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61
“손님이 오셨으니 오늘 행군은 여기서 멈춰야겠군요. 저녁 식사를 준비할 테니 함께 드시죠.”
“저희는 괜찮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그럼 다과라도 준비하겠습니다. 차담이라도 나누시죠.”
“다과도 필요 없습니다.”
엘프들은 이전과 다름없이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그들은 테오도르의 호의를 거절하고 용건만 말했다.
“늪의 조언자께서 전하는 말씀을 가지고 왔습니다. 여러분에게 몇 가지를 묻고, 답변을 받아 오라 하셨지요.”
“저, 혹시 괜찮다면 그 전에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때 아우레오가 끼어들었다. 그는 엘프들을 보자마자 말을 재촉해 행렬 맨 앞까지 온 상태였다.
“샬릿과 샬린느는 잘 지내나요? 샬루를 살해하고 도망친 뱀파이어는 잡았고요?”
엘프들은 아우레오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질문의 저의를 가늠하는 듯했다.
아우레오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답변을 기다렸다. 그는 다른 뜻 없이 샬릿과 샬린느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도망친 뱀파이어는 붙잡지 못했습니다. 황야에서 꼬리를 놓친 탓에 추적이 길어지고 있지요. 샬릿이 서부에서 흉수의 뒤를 쫓고 있습니다.”
“저런, 안타까운 일이네요.”
“괜찮습니다. 흉수가 지상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잡히는 건 시간문제이니까요. 이제 본론을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허허, 뭐가 그리 급해서 말을 탄 채 이야기를 듣게 하실까? 말씀해 보십시오.”
테오도르가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시온은 웃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온 십여 명의 엘프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중부 대교구의 성직자들이 왜 남부로 진군하고 있지요? 심지어 성기사단까지 거느리고요.”
아시온는 심문조로 말했다. 듣기에 따라 불쾌할 수도 있는 어조지만, 무장한 군대가 자기네 땅으로 접근하고 있으니 이해할 수 있는 태도이기도 했다.
“동방 괴수들이 요정숲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었소. 한데, 그 와중에 강력한 리치가 등장했다는 첩보가 있더군요. 우리는 리치를 토벌하고, 동방 괴수들이 이상행동을 한 이유도 파악할 생각이오.”
테오도르는 남부 원정군이 출정하게 된 경위를 상세히 설명했다.
엘프들은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어쩐지 다 아는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늪의 조언자는 뛰어난 정보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대교구의 사정도 대부분 알고 있겠지.’
엘프들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태도였지만, 테오도르는 열심히 설명했다.
“즉, 우리는 엘프를 공격하러 가는 게 아니란 말이오. 남부의 땅을 점령하거나 요정숲을 훼손할 생각은 더더욱 아니고.”
“그랬군요. 그럼 두 번째 질문을…….”
설명을 다 들은 아시온이 무언가 말하려 할 때, 옆에서 지켜보던 라니에르가 그녀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대교구의 남부 원정은 엘프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오. 동방 괴수들을 쓸어버린 리치는 아크리치로 추정되거든. 요정숲 어딘가에 아크리치가 숨어 있다면 엘프들에게도 불편한 일이니, 우리와 힘을 합쳐 놈을 처단합시다.”
“……인간 성기사여, 요정숲의 일은 엘프들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하, 비싸게 굴지 말고, 우리를 요정숲으로 안내하시오. 이쪽은 벌써 신탁까지 받은 마당이오. 아도나이께서 검을 들어 남쪽을 겨누라 말씀하셨으니, 엘프들도 응당 협조해야 하오.”
라니에르의 말투는 문제가 많았다.
애매한 반존대는 예법에 어긋났고, 담긴 내용도 강압적이고 무례했다.
“…….”
아시온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원래부터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나는 그 미세한 변화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지상의 그 누구도 철갑옷을 입은 채 요정숲에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갑옷과 무기를 내려놓고 알몸으로 들어오겠다면 안내하지요.”
“무어라?”
성기사의 갑옷과 무기는 신이 그들에게 허락한 것이다.
언데드를 토벌하는데 무장을 벗어 놓고 오라니? 아시온의 말은 비아냥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라니에르가 대번에 언성을 높였다. 테오도르가 손을 들어 제지하지 않았다면 칼자루에 손을 얹을 기세였다.
테오도르는 과열되는 분위기를 차단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시온, 우리가 요정숲에 들어가는 걸 막아설 생각이오?”
“그렇습니다. 요정숲은 오직 엘프만을 위한 땅입니다. 엘프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이보시오, 아시온. 라니에르 경이 말했다시피, 대교구에 신탁이 내려왔소. 심지어 유례없이 명징한 신탁이란 말이오.”
“당신들이 아도나이를 섬기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프까지 그의 그늘 아래에 두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아도나이가 빚어낸 존재가 아닙니다.”
“듣자 듣자 하니 못 하는 소리가 없군!”
아시온의 마지막 말에 라니에르가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아무리 엘프가 고대의 종족이라지만, 한낱 피조물이 창조신의 은혜를 부정하다니!”
“저는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인간 역시 아도나이가 창조한 건 아니…….”
아시온은 말을 하다 말고 꼬리를 흐렸다.
그녀가 지금 하려는 말은 아도나이 교회의 창조 신화를 부정하는 것. 성기사들이 칼을 뽑기에 충분했다.
“……어디 한번 끝까지 말해 보시오.”
라니에르가 칼자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대답을 잘못하면 엘프건 뭐건 단칼에 베어 버릴 기세였다.
“…….”
아시온은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손끝에 미약하게 마나가 일렁이고 있었다. 혹시 모를 전투에 대비하는 것이다.
“어머, 싸움 났어요?”
극단으로 치닫는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
고개를 돌려 보니 성녀 요한나가 말에서 내려 맨발로 걸어오고 있었다.
“……?”
그녀의 행색을 본 아시온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대교구 원정군 행렬에 웬 거지꼴 소녀가 섞여 있으니 의아한 모양이었다.
‘뭐야, 엘프들은 성녀의 존재를 모르나?’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성녀 요한나는 대교구 안뜰에서만 지냈으니 외부에 얼굴을 알릴 일도 없었을 터다.
‘존재를 알았더라도, 설마 성녀가 원정군에 함께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지. 그것도 비무장으로…….’
늪의 조언자가 이 소식을 들었더라도 거짓 정보로 치부했을 만큼 비상식적인 상황이었다.
“햐, 엘프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그림책에서 본 것보다 훨씬 예쁘네요. 아, 질투 나네.”
요한나가 낄낄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아시온은 잠시 그녀의 정체를 추리하다가, 이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직접 물었다.
“인간 소녀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아, 내가 소개하지, 여기 이…….”
“저는 요한나예요. 고아인데, 교회에서 저를 거두어 줬어요.”
테오도르의 소개를 요한나가 끊었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엘프들에게 자기 신분을 숨기고 있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진실과 거짓
“왜 싸우다 말아요? 혹시 저 때문에 흥이 깨진 건가요?”
요한나의 넉살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호호, 싸움 구경하러 왔다가 졸지에 방해를 해 버렸네요. 전 물러서 있을 테니 계속 싸우세요.”
당연한 얘기지만, 성직자들은 성녀를 옆에 두고 엘프들과 칼부림을 벌일 수 없었다. 혹여 그녀가 휩쓸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아니, 그게…….”
“…….”
라니에르가 말을 더듬거리다 이내 살기를 거두었다.
그 모습을 본 아시온도 손끝에 모았던 마나를 흩어 버렸다.
“자, 불필요한 신경전은 그만두고, 생산적인 이야기를 좀 합시다.”
테오도르가 적절한 시점에 끼어들어 싸움을 말렸다. 어쩌다 보니 분위기가 이렇게 되었지만, 사실 원정군과 엘프는 다툴 이유가 없었다.
‘그래,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지.’
요한나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내가 나서서 싸움을 말릴 생각이었다.
성질대로 들이받는 라니에르와 달리, 나는 늪의 조언자에게 정보를 얻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여기서 엘프들과 척을 지면 곤란해.’
내 심경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아시온이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 묵빛 검에 은빛 망토, 백룡의 비늘로 만든 갑옷까지……. 당신이 바로 용살기사, 테온 크로우군요. 늪의 조언자께서 당신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셨습니다.”
“감사? 늪의 조언자가 나에게 감사할 게 뭐가 있지?”
“붉은 용을 처단한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붉은 용은 예전부터 요정숲을 탐내고 있었거든요. 당신은 요정숲의 오랜 난적을 처치해 준 것입니다.”
‘늪의 조언자가 나를 도와준 이유가 그거였군. 어쩐지, 서부까지 엘프들을 보내서 정보를 제공하고 전투까지 돕는다 했더니…….’
나만 늪의 조언자에게 도움을 받은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은 것이었다.
사전에 쌓아 둔 협력 관계는 향후 그녀를 만나서 정보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야말로 고맙다고 전해라. 나후타야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비데우스의 본체를 습격하지 못했을 거야.”
“테온, 나후타야가 누구예요?”
“늪의 조언자.”
“오…….”
슬쩍 다가온 아우레오가 귓속말로 물었고, 대답을 듣더니 신기하다는 듯 감탄했다.
늪의 조언자에게도 당연히 이름이 있겠지만, 막상 그녀의 진명을 들으니 어색하게 느껴졌나 보다.
“우리를 요정숲에 들이지 말라는 건 나후타야의 지시인가?”
“……그렇습니다.”
내가 계속 나후타야라는 이름을 들먹이자 아시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샬릿과 마찬가지로 아시온도 늪의 조언자의 진명을 언급하는 게 불편한 듯했다.
“나후타야가 지금 이곳을 지켜보고 있나?”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듣고 계십니다.”
“그런 추상적인 대답 말고, 지금 그녀와 통신할 수 있냐는 거야. 그 텔레파시인가 뭔가 하는 편리한 엘프 마법으로 말이지.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거든.”
아시온은 잠깐 망설이더니, 눈을 감고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나후타야에게 가부를 묻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짧은 틈에 요한나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읏차.”
그녀는 아예 내 백마에 올라타더니, 등 뒤에서 몸을 바짝 붙이고 앉았다.
“너 뭐 하냐?”
“오른팔을 꼬집으면 진실, 왼팔을 꼬집으면 거짓. 헷갈리지 마요.”
요한나는 귓속말로 속삭였다. 화경에 오른 내 귀에도 간신히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나후타야가 하는 말의 진위를 가려 주겠다는 건가? 텔레파시로 원거리 대화를 하는 상대에게도 독심술이 통하나?’
성녀가 보유한 독심술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시온은 나후타야에게 허락을 득했는지, 눈을 뜨고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테온 크로우.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너한테 말하면 나후타야가 듣고, 대답을 해 주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저의 귀와 입을 통해 당신과 소통하실 겁니다.”
그때 요한나가 손바닥으로 내 엉덩이를 문질렀다. 땀을 닦는 듯했다. 무엇이 그녀를 긴장하게 만드는지 모르겠지만, 조막만 한 손아귀에 땀이 흥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