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28
228. 운 (1)
클래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장 오슬로가 그랬고, 그는 그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를 다음 세대에게 클래식을 전달하는 운반자의 역할쯤으로 생각하는 듯했고, 그의 생각은 내게도 많은 생각으로 옮겨왔다.
그보다 더 많은 영감을 주었고, 호텔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떠오를 만큼 감명 깊었지.
특히 그가 오늘 보여준 바이올린 독주곡은······.
‘굉장했어.’
앞으로는 충분히 대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할 정도로.
아쉬운 것은 시작이 다소 늦었다는 것뿐.
하지만 그조차도 그의 재능으로 충분히 매울 수 있을 거다.
게다가 그의 연주를 지켜보던 세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데, 만약 그들도 작곡을 시작한다면?
‘······그때야말로 진짜 클래식의 전성기가 올지도 모르겠네.’
사실 클래식의 전성기라는 기사는 몇 년 전부터 심심치 않게 나왔다. 하지만 같은 것만 반복하고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지 않는 전성기가 세상에 어딨겠나.
그렇기에 나는 진짜 클래식의 조건을 생각해보았다.
‘모든 음악가들이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것.’
그렇게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클래식의 전성기가 가졌던 기본 골자였다.
스스로 살짝 흥분하고 있다는 걸 느끼며 냉장고에 넣어져 있던 맥주병 하나를 땄다. 가슴께가 뜨거워지는 것 같아 톡 쏘는 탄산이 당겼다.
머리가 얼얼할 정도로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고서, 다시 자리로 돌아와 백한길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빠르게 전화를 받았고, 나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세운다. 혹시나 목소리가 안 좋을까 봐 불안해하며.
원래도 그랬었지만, 백한길 회장이 일페르소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훨씬 더 심해진 것 같지.
어쩔 수 없었다. 같은 병을 앓았기에, 내겐 절대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인 것이다.
-백작님.
편안한 목소리의 독어가 넘어온다.
그제야 안도하며 그와 이야기의 물꼬를 튼다.
오늘 하루 동안 내가 본 것들, 그리고 생각했던 것들을 털어놓았다. 언제나처럼.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백한길 회장의 대답이었다.
그 또한 예술에 답이 존재한다는 게 혹여 좋지 않은 미래를 가져올까 걱정하던 사람 중 하나로서, 장 오슬로의 변화를 좋게 보는 듯했다.
-역시, 이번에도 음악의 예언가가 옳았네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웃어버렸다.
“저 한서호예요. 그런 별명 들어도 안 창피해요.”
-근데 왜 그렇게 목소리가 떨리시죠?
“쩝.”
뒤이어 후련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하하핫, 이제 여한이 없네요.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여한이 왜 없어요.”
-백작님은 이제 건강한 몸으로 음악을 하시고, SJ는 백작님 덕에 전 세계에 이름을 확실히 알렸고. 아, 그러고 보니 아직 남은 여한이 있긴 있네요.
“그게 뭔데요?”
-백작님이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보는 거요.
“······갑자기요?”
-갑자기 같은가요? 전생 때부터 그려오던 바람입니다만.”
내가 말문이 막히자, 백한길 회장이 웃음을 잔잔히 흘리며 나를 달랬다.
-그리고 뭘 그렇게 불안해하십니까. 제가 오래 사는 미래까지 보고 오셨으면서,
“그래도요. 미래가 바뀌고 있잖아요. 그러니 무조건 똑같이 먹어요. 똑같은 시간에 자고,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제가 미래에 어떻게 했었는지 어찌 압니까.
“끙······.”
-흐, 걱정 마세요. 장 교수가 검진표 들고 왔었는데, 아주 깨끗하답니다.
그 말에 조금 진정하는데, 백한길 회장이 작게 덧붙였다.
-아 참, 그리고 저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싫어요.”
-아직 뭔지도 말 안했······.
“그게 뭐든. 안 들어줄 거예요. 특히 음악 만들어달라는 부탁은 더더욱.”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스타인웨이가 있다는 데, 공개 전에 사전 예약할 수 있는지 좀 알아봐 달라고요. 백작님, 스타인웨이 아티스트잖아요.”
“일페르소는 피아노에 딱히 관심 없었는데······.”
-백한길은 있습니다. 헌정곡을 받기만 했던 백작님께서, 이젠 헌정곡을 만드시는 것처럼요.
흐뭇한 웃음소리가 넘어와 나를 두드렸다.
무장해제다. 저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안 들어주겠어.
알아보겠다는 얘길 하고서, 전화를 마무리했다.
포근하게 내려앉은 적막에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그새 조금 식긴 했지만, 여전히 시원하다. 탄산도 낭낭하고.
테이블 위에 펼쳐둔 오선지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꼭 편지지처럼 보이는 건 전생의 나, 브리너의 시선일까?
이내 픽 하고 웃었다.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이젠 모든 기억과 감정을 정확히 양분하기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뒤섞여버린······.
나는 그냥 나니까.
펜을 들고서 고민한다. 그리고 한 마디를 떠올린다.
편지의 서두이자, 곡의 도입부.
‘발터에게’
담담하지만 구슬프게 수신인을 불렀다.
향하는 곳이 명확해지자 ‘선율’이라는 길이 분명해진다.
수많은 음표가 마치 헨젤과 그레텔의 빛나는 돌멩이처럼 길 위에 이어진다.
누구든 내가 그에게 전하는 음악을 볼 수 있도록.
그 누구든엔 당연히 신적 존재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렇기에 도입부가 끝나고서.
비로소 이 거대한 진혼곡의 첫 가사가 적힌다.
Herr, Friede ihn.
주여, 그를 평안케 하소서.
#
파리의 베르시 공연장.
리허설이 점심시간으로 잠시 중단되고.
밴드 사이렌 멤버들이 무대를 내려가자 세션을 담당한 현악 연주자들이 대기실로 향했다.
그들은 대기실에 들어가자마자 도시락보다 핸드폰을 먼저 꺼내 들었다.
“저희 관련 기사 하나 더 올라왔어요.”
“뭐래? 뭐라는데?”
“사이렌 비엔나 콘서트는 정말 황홀했다. 특히 에밀리가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10여 명의 오케스트라와 연주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는데, ‘난 여전히 꿈을 보고 있어, 그러니까 현실에서 말이야.’ 라는 가사가 나올 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우리 9명인데······.”
“그게 뭐 그리 중요하니. 여기 우리 사진이 떡하니 박혀있는데.”
흐뭇한 웃음소리가 대기실에 번졌다. 무명 연주자였던 그들에겐 이런 기사 하나가 여전히 신기하고, 흥분되는 일이었다.
기사를 읽은 연주자가 헤실거리며 관련 기사를 좀 더 눌러본다. 그렇게 기사를 타고 타다가 새로운 소식까지 보게 되었다.
“어제 김세진 파리 왔다는데요?”
“정말?”
“오, 벨라랑 레오도 왔었대요. 이거 봐요. 카페 점원이 같이 찍은 사진 올렸네요.”
“와, 진짜네? 이 점원 너무 부러운데?”
“저희도 내일 이 카페 가볼까요?”
“어제 왔는데 또 올까?”
“이 세 사람 진짜 한번 보고 싶었는데···.”
누군가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자, 맨 처음에 기사를 읽은 연주자가 슬쩍 자기 바람을 얹었다.
“···전 솔직히 한서호요.”
“그건 당연한 거고. 음악 하는 사람들 중에 한서호 안 보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어. 한국에서 잘 안 나오니 문제지. 왜 투어를 안 도는 거야.”
“지금 학교 열심히 다닌다던데요?”
“그러니까. 으, 다음 공연은 무조건 간다.”
“이젠 더 예매가 어려울걸?”
“암표가 500달러에 팔리고 그랬다던데, 아마 그때가 최저가였을 듯하네요.”
“아······.”
“차라리 한 필하모닉에 지원할 걸 그랬어요.”
“그래, 그거다. 그랬어야 해. 그러면 그 역사적인 공연을 함께 했을 텐데!”
“그것도 오디션 붙었을 때 얘기죠.”
“하긴. 다들 연주실력이 엄청나더라. 어디서 그런 사람들이 튀어나온 건지. 그 정도면 다들 어디 유명 필하모닉에 있었어야 하지 않나.”
도시락을 까면서도 한서호와 그의 필하모닉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이에 이미 도시락을 열고 먹을 준비를 하던 연주자가 툭 던지듯 말했다.
“실력은 있었지만, 운이 나빴던 사람들이겠죠. 한서호는 그들에게 운이 되어준 거고요.”
그 말에 연주자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 그거 되게 멋진 말이네. 운이 되어준다니.”
#
‘일찍 오라고 해서 오긴 왔는데······.’
아직 리허설이 한창인 공연장이었다.
당연히 공연장 주변은 사이렌의 광팬들로 북적였고, 나는 에밀리가 따로 직원에게 언질을 해놓은 덕분에 쉽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팬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스태프인 척 모시려고 했는데, 손에 들고 계신 것들 때문에 팬으로 보였나 봐요.”
직원이 내 손을 본다. 그래, 내가 봐도 팬으로 오해할 만하다. 뭘 많이 들고 있어서.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내가 세 사람에게 물어봐서다.
‘그럴 땐 와인이지. 파리잖아!’
‘초콜릿은 어때요?’
‘······꽃?’
순서대로 레오, 벨라, 김세진.
그들의 취향을 엿볼 수 있었고, 이런 쪽으론 취향이랄 게 없는 나는 결국 모두의 의견을 수렴해서 다 사 온 거지.
“저 근데.”
나를 데리고 들어온 직원이 슬쩍 내 얼굴을 본다. 눈빛이 어째 바깥의 팬들과 비슷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아, 네. 말씀하세요.”
“에밀리님··· 남자친구는 아니시죠?”
설령 맞다 해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 같은 표정인데, 지금.
“아녜요. 그냥 친굽니다.”
그제야 확 펴지는 직원의 표정.
‘아군이다, 사격 중지!’ 뭐 그런 느낌이다.
“그렇구나. 하핫, 난 또. 사실 저도 에밀리 씨 엄청 팬이거든요! 부럽네요. 그분의 친구라니······근데 시력이 많이 나쁘신가 봐요? 안경알 두께가 상당해 보이는데.”
“아, 네 뭐 조금.”
대충 둘러대고 그가 안내한 방으로 들어갔다.
비엔나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화려한 모습의 에밀리가 나를 반겼다. 물론 그때도 미인이었지만 지금은 뭐랄까······.
“잔 다르크 같네요.”
내 말에 그녀가 당장에라도 오토바이에 올라탈 것 같은 가죽 재킷을 펄럭였다.
“그래요? 좀 세 보이나?”
“아뇨, 멋져서요.”
빙긋 웃는 그녀의 뒤로 멤버들도 다가왔다.
피아노의 플로렌스와 드럼의 웬디.
오랜만에 보는 그녀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스태프가 찾아와 리허설 재개를 알렸다.
“저희 슬슬 리허설 이어서 할 건데. 같이 갈래요?”
“오, 전 좋죠.”
복도를 지나 공연장으로 들어가자, 어디선가 나타난 직원이 졸졸졸 따라온다. 아까 나를 데리고 온 직원이었다.
“혹시 뭐 필요하신 건······.”
그의 물음에 에밀리는 되려 내게 물었다.
“필요한 거 있어요?”
“저요? 아뇨 없어요.”
“그럼, 괜찮아요.”
에밀리가 다시 직원을 돌아보며 대답했고, 직원이 날 보는 표정은 다시 경계 모드에 돌입했다.
‘너한테 물은 게 아닌데’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쳐다본다.
조금 따끔거려서 시선을 슥 돌렸다.
무대 위에서 리허설 준비를 하고 있는 세션들.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더블베이스······.”
악기들을 쭉 훑어보며 다가가자 몇몇 시선들이 내 쪽을 본다.
“아.”
쟨 누군가, 하고 바라보는 느낌에 그제야 내가 안경을 쓰고 있다는 자각을 했다.
근데, 이거 이렇게 적응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처음엔 꽤 어지러웠는데 말이지. 이거 계속 끼다간 몽골인도 시력이 마이너스 되겠는걸.
오래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인사하려 무대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
현악기들의 줄이 끊어진 것마냥, 곳곳에서 들려오던 소리들이 뚝 끊겼다.
이제는 모두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것도 어째 아까 팬들 사이로 들어올 때가 나았다 싶을 정도로, 뜨겁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