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38
바닥을 반 바퀴 뒹군 그는 밀려난 자세 그대로 처량 맞게 애웅거렸다.
땅을 파고 있는 그의 모습은 하찮으면서도 마냥 미워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자아냈다.
-······근데, 어떻게?
-하, 젠장. 일본의 주술. 그걸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냐?
의문 섞인 호영의 목소리를 뚫고 임진혁이 등판했다.
진혁과 상일은 대화를 통해 관객들이 몰랐을 사실을 전달했다.
상일이 위기에 순간 펼친 기술은 ‘호흡과 생기를 최소화하여 식사도 필요 없는 가사 상태를 유지한 채 설정된 열쇠가 맞아야만 깨어날 수 있는’ 카타노 가의 주술이었다.
진혁의 방에서 접한 술식을 상일이 제 입맛에 맞게 일부 변형해 소지하고 있던 것.
보신주의자답다면 다운 행동이었다.
-그 금술(禁術)은 시전자의 의식은 그대로 살려 둘 텐데 용케 안 미쳤구나.
-일단 시체를 찾기 위해 누군가는 파헤칠 거라 믿고 버텼죠.
-널 찾아냈어도, 열쇠가 될 행위가 없었다면 그대로 매장당했을 거다.
-그건 당연히 사랑과 목숨을 건 도박······. 아앗! 아, 아파! 나 환잔데!
-당신이란 사람은!
마지막까지 맞는 말을 당당하게 뱉은 그는 화난 호영에게 등짝 스매시를 처맞았다.
***
영화가 끝나고 쿠키 영상까지 마무리되자 객석을 매운 관객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웠다.
태화는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척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나가는데 정신이 팔린 이들은 다른 관객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는다.
그의 옆을 지나는 이들은 방금 본 주연 배우를 알아보지 못한 채 스쳐 갔다.
“너 영화 반응 확인한 적 있어?”
“어? 아니. 아직. 다음 주쯤에 확인하려 했는데 왜?”
다른 이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던 태화는 갑작스러운 인하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무신’이 개봉하면 비교하는 글들이 올라올 게 분명했기에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었거늘, 그의 친구는 태화를 도울 줄 몰랐다.
“지금도 꽤 쌓였는데 함 봐.”
“음.”
“봐 두는 게 충격이 덜 할 걸?”
“······충격?”
의외의 단어가 붙자 태화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인하의 스마트폰 화면을 훑었다.
└한상일 나름 능력남인데 하찮은 게 귀여워 ㅠㅠㅠㅠ └여자가 싫어하는데도 치근덕거리는 남자 재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왜 이태화가 하니까 하찮게 귀엽죠? ㅋㅋㅋ └진짴ㅋㅋ보면 삼국 애들 다 모은 게 한상일인데 히로인한테 취급잌ㅋ
“······나 화나게 하려고 보여준 거?”
태화는 ‘하찮게 귀엽다’라는 평가 일색인 댓글을 확인하고 친구의 얼굴을 쳐다봤다.
사실 이 말은 이미 효신을 비롯한 다른 연기자 동료들에게 숱하게 들을 터라 내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 서인하는 항상 묵직한 한방을 더 준비할 줄 아는 사나이였다.
“아래 더 내려 봐.”
“······뭔데?”
그제야 슬금슬금 불안이 생긴 태화는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스크롤을 내렸다.
└근데 이태화 맡는 배역이 항상 히로인에게 당하는 역할인 듯. 괴물은 제쳐놓고 겨울에서도 여주가 더 적극적, 구미호나 협력에서는 열심히 자기 목줄 건내주기.
└생각해 보니 맨날 약자 포지션이넼ㅋㅋㅋ?
└보면 셋 다 키스신 있는데 남주가 돼서 한 번도 본인이 먼저 한 적 없음 ㅉㅉㅉ └어쩔 수 없잖아요. 우리 오빤 백설공주인 걸요? 항상 마지막에 키스 받아서 삶의 희망을 얻는다고 할까, 겨울도 그렇고요.
“백, 뭐?”
쭉 읽어 내리던 태화는 한 댓글에서 말문이 막혔다.
배우들에겐 여러 별명이 있다.
이름에서 따온 별명, 너무 한가지 역할을 맡아서 생기는 별명, 행동 때문에 생기는 별명 등.
그러나 남자 배우에게 공주라는 별명이 붙은 적은 그가 알기론 없었다.
└그래도 남자한테 백설공주는ㅋㅋㅋ └그럼 우리 절충해서 스노우 화이트라 부르죸ㅋ?
└오오, 어울린다. 태화 오빠 얼굴도 하얗고 잡티 하나 없잖아요? 완전 어울려!
└배우님이 안 좋아하실 것 같은 별명은 삼가주세요.
└에이, 이것도 다 팬들의 애정인뎈ㅋㅋ? 설마 싫어하겠습니까?ㅋㅋㅋㅋㅋ?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고 하던가.
누군가 농담처럼 던진 한 문장이 생명을 얻어 점차 형태를 갖추는 것을 보며 태화는 얼굴을 가렸다.
처음으로 붙은 별명이 스노우 화이트라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끝
ⓒ 마늘소금
‘협력자들’의 성공 이후 태화에게 날아드는 러브콜은 하루에도 수십 건이 넘었다.
개중엔 이름만 듣고 바로 히트작이 떠오르는 이도 있었으나, 태화의 연기력에 기대 성공하려 드는 작자도 없지는 않았다.
BGA는 그중 쭉정이들을 걸러 내고 남은 작품들을 태화에게 건넸다.
“여기. 이번에도 제시된 출연료는 고려하지 않았대. 서연 씨 말로는 어떤 작품이든 제시 가격이 터무니없어서 조정이 필요하다더라.”
“감사합니다. 출연료라면 서연 씨에게 맡기는 편이 확실하죠.”
태화는 3센티 정도 되는 두께의 종이 뭉치를 받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연기 이외의 부분에서 크게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도와주는 이들이 무능하면 모를까, 현규부터 BGA의 직원들까지 다들 자신이 맡은 분야에선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여 줬기 때문이다.
특히 서연은 ‘협력자들’을 통해 제 능력을 온전히 입증해 냈고, 태화는 여러 차례 이어진 결과를 통해 그녀의 교섭 능력을 믿게 됐다.
‘영 괜찮은 게 없네······. 좀 거친 분위기를 원하는데.’
‘축복을 실행하겠습니까?’라 묻는 창들을 꺼 가며 작품을 읽어 내린 그는, 오늘도 소득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고민에 잠겼다.
영화가 개봉한 지도 벌써 3주 차.
달력은 한 장의 허물을 벗었으며, 나뭇잎들도 점차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물들었다.
이 이상 선택을 머뭇거리다간 어영부영 한 해가 가 버리고 말리라.
‘성공할 만한 작품이 없는 건 아니지만······.’
BGA는 여러 전문가들이 어우러진 회사로 작품을 보는 안목이 상당했으며, 태화에게 건네진 대본들은 평균 이상 되는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작품성과 별개로 그는 제안된 역할들에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오늘도 재벌 3세만 4건······. 시상식이 코앞이라 그런지 참······.’
작품에 대한 인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는 법.
때문에 드라마의 경우 상반기보다 하반기 작품이 연말 시상식에 초대받을 가능성이 높았고 유리한 요일, 시간대에 기존 유명 작가와 PD들이 포진하는 일이 잦았다.
그들은 흥행하기 좋은 작품을 만들었다.
적당히 인기 있는 소재, 다음 화가 궁금한 구성, 클리셰와 살짝 어긋나 시청자의 흥미를 끄는 요소 등.
능력 있는 작가들답게 트렌드에 맞는 소재들을 맛깔스레 버무렸다.
그렇게 잘 만들어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태화는 그것들이 조금 걸렸는데, 그들 중 대다수가 재벌 3세라는 캐릭터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철없는 재벌 3세, 야망 넘치는 재벌 3세, 업둥이로 자라 자신이 재벌 3세인지 모르는 재벌 3세······.
무슨 재벌이 그리 많은 것인지, 왜 하나같이 그 재벌 역할을 자신에게 들이미는 것인지 차라리 길 가던 고양이 역이 더 나을 정도였다.
‘시대극도 나쁘지 않은데 그 쪽에선 영 연락이 없고.’
오늘도 이어진 허탕에 작게 한숨을 내쉰 그는 대본들을 내려놓고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그나마 이쪽은 성과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제 별명은 완전히 ‘백설기’로 굳은 것 같네요.”
태화는 ‘설기 오빠 차기작 발표 언제래요? 오빤 연기 욕심 많아서 바로 차기작 소식 들려올 줄 알았는데ㅠ’란 문장을 파랑새에서 확인하고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이태화’, ‘스노우화이트’, ‘백설공주’였던 해시태그가 ‘이태화’, ‘백설’, ‘백설기’로 바뀌자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았다.
‘예쁜이 정도라면 놔뒀겠지만 공주는 너무하잖아.’
첫 별명은 스쳐 가는 다른 별명들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 별명이 배우의 이미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는 다음 작품이 들어가기 전, 조금이나마 방향을 바꾸길 원했다.
현규와 BGA는 배우의 의사에 맞춰 조금씩 여론을 움직였다.
본진이라 부를 수 있는 마레드의 운영진 또한 매니저에게서 태화의 생각을 전해 듣고 변화에 한 손을 거들었다.
그렇게 완성된 별명이 바로 ‘백설기’.
별명이 붙은 이유를 찾아보지 않는 이상 단순히 ‘떡처럼 하얘서인가 보다’라 여길 별칭이었다.
“형. 이제 작품을 찾기에 집중하고 싶은데······. 제가 차기작 고민 중이란 소문을 은근히 뿌려 주세요. 남성미 넘치는 역할 쪽을 주로 보고 있다는 말도 같이요.”
“알았어.”
태화는 아직까지 간 보고 있을 작가와 감독도 끌어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떡밥을, 한 PD도 물었다.
***
장철진 PD는 ‘첫눈의 사랑’, ‘춘향이 나가신다’, ‘섣달, 그믐, 하루’ 등 수많은 히트작을 제작한 KBC의 간판 감독 중 하나였다.
과거 태화가 카메오로 출연했던 ‘착각녀 임니다’ 또한 그의 작품이었으며, KBC에선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먼저 도움을 요청했다.
연출 능력만큼이나 정치 감각도 뛰어난 철진은 ‘그런 종류’의 셈이 빨랐다.
이 부탁이 자신의 커리어에 독이 될지 득이 될지부터 자신이 붙어 봤자 망작일 게 뻔하다는 각도까지 깔끔하게 잴 줄 알았던 것이다.
그 덕에 철진은 단 한 번도 손해 보지 않고 제 가치를 높여왔다.
이번에 맡게 된 골치 아픈 드라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시놉시스와 주변 소문, 작가의 성향을 확인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후에, 일을 수락했다.
“채연아 작가, 여기 이 아이돌들, 연아 작가가 넣은 거 아니죠?”
철진은 가장 먼저 ‘악의로 가득 찬’ 여자가 속살거려 둔 캐스팅부터 손보기로 결심했다.
전부는 힘들더라도 가장 중요한 몇몇 역할은 반드시 바꿔야 했기 때문이다.
“어······. 네, 남주가 좀 걸리긴 하지만 제가 신인이라 발언권이 적어서······. 많이 별론가요?”
연아는 주눅이 든 채 철진의 눈치를 살폈다.
기존에 작품을 맡던 PD가 사라지고 나타난 새로운 PD는 웬만한 작가가 아니고선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는 거물이었다.
그런 이에게 ‘공식적으로’ 첫 작품을 쓴 작가가 뻗대는 건 불가능했다.
“무슨 가요 대전 찍는 것도 아니고 최형욱 이 새끼가 아주 지랄을 해 뒀네.”
그는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아이돌로 범벅된 캐스팅을 보고 혀를 찼다.
KBC는 평균 시청률 30퍼센트를 자랑하는 주말 드라마의 강호다.
아무리 10시에 편성되는 ‘주말 특별 기획’이더라도 이따위로 작업해서 망했다간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대체로 소속사를 끼지 않은 채 방송국과 작업한 작가나 PD였다.
물론 배역을 맡은 아이돌들도 욕은 먹는다. 그러나 연기는 그들의 본진이 아니며, 팬덤이 흔들릴 위험은 적었다.
최형욱은 둘 중 하나가 책임져야 한다면 그것은 작가가 될 것이라 예상했을 것이다.
히트 제조기까진 못 돼도 대체로 선방해 왔으니 이번 드라마가 망하더라도 방송국에선 한 차례 더 기회는 줬을 테니까.
그의 계산에서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지는 건, 첫 작품을 대차게 말아먹고 KBC의 얼굴에 먹칠까지 한 채연아뿐이었으리라.
‘미친놈. 여자한테 미쳐서 지 커리어 다 말아 먹었네.’
그러나 방송국은 바보가 아니었다.
진행 상황을 보고 받은 국장은 며칠 뒤 크랭크인할 드라마의 이상을 눈치챘으며, 상황을 알아본 뒤 자신들의 상품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에게 분노했다.
그 결과, 드라마국 PD였던 형욱은 연고 하나 없는 교양국으로 쫓겨났다.
‘한서린은 살아남았지.’
아이러니하게도 형욱의 배후에 있었을 것이라 의심되는 작가, 한서린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그녀는 배우만 기억하는 대중들조차 이름을 들어 본 스타작가였고, 심증은 심증일 뿐 증거가 되지 못했다.
그러니 ‘드라마는 작가 놀음’이란 말을 맹신하는 KBC로선 한서린을 쳐 내는 게 불가능했으리라.
‘좀 불이익받을지도 모르지만······. 차기작이 대박 나면 그것도 흐지부지될 거고.’
이래서 연예계는 성공이 전부라는 말이 있는 거다.
성공한 가해자들은 아무리 횡포를 부려도 용서받기 쉽고, 이름을 알리지 못한 이들만이 사라질 뿐이니까.
채연아가 아무리 수작에 걸려든 피해자일지라도, 이번 드라마가 망하면 그대로 매장당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될 거였으면 내가 수락도 안 했지.’
“채연아 작가, 신인인 당신을 주말에 넣은 게 공개 처형용인 거 알아요?”
철진은 대놓고 현재 그녀의 상황을 알렸다.
신인 작가에게 주말 편성은, 자신을 벨 가능성이 더 높은 양날의 검이다.
특히 충성층이 두터운 KBC의 경우 1, 2화 시청률이 상당히 높은 편이기 때문에 더더욱 실패가 두드러졌다.
“······몰랐어요. 그냥, 서린 선생님이 전에 있던 일은 미안하다고, 그래서 힘 좀 써 줬다고 하셔서 정말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연아는 물기 어린 목소리를 쥐어짜며 울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한서린의 밑에서 막내 작가로 일하면서 그녀가 빼앗겼던 작품은 세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