A reincarnated cop who beats you with wealth RAW novel - Chapter 177
또각-
걷는 소리마저 우아하게 울리는 고광갤러리. 나와 김 실장은 한산한 로비에 들어서며 주위를 둘러봤다. 조용조용 이야기꽃을 피우는 관람객과 꼿꼿한 자세로 서 있는 서여진.
“도련님. 어서 오세요.”
그녀는 우리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밖에서 봤을 때와 달리 훨씬 카리스마 있어 보이는 모습. 나는 서여진의 안내에 따라 안쪽 특별 전시실로 들어섰다. 전시 준비로 인해 일반인은 출입이 금지된 곳.
“카드 잘 썼습니다. 덕분에 데이트 잘했어요.”
“아아. 별말씀을요.”
서여진은 나를 보자마자 카드를 내밀었다. 김 실장 말로는 자기보다 덜 써서 민망했다 하던데. 나는 넓은 홀을 쭉 둘러봤다.
“전체적으로 어둡네요.”
“작품이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필오 작가의 디폴트 값이거든요. 어둡고 침침한.”
“필오 작가는요?”
“안쪽에서 회의 중이에요.”
나는 벽면에 걸린 사진을 자세히 살폈다. 새로운 작품이 아니라, 스카이라운지에서 봤던 사진들. 혹은 그것의 B컷으로 보이는 것들이 걸려 있었다.
“느낌이랑 구도만 보려고 걸어 둔 거예요. 여전히 진전이 없어서···. 여차하면 첫 번째 전시에서 썼던 작품이나 미공개 작품을 내야 할 판이거든요.”
서여진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지만, 목소리에서는 짜증과 난감함이 확 느껴졌다. 전시를 준비하는 관계자 입장에서는 푸념을 부릴 수밖에. 나는 넥타이를 만지며 홀을 가로질렀다.
“여기입니다.”
살짝 문이 열려있는 회의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작가님. 이번 주까지 픽스하는 거로 하죠.”
“하지만 그건 B컷들이잖아요.”
“미공개 작품 전시회로 가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벌써 다음 달이 전시회인데 작품 선정이 안 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나긋나긋한 말투와 달리 내용들은 날카로웠다. 문을 열자 보이는 사람들. 관계자로 보이는 직원들과 유독 눈에 띄는 한 남자.
“안녕하세요.”
구불거리는 얇은 머리카락에 툭 튀어나온 광대와 구강. 움푹 꺼진 눈가에는 예술가 특유의 피곤함이 찌들어 있는 남자. 그는 나를 보더니, 누구냐는 눈빛을 보냈다. 서여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소개한다.
“필오 작가님. 이쪽은 갤러리장님의 아드님이세요. 작가님을 꼭 뵙고 싶다 해서요.”
별다른 수식어 없이, 이미숙의 아들이라는 말 한마디에 모두 내가 누군지 알아챘다. 필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신인 전시회에 나왔던 작품, 잘 봤습니다. 이런, 회의 중인데 제가 방해하는 건 아니겠죠?”
“어후. 아닙니다. 마침 좀 쉬었다 할까 했어요. 마실 것 좀 가져오겠습니다. 말씀들 나누세요.”
직원들이 이때다 싶은 미소를 지으며 우르르 나가 버렸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들도 휴식이 필요한 모양이지. 김 실장은 뒤에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필오를 쳐다봤다. 이런. 여차하면 바로 달려들 기세다.
“실장님. 직원분께 가서 마실 거 괜찮다고 말해주세요.”
“에?”
“부탁합니다.”
김 실장은 머뭇거렸지만, 이내 내 의도를 알아채고 회의실을 나섰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적거리며. 나는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그를 쳐다봤다.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요. 사진작가는 거의 처음 봐서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작품이 굉장히 인상적이던데요.”
그는 내 칭찬에 입꼬리를 살며시 올렸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지.
“그런데 작품 작업이 잘 안 되고 있다면서요?”
“네. 마음에 드는 모델 구하기가 어려워서요. 매일같이 길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살펴보는데도 쉽지 않습니다. 미적인 감각이 남아 있으면서 내면의 온도가 확실해야 하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람. 나는 대충 알아듣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작업했던 모델들을 쓰시면 되잖아요.”
그러자 필오 작가의 눈빛이 변했다. 예술이라는 구름 위에 서 있는 신처럼 거만하고 권위적인 눈길. 문외한인 나를 깔보는 듯하다. 이놈···. 말없이 사람을 재수 없게 하는 재주가 있네.
“이미 죽은 모델이지 않습니까.”
나는 대답 없이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살짝 수그러진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이는 그.
“설정상으로요. 죽음이라는 테마에 맞게 모델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한 번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는 없죠. 그래서 다시 그 모델을 쓸 수 없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나는 이해가 간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렇게 가다가는 전시회를 망치게 될 텐데요.”
“갤러리장 아드님 앞에서 이런 말도 좀 그렇지만, 사실 저에게 전시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선순위는 작품이죠. 제가 지금 초조한 것은, 전시회를 못 열 것 같아서가 아니라 더 이상 좋은 작품을 만들지 못할 것 같아서입니다.”
나는 그가 단기간에, 어떻게 사람들을 사로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어느 방향이든, 필오는 뼛속까지 예술가였던 것이다. 대중은 그걸 알아본 거지.
“대단하시네요.”
“아니죠. 제 작품은 제 것이 아닙니다. 피사체의 것이지요. 얼마나 내면의 고통을 끌어내느냐가 작품 생명의 관건이니까.”
“아 참. 혹시 모델들 동공은 어떻게 한 겁니까?”
내 말에 필오가 멈칫거렸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는 표정,
“갤러리에서 말이 나오고 있던데요. 죽음을 연출하는 디테일이 뛰어나다고.”
“···다 모델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저는 그저, 옆에서 거들었을 뿐이죠.”
그는 머리와 팔을 박박 긁어 대며 중얼거렸다. 미치광이처럼 점점 거세지는 손길. 마치 병이 있는 것처럼 발작적이다.
“필오 씨?”
“죄, 죄송합니다. 요즘 스트레스가 좀 심해서.”
“아니요. 이해합니다. 예술이 쉽나요.”
“세상만사 제 마음대로 풀리지 않네요. 사실 봐 두고 있는 모델이 있긴 한데···.”
아마 서여진을 말하는 거겠지. 그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혼잣말했다. 습관인지, 퉁퉁 불어 있는 손끝. 나는 책상을 두드리며 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안 그래도 그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네? 그게 무슨···.”
“고광갤러리에서는 겸직을 금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모든 일은 공과 사를 확실히 나누길 권하고요. 물론 저희 어머니께서요.”
나는 방긋 웃으며 이미숙 여사를 팔았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인맥이자 혈연 아니겠어.
“이에 문제가 생긴다면 회사 차원에서 개입할 수밖에 없답니다. 작가께서도 그 점 잘 유의하셔서 진행해 주세요. 아무리 전시회가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활동을 오래 이어 가려면 여러모로 관계가 좋아야 할 테니까요.”
“···서여진 씨가 말했나 보군요.”
“개인적으로 또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
내가 방긋 웃자, 필오는 고개를 푹 숙인다. 안 그래도 거절당하고 있던 마당에 직접 얘기를 들으니 확실하게 낙담한 모양이다.
“하아. 서여진 씨만큼 완벽한 모델이 없는데.”
“굉장히 아름다운 분이긴 하죠.”
“아니요. 그것뿐만 아니라, 내면의 온도요.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기운을 가진 사람은 드물거든요. 만약 제게 마지막으로 시간이 주어진다면, 저는 그녀를 찍고 싶어요. 그 정도예요.”
그놈의 온도 타령. 나는 찌푸려지는 미간을 겨우 피며 대화를 이어 갔다.
“뭐, 희망사항은 누구나 갖고 있는 거니까요. 하지만 본인이 싫다 하니, 그만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고광갤러리는 작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거든요.”
그 말은 곧, 척을 질 수도 있다는 뜻. 아무리 전시회보다 작품을 우선순위로 둔다지만, 작가 생활을 이어 가기 위해서는 또 필요한 것이 전시회였다.
“더 큰 것을 위해 손에 쥔 걸 놓지 말라는 말이군요. 그것참 애석합니다.”
“얼추 비슷한 말이네요. 어쨌거나, 제 말을 잘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달칵-
그때 문이 열리며 직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분명 마실 것은 됐다고 했는데도, 그들 손에 잔뜩 들린 음료수들.
“말씀은 다 끝나셨어요?”
“고지훈 씨. 아니, 뭐라고 해야 하나. 호호.”
“도련님이라 하기에는 좀 민망하네요.”
직원들은 나와 필오 작가 사이를 채우며 자리에 앉았다. 문 앞에서 각을 잡고 필오 작가를 주시하는 김 실장. 나는 그를 무시하며 직원들에게 웃어 보였다.
“편하게 부르시면 됩니다.”
“직급이 경장이라 하셨죠?”
“어머. 그러면 경장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고지훈 경장님.”
직원들이 재잘대며 내게 질문한다. 오너가의 자식이면서 경찰인 내게, 흥미가 짙은 모양.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필오 작가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경장이라니요?”
“아. 작가님. 모르셨어요? 고지훈 씨, 경찰이잖아요. 어디더라, 무슨 수사대에 있다 하셨는데.”
나는 말없이 필오 작가의 얼굴 변화를 관찰했다. 그저 일반적으로 놀란 반응이 아니다. 당혹감과 낭패감이 잔뜩 서려 있는 표정. 그러고 보니, 서여진이 나를 소개할 때 그저 ‘아들’이라고만 했었구나.
“혹시 그 셋째라는···.”
“네. 맞습니다. 아. 혹시 첫째랑 둘째 형인 줄 아셨나요? 이거 섭섭한데요. 첫째 형이면 몰라도 둘째 형이랑은 닮았단 소리 듣고 싶지 않아서요.”
“어머! 경장님 말씀하시는 것 좀 봐.”
농담 섞인 내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고민국이 좀 유별난 생김새였으니까. 허나 필오의 안색은 더더욱 창백해졌다.
덜컹-
“오,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아직 콘셉트 회의 덜 하셨잖아요.”
“죄송합니다. 몸이 안 좋아서요.”
그는 허둥지둥 가방을 집어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당한 표정의 직원들. 나는 뛰쳐나가는 그를 불렀다.
“필오 씨.”
우뚝 멈춰 서서 나를 쳐다보는 남자.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다음에는 작업실 구경 가도 될까요?”
“제 작업실에는 아무도 초대 안 합니다.”
“흐음. 그래요? 아쉽네요.”
필오 작가는 그 말을 남기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아주는 서여진을 뚫어져라 보는 남자. 김 실장이 목을 가다듬으며 둘 사이를 파고든다. 몸으로 여자 친구를 가리며.
“크흠. 문은 제가 열어 드리죠.”
“···고맙습니다.”
필오 작가가 사라지자, 직원들은 일제히 불만을 터트려 댔다. 네임드 작가도 아닌, 신인이 할 행동은 아니었으니.
“진짜 보면 볼수록 괴짜라니까.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서 실장님. 우리 다음부터는 절대 필오 작가랑 하지 말죠.”
“그러니까요. 평소 행동도 이상하고, 누가 보면 지가 예술계의 거장인 줄 알겠어. 작품 안 나온다고 벌써 몇 주째 이러고 있는데 홀라당 가 버려?”
“에효. 수요만 없었으면 이런 고생도 안 하는 건데. 저 작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VIP가 그림 몇 점 샀다고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하나 봐.”
어마 무시하게 쏟아지는 험담. 나는 음료수를 홀짝이며 직원들의 분통을 들어 줬다. 서여진이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달까지 진전 없으면 제가 관장님이랑 부관장님께 말씀드릴게요.”
나 역시 시계를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필오 작가를 보러 왔는데, 그가 갔으니 나도 있을 이유가 없지.
“저도 그만 가 보겠습니다. 다들 일하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벌써 가시게요?”
“하하. 다음에 또 뵙죠. 전시회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나와 김 실장은 서여진과 함께 전시관 홀로 나왔다.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두 연인. 나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
“말 잘해 뒀으니, 더 이상 모델 일은 안 꺼낼 겁니다. 알아들은 것 같더라고요.”
“어휴. 다행이네요.”
“고맙습니다. 도련님.”
서여진은 우리를 갤러리 앞까지 배웅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나와 김 실장은 창밖으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모든 것이 그렇게 잘 마무리된 줄 알았다. 허나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지.
***
“막내야!”
그리고 며칠 후. 찢어지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팀장. 나는 특수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막내 어디 있어어어-!”
“왜 그러세요?”
“어어! 야야!”
괴상한 추임새를 넣으며 내게 후다닥 달려오는 팀장. 그는 종이 뭉치를 들고 있었다. 겉표지에 떡하니 붙어 있는 국과수 마크.
“이게 뭔데요?”
“뭔데요? 그건 내가 물을 말이다. 너, 이 사진들 어디서 났어?”
나는 종이를 넘기며 팀장의 말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필오 작가의 사진 분석 결과지였구나. 내가 뭐라 입을 열려고 하는 사이, 팀장이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이거 진짜로 죽은 사람이라잖아.”
“···아, 에?”
당황한 나머지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보고서에 적힌 글자를 빠르게 읽어 갔다. 깜장과 몽두 역시 설렁이며 내 옆에 붙었고.
“보자. 여자는 총 다섯인데, ‘시간 순서를 추정했을 때 동공 풀리는 것이 자연스러워 조작의 흔적은 없다’라.”
깜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게 왜 죽었다는 뜻이야?”
“그 아랫줄 읽어 봐요. 현미경으로 확대했을 때, 서 있던 솜털이 눕는 것을 확인. 이는 살아 있던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의미··· 한다라. 막내야. 너 이거 어디서 났어?”
“아 놔. 우리 막내. 자꾸 밖에서 이상한 걸 주워 오네. 이 정도면 개코다. 개코.”
이게 무슨···. 팀원들의 물음에 나는 멍하니 이마를 쥐어 쌌다. 그저 호기심 반, 흥미 반으로 의뢰한 게 진짜로 밝혀지다니. 내사가 수사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사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체였다.
“여자들, 피해자인 여자들은 누구래요?”
끝
ⓒ 배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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