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92)
두 번 사는 미대생 92화(92/93)
*
인생이 가장 빛나는 시기.
그 시기는 바란다고 해서 찾아오는 게 아니며,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일 또한 아니라고 하였다.
내 삶도 그렇지 않을까.
‘누가 이런 걸 바라기나 했을까. 바란다면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지.’
사람들이 많다.
예전에 여동생을 따라서 코믹페스에 갔을 때보다 더하다.
마치 신기루를 보는 것만 같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사라지지 않을까.
‘······.’
안 사라졌네.
현실이 맞다.
그렇게 멍하니 있으려니 이종이 교수가 내게 말을 걸었다.
“심란한가요?”
“아,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냥 믿기질 않아서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어쩔 수 없다.
누가 상상하겠는가.
이번 생이 시작되고 불과 4년이 안 지났다.
그때의 나는 1학년 신입생이었고, 지금은 4학년이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라는 사람이 뭐 얼마나 변했을까 싶을 만큼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세상이 변했다.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졌네요.”
그렇다.
한국에는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보세요.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줄을 서 있어요.”
라온 미술관 5층의 유리창 너머.
숫자를 감히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초원에 난 풀의 숫자를 세는 게 의미가 있을까.
지금 내 눈에 비친 광경이 그러했다.
전생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물론 전국적으로 몇십만 명을 동원한 전시 자체는 여럿 있었다.
외국에서 반 고흐나 피카소, 샤갈, 르누아르 같은 유명 작가를 데려오거든 50만 명을 넘기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어떨까.
‘전생에 한국 역대 최대 기록이었던 이중섭 전이 4개월 동안 25만 명이었지.’
이렇게 차이가 컸다.
해외 작가를 초빙한 블록버스터 전이 수십만을 우습게 넘나들 때, 국민 화가인 이중섭이 하루 평균 2천 명 수준이었다.
물론 이것만 해도 대단하지.
하지만 중요한 건 한국 대중이 요즘 한국 작가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그랬던 게 지금은 어떻게 되었다.
“저 1학년 때만 해도 미술 한다면 굶어 죽기 딱 좋다고 했잖아요.”
“그랬지요.”
“교수님한테 말씀드린 적은 없지만, 저희 부모님도 그거 때문에 저랑 거의 의절하려고 하셨거든요.”
나는 어딘가 초연해진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미술 수업을 받고, 주말이 되면 가족 다 같이 그림을 그리러 가는 경우도 많아졌어요.”
“시장이 커졌군요.”
“네, 헤븐즈 도어에서 고용하는 작가들은 적어도 밥걱정은 안 해요.”
평균적인 처우가 좋아졌다.
아직 그렇게 막 돈을 잘 번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 이런 대우가 거품과도 같아, 언젠가 바람 한 번 불면 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미술계에는 이 거품조차도 없었다.
나는 어쩐지 먹먹해진 기분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벽화로 사업을 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경쟁업체가 아예 없다시피 했어요. 그냥 그림 좀 그리는 사람들이 외주로 간간이 하는 정도였죠. 그런데 지금은 벽화 사업을 하는 법인만 수십 개가 넘어요.”
스트로크의 방영과 함께 전국적으로 벽화 업체의 수가 많아졌다.
“이제 카페들은 어딜 가나 미술품 걸어놓기를 당연하게 여기죠. 카페의 의미가 몇 년 사이에 좀 바뀌었어요. 사람 없어서 난리였던 화랑들도 지금은 손님들로 북적거린대요. 미술 드라마도 많아졌어요.”
그렇게 한참 말을 늘어놓기를 한참.
이종이 교수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학생이 세상을 바꾼 겁니다.”
“······.”
이종이 교수 특유의 오글거리는 칭찬이었다.
모르겠다.
솔직히 저 말이 조금 오글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 감동도 느껴졌다.
“이제 막 시작이죠.”
나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앞으로는 더 많이, 더, 더 많이 바뀌었으면 좋겠네요.”
*
전시가 시작되었다.
원래 소형 별관에서 운영됐던 전시가 앙코르 전시를 열며 메인 홀 전체를 이용하게 되었다.
가뜩이나 큰 미술관을 1층에서 3층까지 사용한다.
오성 라온 미술관에서 자랑하는 원형 전시장이었다.
‘1층부터 3층까지 층만 구분되어 있을 뿐, 전부 하나의 전시장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사실상 국내 전시 중에서는 역대 최대 규모라고 봐도 될 정도.
하물며 해외에서 유명 건축가를 초빙해서 지은 탓에 조형이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
이 전시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 위용이 어마어마했다.
개관하고 불과 몇 분.
관객들은 일관된 감탄을 토해냈다.
“이렇게 볼거리가 많아?”
볼거리가 다양하다.
그리고 그 모든 볼거리의 퀄리티가 너무나도 뛰어나다.
정말 어마어마한 광경이었다.
“이쪽 작품 좀 봐. 작품이 벽 전체에 붙어 있어.”
그래.
저게 내가 만든 아트북의 풀버전이었다.
1000페이지에 가까운 모든 그림을 전부 벽에 덕지덕지 발랐다.
양으로 압도한다.
시간순으로 나열된 1000장의 드로잉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역시 알기 쉬운 미술이 좋다니까.’
대중에게 사랑을 받기 수월하다.
심오한 것보다는, 조금 단순한 게 좋다.
공간 전체에 드로잉을 도배하듯 덕지덕지 발라두었는데, 내친김에 아예 옛날 드로잉까지 전부 가져다 두었다.
“우와······.”
볼 게 많다.
그러니 오랫동안 머문다.
고객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정체되었다.
미술관 입구에서 한 번 막히고, 내 작품 앞에서 한 번 막힌다.
그 구조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슬슬 위에 층도 반응이 올라올 것 같은데.’
나는 슬쩍 둘러보러 갔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졸업전시 때와는 조금 달랐다.
훌륭한 작가들을 잔뜩 데려왔기 때문일까.
관객들의 발걸음을 확실하게 붙잡았다.
열 명이 지나가면 여덟아홉이 발을 멈추고 천천히 관찰한다.
토마스 킨케이드나 애슐리 크루거쯤 되면, 아예 모두가 뚫어지도록 구경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지. 아예 저거 보려고 온 사람들도 널렸지.’
그리고 이종이 교수가 또 가관이었다.
‘무슨 전시를 가져오나 했더니마는.’
역시 역사의 산증인이다.
성공한 작품들의 프로토타입을 가져와서 걸어놨다.
‘미술전시라기보다는 역사박물관이라고 하는 게 어울리겠는데.’
어이가 없다.
분명 다른 시각디자인과 학생들이랑 다를 바가 없는 전시.
하지만 큰 차이가 있었다.
과 동기들의 전시는 어디까지나 상상으로 구현한 작품이었다.
이종이 교수의 전시품들은 달랐다.
정말로 출시한 작품들.
그것도 아주 크게 성공한 작품들의 시제품들.
“이것도 이 작가님이 만든 거였어?”
“교수 정도 되면 다르긴 다르네.”
“우리 아빠 세대 물건 아니야?”
“역시 스승이 잘나야 제자도 잘나는구나.”
관객들도 심히 당황하는 듯했다.
그리고 또 신기한 점이 있었다.
‘실력이 늘었네.’
과 동기들의 작품들이 크게 좋아졌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를 갈고 나왔다는 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스스로 타협한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아니다.
가진 능력의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여, 정말 최선의 결과물을 내놓았다.
그 사실이 눈에 잡힐 듯 훤했다.
‘역시 사람은 한 번쯤 깨져봐야 는다니까.’
꼰대 같은 발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기도 했다.
미대생이라면 누구나 겪는 충격이 있다.
‘나는 정말 잘난 사람이고 어디서나 천재로 인정받는 사람인데, 막상 대중에게는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는 거지.’
나는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대중을 멍청이 취급하고 물러서면 끝이다.
내 작품이 모자라서 이렇게 되었다는 걸 인정하고, 어떻게 해야 나아질 수 있을까 방법을 모색해야 나아갈 수 있다.
자기 자신을 깨부숴야 했다.
물론 오사무엘 같이 무한한 자신감으로 될 때까지 들이박는 타입도 있다.
“여기 냄새나는 것 같아.”
“껌으로 작품을 만들었다네.”
“······ 예쁘긴 한데 소장하고 싶지는 않다.”
적절한 평가다.
눈으로만 보고 싶다.
가능하면 냄새 차단 마스크를 쓰고.
아무튼, 전시는 종일 성황을 이루었다.
3층짜리 전시장으로 규모를 대폭 늘렸기 때문일까.
적어도 관중들이 예전처럼 꽉꽉 막혀가며 전시를 하진 않았다.
물론 적당히 붐비기는 했다.
“지난 전시는 입장도 못 했는데 그때랑 비하면 지금이 훨씬 낫다.”
“응, 줄이 생각보다 빨리 빠지더라.”
입장한 것 자체로 기뻐하고 있다.
‘저 정도면 충분하지.’
내 얼굴에도 기쁨의 미소가 맺혔다.
그렇게 전시를 시작하고 첫 주말.
관람객 수는 2만을 돌파했다.
역대 한국 최다 기록이었다.
그렇게 첫 달.
관람객 수는 30만 명을 돌파했다.
마찬가지로 역대 한국 최다 기록이었다.
언론은 기뻐하며 매일 같이 기사를 쓰기 바빴다.
[이재하, 그가 전시의 역사를 새로 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미술관으로 향하는가]전시가 시작되고 삼 개월 뒤.
[이재하 앙코르 전시, 100만 명 돌파]전생을 통틀어 한국 내 개최된 미술전 중 최고 기록을 돌파했다.
이제 사람들은 기뻐하기에 앞서 숨을 죽였다.
이 전시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어떤 기록을 세울 것인가.
거기에 더 중점을 두었다.
[이미 여덟 번 다녀왔는데, 아예 열 번 채워야겠다] [역사에 남을 전시]전시가 끝난 다음 해 1월.
총 방문객 수는 123만 명.
하루 평균 1만 명을 조금 넘겼다.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손에 꼽을 기록이었다.
< 역대급 > 끝
ⓒ 이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