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313
313. 외전 – 누구세요, 당신 (5)
“이게 채봄이 덕분에 탄생한 새 메뉴.”
알렉스님이 들고 온 큼직한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에 슬쩍 내 쪽을 바라본 교수님이 싱긋 웃으며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든다.
오븐에 장시간 구워져 녹아내릴 듯 쉽게 썰려버리는 돼지고기.
꿀꺽——.
한입 베어 무는 교수님을 보며 침을 삼켰다. 내가 만든 음식도 아닌데 괜히 긴장하게 된다. 내 입맛이 꽤나 많이 반영된 메뉴였으니까.
“와, 맛있는데요?”
빙그레 웃는 교수님에 그제야 나도 헤헤거리며 포크를 들었다.
그러다 문득 옆을 보았는데, 좀 전의 나만큼이나 긴장한 세 사람이 보였다.
사실 이곳 레스토랑에 들어선 순간부터 계속 저 상태다. 알렉스님을 보고 완전히 얼어버린 것.
교수님이 클래식계에 나타나기 전까지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로서 유명세를 떨치시던 거장이니 그럴 법도 했다.
“레스토랑 하시는 거 알았잖아요?”
“직접 요리에, 서빙까지 하시는 줄은 몰랐지. 게다가 아까 들어올 때 연주하시는 거 봤어? 중딩 때 그렇게 내한 왔으면 했었는데, 이렇게 들을 줄이야.”
“난 초딩 때 과외 선생님 덕분에 처음 알았지. 과외선생님이 알렉스님 광팬이라 요만한 pmp에 영상 엄청 넣어 다니셨거든. ”
“와···pmp 엄청 오랜만에 듣는다.”
“그게 뭔데요?”
“너넨 모르냐 설마?”
옛날이야기로 추억 여행을 시작한 동기 언니와 과대 오빠.
그 수다 속에서 내심 결승에 오르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는 것 같던 표정들이 천천히 밝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가 동기 언니가 사뭇 홀가분한 표정으로 교수님께 말했다.
“그나저나, 솔직히 뿌듯하시죠? 결승전에 교수님 제자··· 학생이 둘이나 올라갔잖아요.”
“그 전에 준결승에 4명이나 올라갔었죠.”
“거기부터 기특한 거면 저희야 감사하구요.”
키득거리는 언니를 보며 교수님이 툭 묻는다.
“아쉽지 않아요?”
“아쉽기야 하지만··· 어쩌겠어요. 저희가 부족해서인데.”
“아쉬워해요. 제가 여러분들 곡 모두 들었잖아요. 전부 뛰어났어요. 결코 부족해서 오르지 못한 게 아녜요.”
“정말 그랬나요?”
“네. 그랬어요. 그러니 다음 마디로 나아가다 만난, 도돌이표라고 생각해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보는 우리에게 교수님이 덧붙여 말했다.
“도돌이표는 언뜻 보면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지만, 연주자들은 알잖아요. 단순히 반복이 아니라는 걸.”
“그렇죠. 전혀 다르죠.”
“여러분도 도돌이표를 만난 거예요. 언뜻 지금까지 준비한 걸 다시 반복하는 것 같겠지만 전혀 다른 시간이 될 거고, 그 시간을 발판 삼아 훌쩍 뛰어넘을 수 있겠죠. 그러다 보면 언젠가 한 악장의 피날레에 도달해있을 거고요.”
그 말에 우리는 각자 생각이 많아진 표정이 되었다.
다음 마디로 뛰어넘기 위한 도돌이표라.
교수님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하며 끄덕이는데, 옆에서 턱을 긁적이던 과대 오빠가 문득 궁금해졌는지 교수님에게 물었다.
“교수님도 도돌이표라고 생각되는 순간이 있으셨나요?”
“저요? 누구보다 많았는걸요. 도돌이표.”
“교수님이요?”
세 사람 모두 의외라는 표정으로 교수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 한 번도 브레이크 같은 건 밟지 않고 오로지 질주만 해온 것 같은 천재.
모든 거장들이 꼽는 이 시대 최고의 음악가가.
누구보다 도돌이표가 많았다니.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교수님이 픽 하고 웃으며 덧붙였다.
“진짜예요. 인생 자체가 도돌이표의 연속이었어요.”
······.
바깥에 걸린 무수히 많은 액자들과 같은 프레임으로 되어 있는 거울을 보며 손을 씻었다.
너무 맛있어서 뼈째로 들고 먹다 보니 손이 끈적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먹다 보니 깨달았다. 옆에 교수님이 웃으며 보고 있다는 걸.
‘망했지······.’
고갤 푹 숙이고 머릴 긁적였다.
까짓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거 뭐 이성적으로 어필을 해보겠다···뭐 그런 건 절대 아니고.
‘아니지. 아니고말고. 감히······.’
그래도 굳이 우악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지 않았나······.
쩝. 입맛을 다시며 털레털레 밖으로 나왔다.
바로 옆에 펼쳐지는 녹색 벽으로 시선이 옮겨붙었다.
그곳에 줄줄이 붙어있는 액자들이 눈에 들어오고, 가장 끝에 걸린 ‘그 남자’의 초상화도 보인다.
자연스레 그곳으로 다가가 섰다.
브리너 프리드리히.
음악의 예언가, 위대한 후원자···이런 대단한 별명을 가진 옛사람을 보며 내가 느끼는 감정은 다름 아닌 슬픔이었다. 꿈을 꾸고 느꼈던 것과 동일한 슬픔. 분명 꿈 때문이겠지.
가만히 서서 빤히 바라보았다.
비록 그림이지만 꿈속 얼굴과 똑같았다.
그리고······.
“흐음. 묘하네.”
고개를 돌렸다. 앉아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교수님이 보였다. 그쪽을 번갈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묘하게 닮았단 말이지.”
둘 다 잘생겨서 그런가?
하지만 세상에 잘생긴 사람들이 한둘인가. 그런데 유독 두 사람이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그것 때문만은 아닐듯한데······.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해하는데, 때마침 다른 테이블의 빈 접시를 들고 가던 알렉스님이 내게 물었다.
“뭐 하고 있어?”
곧장 초상화를 가리켰다.
“제가 이분 얼굴은 잘 몰랐단 말이죠.”
“누구? 브리너 백작?”
“네. 근데 왠지 모르게 익숙했어요. 꿈에도 나올 정도로.”
“꿈에도 나왔어? 요즘 브리너 콩쿠르를 하고 있어서 그런가?”
“그 전에 꾼 꿈이긴 한데······아무튼.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오랜만에 교수님 뵈니까 알게 됐어요. 두 사람. 뭔가 닮았어요.”
“···?”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초상화와 교수님을 번갈아 보던 알렉스님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넌 청각도 미각도 뛰어난 애가 시각은 영······.”
“아니 생김새가 아니라 분위기요. 분위기.”
“분위기? 그런가······.”
갸우뚱한 그가 접시를 들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도 잠시 더 초상화를 보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교수님이 물어왔다.
“뭘 그렇게 보고 있었어요?”
“아, 저 초상화요.”
“초상화?”
내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 교수님.
“브리너 백작이요. 갑자기 교수님하고 분위기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
초상화를 바라보던 교수님이 멈칫거리더니 이내 웃음 소리를 냈다.
“하하하···하핫.”
뭐지? 방금 무지 어색했는데?
그 사이, 물을 한 모금 마신 교수님이 내게 재차 물었다.
“진짜··· 진짜 닮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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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게요.”
한서호가 기분 좋게 손을 흔들었다.
학생들과 작별하고 곧장 공항으로 향한 그는, 비행기 시간을 기다릴 것도 없이 곧바로 전용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물론 출발 시간까지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기에 기다려야했다.
“여보세요?”
-지금 독일이라며?
SJ 엔터테인먼트 백선화 사장의 물음에 그가 끄덕였다.
“네, 만하임에요.”
-빈 필하모닉에 미팅하러 간 거 아니었어?
“맞아요. 빈 필하모닉에서 6월에 객원 지휘자로 참여해달라는 요청 때문에 갔었죠. 근데 마침 만하임에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이 있어서요. 한창 콩쿠르 중이라 잠깐 들렀어요.”
-아아, 기사 본 것 같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선전하고 있다던데.
“엄청 잘 해주고 있죠.”
한서호가 창밖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이윽고 백선화 사장이 전화한 이유를 꺼내 들었다.
-다른 게 아니라, 그 발터 슈몰저 다큐멘터리 제작했던 감독이 계획 중이라는 영화 말이야. 그거 너무 괜찮던데?
백선화 사장의 말에 한서호가 반색하며 말꼬릴 올렸다.
“그렇죠? 제가 우연히 뉴욕에서 만난 클래식 연구원을 소개해줬는데 두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영화 시나리오 하나를 들고 왔더라고요.”
-네가 보내 준 시나리오 읽고 마음에 들어서 바로 알아봤어. 근데 정작 할리우드 투자자들은 반응이 별로인 것 같더라. 하긴, 다큐멘터리 감독이 갑자기 200년 전 중세 이야기를 만든다는데, 그것도 음악물을··· 투자가 섣불리 안 나오지.
“맞아요. 감독님도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메인 투자자가 되어볼까 싶긴 한데······.
“정말요?
-안 그래도 할리우드 영화 투자 쪽으로도 사업을 확장하려고 계획 중이었는데 첫 단추로 괜찮을 것 같네. 물론 리스크가 좀 있지. 그래서 안전벨트가 필요할 것 같긴 한데, 그게 바로 너야. 네가 OST에 참여해준다면 든든할 것 같은데.
“안 그래도 할 생각이었어요. 그 영화 OST.”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백선화 사장이 오히려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웬일이냐. 요샌 통 OST 안 하더니.
“그 영화는 하고 싶어서요.”
-신기하네. 아버지도 이건 네가 꼭 할 거라고 하시던데.
한서호가 웃음을 머금었다. 백한길 회장이 저렇게 말한 이유를 본인도 알기에.
-한국 도착하면 아버지한테 가 볼 거야?
“네, 바로 가려고요.”
-네가 우리보다 낫다.
잘게 웃은 백선화 사장이 전화를 마무리하며 덧붙였다.
-아무튼, 그 여성 하피스트 영화, 우리 쪽에서 나서는 거로 알고 있으라고.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알려줘야겠네요.”
전화를 끊자마자, 한서호가 곧장 다른 번호를 눌렀다.
백선화 사장에게 말했던 두 사람 중 한 명.
발터 슈몰저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한서호와는 할리우드의 한 카페어서 만났던 브래들리 감독이었다.
-지휘자님!
-한서호 지휘자님이에요?
그의 우렁찬 목소리 뒤로 여자 목소리가 겹쳤다.
센트럴파크에서 마주쳤던 클래식 연구원의 목소리였다.
뒤이어 또 다른 목소리들도 웅성웅성하는 게 아무래도 영화 관련 회의 중이었나 보다.
“영화 준비는 잘 되고 있으세요?”
-시나리오는 지난번에 지휘자님 피드백 덕분에 술술 풀리고 있는데, 문제는 투자네요. 아직 연락 온 곳이 없어요. 발로 뛴다고 뛰고는 있는데······.
“곧 한 곳에선 연락이 갈 거예요.”
-네? 어디서······.
“SJ 엔터테인먼트에서 시나리오를 좋게 봤더라고요. 방금 그쪽이랑 통화했는데, 투자를 하고 싶나봐요.”
잠시 건너편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댐이 열린 것 마냥 건너편이 소란스러워졌다.
몇 번이나 확정된 거냐고 묻던 브래들리 감독이 그보다 더 몇 번을 감사하다고 말한다.
-감사합니다. 다 지휘자님 덕분입니다.
“아뇨, 시나리오가 좋아서죠. 제가 뭘.
그러자 클래식 연구원 제리가 전화를 빼앗듯이 받아 단호하게 말했다.
-지휘자님 덕분이 맞죠. 처음 만났을 때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음악가라면서 아실리 로라렌스에 대해 흥미를 갖게 만든 것도 지휘자님이시고, 이번에 시나리오를 봐준 것도 지휘자님. 게다가 소속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시나리오를 넘겨서 투자를 이끌어 주신 것도 지휘자님.
“뭔가 그렇게 말하니 영화의 흥망이 제 책임인 것 같은데요?”
-에이, 그런 뜻은 아니구요. 저희한테 영감이 되어주셨단 얘기죠.
“하하. 어쨌든, 제가 최대한 도울게요. 제가 영감이었다니 별수 있나요.”
한서호가 그녀와 킬킬거리며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직원들과 환호를 지르던 브래들리 감독이 다시 돌아와 전화를 바꿨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저, 그러면 혹시 OST는······.
“일단, 완성되는 대로 곡 하나 보내드릴게요.”
-그, 그럼 해주시는 건가요?
“최대한 돕겠다고 했잖아요.”
-···!
아까 댐이 전부 열린 게 아니었나 보다.
2차로 소란이 터져 나오고, 또다시 한참 동안 감사하단 인사를 받다가 겨우겨우 전화를 끊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전용기에 홀로 앉은 한서호가 피식 웃으며 턱을 괴었다.
시선을 내려 비행기에 탑승하자마자 꺼내두었던 오선지를 눈에 담았다. 반대 손으로는 펜을 잡아 움직였고, 제목을 적는 곳에 떠오르는 세글자를 새긴다.
[유채꽃]그녀의 마지막 순간이 담긴 장소.
그곳에 가득하던 꽃을 떠올리며.
다섯 줄, 메마른 땅 위로.
노란 음표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