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aired U.S. Army Marshal RAW novel - Chapter (519)
519_황혼의 투쟁 (6)
1949년.
전 세계를 불태웠던 제2차 세계대전도.
그 뒤로 세 번째 전쟁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샀던 이스라엘 독립 전쟁과 국공내전도 모두 끝났다.
물론 세상 곳곳에서는 여전히 갈등이 끝없이 이어졌고, 대개 그 갈등의 끝은 무력 충돌로 귀결되었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서는 공산 반군의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 수카르노와 아나스타시오 모두 이 반란 진압에 골몰하고 있었다.
베트남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향후 국가의 정치체제를 묻는 국민투표가 시행되었고, 그 결과 프랑스 제4공화국을 본따 내각책임제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여전히 옛 식민지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프랑스는 첫 목표였던 유사한 정치체제 수립에 성공한 뒤 득의만만해져 그다음 계획, 막대한 금품 살포와 투표함 바꿔치기 등의 부정선거 종합 세트를 펼쳐 빨갱이 당선을 저지하려 했으나 유엔 선거감시단의 정중한 경고에 물러나야만 했다.
애시당초 그 선거감시단에 소련 대표단도 포함되어 있는 시점에서 프랑스의 야욕은 실현 불가였고, 프랑스의 행동이 못마땅했던 미국은 단지 펄펄 뛰는 소련을 방관할 따름이었다.
그 결과 공산당이 대중 선거를 통해 집권하는 기이한 기록을 세웠고,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캄보디아나 라오스 등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듯했다.
호치민은 베트남 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프랑스 제4공화국이 그러하듯 베트남의 대통령 또한 명예직에 가까울 뿐 실권은 그리 크지 않았으며, 얼마 전까지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여대던 공산당의 정권 장악에 기겁한 우파 인사들은 응오딘지엠의 을 중심으로 단일화된 야권을 구성해 맞서기 시작했다.
중동에서는 중동전쟁을 통해 점차 영향력을 키워나가던 군부가 기존 왕정에 실망해 혁명을 꿈꾸고 있었고, 중남미에서는 사회주의의 물결이 수면 아래에서 천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평화를 향해 나아갔다.
런던에서는 마침내 올림픽이 재개되었고, 독일은 비록 분열되었지만 저마다의 국가 체제를 수립했다.
온갖 기업들은 집안에 앉아 올림픽을 시청하라며 텔레비전을 팔아먹기에 열을 올렸으며, 가난한 나라에서조차 라디오가 새로운 언론 매체로서 대대적으로 보급되며 새로운 시대를 알렸다.
미국의 유럽 재건 계획에 맞서기 위해 소련은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를 결성했고, 거대한 공산 경제 블록을 설립해 경제적 봉쇄에 맞서고 자신들의 지상락원을 실현하고자 첫 삽을 뜨기 시작했다.
여전히 지구 어딘가에서는 총성이 울려 퍼졌지만, 경제 성장이라는 새로운 대결 또한 막을 올린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분위기가 딱히 부드러워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스크바에서 한참 떨어진 흑해 해안의 한 고급 별장은 그 어떤 시베리아의 극한지대보다도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몰로토프 동무도 총기가 흐려진 모양이군. 그렇지 않나?”
“…….”
스탈린은 점점 더 괴팍해지고 있었다.
대조국전쟁 때 어마어마한 기력을 소모해서일까, 아니면 독재 체제 특유의 행정 과부하가 그를 좀먹어서일까, 둘 모두 아니라면 독재자들이 필연적으로 빠지게 되는 정신병적 강박증일까.
그는 여전히 유능했지만, 예전처럼 열정 넘치지는 못했다.
여전히 크렘린궁 서기장 집무실의 창문으로는 새벽 내내 불빛이 꺼지지 않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집무실에 앉아 정력적으로 집무를 수행하던 서기장은 밤에 불을 켜놓을 것을 지시하고는 자리를 비우기 일쑤.
그는 자택의 소파에 푹 눌러앉은 채 술을 들이켜거나, 혹은 전국 방방곡곡 흩어져 있는 그의 별장으로 여행을 떠나 서민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기곤 했다. 어디까지나 공산 국가 수준에서의 호사일 뿐이었지만.
“그렇지 않냐고 물었네만.”
“그렇습니다, 동지. 몰로토프 동지의 자아비판이 필요하다고 저 또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늙고 병들어 다소 민활하지 못한 감이 있지만, 그의 오랜 헌신과 충성을 보건대 금방 옛날의 정력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흐음. 하지만 그의 부인은 반역자잖나. 그가 진정으로 자아비판을 하고자 한다면 부인부터 신속히 버렸어야지.”
이제 그에겐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아니, 예전부터 즐기던 취미였지만 그 빈도가 더욱 늘어났다.
“가만히 동무들의 충고를 숙고해보노라면, 그 누구보다 늙고 병든 건 바로 내가 아닌가. 역시 물러날 때가 된 듯허이.”
“안 됩니다!!”
“서기장 동지께서 저희 곁을 떠나신다면 이 나라는 제국주의자들을 막지 못하고 파멸하게 될 겁니다!”
“어흐흐흑! 제발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동지가 곧 연방이고 연방이 곧 동지이거늘 어찌 저희를 버리시려 하십니까?”
“영원히 저희를 인도해 주셔야 합니다. 저희에겐 서기장 동지의 영도가 필요합니다!”
“다들 엄살들이 심하구만. 내가 당장 내일 죽는다 해도 동무들은 능히 이 나라를 이끌 능력이 되는 인재들이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희는 동지 없이는 벌레에 불과합니다!”
스탈린의 비밀 별장에 ‘초대’받아 함께 올 이들이라면 그들 또한 당연히 소련이라는 나라를 이끄는 정점들.
그러나 그들조차 스탈린의 한마디 한마디에 일희일비해 그의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 온갖 아양과 아첨, 애걸을 떨어야만 했다.
이 아부는 단순히 스탈린을 칭송하기만 하면 끝이 아니라는 게 더욱 악질적이었는데, 그의 변덕에 제때 대응하지 못하거나 괜히 오버해 서기장 동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짖으라면 짖어야 하고, 재롱을 떨라고 하면 재롱을 떨고, 따라오라고 하면 따라가야 하는 팔자.
다만 이러한 처지가 딱히 최고위 공직자들뿐이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적어도 그들은 이 딸랑딸랑의 보답으로 스탈린 최측근이라는 지고의 권력을 손에 넣지 않았는가.
음악을 하는 이들은 스탈린을 칭송하는 음악과 노래를 끝없이 만들고 연주해야 한다. 화가는 위대한 서기장 동지의 위업을 상징하는 장대한 그림을 그려야 하며, 언론은 스탈린 동지의 위엄과 자애로움을 전하는 것이 제1 사명이고, 조각가는 스탈린 동지의 흉상을 최대한 멋들어지게 깎아야 한다.
붉은 군대는 이 위대한 지도자를 위해 기꺼이 유일무이한 대원수 계급장을 바쳤으며, 지난 2차 대전이 끝난 후 개선식이 열렸을 때는 오직 스탈린 동지를 태우기 위한 탱크를 만들어 그가 위엄을 떨칠 수 있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
더.
더더.
“마침 올겨울은 동지께서 70세 탄신을 맞이하는 경이로운 때가 아닙니까.”
“전 세계의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 동지의 탄신을 축복하기 위해 오직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허허. 거참 이 사람들하고는. 그런 화려한 행사를 벌이는 게 정녕 우리 연방의 대의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이건 정말 멈추라는 뜻이 아니다.
더욱 그의 마음이 흡족하도록 논리적이고 인텔리하게 빨아보라는 하명.
“동지의 인도 아래, 잿더미가 된 러시아 땅이 전부였던 공산 혁명은 어느새 전 세계를 뒤덮고 있습니다. 저 제국주의자들에게 우리의 위업을 분명히 알려줄 행사는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스탈린 동지의 건재함을 보여주는 일은 외교적으로 보나 우리의 사상적 측면에서 보나 필수불가결합니다.”
“크렘린의 올바른 지시 대신 자신들만의 이단적, 트로츠키적 사상에 치우치려는 해외 공산당원들에게 무엇이 바른길인지 알려줄 기회가 필요했습니다. 동지의 탄신일 같은 좋은 기회를 허투루 날릴 수는 없습니다!”
“흐으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겠구려. 다만 쓸데없는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아무쪼록 두루두루 고려를 해서 행사를 준비하면 좋겠소.”
문득.
스탈린은 여전히 자신의 새디스틱한 욕망이 끝까지 채워지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말이오.”
“예, 동지.”
“우리의 단결과 융성함을 저들 제국주의자들에게 선보이려면, 당연히 제국주의자들이 우리를 바라봐야 할 것 아니오?”
이미 스탈린의 죽 끓는 듯한 변덕과 온갖 생트집에 익숙해진 그들이지만, 이번에는 다소 추리가 늦어졌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저 당황스러움을 보자 비로소 가슴 한켠이 따스해지고 만족감이 차오르매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가는 그였다.
“마침 저 서방에는 우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동시에 누구보다 음험한 자본주의자가 있지.”
“서기장 동지. 그 놈팽이가 온다면 이번에 또 무슨 수작질을 벌일지 모릅니다.”
“동지께서는 모든 소련 인민, 나아가 전 세계 무산 계급의 희망이자 등불이시고 그놈은 고작 나라 하나의 공직자에 불과합니다. 구태여 모스크바로 그를 부르지 않아도 동지의 위엄은 능히 그를 뒤덮고도 남습니다.”
“하하하. 다들 아부가 너무 심하구만. 하지만 나는 진심이오. 최근 그가 종횡무진하며 또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으니, 이곳으로 초대를 하면 적어도 몇 달은 발을 묶을 수 있지 않겠소?”
스탈린은 제 콧수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침 그의 생일이 나와 며칠 간격으로 있잖소? 우리 친애하는 예브게니 킴에게 옛 전우로서의 정을 베풀어 주면 참으로 재밌을 것 같구려.”
자리에 있던 모두의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예브게니 킴을 모스크바로 불러?
그냥 부르면 땡이 아니고 그놈에게 뭔가 깊은 인상이라도 남겨야 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당혹감이 퍼져나가기 직전, 스탈린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화제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하하하! 자, 이제 재미없는 일 이야기는 그만두고 한잔들 합시다! 어이, 대머리!”
“예, 동지!”
“내가 한잔 따라줄 테니 쭉 들이켜고 춤이나 좀 맛깔나게 춰봐!”
“감사합니다!”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ev)는 곧장 허리를 90도로 꺾어 경건하게 술잔을 받고, 우스꽝스럽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미 수십 수백 번은 반복된, 흔한 소련 수뇌부의 일상.
이 소련에서 ‘판단’이라는 것을 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 술 마시며 노니는 지금, 거대한 중앙집권형 기계 소비에트 연방의 업무 처리 속도는 이전에 비해 훨씬 저하되어 있었다.
* * *
대소사를 모두 만기친람하는 중앙집권 독재 국가 소련이 뇌경색에 걸렸다.
그리고 한때 미국을 뇌성마비 환자로 만들었던 인물.
“개자아아식들. 개애애애자식들아아!”
조지프 매카시.
그는 울부짖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상원의원이었고, 단지 청문회를 통해 처분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매카시가 법의 머리 꼭대기에서 노닐며 초법적인 짓을 거리낌 없이 자행했듯, 누구보다 법에 빠삭한 워싱턴 D.C. 동종업계 종사자들 또한 그에게 법에는 없는 처벌을 내렸다.
그 어떠한 언론도 그의 말을 받아적지 않았다.
의회에서 그가 발언을 요청해도 모두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우격다짐으로 발언을 하려 하면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만을 남겨 놓은 채 썰물처럼 빠져나가곤 했다.
그의 모든 요청은 기각되거나 혹은 애초에 그런 게 없던 것처럼 취급당했고, 그는 사실상 사회적으로 말살당했다.
당적이 남아 있고 금뺏지가 남아 있으면 무엇 하는가.
그의 존재 자체가 허깨비 취급당하는데.
“유진 킴은 빨갱이라고! 빨갱이!! 너희는 다! 다 속고 있다고! 씨발롬들아!!”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은 오직 애완 술병뿐.
원래부터 술을 즐기던 매카시는 이제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게 아닌 술이 사람을 마시는 지경에 이르렀고, 동료 의원들은 얼씨구나 하며 ‘알콜중독자’의 말을 더더욱 뻔뻔스레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나라는 틀렸어. 빨갱이가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 않….”
그는 제멋대로 뻣뻣해지는 이곳저곳의 근육을 신경질적으로 주무르며 다시금 위스키 병을 붙들었다.
꼭 인간이 심장이 멈춰야만 죽어버리는 건 아니었다.
기다려주신 모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보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