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459
내가 그의 삶을, 그 후손들의 삶을 망쳤으니까.
그에게 약속되었던 유산을 도둑질해갔으니까.
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일으켜세웠던 상체를 그대로 바닥에 추하게 늘어뜨린다. 들것에서 떨어져 피범벅이 된 채 바닥에 늘어진다.
나는 천천히, 그의 눈을 감겨주며 말했다.
“···시도는 좋았어. 네 정체를 알기 직전까지 흔들렸으니까.
그리고 미안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올렸고.
“으, 으아악!! 이게 뭔··· 파리스 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눈을 뜬 다음, 다시 저 성벽 바깥에서 들려오는 혼란에 찬 웅성임을 듣는다.
성벽 바깥의 아군들은 살아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으니 이제 그 다음 용건을 처리할 때가 왔다.
나는 클레이다이오스의 시신이 놓인 자리 옆에 얼음으로 된 대낫 한 자루가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거기에 손을 대려다··· 불길한 기분이 들어 멈추었다.
카산드라와 함께 확인해봐야 할 물건 같았다.
“이 물건, 내 방에 가져다놓게. 절대로 직접 손을 대서는 안 되네. 시신은 성벽에 잘 보이게 걸어놓고.”
“아···알겠습니다.”
“···그리고, 헬레네 님은 어디 계시지?”
내 말에 병사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저 굳게 닫힌 문을 가리킨다. 역시 여기에 헬레네를 실어놓고서 도로 나가던 중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들에게 감사인사를 남긴 뒤 문을 열었다.
그러자 멍하니 상체를 일으킨 채 금발을 휘날리는 여인이 보였다. 그녀가 나를 돌아본다.
왼쪽 뺨에, 작은 화상이 있었다. 그녀는 그쪽을 가리키며 웃었다.
“···이건 흉터가 남겠죠?”
나는 대답하는 대신 의자를 끌어다놓고 침대 옆에 앉았다. 그녀는 고통에 숨을 헐떡이면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겠네요?”
“···.”
“여기 온 걸 보면 우리가 이겼겠죠.”
“아직 끝나진 않았지만, 이긴 거나 다름 없습니다.”
“부탁이 있어요.”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뭔 줄 알고요.”
“뭔 줄 압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당신을 가장 잘 아니까.
“···.”
“···.”
“내가··· 죽도록 도와주지 않을 건가요?”
“예.”
“당신의 품에서··· 죽을 수 있도록?”
“예.”
“왜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느리지만, 단호한 뜻을 보일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사람은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게 내가 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에요. 내가 택했다고요. 알아줄 거잖아요. 나는, 나는···.”
꼿꼿하던 그녀의 허리가 한순간 구부려진다. 그녀는 슬픔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가린다.
“나는 그저, 내 삶을 완성하려던 것뿐이에요. 나의 목적을 위해서.”
“삶은 무슨 조각품이 아닙니다. 완성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사는 겁니다.”
“하지만, 내 삶엔··· 당신이 없는데?”
“제가 없어도 당신은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 없이 살 수 있으니까요?”
“···.”
“난, 나는···”
“그래도.”
나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죽지 마십시오.”
나는 누가 스스로 죽는 꼴을 또 보고 싶지 않았다.
“권력을 쟁취하고 싶다면 살아서 하십시오. 뭐든, 살아서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얻는 건?”
“그건 빼고요. 그건 어차피 죽어서도 할 수 없어요.”
“하, 하하하···.”
“···.”
“···.”
침묵.
우리는 한참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내가 바라는 한마디만 해줘요.”
“···.”
“어서요. 그럼 잘 살아보려고 할 테니까.”
나는 망설였다.
아주, 아주 길게 망설였다.
그리고 결국 입밖으로 냈다.
“···사랑합니다.”
그 말을 들은 헬레네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리며 울음을 막았다. 가슴에 단검이라도 박힌 것처럼.
그리고는··· 웃었다.
아주 기쁜 듯이.
“그런데, 좋아하지는 않죠?”
아.
“네.”
“이제 가도 좋아요.”
“안녕히 계십시오.”
“잘가요. 한 번만 더 말해봐요.”
“사랑합니다.”
“나도요.”
“···.”
“같잖은 화살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라서.”
“···가,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나는 문을 닫고 나섰다.
문 너머에서 나는 그녀가 울고 있을 것을 알았다. 웃으면서 울고 있을 것을 알았다.
아마 그녀도 내가 그럴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냥
외전-열네번째 스타시몬
넓은 복도로 나서니 장로들과 병사들, 시종들이 여기저기로 뛰어다닌다. 누구는 피투성이였고 누구는 땀투성이가 된 채 움직이는데 누구 하나 바빠보이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이 싸움에 도시의 명운이 걸렸으니까.
그리고 곧···
“우와아아아아!!!!”
“만세!! 스파르타 만세!! 트로이아 만세!!!!”
“적들이 물러갔다!! 적들이 패배하고 있다!!”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보이는 사람에게 죄다 입맞추고 끌어안던 이들이 뒤늦게 나를 알아보고 기겁하여 물러서기도 한다.
“파, 파리스 님? 어째서 이곳에···.”
“여왕을 봬러 왔었네. 적들은?”
“저도 부상병을 돌보고 있던지라 듣기만 했는데··· 가, 갑자기 그 기이한 힘을 잃었다고 합니다.”
역시나.
신들이 내려준 권능을 부리던 것은 클레이다이오스 한 사람이었고 그가 죽자마자 권능은 풀어헤쳐졌다.
자신들의 완력이 줄어드는 동시에, 돌아보니 자신들의 지휘관마저 사라져 있으니 도리아인들과 켄타우로스들이 제정신을 차리고 전투를 지속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구심점도 별로 없던 이들에게 승리에 대한 희망마저도 앗아갔으니 그들에게 감투정신 따위 남아있지 않겠지.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면 아카이아 각지에서 몰려온 지원군들이 남은 오합지졸들을 해치우리라.
이곳에서의 싸움은 끝났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도 않았고, 클레이다이오스를 지원했던 가이아와 다른 존재들의 음모가 여기까지인지도 의문이지만.
그래도 스파르타는 여전히 무사했다.
스파르타의 여왕도.
그러니··· 나도 이제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겠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춤추고, 노래하고, 맛있는 걸 요리해먹고, 하잘것없는 주제로 열을 올려 잡담하면서.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방금까지 혼란스럽던 마음이 조금 달래지는 듯했다.
헬레네는 잘 살 것이다. 이제는 죽을 생각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도 그녀를 위해 잘 살아나가면···
-툭.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