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Dominion RAW novel - Chapter (276)
절대군림 276화(276/276)
천귀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물이 튀어나온 것이다. 적랑은 낭인들 중 가장 강한자로 일명
낭왕리라 불리는 자다.
“대체 어떻게 그를?”
“십만 냥이 들었지.”
“자존심이 강해서 돈에 넘어오지 않았을 텐데.”
자신이 아는 적랑은 분명 그런 자였다.
“하지만 이 액수가 낭인들을 고용한 청부 금액 중 최고액으로 낭인들
사이에 길이 남을 것이란 말에 결국 수락하더군. 그는 명예를 원했네.”
천귀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막대가는 분명 돈만큼이나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자였다. 이런 곤경에 처한 것이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막대가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복수가 아니었네.”
“복수가 아니라면?”
“난 여전히 그녀를 …차지하고 싶었네.”
“이런 미친!”
천귀가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평소답지 않은 흥분에 아차 했지만,
막대가는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막대가의 멍한 눈에는 애증의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지.”
천귀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막대가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스윽 들며 물었다.
“어찌 되었을 것 같나?”
벌써 그 행동에서 느낌이 왔다.
“설마? 적랑까지 당했단 말이오?”
“적랑은 돌아오지 않았네. 대신 그날 밤 그녀가 다시 찾아왔지.
백 명이나 되는 수하들은 무용지물이었네. 그녀가 다시 물었네.
같은 물음이었지. 내 탐욕의 대가가 얼마나 되느냐고.
난 울면서 십만냥이라고 대답했네. 그러자 그녀가 내 손가락을
다시 잘랐네.”
천귀가 말없이 탁자를 응시했다. 저 아래 몇 개의 손가락이 남아
있을까?
“울면서 난 삼십만 냥이라고 소리쳤지. 빌어먹을! 삼십만 냥이라고!”
마치 그녀가 눈앞에 있었던 그날 밤처럼 막대가가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삼십만 냥! 제발 그만!”
흐느끼던 막대가가 갑자기 활짝 웃었다.
“그러자 그녀가 웃었지. 날 내려다보면서 말이야.”
서글프면서도 무선운 열연이었다.
천귀는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녀가 털어간 돈만 해도 벌써
사십만 냥이 넘었다.
“그러고도 그녀는 떠나지 않았소?”
왠지 그랬을 것 같았다.
막대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정답이네.”
하지만 천귀는 또 다른 정답을 떠올렸다.
“당신이 속았소.”
“무슨 뜻인가?”
“그 여인은 적랑과 한 패요. 배후에 있는 자가 바로 적랑이오.”
천귀가 내린 결론이었다. 적랑을 해치울 수 있는 고수는 드물었다.
막대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 점을 의심했네. 하지만 아니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그는 피해자네.”
막대가가 박수를 쳐서 신호를 보내자 문이 열렸다. 정원에 사내 둘이
누군가를 부축하고 서 있었다. 부축을 당한 중년인은 넋 나간
사람처럼 서 있었는데 한눈에도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은 것처럼
보였다.
“설마?”
“적랑 바로 그네. 무공이 전폐당하고 완전 폐인이 되었네.”
천귀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적랑은 절정고수다. 이렇게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독! 혹시 독에 당한 것이오?”
천귀의 물음에 막대가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름 조사를 했을 것이다.
‘독이 아니라면….정말 대단한 고수가 개입되어 있군. 이거 정말
쉽지 않겠어.’
막대가가 탄식하며 말했다.
“그것으로 끝냈어야 했지.”
“뭐요?”
천귀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그를 이해했다. 손가락이 세 개나
잘리고 사십만 냥을 빼앗겼는데 저 탐욕 덩어리가 그냥 끝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ㅣ만 이제 대체 누굴 보내야 한단 말인가?
“내가 가진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한 사람을 포섭했네.”
“누구요?”
“생사판.”
천귀가 참지 못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과판은 천하십대고수에 속한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는 사도의 길을
걷는 사람이었다. 절대고수 중의 고수, 절대 건들지 말아야 할 사람
중의 하나.
“그,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천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만약 그가 가서 일이 마무리되었으면 널 이리로 불렀겠냐는 눈빛으로
막대가가 천귀를 올려다 보았다.
천귀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까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에도 이번
청부에 일ㄴ 어마어마한 배경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도 돌아오지 않았소?”
“앉게나.”
천귀가 가만히 제자리에 앉았다.
이제는 오히려 한결 편안해진 막대가였다.
“그날 밤 다시 그녀가 찾아왔네. 그녀는 이제 질문을 하지 않았네.
그녀는 날 협박해 내 재산을 처분하게했지. 반항하다 남은 모든
손가락이 잘렸지. 난 그녀에게 저할할 수 없었네.”
막대가가 그제야 탁자 아래 양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 남아 있는
손가락은 없었다.
“얼마나 빼앗겼소?”
“구십만 냥이네.”
“헉!”
정말이지,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앞서 사십만 냥을 더하면 모두
백삼십만 냥ㅇ르 빼앗긴 것이다. 모르긴 해도 아마 막대가의 거의
전 재산일 것이다.
“그 돈을 찾지 못하면 난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네. 만약 그녀를
죽이고 군자검과 내 돈을 찾아와 준다면, 자네에게 살막에 청부한
금액 외에 따로 삼십만 냥을 주겠네. 그녀를 산 채로 돈과 함께
가져오면 그 두 배인 육십만 냥을 주겠네. 하지만 명심하게. 만약
자네가 중간에서 그 돈을 가로챈다면 내 남은 모든 재산으로 강호의
모든 살수들에게 자네를 청부하겠네.”
천만에. 중간에 돈을 가로챌 마음은 전혀 없다. 강호의 모든 살수들이
뒤쫒는다면 반드시 죽게 된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다. 은퇴는 할 수 있어도 배신은 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바닥이다.
‘삼십만 냥이라……..’
그녀를 살려서 데려올 자신은 없었다. 삼십만 냥만 해도 충분했다.
백 번째 청부가 마지막 청부가 된다면 그 역시 멋진 일이 될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기회처럼 느껴졌다.
막대가가 차분히 말했다.
“이제 알겠나? 왜 강호제일의 살수인 자네를 직접 보자고 했는지?”
막대가가 예언한 대로 천귀가 죽립을 벗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컸다. 자신을 믿으란 그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행동이었다. 동시에 이번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는 의지다.
“그 여인의 이름이 무엇이오?”
천하제일살수의 준비된 눈빛을 응시하며 막대가가 차분히 말했다.
“적이연. 그 아름다운 악귀의 이름이네.”
*
*
*
천귀는 가장 먼저 교하촌에서 그녀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그녀가 이곳에 머물면서 가장 많이 드나든 곳이 바로 교하촌이라
했다. 교하촌은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일종의 빈민굴
이었다.
‘대체 이런 곳에는 무슨 일로 왔을까?’
한편인 자들과 접선을 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이런
빈민굴까지 와서 접선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다른 방법도 많았을 텐데.
‘혹시?’
어저면 그 돈을 이곳 어딘가에 숨겨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빈민굴에 그런 엄청난 돈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짐작조차 못할 테니까.
음약에 취한 자들이 쓰레기와 함께 굴러다닐 것이라 생각했는데
교하촌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천귀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시선을 끄는 곳이 있었다.
예전에 패싸움이 주로 벌어졌을 커다란 공터에 공사가 한차이었다.
천귀가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가 돌멩이를 가득 등에 지고 가는
청년을 불러 세웠다.
“무엇을 짓는 건가?”
청년이 천귀의 허리에 매달린 검을 쳐다보고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객잔입니다.”
“객잔?”
천귀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규모 공사였다. 이런 빈민촌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큰 규모의 객잔이었다.
“주인이 누구인가?”
“그것이……..”
청년이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아무래도 외지인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천귀가 살짝 살기를 흘려보냈다.
그 서늘한 기운에 놀란 청년이 재빨리 대답했다.
“이곳 교하촌 주민 모두가 주인입니다.”
“무슨 헛소리야?”
“사실 자세한 이야기는 저도 잘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들었을 뿐입니다.”
겁에 질린 청년은 분명 진실을 말하는 듯 보였다.
“꺼져라.”
청년이 머리를 싸매고는 그곳을 달아났다.
천귀가 천천히 공사장 주위를 살폈다. 나무 담장을 따라 객잔을
돌아가자 그 뒤쪽으로 또 다른 공사가 한창이었다.
새로 길을 내고 그 양옆으로 화원을 조성하고 있었다.
반쯤 만들어진 화원은 너무나 아름다웠는데 그 역시 빈민촌하고는
어울리지 않았따.
천귀가 한 옆에서 쉬고 있는 노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잠시 좀 쉬어갑시다.”
강호인이 옆에 앉자 노인이 내심 긴장했지만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일부러 피하진 않았다.
“무슨 공사를 이리하시오?”
천귀가 친근하게 물었다.
“명승지를 조성할 작정이지요.”
“명승지?”
“그렇습니다. 이곳 교하촌은 예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산
곳입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지요. 이 길을 따라가면
양하폭포로 이어지지요. 그곳이 실로 아름다운 절경입니다.
“그 폭포를 명승지로 만든다?”
“그렇지요.”
“객잔도 그래서 만드는 것이고?”
“절경을 즐기다 보면 자연 배가 고픈 법인지요.”
“얼핏 들으니 객잔 주인이 바로 이곳 주민들이라던데?”
“맞습니다. 저희들이지요.”
“도통 무슨말인지모르겠군.”
어느새 천귀는 하대를 하고 있었고, 살기를 흘리며 노인을 압박하고
있었다. 노인이 절쩔매며 식은땀을 흘렀다.
누가 투자했지?”
그 물음에 노인이 더욱 긴장했다. 강호인이 개입해 자신들의 일을
망칠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살기를 누그러뜨리며 그를 달랬다.
“이 일하곤 관계없는 일이니 안심하게.”
반신반의하며 노인이 나직이 대답했다.
“적 소저입니다.”
“적 소저? 혹시 적이연을 말하는 것인가?”
“맞습니다. 아시는 분입니까?”
혹시나 하고 물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왔다.
“저희뿐만 아닙니다. 인근의 모든 빈민가에 적 소저계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웃의 양촌도 그곳의 모든 빚을 갚아주시고 쌀을
푸셨지요. 또 그곳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대형 양조장을
만드셨습니다. 막촌에는 호수를 정비해 뱃놀이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드셨고, 또 조가촌에는……”
노인의 이야기는 그러했다. 적이연이 빈민촌의 빚을 모두 갚아주고
쌀을 풀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앞으로 돈을 벌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다. 얼핏 들어도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대체 무슨 수작이지?’
천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적이연의, 아니, 그 배후에 있는자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이 못배운 것들을 이용해 뭔가 더 크게 해먹을 작정인가?’
천귀의 의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큰돈을 수중에 넣었는데
이런 천한 자들을 위해 돈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상식으론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어딜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지?”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 그녀는 대리인을 통해 저희에게 공사
비용을 보내주시니까요.”
천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대리인이 누구지?”
*
*
*
천귀가 중원전장의 지단으로 들어섰다. 중원삼대전장 중 하나답게
그 경비가 막중했는데, 천귀의 방문에 당장 주위의 공기가 달라졌다.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는 이들이 긴장했다는 뜻이다.
마음을 먹는다면 강호인이 아닌 것처럼 완전히 기척을 감출수 있는
그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회계원 하나가 특별히 그를 맞았다.
오히려 천귀가 더 사무적으로 그를 대했다.
“교하촌 공사담당자를 만나러 왔소.”
“서계원 말씀입니까?”
“누군지는 모르오.”
“미리 약속하셨습니까?”
“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곤란합니다.
이미 예상한 반응이었다. 겉으론 공손한 척해도 전장에서 일하는
것들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깐깐한 자들인지는 익히 아는 바였다.
이럴 땐 입 아프게 긴 이야기할 필요 없었다.
천귀가 품에서 작은 옥패를 꺼냈다.
“아, 맹에서 나오셨습니까?”
옥패는 바로 정도맹 무인임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것도 끗발
높은 감찰부 소속의 명찰이었다.
“절차상 확인하겠습니다.”
“물론이오.”
사내가 누군가를 불렀다. 달려온 노인은 신분패만을 감정하는
감정사였다. 그가 몇 가지 방법으로 옥패를 확인하더니 진품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회계사내의 표정에서 의심이 사라졌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고맙소.”
신분패는 살행의 기본지급품 중 하나였는데, 정도맹의 감찰부
정도의 귀중한 신분은 자신과 같은 특급살수들에게만 지원되는
것이었다.
옥패의 주인은 이미 땅속에 묻혀 있을 것이다.
천귀가 사내의 안내를 따라 별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곳으로 인상 좋은 중년 사내가 들어왔다. 그가 바로
담당인 서계원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소.”
천귀가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이런 일 처리에 친절은 금물이다.
천귀를 정도맹 감찰부 소속 무인으로 알았기에 서계원의 태도는
고분고분했다.
“말씀하십시오.”
“교하촌 공사 말이오. 적이연이란 여인이 자금을 대었다고 들었소.”
“맞습니다.”
그다지 숨길 일도 아니란 듯 서계원이 부연했다.
“적 소저가 공사 대금 전액을 부담했습니다. 그에 대한 모든 권한의
대행을 저희 전장에 일임했고요.”
“전장에서 이런 일을 맡는 것이 흔한 경우는 아닌데?”
“그렇다고 아주 없는 일은 아니지요. 그녀는 빈민들을 돕고자 막대한
금액을 기부했습니다. 쉽게 찾아보기 힘든 선행이지요.”
천귀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적이연은 교하촌 공사 대금 외에도 막대한 돈을 이곳에 맡겼을
것이다. 전장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최고의 고객인 셈.
이 정도 봉사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천귀가 알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였다.
“어떤 이면 계약이 되어 있소?”
천귀의 기도가 아주 차가워졌다.
서계원이 깜짝 놀랐다. 순식간에 뿜어져 나온 천귀의 살기에 그야말로
온몸이 덜덜 떨렸다.
“왜, 왜 이러십니까? 아무리 맹에서 나오셨다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천귀가 거칠게 서계원의 목을 움켜쥐었다.
“죽기 싫으면 대답이나 해!”
“이면 계약은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웃기지 마라!”
목을 조르는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얼굴이 시뻘개진 서계원이
숨을 헐떡였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음에도 그는 진술을
번복하지 않았다.
“크에에엑! 정, 정말입니다.”
천귀가 손아귀에 힘을 뺐다. 공연히 전장의 회계원을 죽여 진짜
정도맹 놈들을 끌어들이면 귀찮아질 것이 뻔했다.
서계원이 몇 번이나 크게 숨을 몰아쉬자 이제 정신이 좀 드는 곳
같았다. 여전히 그는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주장했다.
“저, 정말입니다.”
“그냥 순수하게 빈민 구제에 돈을 썼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습니다. 한데 적 소저가
말씀하시더군요. 이 돈은 애초에 그들에게서 나온 돈이라고.
그들을 착취해서 얻은 돈이라고요.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만날 수 있지?”
“일이 있으면 직접 오겠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은 저도 모릅니다.
제발….제발 살려주십시오.”
“난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번 일을 상부에
보고하면 날 다시 보게 되겠지. 선택은 네가 해라.”
서계원이 깊숙이 허리를 숙인 채 말했다.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이 다섯이나 있습니다. 절대 말하지 않을…..”
그의 긴 애원이 끝났을 때, 이미 천귀는 그 자리에 없었다.
*
*
*
다음으로 천귀가 향한 곳은 적이연이 장기 투숙한 객잔이었다.
은 한던이에 점소이는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눈빛으로 침을
튀기기 시작했다.
“적 아가씨는 정말이지 아름다웠습니다.”
먼저 그녀의 외모부터 칭송하는 것을 보니 한편으로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외모라면 쉽게 눈에 띄기
마련이다. 물론 인피면구를 쓰지 않았을 때의 일이지만.
“동행한 사람은 확실히 없었나?”
“네. 혼자 묵으셨습니다.”
“끼니는?”
“방에서 드셨습니다.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셨죠.
제가 직접 음식을 날라 드렸습니다.”
“돈 좀 두둑이 챙겼겠군.”
“아닙니다. 아가씨께서는 한 번도 따로 돈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천귀가 코웃음을 쳤다. 감히 누구 앞에서 개수작을.
“그런데 왜 이렇게 그녀 이야기만 나오면 꼬랑지를 흔들어 대지?”
“그건…..”
점소이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천귀가 은덩이가 놓여 있는 손바닥을 천천히 접으며 반대쪽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은덩이가 매타작으로 바뀌는 모습에 점소이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가씨께서는 저를 점소이로 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지?”
“아가씨는 명문의 자제가 틀림없으셨습니다. 정말 기품이 있으셨죠.
하지만 아가씨는 우릴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지요.”
“구체적으로 말해봐.”
“저희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식사를 하실
때면 언제나 저희에게 식사를 했냐고 물어봐 주셨지요. 세상에!
점소이가 밥을 먹었는지 신경을 써주는 손님을 본적이 있으십니까?”
그단 말에 감동받기는. 천귀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가씨께선 제게 꿈을 물어보셨지요.”
“꿈?”
“제 꿈은 무관의 사범이 되는 거랍니다.”
‘이미 늦었다. 이 멍청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천귀는 애써 참았다.
상대를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손바닥 길이의 꼬챙이가 급소를
관통하면 그뿐이다. 하지만 상대를 아는 것은 쉽지 않다.
이 멍청이가 흘린 한 마디 한마디가 결정적 단서가 되어 적이연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아가씨께서는 그에 대해 여러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이미 나이가
들어 무공을 익히기 힘들다며 제게 맞는 심법 책을 선물로 주셨지요.”
“심범 책을?”
천귀가 깜짝 놀랐고, 점소이가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천귀가 손부터 내민 후 물었다.
“내놔봐, 안 가져간다. 새끼야!”
함악한 눈빛에 질려 거절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점소이가
품에서 책자를 꺼내 건넸다.
소양심법
일반 무공 서점에서는 흔하게 파는 것이었다.
대충 넘겨보던 천귀의 눈이 반짝였다. 책 중간중간에 몇 군데
고쳐진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이건 뭐지? 원래 낙서가 되어 있었나?”
“아닙니다. 아가씨께서 고쳐 주신 부분들입니다. 나이 든 제가
익히려면 이렇게 고치는 것이 좋다면서.”
“뭐라고?”
천귀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엉터리로 아무 말이나 짓는 것이
아닌 바에야 무공을 창안하고 그것을 고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삼류무공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게다가 고작 열다섯 먹은 아이였다.
책자를 읽던 천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봐선 알 수 없었다.
고쳐진 것이 완전 엉터리는 아닌 게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원래
것보다 더 나아 보이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자신이 파악할 수
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설마?’
천귀는 왠지 모를 섬뜩함에 똥구멍이 찌릿찌릿했다. 하지만 이내
방금 전 가졌던 생각을 버렸다.
‘이제 고작 열다섯 먹은 여자애가 낭왕과 생사판을 해치울 수는
없지. 천귀야, 천귀야, 정신 차려라!”
천귀가 나직이 물었다.
“이걸 믿나?”
“믿습니다.”
천귀가 책으로 점소이의 머리통을 가볍게 툭툭 쳤다.
“점소이야, 이 못난 점소이야!”
천귀가 책자와 은자를 녀석에게 던져 주었다.
방을 나서던 그가 고개를 돌리며 다시 물었다.
“찬, 그녀가 어디서 주로 수련을 했다고?”
*
*
*
점소이가 알려준 숲은 객잔에서 오리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아침마다 수련을 했다고 한다.
점소이에게도 알려준 장소니 뭐 비밀스런 것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온 것이다. 단서는 언제나 생각지
못한 곳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조사를 진행할수로 천귀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처음 예상과 다른 점이 너무 많았다. 대체 그 돈으로 왜 빈민들을
구제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막대가의 손가락을 모조리 잘라 버린
잔인한 여자애가 점소이를 챙겨준다?
가장 핵심은 배후였다.
조사를 하는 내내 생각했던 것이 생사판을 죽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생사판은 강호십대고수 중 한 명이다. 사도인이니까 정파 쪽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지. 워낙 큰돈이 걸려 있으니까 출신 성분으로 단정 지어선
안 되지.’
이렇든 저렇든 이삼십 명 내외일 것이다. 그를 죽일 수 있는 자가
꼭 그 강호십대고수들 중에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비슿한 실력
이지만 십대고수에 들지 못한 자라거나, 실력은 떨어지지만 무공의
상성이 우위에 있거나, 혹은 암기나 독의 사용에 능한 자, 그들
모두도 용의자들이었다. 그들 중 이곳에 행적을 보인 자가 있다면
그가 유력한 용의자였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천귀가 작은 공터에 도착했다.
‘여기군.’
천귀가 주위를 살폈다.
별다른 것은 없었다. 혹시 발자국이 남아 있는지 주의 갚게 살폈다.
운이 좋다면 규칙적인 보법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러 지운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그곳에서 수련을 하지
않은 것인지 천귀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주위를 대충 살펴보고는 천귀가 미련없이 돌아섰다. 천천히 돌아서
나오던 그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숲 한쪽의 거대한 절벽 바위였다.
천귀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절벽의 가운데 거대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절대군림
도대체 어떻게 새겼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거대한 크기였고,
서체는 웅장한 힘과 멋이 있었다.
“설마 검으로 쓴 것인가?”
천귀는 그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분명
고수가 검이나 도를 사용해서 남긴 글자였다.
천귀의 표정이 밝아졌다.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
이 글귀를 새긴 무공을 조사하면 상대가 누군지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 글자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강호에 몇 사람
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곧 내가 잡아주지!”
천귀가 소리치는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바로 옆에서 말했다.
“정말인가?”
“으아악!”
너무 놀란 천귀는 비명과 동시에 나갔어야 할 공격 기회조차
놓쳤다.
자신과 어꺠를 나란히 할 때가지 기척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충격을 넘어선 경악이었다.
천귀가 뒤늦게 훌쩍 물러서려는데 사내가 어깨동무를 했다.
그 순간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혈도가 제압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떤 거대한 기운이 그와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함부로 출수해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생존 본능이
쿵덕거리는 심장에 실렸다.
“정말 저 애를 찾을 수 있는 거지?”
적이건이었다. 걱정스런 말과는 달리 적이건의 표저은 밝았다.
벽에 새겨진 글자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빛에 여러 감회가 서렸다.
그때였다. 반대쪽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연이는 우리가 직접 찾아야지요.”
“으허헉!”
천귀가 화들짝 놀라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왔는지
기척도 없이 차련이 옆에 서 있었다. 천귀는 어안이 벙벙했다.
마치 꿈을 꾸는 심정이었다.
차련이 절벽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연아”
두 사람의 이름에서 이 자와 련 자를 합쳐 적이연이라 이름 붙였다.
다행히 외모는 차련을 꼭 빼다 닮았는데 문제는 성격이었다.
“그래도 글은 잘 썼는 걸.”
적이건이 흐뭇한 미소르 지었다.
차련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에 막아야해요. 어쩜 그리 하는 짓이 당신을
닮았을까요?”
“언제는 당신을 닮았다고 해놓고선.”
“그땐 착했잖아요.”
“너무하는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천귀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쳐 나가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우선 내력이 제압당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을 먹으면 기습이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뭔지 모를 기운과
분위기에 눌려 몸과 마음 모두 움츠러들어 있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 이었다.
천귀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두 분은 누구시오?”
적이건이 순순히 대답했다.
“네가 찾는 아이의 부모다.”
“당신들이 이번 일의 배후요?”
대화의 내용으로 볼 때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이들의 배후란
가능성을 배제해선 안 되었다.
적이건이 피식 웃었다.
“당연히. 부모니까 언제까지나 우리가 배후지. 하지만 네가 묻는
질문의 배후는 아니야.”
천귀가 적이건의 눈과 마주쳤다. 맑은 눈빛은 절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그 아이 혼자 한 일이란 말이오?”
“그래.”
“믿을 수 없소.”
“나도 그래. 고작 열다섯 살인데 벌써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그때 차련이 말했다.
“그래도 당신보단 훨씬 나아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돈을 쓰고
다니니.”
“그러게. 이 아비는 고기나 사먹고 다녔는데. 녀석이 훨씬 낫네.”
적이건은 진심으로 감동하고 있었다.
“당신 닮아서 정말 착해.”
적이건의 말에 차련이 공연히 부끄러워졌다. 그런 말 들으려고
적이건을 놀린 것은 아니었는데. 적이건의 바람에 대해서는 잊기로
했다. 적이건을 용서했다기보다, 설벽화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평생을 자신의 남편만 사랑하고 살아온 그녀였다.
같은 여자로서….마음이 아팠다.
적이건이 여전히 절벽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지금까지 몇 명이나 죽였지?”
단번에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자 천귀가 흠칫 놀랐다.
“난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놀라지도 거짓말 하지도 마.”
담담한 그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실려 있었다.
“아흔아홉이오.”
“많이도 죽였군.”
“당신에게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소.”
“그렇겠지.”
잠시 사이를 둔 적이건이 천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살려주면 어떻게 살 텐가?”
“생각해 본 적 없소..”
“지금 생각해 봐.”
적이건이 천귀를 뒤로 물러서게 했다.
그 허점 가득해 보이는 등을 보는 순간, 천귀는 알 수 있었다.
모든 곳이 허점이기에 정작 공격할 수 있는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을 . 완벽함의 단계를 지나 다시 완전한 허점 투성이가
되었다는 것을.
그때 적이건이 천천히 절벽으로 손을 내뻩었다.
대체 뭘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다음 순간!
스스스스스스스.
적이건의 손길을 따라 절벽의 글자가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아아!”
천귀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이런한 신공을 태어나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적이건이 절벽을 깎아 단 한 글자를 지웠다. 절대군림의 대자였ㄷ.
다시 적이건이 손을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검이 그곳에 새로 글자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각, 가아악, 각, 가가가가가!
천귀의 눈이 뒤집어질 듯 휘둥그레졌다.
“심,심,심검!”
적이건의 손길에 따라 새로운 글자가 쓰였다. 대(代)자를 대(對)자로
바꾼 것이다.
절대군림(絶對君臨)
자신이 바꿔 적은 글자를 잠시 올려다보던 적이건이 차련을 쳐다
보았다.
“난 연이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세상을 절대(絶代)군림
하는 것보단 자신의 삶을 절대(絶對)군림하는 그런 삶을 말이야.”
차련은 적이건의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차련이 적이건의 손을 다정히 잡아주었다.
“당신이 그랬듯이…..우리 딸도 언젠가 우리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아줄 날이 있을 거예요.”
두 사람이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만 갑시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돌아섰다.
“결정했나?”
“잘 모르겠소. 한 번도 살수가 아닌 삶을 살아보지 못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그러자 적이건이 편안한 미소로 말했다.
“아흔아홉을 죽였으니 앞으로 아흔아홉의 목숨을 구하는 삶을
살아보면 어떤가?”
“….내가 그런 삶을 살 수 있겠소?”
“그건 난 모르지. 자네만이 알겠지.”
적이건과 차련이 돌아서 걸어갔다. 더 이상 강요도 다짐도 받지
않았다.
“날 어찌 믿고 이러는 것이오?”
“천하제일살수라지? 분하지만 난 아직도 그 별호를 얻지 못했네.
비록 나쁜 쪽이긴 해도 그래도 그 이름을 얻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겠지? 그 천하제일의 자존심을 믿어보겠네.”
천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적이건과 차련이 손을 맞잡고 걸어갔다. 뿌연 안개 사이로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점차 멀어졌다.
이대로 그냥 헤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천귀가 소리쳤다.
“당신에 대해 알고 싶소!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저 멀리서 걸어가던 적이건이 멈춰 섰다.
적이건이 천귀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쉽지만…..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라네. 이제 그대는 자신의 삶을
살러 가야지. 부디 행복하시게.”
적이건이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며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한참을 그렇게 두 사람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천귀가 품에서
자신의 독문암기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곳을 떠나려던 그가 절벽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되뇌었다.
絶代郡臨, 絶對郡臨
「절대군림」 大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