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336)
#334
프랑스 황실의 명예를 걸고
김덕성이 연말연시 초대를 받은 다음 날 아침.
김덕성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세부 계획을 짜던 한서진을 벨라가 불러냈다.
세부 계획 수립에 바쁜 와중에도 한서진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원래도 벨라와는 친한 관계였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금의 벨라는 그녀에게 있어서 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크리스마스 데이트에 망설이는 자신을 등떠밀지 않았더라면.
벨라가 히로인들을 모아 역으로 크리스마스 데이트 계획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그날 대관람차에서 그분의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서진은 벨라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사용인 숙소, 휴게실.
눈 내리는 창밖이 보이는 그곳에서 한서진은 벨라와 마주 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벨라 씨.”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홍차를 두고 한서진이 물었다.
그 모습을 본 벨라가 옅게 웃었다.
“크리스마스 데이트, 잘 마무리된 것 축하드립니다. 한서진 씨.”
벨라의 말에 한서진이 움찔했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가, 감사합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들어가죠. 제가 이렇게 한서진 씨를 부른 이유는 주인님의 주인님의 연말연시 스케줄이 궁금해서입니다.”
일본은 곧 연말연시 연휴.
가족끼리 모여 설날을 보내는 풍습이 있지만, 김덕성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게다가 가족도 없는 천애 고아니까 연말연시에는 별다른 일정이 없을 확률이 높다.
벨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스케줄이라면······.”
한서진이 말끝을 흐린다.
“만약 주인님의 주인님께서 일정이 없다면, 우리 아가씨와 함께······.”
그 틈을 타서 벨라가 진짜 속셈을 말한다.
벨라는 어디까지나 올리비아의 전속 메이드.
올리비아의 소망을 현실로 만들어야 하는 의무가 그녀에게는 있었다.
‘아가씨가 입지를 굳혀야, 제 출연 분량도 늘어납니다.’
안 그래도 경쟁자가 늘어나고 있는 시점이었다.
아직은 선두를 지키고 있지만, 누가 언제 따라붙을지는 알 수 없는 상황.
데이트를 통해 주인님의 주인님과 가까워져 다른 히로인들과의 격차를 늘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말연시는 최적의 시기였다.
김덕성과 올리비아는 둘 다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
가족과 함께 설날을 보내는 일본인 히로인들과는 다르게 둘 다 시간이 빌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의 설날은 음력 1월 1일.
일본과는 달리 새해 첫날은 한국에서는 명절이 아니다.
스케줄을 물어본 것은 의례적인 질문이었고, 올리비아와 김덕성이 함께 연말연시를 보내자는 제안이 벨라의 본론이었던 셈이다.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시작부터 부정당했다.
“있······. 다고요?”
벨라가 살짝 말을 더듬었다.
언제나 흔들림 없는 무표정을 자랑하는 만능 메이드인 그녀였지만, 방금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김덕성 님께서는 쿠로사와 유지 군의 초대를 받아 쿠로사와 유지의 자택을 방문해서 연말연시를 보낼 예정입니다.”
한서진이 말했다.
“······.”
벨라가 입을 다물었다.
쿠로사와 유지의 초대.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유능한 메이드인 벨라는 초대의 이면에 담긴 진의를 알아차렸다.
“쿠로사와 하루 양이 주인님의 주인님을 초대한 것이로군요.”
벨라의 갈색 눈동자가 빛난다.
“······.”
한서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 역시 유지의 초대가 진짜 유지 본인의 의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하루가 아닌 유지의 초대.
그렇기에 그분의 그림자에 불과한 자신이 아무리 은인이라고는 해도 외부인인 벨라에게 그분 관련 사안에서 공식 이외의 사견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한서진은 벨라의 추측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쿠로사와 양이 움직이다니······. 예상 밖의 일이지만 괜찮습니다.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벨라가 우아한 태도로 홍차를 마시면서 말한다.
쿠로사와 하루의 방해는 뜻밖의 일이었지만 상관없다.
변수는 알지 못할 때가 무서운 것이지, 알고 나서는 별로 무섭지 않기 때문이다.
“소중한 시간 감사합니다. 한서진 씨, 그럼 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벨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루의 수작을 알았으니, 이제 이쪽에서 대응할 시간이었다.
*
겨울방학의 슈오우 영웅 학원은 썰렁했다.
연말연시 연휴까지 끼어있어서 그런지, 생도 대부분은 집으로 돌아갔다.
일본 최대 명절인 설날을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서였다.
원작 16권의 유지도 이치로가 시노자키 저택으로 초대하지 않았다면, 여동생인 하루와 함께 쿠로사와 저택에서 새해를 보냈겠지.
그래서 기숙사는 텅텅 비어 있었다.
방학 기간에도 학원에 남아 있는 생도는 나랑 올리비아 같은 외국인이거나 아니면 가족이 없는 고아 생도들뿐.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휴식할 수 있었다.
물론 완전히 쉬는 건 아니고, 한서진의 보고를 받으면서 스키 여행 관련 작전을 짜는 시간에 여유가 나면 쉬는 형태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스키 여행이 시작되면 이제 휴식을 취할 시간도 없게 될 테니까.
나는 침대에 대자로 누워서 생각했다.
‘한국은 안 가고 싶었는데······.’
여름방학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온몸이 떨린다.
청와대에서 열린 환영회에 예포에 태극기를 흔드는 시민들에 광화문광장 동상까지.
빌어먹을 국뽕 퍼레이드만 생각하면 오한이 든다.
그래서 겨울방학에는 절대 한국에 안 가리라 다짐했는데.
어쩔 수 없이 가게 됐다.
대장로 디에고 모랄레스.
놈을 끌어낼 수 있으며, 동시에 놈을 붙잡아둘 함정을 팔 수 있는 장소는 한국이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크리스마스 데이트 때 찍었던 브이로그 영상을 한서진이 언더테이커 등장 때문에 보안상의 이유로 전량 폐기해서 인터넷에 안 올린 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 브이로그가 올라갔으면, 뒤따라올 국뽕 반응을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파트너, 왜? 파트너의 조국이 부담스러워?]머릿속에서 흑태자가 말한다.
부담······.
한국의 국뽕은 부담이 아니라 이미 광기의 수준에 올라 있었다.
거기다 나는 심상전개를 각성하고 EX랭크에 도달한 영웅.
여름과는 차원이 다른 국뽕의 쓰나미가 나를 덮칠지도 모른다.
그래도 대장로를 잡아낼 수 있다면, 이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
메사이어는 아직 검성에게 당한 상처를 전부 치료하지는 못했을 터.
원작 16권의 시노자키 저택 공격에 메사이어는 블랙 스톤을 강탈하기 위해 상당히 무리했었고, 실제로 분신 같은 더미를 동원한 것도 피해 최소화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메사이어의 상처가 더 악화되었다는 내용이 설정집에 적혀 있었다. 그걸 나중에 완성한 현자의 돌로 말끔하게 치료해서 문제지.
이 세상의 블랙 스톤은 내가 이치로에게 예전에 부탁해서 폐기 처리된 걸로 정보를 조작한 상태.
블랙 스톤의 폐기 정보를 확인한 메사이어는 원작과는 다르게 플랜 B로 전환했을 것이다.
플랜B의 내용은 모르지만, 극한의 효율충인 메사이어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플랜A보다 효율이 뒤떨어지는 계획이 분명할 터.
플랜 A의 최종 결과물인 현자의 돌의 목적 중 하나가 메사이어의 상처 치료라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메사이어의 상처 치료가 완전히 끝나는 시점은 아무리 변수를 고려해도 원작과 같거나 그것보다 좀 더 느린 시점일 게 분명했다.
블랙 스톤이 폐기 처리됐다는 정보를 입수한 지금의 메사이어는 결코 외부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메사이어가 움직이지 못하는, 스키 여행 에피소드가 수록된 원작 16.5권의 시점.
지금이야말로 대장로를 조질 수 있는 기회다.
다음은 없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쾅쾅.
기숙사 문이 부서질 듯한 거친 노크 소리가 들린다.
누구지?
기숙사에 남은 생도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그중에서 나를 찾아올 만한 생도는 한 명뿐이다.
“올리비아?”
올리비아가 날 찾아오다니.
츤데레 성격과 프랑스 황녀라는 자존심 때문에 날 먼저 찾아오는 일이 드문 그녀였다.
그런데 갑자기 왜?
[파트너. 내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기숙사 복도에 계속 세워둘 생각이야?]흑태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올리비아를 문전박대할 생각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에 방문을 연다.
“후우. 당신. 조, 좋은 아침이군요!”
올리비아가 분홍빛으로 물든 얼굴로 어색하게 말한다.
“어, 그래······.”
아침이 아니라 오후라는 사실은 굳이 정정해주지 않기로 했다.
탁.
그녀가 방 안에 들어오더니, 어질러진 집안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린다.
“방 꼴이 이게 뭔가요? 돼지 우리가 따로 없네요. 당신! 하여튼, 전속 시녀인 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없으면 금방 엉망이 된다니까요. 흥! 비켜요!”
올리비아가 이렇게 소리치면서 방 안에 어질러진 옷가지,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돼지 우리라니.
빙의 전, 우리 엄마가 내 방을 보고 하던 말이랑 똑같았다.
그래도 내가 그렇게 안 치우고 사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지금 이런 말을 꺼내봤자 본전도 못 찾을 것 같다.
우리 엄마가 잔소리했을 때처럼.
나는 입을 닫았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에, 나는 오랜만에 깔끔해진 방을 볼 수 있었다.
“후우. 좋아요. 이제 좀 사람 사는 방처럼 됐네요!”
올리비아가 팔짱을 낀 채로 방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고마워.”
잔소리는 잔소리인 거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흥. 전속 시녀의 의무를 지켰을 뿐이에요!”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자 올리비아가 팔짱을 끼면서 답한다.
올리비아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진다.
올리비아가 자연스럽게, 본인 집처럼 발코니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탁.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올리비아의 그림자에서 메이드복을 입은 갈색 보브컷 미녀, 벨라가 솟아올랐다.
깜짝이야.
“오랜만입니다. 주인님의 주인님.”
벨라가 공손하게 내게 인사하면서 품에서 다과와 찻잔 세트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쪼르르르.
순식간에 다과가 세팅되고, 내 앞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홍차가 놓였다.
발코니 통유리 너머로 눈 내리는 바깥 풍경이 보인다.
“그래서······. 올리비아.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따뜻한 찻잔을 만지면서 올리비아에게 묻는다.
내 질문을 들은 올리비아가 얼굴을 붉히면서 소리친다.
“이, 이이유가 뭐냐니요! 저는 당신의 전속 시녀! 당신 곁에서 언제나 당신을 보좌할 의무가 있다고요! 그런데 당신은 단 한 번도 저를 찾아주지도 않고······.”
그건 스키 여행 작전을 짜느라 바빠서 그랬다.
“네가 직접 찾아오면 되잖아.”
“저는 고귀한 보나파르트 황실의 적장녀이자 프랑스의 황녀! 아, 아무리 당신이라도 제가 먼저 찾아갈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다, 다다당신이 저를 불러야죠! 제, 제가 어떻게 먼저······.”
내 말을 들은 올리비아가 횡설수설하며 얼굴을 붉힌다.
그녀가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속마음은 부끄러워서 날 먼저 보러 못 온 거다.
하여간 츤데레 성격은 여전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저 츤데레 성격 때문에 본론이 나오는 데 한나절이 넘게 걸릴 거다.
“아무튼, 이유가 있어서 날 보러 왔을 거 아냐.”
츤데레 성질을 받아주는 건 익숙하지만, 그래도 본론이 빨리 나오는 편이 좋다.
내 말을 들은 올리비아의 귓불이 붉어진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면서, 테이블을 만지작대며 말한다.
“······당신이 이번 연말연시에 쿠로사와 집에 초대받았다는 정보를 입수했어요.”
“그래서?”
내 말을 들은 올리비아가 입술을 깨문다.
“으으으으으······.”
그녀가 앓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든다.
새빨개진 얼굴로, 올리비아가 가슴 위에 척하고 손을 올리면서 소리친다.
“그, 그그그래서는 뭐가 태평하게 그래서인가요?! 전속 시녀인 제 수행 없이 당신 혼자서 타인의 낯선 집에 함부로 들어가다니! 그런 돌발 행동은 전속 시녀인 저,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황실의 명예를 걸고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올리비아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프랑스 황실의 명예, 이런 데서 걸어도 괜찮은 건가?
“그, 그그그러니까! 당신의 연말연시 초대에 저도 동행하겠어요! 당신의 전속 시녀로서!”
올리비아가 흔들리는 파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면서 외친다.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저 전속 시녀 이야기는 좀 안 하면 안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