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aired U.S. Army Marshal RAW novel - Chapter (217)
217_거인의 포효 (3)
호치민.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 겸… 빨갱이.
단순히 빨갱이를 믿어도 되냐의 문제는 아니다.
원 역사에서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소련 엿 먹이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던 미국은 아프간 무자헤딘들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훈련도 시켜주고 무기와 탄약도 듬뿍듬뿍 챙겨줬다.
그리고 그때 무럭무럭 자라난 무자헤딘들은 알라의 이름으로 쌍둥이 빌딩에 비행기를 꽂았고, 미국의 중동 전략에 짙은 먹구름을 끼얹어버렸다.
내가 지금 호치민에게 투자를 하면 훗날 이게 돌고 돌아 빅―투자대박은커녕 업보로 되돌아오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나?
내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지만, 꼴에 짬 좀 먹었다고 혓바닥은 알아서 노닐고 있었다.
“미리 분명히 선을 그어 놓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조선인 김유진과 미국인 킴 준장은 별개의 인물이며, 미국인 킴 준장의 입장은 절대 미합중국 정부의 의사가 아닙니다.”
충분히 불편해질 수 있는 말을 해놓았음에도, 그는 허허 웃기만 할 뿐이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저 역시 두 사람을 분리시켜야겠군요. 예전에 장군을 뵀던 공산주의자 응우옌아이꾸옥과 현재 베트남 무장독립단체를 이끌고 있는 애국자 호치민 또한 별개의 인물입니다.”
이건 환영할 만한 이야기네. 이러면 이야기가 편해지지.
“그러면 여기에 네 사람이 있는 셈이군요. 어디 한번 서로의 의견을 잘 조율해봅시다.”
“하하. 모두가 웃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복잡하게 머리 쓰는 일엔 소질이 없으니 제가 필요한 것들 먼저 쭉 말씀드리겠습니다.
킴 장군은 쪽발이들과 싸우고 싶지만, 아마 단기간 내에 미 육군이 직접 투입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따라서 중국의 장개석을 위시해 일본과 싸울 ‘친구’를 찾고 있습니다.
반면 김유진 씨는… 일본과의 싸움에서 조선인의 임시정부가 무언가 공을 좀 세웠으면 좋겠다고 여기고 있죠. 혹시 이 둘에게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내 물음에 호치민은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나는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꺼내 물었다.
“우선 저희는 프랑스건, 일본이건, 아니면 중국이건 관계없이 베트남의 자주독립을 억누르는 세력이라면 모두 타도 대상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이제이 또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고요.”
“프랑스를 물리치기 위해 일본과 손잡을 수 있단 뜻입니까?”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지요.”
벌써 머리가 아파진다. 나만 올 게 아니라 국무부 사람이라도 하나 데려와야 했나?
하지만 의외로 복잡한 정치 논리 따위는 없었다.
어차피 내가 원하는 건 중국으로의 군수물자 지원이었고, 가능하면 그 지원의 형태가 ‘임정에 전차 택배 부치기’면 더더욱 좋겠다 정도.
내가 랜드리스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남은 건 민수시장에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총기와 탄약. 그리고 포드 트랙터 컴퍼니를 통한 일부 구형 기갑장비 정도뿐.
하지만 내가 개인적 입장에서 제공해 줄 수 있는 것들이 바로 호치민이 가장 원하는 것이었으니, 서로 좋다 좋아 소리만 죽죽 나오고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풀렸다.
시발, 내가 언제 프랑스뽕이 가득했다고 프랑스를 챙겨주겠냐. 어차피 걔들 원 역사에서도 영혼까지 탈곡당한 뒤에 미국에 똥덩어리 토스한 놈들이잖아. 호치민이 구형 전차 몇 대 좀 갖고 논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가 있겠어?
나는 일본제국이 착취나 강압 없이 평화롭게 동남아시아에서 공존 공영할 거라는 기대는 정말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기에, 혹시나 호치민이 일본과 한패가 되어 총부리를 돌리리라는 가정 따위 하지 않았다. 그게 되면 일본이냐? 갓본이지?
다만 문제가 있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전차를 중국으로 보낼 방법이 없습니다.”
“땅굴 같은 거라도―”
“말씀드린 대로, 아직 저희는 그럴 여력이 부족합니다.”
베트남전 이야기에 항상 언급되곤 하는 ‘수백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베트콩 땅굴’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프랑스인들이 베트남에 정성껏 지었던 항구는 전부 쪽발이들이 낼름 다 먹었고, 밀수 역시 어렵다.
나는 지도를 보다 문득 아직 일본의 마수가 닿지 않은 지역에 시선을 옮겼다.
“태국은 어떻습니까?”
“태국은 중립을 지킬 것 같습니다만….”
“그건 제가 한번 이야기해 보지요. 만약 태국에 전차를 보낼 수 있다면, 거기에서 북상해 수운이나 육로로 전달을 한다거나….”
“정확한 루트만 나온다면 한번 확인은 해보겠습니다.”
이웃나라가 으레 그렇듯 호치민 또한 태국에 대해 와! 친한 이웃! 같은 감상은 딱히 없는 모양이었지만, 일단 써먹을 수 있는 건 전부 써먹어야지.
물론 영국령 버마로 보내는 방법도 있지만, 바로 그 버마 로드는 지금도 일본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 어지간하면 피하고 싶다.
“태국 측에 문의를 해본 뒤 즉각 연락드리지요. 이와 관계없이 지원은 해드릴 예정이니 그 부분은 걱정 마시지요.”
“감사합니다. 제 동지 몇을 남겨놓고 가겠으니 그들에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니다. 저 또한 최대한 빨리 확인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웃으며 악수를 나눈 뒤 헤어졌고, 얼마 후 미국 국적의 화물선들이 분주히 태국을 향해 출발한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일이 이렇게 풀리기까지는 여러 과정들이 있었다.
나와 태국 사이의 인연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정도.
대전쟁, 아니, 이제는 당당하게 제1차 세계대전이란 표현을 써도 되는구만. 1차 대전이 끝나고 한번 가서 의전 좀 뛰어주고, 훈장도 하나 받았었다. 사실 전쟁 끝나고 아시아 각국과 온갖 단체에서 받은 게 어디 한 트럭이어야지.
하지만 꼴랑 훈장 좀 받았다고 쫄레쫄레 태국 대사관에 달려가서 ‘제 전차 택배배송에 협조해주시면 안 될까요?’ 같은 소릴 할 순 없다. 호치민의 말로는 태국도 요즘 친일 테크트리를 타느라 분주하다고 하더라고.
따라서 내 움직임은 당연히 민간 영역에 집중되어야 했다.
혹시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옛날 옛적, 내가 일본에 파견 나가기 전 임정과 연락할 때 썼던 한 상사가 있다. 비센테 선배의 친구가 근무한다던 곳.
내 직급도 올라가고 봐야 할 눈치도 늘어 자연스럽게 연락은 흐지부지되었었는데, 오랜만에 그곳과 다시 접선해 태국으로의 무기 수출을 의뢰했고.
“이만한 물자를 수송하려면 결국 당국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요? 역시 어렵나….”
“어렵다뇨? 뽀찌 좀 주면 해결될 듯합니다.”
도대체 무슨 딜이 있었는진 잘 모르겠지만, 태국의 몇몇 높으신 분들과 태국군이 운송될 물자의 ‘일부’를 스리슬쩍하는 형식의 기적의 계약이 성립되었다.
정리하면.
1. 미국에서 화물을 보낸다.
2. 태국 항구에 화물이 선적된다.
3. 세관을 위시한 태국의 높으신 분들이 살짝 맛을 본다.
4. 태국군은 싱싱한 부릉이 몇 대를 좀 챙긴다.
5. 호치민 씨와 그 친구들이 태국 국경에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거쳐 중국으로 밀수를 해주고 또 한몫 챙긴다.
6. 임정이 물자를 수령한다. 와!
이게 대체 무슨 다국적 신디케이트냐. 누가 보면 아편 장수 같잖아.
아무튼 택배는 부칠 수 있게 되었다. 택배가 아니라 무슨 기나긴 뽀찌열차가 꼬라지가 되고 말았지만, 원래 배송 중 손상이 일어날 수 있으면 포장도 좀 과다하게 하고 물량도 주문받은 10개가 아니라 12개를 보내고 다 그러는 법이다.
태국이 완전히 일본 편에 붙는 날이면 이 장사도 접어야겠지만, 안 보내는 것보단 낫지 뭐.
다만 마셜에게 걸리면 백퍼 혼난다. 아니, 혼나는 게 아니라 쪼인트 까인다… 숨겨야지. 꼭꼭.
* * *
유진 킴이 캘리포니아에서 홍보대사 임무는 마음이 콩밭에 가 슬렁슬렁하면서 밤거리는 열심히 싸돌아다닐 무렵.
“군에 가겠다고? 네가?”
김유신은 드물게도 조카를 향해 목소릴 높이고 있었다.
평소와 무척 다른 삼촌의 반응에 당황할 수도 있으련만, 헨리는 제 아버지한테 배웠는지 사뭇 뻔뻔스럽게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네.”
“어째서?”
“가야 하니까요. 아버지가 저토록 거리에서 입대를 독려하고 있는데, 제가 안 가면 얼마나 우습겠어요?”
[유진 킴의 아들들은 어디에 있는가? 충격적인 진실!]이라는 헤드라인이 굵게 박힌 신문을 만지작거리며 헨리가 말했다.“그 망할 신문은 저리 치우고 이야기하자.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다.”
“이게 문제의 핵심이잖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그러면 입대를 해도 좋다.”
유신의 말에 헨리가 깜짝 놀라려 할 때, 그가 덧붙였다.
“네 아버지랑 상의해서, 워싱턴 D.C의 행정 업무를 보는 보직으로 입대하면 되겠구나.”
“싫어요.”
“왜? 설마 후방 근무하는 군인은 군인답지 못하단 소릴 하고 싶은 게냐?”
헨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신은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우리가 괜히 널 샌―프랑코 에어로노틱스에 몇 달이고 처박아 둔 줄 아니? 네가 모병소에 들어가 봤자 네가 총 들 일은 없어. 국가 방위에 필수적인 연구를 하는 연구인력으로 분류될 거거든. 연구자가 되든 행정가가 되든 징집을 피해 도망가는 게 전혀 아냐.”
“그럼 그때 절 부려먹은 게―”
“일개 학부생이 대관절 뭐 얼마나 도움이 된다고 회사에서 써먹었겠니? 네 아버지랑 내가 서로 상의해서 준비한 일이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왜 남의 진로를 저들끼리 알아서 다 세팅해 둔단 말인가. 한번 물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그냥 간판만 걸어두면 향후에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요.”
“죽는 것보단 훨씬 나으니까. 집안 물려받을 장남이 사지로 나아가면 대체 어쩌란 말이냐?”
“아버지는 잘만 나가지 않았습니까.”
“네 아버지는 가진 게 없으니 몸으로 때워야 했고! 그때가 벌써 이십하고도 몇 년 전인데 그때랑 비교를 하고 있냐! 그리고 김유진이가 어디 보통 인간이냐? 저승사자가 찾아와도 좆이나 까 잡수라고 할 인간인데.”
다른 건 모르겠지만 마지막 말엔 확실히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좀… 좀 많이… 아무튼 그랬으니까.
“하지만 전 그 저승사자한테 가운뎃손가락 치켜들 사람의 뒤를 이어야 합니다. 후방에서 탱자탱자 놀면… 과연 제대로 이어받을 수가 있을까요?”
“…….”
유신이 대답하지 않자 장내엔 묵직하게 침묵이 내리깔렸다.
그는 대신 위스키를 잔에 가득 따라 쭉 들이켜더니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너는 왜 우리 집안이 싸움 하나 없이 잘 굴러가는지 모르겠니?”
“네?”
“다른 집안은 보면 유산 싸움이네 경영권이네 하면서 형제자매끼리 등에 칼 꽂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어째서 우리 집안은 이렇게 조용할까 생각해 본 적 없니. 우리 집안 장손?”
없었다.
그냥 윗대 분들끼리 다 알아서 정리했겠거니 했지, ‘왜’를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애초에 이 집안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그 중압감을 떨쳐내는 것부터가 어마어마한 일이었으니까.
“망할 형이 웨스트포인트에 갈 때. 아니지. 조선에서 혈혈단신으로 건너온 부모님이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우리 집은 이미 왜놈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네.”
“왜놈들만큼 이간질에 능한 종자는 이 세상에 없어. 지난 대전쟁이 끝날 무렵 우린 독립에 뜻을 둔 조선인 중 가장 부유한 집안이 되어 있었고, 놀랄 만큼 찬란한 명예 또한 쥐고 있었지. 그러면 어디 뻗어오는 마수가 한둘이었겠느냐?”
유신은 수십 년 전의 과거를 떠올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하루하루가 작두 타는 것처럼 살벌하던 날들.
도저히 기회를 걷어찰 수 없었기에, 그 어떤 조선 사람도 이런 천우신조를 손에 쥔 적은 없었기에 아득바득 전진해 나가야만 했던 나날들.
그렇게 동네에서 주먹다짐으로 유명하던 애는 전쟁영웅이 되었고, 학교나 열심히 다니던 애는 수많은 종업원을 거느린 기업가가 되었다.
“이 집안의 분열은 조선인이 잡은 마지막 기회 또한 날아간다는 걸 뜻했다. 싸워? 재산을 다퉈? 죽어서 역사 앞에, 선현들 앞에 무슨 면목으로 서려고 그런 짓을 하겠냐. 다른 건 몰라도 쪽발이들 좋을 짓은 결코 할 수 없었으니 말이야.”
“그랬군요.”
“그래서 나는 무심코… 형이 그토록 노래를 불러대던 미일전쟁이 정말 목전으로 다가왔으니, 조선이 독립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너무나 길고 긴 싸움이었다.
인생을 다 바친 싸움이 이제 절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신은 마시다 죽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쉴 새 없이 잔을 채웠다.
“조선이 독립되면 그거로 끝이라고 무심코 생각했다. 정말 무심코 말이야. 소파 선생 구연동화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의 목표는 달성될지언정 너희들의 인생은 이제 시작일 텐데 말이야.”
“그러면….”
“정 목숨 걸고 싶거든, 네 알아서 해라. 내가 말려봐야 몰래 강행할 것 같으니.”
“감사합니다!”
“대신, 너무 죽을 장소로 가진 말고. 네가 죽는 순간 네 동생들과 조카들이 이 집안을 토막토막 낼 미래가 뻔하지 않느냐.”
헨리는 그 말에 멈칫했다.
그냥 물러야 하지 않을까? 역시 최전방은 조금 그런가?
그 고민이 얼굴에 다 드러났는지, 유신은 키득댔다.
“장손의 무게가 묵직한가 보구나.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거라.”
헨리가 떠난 후, 유신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옛말에 씨도둑질은 못 한다고, 정말 부자가 아주 똑같구만.
솔직히 김유진도 커티스 의원이 전쟁터 못 가게 막는데도 아득바득 기어나갔잖아. 업보려니 생각해야지, 누가 누굴 막아?
“밖에 누구 있나?”
“예, 회장님.”
“우리가 지원하던 항공학교 말일세.”
“예.”
“거기 졸업자들에게 전부 연락 돌려서, 파일럿으로 종군할 의향이 있는지 확인 좀 해보게.”
기왕 군에 간다면 혼자 보낼 순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