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68)
흑백무제 1368화(1368/1368)
1368화. 스러지는 세상 (9)
“저곳이다. 저곳에서 진동이 느껴져.”
“예?!”
“하지만 저곳은 안 되겠어. 힘의 충돌이 너무 크다. 아마 무극수끼리 싸우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광혈교에서도 무극수가 왔다는 소리야. 십중팔구 소교주겠지.”
“저는 무슨 말씀인지…….”
“차라리 오른쪽으로 가자. 저쪽 전장에는 우리가 필요할 거야. 좌측보다 충격파의 밀도는 낮지만, 힘겹게 싸우고 있는 것 같아.”
“…….”
“당가도 곧 올 테니 무리해서 싸울 필요는 없어. 아마 저곳에 있는 사람은 패율 장로님일 터, 뒤만 든든하게 받쳐 줘도 적이 남하하는 걸 막을 수 있을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아가씨를 따를 겁니다.”
“고마워. 가자.”
“예!”
파아아악!
도도한 신법은 마치 학(鶴)을 연상케 했고, 꼿꼿하게 선 허리는 대쪽 같은 선비의 정신을 보여 준다.
마치 연가의 천종운행비를 보는 듯했지만, 그보다 더 유연하고 부드러운 흐름이 특징이었다.
중원에서 무공보다 진법과 전술로 더 이름을 떨친 명문가의 병력 삼백이 전장으로 진입했다.
강호 무림에서 사천의 위험을 가장 빨리 꿰뚫어 본 여인.
흑암의 전포를 두르고 돌진하는 그녀의 얼굴은 군사(軍師)보다 전사(戰士)에 가까웠다.
* * *
얼마나 싸웠을까.
쩌저저저정!
점점 막아 내기가 어려워진다.
‘제기랄.’
패율은 저도 모르게 쌍소리를 뱉을 뻔했다.
‘쪽팔려 죽겠네.’
한 놈도 놓치지 않겠다고, 도망치지 말고 시원하게 싸우자고 호기롭게 외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 모양인지.
‘이놈들, 무섭게 발전하고 있다.’
개개인의 내공이나 체력이 더 늘어난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몸이 더 단단해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놈들을 죽이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실상 반 각 전 셋을 더 쳐 죽인 이후로 단 하나의 사상자도 내지 못했다.
‘정말 강시가 맞나? 이제는 숫제…….’
전투 부대가 따로 없다.
패율은 여전히 길목을 잘 지키고 있었다. 한 명이 담당하기에는 넓은 범위였지만, 그의 놀라운 무공과 대처 능력, 실전 감각이 그것을 가능케 해 주었다.
그에 맞서 흑시들의 전투 능력도 점점 발전했다.
삼각진으로 돌격해 큰 피해를 본 흑시들은 셋에서 다섯의 소진(小陣)을 형성하여 세 방위에서 패율을 압박해 왔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누구의 지휘도 없이 자기들끼리 소진을 형성해 덤빈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진만 형성했을 뿐, 진끼리의 연계는 제대로 되지 않았다. 패율은 단숨에 소진 네 개를 박살 냈다.
그리고 이어진 게 지금이다.
세 명으로 이뤄진 소진을 완전히 박살 내 버린 이후, 흑시들은 진끼리 연계하며 차분하게 패율을 압박하고 있었다.
‘놈들의 변화도 놀랍지만, 진짜 놀라운 건 이 진법이다. 소형 전투진이 이렇게까지 정교하다니…….’
좌우 측면을 동시에 공략하면서도 물러날 여지를 남겨 두고, 중앙에서 침투할 진을 위해 끝까지 목표물을 물고 늘어진다.
단순히 외공에 특화된 조법만을 구사하는 게 아니라 허리춤에 달린 작은 칼까지 뽑아 휘두르는데, 그 무공도 초일류였다.
무공의 위력이 상승한 게 아님에도 크나큰 어려움을 느낀다. 마구잡이로 달려들어 죽이기 쉬웠던 경험이 있어서 더더욱 난감해진 기분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건 정말 대단한 거다. 무공 경지가 상승한 것도 아니고 내공이 깊어진 것도 아닌데, 그저 진법의 연계만으로 싸움이 어려워졌으니.’
점창의 젊은 고수들도 이렇게 자연스럽고 위력적인 소진 전투는 못할 것이다. 중견 고수들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점창의 소진은 독립성이 강해 서로의 연계가 불가능하다.
이 정도면 소림의 소나한진(小羅漢陣)에 버금가는 활용성을 자랑한다고 봐도 좋았다. 진 자체의 위력은 나한진이 우위에 있겠지만, 유연함과 활용도는 이쪽이 더 대단한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음험하다. 마도의 진법이야. 하지만…… 마도의 진법이 이렇게까지 수준 높을 줄이야.’
중앙 소진의 좌장이 힘차게 칼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어엉!
패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제껏 받아 본 적 없는 위력이었다.
기세 때문이 아니라 발경 자체가 거세졌다. 내공도, 체력도 그대론데 어찌 이럴 수 있을까.
‘기공전이!’
심지어 동문의 심법을 익힌 자들만이 가능하다는 기공전이까지 선보인다. 진을 이루는 무인들끼리 내공을 전달하여 한 사람의 공격력을 배로 끌어 올리는 전법이었다.
파바바박!
좌우에서 몰아치는 공격이 한층 거세졌다.
더 강해진 공격을 막았을 뿐, 딱히 더 많이 물러난 것도 아니었다. 한데도 좌우에서는 정확히 틈을 읽고 공격에 나섰다.
‘나를 읽고 있다.’
패율은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이 괴물들은 더 이상 괴성을 지르지도, 병에 걸린 짐승처럼 침을 질질 흘리지도 않았다.
저 멀리 후방에 있는 놈들은 여전히 기괴한 소리를 냈지만, 패율과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흑시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괴이한 눈을 고요히 빛내며 목표물을 노려본다. 나아가 목표물과 동료들의 싸움을 보며 조금씩 움직여 자리를 잡아 가는데, 즉각적으로 전술을 배워 가는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안 돼.’
패율은 결단을 내렸다.
‘당가 병력이 올 때까지는 버텨야 한다. 하지만 이놈들에게도 생각할 여지를 줘선 안 돼. 조금 아깝더라도 쓸 땐 써야 한다.’
우우우우웅!
북명신공에서 천룡무상심법(天龍無上心法)의 진기로.
어둡고 치열하며 무거웠던 기운이 밝고 웅혼한 기운으로 바뀌었다.
흑시들은 그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했다. 대응 이전에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패율이 크게 검을 휘둘렀다.
후우우우웅!
커다란 바람이 흑시들을 스치며 나아간다.
묵직하지만 상쾌한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어느덧 패율의 좌검에 모여 풍성한 검력을 끌어내고 있었다.
지나친 내공 소모를 막기 위해 봉인해 두었던 점창파의 절정검법.
천룡무상검법(天龍無上劍法)이 회풍검의 전사경을 싣고 나아갔다.
콰르릉! 퍼어어억!
무자비한 검력에 중앙 소진을 이룬 흑시 둘의 몸뚱이가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동작이 커서 빈틈이 드러났다.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좌측 소진의 흑시들이 칼을 휘둘렀다.
치리리링! 피슉!
두 구의 칼은 막았지만, 마지막 한 구의 칼은 기어이 패율의 어깨를 스쳤다.
‘얕지 않아.’
깊지도 않지만 얕지도 않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손톱이 아니기에 독기가 깃들어 있진 않았다는 것이다.
우우우웅!
단창에 기봉검의 흐름을 담아 휘둘렀다.
퍼억! 퍼억!
대붕의 날갯짓과도 같은 무공이었다. 일격, 일격에 실린 남다른 무게감에 흑시 두 구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사사삭!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옆구리와 허벅지를 긋고 지나갔다.
어깨보다 얕은 상처다. 무시해도 될 만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동작이 크고 내공 소모가 많은 무공들을 계속 구사하다 보면 이런 상처를 수도 없이 입을 것이다. 당연히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이 떨어질 것이며, 진기로 지혈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럼 패배한다.
‘알지만.’
콰앙!
힘찬 진각과 함께 단창을 넓게 휘둘렀다.
콰콰쾅!!
내공이 쑥쑥 빠져나간다.
단창 끝에서 올올이 퍼져 나가는 천룡무상검의 검력이 물결과도 같은 파장을 일으켰다. 무너진 소진을 다시 만들기 위해 흑시 몇몇이 끼어들었지만, 그대로 밀려나 버렸다.
그 순간, 패율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쿠웅!
또 한 번의 강력한 진각.
대지의 힘을 전신으로 끌어 올린 그가 좌검을 쏘아 내듯 휘둘렀다.
관일검(貫日劍)이었다. 관일공의 예선관일(羿仙貫日)이 펼쳐졌다.
쩌저저저저저정!
좌검이 겨눠진 곳에 서 있던 흑시 일곱 구의 몸통에 구멍이 뚫렸다.
관일공에서 그나마 내공 소모가 적은 초식이었다. 기공 발산 이후 수십 줄기로 퍼져 나가는 관통 경력이 없는, 오직 직선의 섬격(閃擊)으로 경로상의 적을 멸살하는 초식이었다.
쩌어어어엉!
용케도 천룡무상검의 검력에서 벗어난 흑시 둘의 공격은 단창으로 막았다.
‘……!’
패율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한순간 쏟아 낸 내공 때문에 대비를 제대로 못 했다. 놈들의 공격이 올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위력이 더 강했다.
치리리링!
단창을 횡으로 휘둘러 놈들을 밀쳐 내고 곧장 분광검을 펼쳤다.
쩌저정!
회풍검의 힘을 담아 떨친 분광검에 흑시 하나의 목이 잘려 나가고, 다른 흑시의 목에는 작은 금이 갔다.
‘젠장!’
본래라면 두 놈 모두 죽었어야 할 일격이었다.
검에 탄력이 줄어든 탓이다. 내공 소모가 심한 초식들을 쓰자 연환 동작에 빈틈이 생기고 쾌검에 실린 힘이 감소했다.
‘어쩔 수 없다.’
쩌저저저정!!
그나마 다행인 건 흑시들의 손톱 공격은 단 하나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상황이 좋아진 건 아니었다.
‘……!’
천룡검과 기봉검을 수도 없이 쏟아 내고, 기회가 포착될 때는 관일공을 펼쳤다.
벌써 내공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홀로 괴물 같은 강시들을 절반 가까이 섬멸한 그의 무용은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파바바바박!
패율의 눈이 흔들렸다.
‘이 새끼들이?’
오직 패율을 뚫고 지나갈 생각이었던 흑시들이 일순 전술을 바꾸었다.
세 개의 소진 뒤쪽에 도열해 있던 흑시들이 이 열 종대로 나뉘더니, 갑작스레 절벽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팍! 파바박! 콰득!
기괴한 몸놀림이었다.
수직 절벽을 양손과 양발을 이용해 올라가는데, 벽에 그 단단한 손톱을 마구 찍어 가며 이동한다.
한데도 이동 속도가 상당했다. 벽호공(壁虎功)과 비슷해 보였지만, 그보다 훨씬 우악스럽고 빠르다.
‘여기까지인가.’
놈들이 좌우 절벽을 타고 진입하면 패율로서도 막을 수가 없었다.
‘후방으로 더 물러나도 의미가 없어. 벽을 타기 시작했다면 협곡 위로 이동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정도면 잘 싸웠다.
몸은 피범벅이 되었고 내공도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그나마 체력은 남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상대하다간 놈들을 섬멸하기 전에 내가 죽을 것이다.
마침내 패율은 결단을 내렸다.
‘그렇다면 최대한 많이 쳐 죽이고 뒤따르겠다.’
그때였다.
‘……?’
흑시들의 사나운 기파를 맞이하면서도 패율의 날카로운 기감은 또 다른 기운을 읽어 냈다.
‘이건?!’
패율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당가가 아니다?’
처음에는 당가 사람들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고아하고 유장한 진기의 흐름은 당가의 것이 아니었다. 당가 특유의 독기 어린 사나운 기파와는 완전히 상반된 기운이었다.
그러나 강했다.
단단하게 뭉쳐서 진격하는, 어느 문파에 가도 정예 병력이라 대우받을 전력이 후방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설마!’
패율은 이 기운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무림맹에서.
“지현죽단(智賢竹團)은 전원 파진돌격(破陣突擊)의 형(形)으로!”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참으로 아름답다.
전장에 드리워진 여장수의 음성은 묵비의 그것과 달리 더 날카롭고 단단했다. 그러면서도 놀라운 투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콰앙!
전방의 흑시를 뒤로 물린 패율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 반가움이 어렸다.
“제갈세가!”
그렇다.
무궁한 변화를 일으키며 돌진하는 그들은 호북의 명문가이자 무림맹 총군사가 수장으로 있는 제갈세가의 정예 중 하나인 지현죽단이었다.
그리고 그 지현죽단을 이끄는 사람은 저 멀리, 흑제성으로 파견된 총군사의 금지옥엽 제갈아연이었다.
제갈아연이 검을 뽑아 들었다.
제갈세가 특유의 얇고 곧은 패검(佩劍)이 아닌, 전장에서 쓸 법한 두툼한 철검이 살벌한 광채를 발했다.
“한 놈도 남겨 두지 마라!”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