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1: Winterer RAW novel - Chapter (20)
룬의 아이들 윈터러 제7권. 2장 , One Meets His Bestiny Often in the Road He takes to avoid it(20/21)
2장 , One Meets His Bestiny Often in the Road He takes to avoid it
통로를 감싸고 있던 얼음이 점차 엷어지면서 흙이 드러났다. 통로의 끝에 이르러 보리스는 문고리 같은 것을 만졌고, 그것을 비틀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밝다못해 희게까지 느껴지는 햇빛 아래 서 있는 것을 알았다.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며 솟은 것은, 수없이 많은 나선을 그리며 멀어지고 있는 흰 돌의 허공다리였다. 무너진 잎새 장식 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다시 가나폴리의 수도, 아르카디아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이 아르카디아의 어디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에피비오노를 따라 갔던 눈에 익숙한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늙은이의 우물이 있던 곳도 어딘지 찾을 길이 없었다. 보리스는 그가 방금 나온 문을 돌아보았다. 그건 폐허가 된 건물 속에 묻히다시피 한 낡은 문짝이었다. 다가가서 다시 만져보니 어이없게도 떨어져 바닥에 방치된 문이었다. 보리스는 문짝을 번쩍 들어올리고는 당황하여 헛웃음을 흘렸다. 오던 길로 돌아가는 것은 고사하고 문은 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았다. 수많은 깨진 돌들과 함께 팽개쳐진 잔해에 불과했다. 보리스는 폐허에서 빠져나와 큰길로 나왔다. 에피비오노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로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을 셈인 걸까. 그와 헤어진 후 기껏 하룻밤 정도 여행한 것 같은 기분인데, 이곳의 시간도 마찬가지라면 아직 아르카디아에서 떠나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짧은 시간 같이 여행했을 뿐이지만 그의 유쾌한 목소리와 재미있는 관점을 가진 말투가 조금은 그리웠다. “이제 왔구나.” 보리스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조금 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허공다리의 한 가지가 빙글빙글 돌며 바닥에 닿아 있는 조금 높은 위치에 익숙한 얼굴의 땋은 머리 소녀가 앉아 있었다. 부서진 난간 사이로 한쪽 발을 늘어뜨리고, 다른 쪽은 무릎을 세워 몸을 기댄 채 한참 전부터 보리스를 보고 있었던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야?” “아주 오래 전부터,” “왜 미리 부르지 않았어?” 힘든 여행을 끝낸-탓인지 어쩐지 반가운 마음이 든 보리스는 전보다 친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나야트레이는 여전히 무감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가 에피비오노를 찾는 것 같아서.” 보리스는 조금 당황했다. 나야트레이는 가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듯한 때가 있었다. “물론 그를 찾았지만, 너도 찾고 있었어. 넌 어디에 있다가 온 거니? 그 이상한 곳에서 너를 꽤나 오랫동안 찾았었어.” 그 때, 나야트레이가 앉은 허공다리 뒤쪽에서 낯선 짐승이 느리게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보리스가 경고하려는 순간, 나야트레이가 한 손을 내밀더니 짐승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조금 큰 고양이처럼 생긴,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 동물이었다. 새끼 호랑이와 비슷하달까? 햇빛 탓인지 털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이 보였다. “나도 널 찾았어.” 나야트레이는 늘어뜨렸던 다리를 올렸다가 허공다리 아래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5미터는 되어 보이는 높이인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 호랑이인지 고양이인지 모를 놈도 따라 뛰어내리더니 어슬렁거리며 나야트레이 뒤를 따라왔다. “새로운 친구를 얻었구나.” “응.” “그럼 갈까?” 에피비오노가 말했던 남동쪽광장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건 광장이라기보다 오래 전엔 잘 꾸며진 정원이 아니었을까 싶은 곳이었다. 중앙에 바짝 말라 갈라진 분수대가 서 있었고 그것을 중심으로 방사형 길이 여러 가닥 뻗은 것이 보였다. 길과 길 사이에는 바랜 돌들이 둘러져 그곳이 화단이었으리란 짐작을 가능케 했다. 물론 식물은 한 줄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클라자니냐에서 본 것과 같은 높다란 받침대는 광장 머리 쪽에 서 있었다. 둘은 광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단 사잇길을 걸어 분수가 있는 중앙까지 가는 동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장 먼저 들린 것은 물소리였다. 쏴아,. 한동안 뜨거운 땅을 걸었던 그들에겐 음악보다 아름다운 소리였다. 분수에서 물이 나오고 있었다. 3미터도 넘게 뻗은 가장 높은 물줄기,그걸 중심으로 좀더 낮은 물줄기들이 여섯 개, 나선을 그리며 솟아올랐다. 둘은 걸음을 멈췄다. 이 죽은 도시에서 인형들 외에 움직이는 것을 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하얀 햇살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수 안에는 다섯 가지 빛깔을 내는 광원이 있어 차례로 빨강, 오렌지, 초록, 보라, 금빛으로 변했다. 분수 앞으로 다가가 들여다보니 깊이 파인 내부에서 수십 개의 작은 물줄기들이 꽃대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꽃이 없는 화단에도 저절로 물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주위의 모든 화단이 하얗게 빛나는 물줄기로 가득 찼다. 뜻밖으로 나야트레이가 짧은 감탄사를 냈다. “와아,.” 왜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인지 몰라도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잠시 머물렀을 뿐이라 해도 아르카디아 역시 사막 가운데 세워진 곳인 만큼 덥고 건조했다. 그런 곳에서 보는 물줄기는 감탄을 넘어 일종의 신비로움까지 느끼게 했다. 가장 높이 솟아오르는 물줄기를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보리스가 말했다. “사람이 찾아와야만 움직이는 걸까?” 나야트레이가 말했다. “너와 내 몸에 외부 세계의 마법이 묻어 와서, 마법으로 움직이는 것들이 반응하는 거야.” 무슨 근거가 있는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보리스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오랜만에 만난 시원한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광경을 에피비오노가 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가 사랑하던 왕국이 잠시라도 옛 모습을 찾은 걸 보았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그러나 아름다운 유희는 오래 가지 않았다. 둘이 넋을 놓고 분수를 바라보는 가운데 점차 물줄기는 얕아지고, 잦아들고, 소리도 멎었다. 광채도 사라졌다. 보리스와 나야트레이가 볼 수 있었던 유일한 가나폴리의 마법은 다시 사라졌다. 남은 것은 분수대 속에 떨어져 남은 물, 그리고 두 사람의 얼굴과 팔에 튄 물방울들뿐이었다. “가자.” 이번에 먼저 말한 것은 보리스였다. 둘은 곧 클라자니냐에서 본 것과 같은 거울 받침 앞으로 가 섰다. 하늘로 솟은 장식침을 말없이 올려다봤지만, 에피비오노가 없으니 찬트를 불러 줄 사람이 없었다. 보리스 역시 섬의 마법 그릇에 남기고 온 머리카락 때문에 함부로 찬트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정말 생각만으로도 충분한 것일까?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무심코 말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가장 높이 솟은 장식침 쪽에서 거울을 녹인 듯 반들거리는 물이 흘러내려 순식간에 거울 모양으로 변했다. 클라자니냐에서 본 것과 꼭 같은 일렁이는 거울이었다. 갑자기 나야트레이가 말했다. “그럼 이제 헤어져야겠네.” 가나폴리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는 이 거울들은 본래 가나폴리의 마법사들이 먼 곳으로 급히 여행할 때 사용하던 이동수단이었다고 에피비오노가 말해 준 일이 있었다. 보통은 한 거울에서 다른 거울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는데, 때로는 거울이 없는 곳으로 바로 갈 때도 있었다. 그것이 가능한 거울을 ‘소원 거울’이라고 했다. ‘소원거울’은 이동하고자 하는 사람이 머릿속에 떠올린 장소로 직접 보내주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예전에는 그 사용이 엄격히 통제되었다고 했다. 물론 이제 이곳에 거울을 지키는 사람들은 없었다. “어디로 갈 거니?” 나야트레이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아노마라드.” “아노마라드는 굉장히 넓어. 그 중 어디로 갈 건데?” “언니가 있는 곳.” 나야트레이에게는 언니가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나야트레이가 한쪽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이며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순식간이었다. 은발을 땋아 늘인 작은 소녀와 금빛 새끼 호랑이의 모습은 눈 앞에서 지워져버렸다. 이제 보리스의 차례였다.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딘가 생각해 봤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섬으로도, 고향으로도 갈 수 없는 자신이었다. 그렇다고 나우플리온이 소개해 준 렘므 사람들을 이런 기회까지 이용해 가며 굳이 찾아갈 마음도 나지 않았다. 강요도 책임도 없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어디에도 환영할 사람은 없었다. 역시 그가 가야만 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는 걸까. 그 때 에피비오노가 목적지를 모르는 사람이 가야 할 곳을, 거울이 대신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거울이 정말로 그걸 알고 있을까? 보리스는 아무 장소도 생각하지 않은 채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신의 마음이 원하고 있는 장소는 어딜까. “맥주 가져와, 맥주!” “스튜는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아가씨? 시킨 지 반 시간은 된 것 같잖아!” “금방 나오니까 조금만요!” 소리가 먼저였다. 여러 사람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음이 귓가에 울렸다. 그리고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분주한 주점 식당의 풍경이었다. 저녁 식사가 한창일 즈음인 모양이었다. 사내들이 테이블마다 둘러앉아 맥주잔을 기울이고 두어 명의 급사들이 바쁘게 뛰며 음식이며 술을 날랐지만 성질 급한 사람들의 불평은 어디서든 터져 나왔다. 문은 활짝 열려 있고 밖에는 여러 마리의 말들이 투레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참에서는 무언가 별 것 아닌 이야기를 목소리 높여 하는 사람들 때문에 악의 없는 소란이 빚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 자신은 구석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당연히 일행은 없었다. 눈을 몇 번 비벼 보았다. 이렇게 구체적인 장소로 옮겨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꽤 놀라 있었다. 게다가 이곳이 어디인지 단번에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사실은 와본 일이 있는 곳인지조차 애매했다. 어딘가 익숙한 점이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가 여행하면서 가본 여
관 겸 주점은 한두 군데가 아니었던 것이다. 날씨는 여전히 여름, 렘므식 말투는 들리지 않았고,. “자, 무얼 주문하시겠어요? 어머, 손님은 어디서 오셨기에 이렇게 먼지투성이가 되셨어요?” 쾌활한 여급의 목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임을 깨달은 보리스는 자신이 망토 두건을 덮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당황했다. 이랬으니 여급은 그의 얼굴을 충분히 잘 보았을 것이다. 이제 와서 새삼 두건을 쓰기도 뭣하여 보리스는 무엇이라도 주문하여 그녀를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여급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흠칫 놀랐다. 분명 어디선가 본 일이 있는 얼굴인데,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에, 저,.” 그런데 여급도 마찬가지 감정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녀가 보리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바람에 보리스는 허둥지둥 고개를 도로 숙이고는 급히 말했다. “매…. 맥주 주시지요.” 주문을 받자 여급은 호기심을 접고 돌아섰다. 여급의 뒷모습 너머로 주방으로 통하는 문이 보였는데, 그 옆에 어디서 본 듯한 작은 문이 딸린 것이 눈에 띄었다. 마침 문이 열리고 손님에게 내주는 방이라기엔 지나치게 작은 그 방에서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 하나가 나와 주방으로 들어갔다. “토냐?“ 저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이었다. 여급이 몸을 홱 돌려 경이로운 눈동자로 보리스를 보았다. “저, 그러니까, 그 때 부닌 아저씨네 대장간에서 일할 뻔했던 아이?” 토냐는 보리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보리스는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지금까지 ‘토냐’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둘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토냐가 먼저 탄성을 터뜨렸다. “진짜 많이 자랐구나! 난 정말로 아닌 줄로만 알았어! 키도 커지고, 그새 어른이 다 된 것 같네?” 이럴 때 “누나도 많이 예뻐졌네요’ 같은 말을 생각해 낼 줄 모르는 보리스는 그저 미소만을 보였다. 정말로 그곳이었구나,. 황야를 헤매다 찾아든 그에게 처음으로 친절을 베풀어 준 토냐의 여관, 그러다가 벨노어 백작을 만나 그와 함께 가기로 결정한 후 부닌 아저씨한테 좀 전해 달라고 다시 한 번 찾아왔던 그 곳이었다. “조금만 있어 봐. 저쪽 주문 좀 받고 다시 올게. 아참, 너 저녁 먹었니?” 잘 아는 사이라고 할 순 없는데도 토냐는 몹시 반가운 모양이었다. 손님들 사이를 뚫고 가면서도 뒤돌아보며 ‘가지말고 기다려’하는 듯 한 손짓을 보냈다. 혼자 남은 보리스는 미소를 거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필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가 윌까? 어느새 기억 속에서 흐려져 버렸던 트라바체스,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이곳으로 그를 보낸 가나폴리의 거울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무엇을 읽었던 걸까? 그나저나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은 듯한 기분이다,. 한참만에 다시 돌아온 토냐의 손에는 널찍한 쟁반이 들려 있었다. 쟁반 위에는 맥주 두 잔, 구운 닭다리, 찐 달걀, 수프, 호밀빵 따위가 올려져 있었다. 음식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토냐는 의자를 끌어당겨 맞은편에 앉더니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참, 그 때 어느 외국 귀족님을 따라가게 됐다고 하지 않았어? 그 집에선 나온 거야?” 벨노어 백작의 양자가 되기로 했다는 말은 그 때도 안 했으니 이제 와서 새삼 할 필요는 없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랬구나. 어디 보자, 그게 벌써 햇수로 5년이 됐네,. 참, 저녁 나랑 같이 먹어도 되지? 사실 나, 5년 전 그 때도 네가 저녁을 굶은 같아서 걱정했었단다. 오랜만에 보니까 제일 먼저 ‘저녁 먹었을까?’하는 생각이 떠오르지 뭐니. 호호호, 그래서 가져온 거니까 사양말고 먹어 돈은 남아돌면 주고, 아니면 안 줘도 돼.”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따뜻하게 대해 주는 것은 예전과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토냐가 보기엔 보리스가 많이 컸다 해도 오래 전에 갈곳도 모른 채 헤매던 아이의 느낌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도 고향은 역시 고향이구나, 하는 생각에 보리스는 수프를 뜨다가 조금 감상적인 기분이 되고 말았다.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다시 왔니?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야?” 볼일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나가면 좋을까 궁금해졌다. 이런 곳에서 적당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보리스는 열 두 살이었던 자신과 지금 자신이 똑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이 여관에 갈 곳 모르고 방황하던 보리스는 일자리를 찾으려 했고 그러다가 벨노어 백작을 만나 고민하다가 대장간 일을 버렸다. 갈림길에서 택한 한쪽 길, 그쪽 길을 충분히 가보았으니 이제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선택을 해 보라는 것인가. 보리스는 수프를 먹다 말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났니?” 가나폴리의 거울이란 정말로 신기한 물건이었다. 이제 보리스는 그가 왜 이곳으로 왔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조차 모르는 마음을 알아보는 거울의 힘이란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후후훗, 아뇨. 저, 토냐 누나 그 때 대장간 하시던 분, 아직도 그 일 하시나요?” “부닌 아저씨 말이니? 물론이지. 그 분 생업인걸,” “잘 됐네요. 이따 대장간 가는 길 좀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러자. 그런데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야?” 한쪽 길을 택해 지나쳐 갔던 처음의 갈림길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거울은 그곳으로 그를 돌려보냈다. 그 때 택한 길에서 시작되었던 일은 이제 모두 일단락 되었다. 가지 못했던 새로운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좀 늦긴 했지만, 다시 저를 써주실 지 여쭤보려고요.” 여름이 다 불탄 자리에 가을이 왔다. 그 사이 보리스는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그의 생일을 아는 사람
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날처럼 조용히 지나갔지만 그 편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보리스가 안드레아 부닌의 대장간에서 일하게 된 후 그새 넉 달이 흘렀다. 대장간 일은 이제 겨우 좀 익숙해졌다. 힘이나 체력 등에서 또래 소년들보다 월등한 그였지만, 화덕의 열기까지 더해진 한여름 더위와 싸우면서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았다. 조금만 흐트러지면 금방 어딘가를 다치게 되는 것이다. 부닌은 그를 꽤 사납게 가르쳤다. 어려운 일이든 쉬운 일이든 가리지 않고 맡겨서 몇 시간이 걸리든 반드시 다 해내게 했다. 그러나 일이 끝난 뒤에는 보람 있는 휴식이 찾아왔다. 저녁 무렵이면 부닌 아저씨와 함께 근처 시냇가로 가서 하루 동안 땀투성이가 된 옷을 빨고 목욕을 했다. 그러다가 흥이 나면 물장난도 쳤고, 잘 차린 것은 없어도 열심히 일했기에 더욱 흡족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바람을 쐬러 나와 별밤 구경도 했다. 사나흘에 한 번씩은 토냐의 여관에 가서 맥주를 들이키며 더위를 달랬다. 토냐가 직접 주방을 보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특별 안주도 나왔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부터 보리스는 부닌 아저씨와 막대를 들고 대결하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이곳은 트라바체스였으니 혹시라도 자신을 노리는 자가 있을 지 몰라 검술 수련을 규칙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상대가 있는 쪽이 확실히 재미있었다. 부닌의 나이는 보리스의 세 배 이상이었지만 막대 대결에 있어서만은 보리스가 선생이었다. 처음에는 혹시 다치게 할세라 조심조심 했는데 요새는 부닌 쪽도 좀 늘어서 심하다간 한 대 얻어맞는 경우도 생겼다. “실은 젊었을 때 아노마라드 쪽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가한 일도 있었어. 그냥 잡병이었지만, 그래도 몇 해나 따라다녔으니 얻어 건진 요령은 좀 있었더랬지. 보는 눈도 생겼고. 그래서 그런지 네 실력이
범상하게 보이질 않아.” 여름이 저물고 밀을 거둘 시기도 지났을 즈음, 그 날도 별을 보며 나와 앉아 있자니 부닌이 불쑥 그렇게 말했다. 대장간은 야트막한 언덕 꼭대기에 있어서 별을 보기에 좋았다. 보리스는 평소 버릇대로 그냥 웃기만 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아노마라드에 가서 검술 학교라도 들어갔었나? 널 처음 보았을 땐 정말 앳된 꼬마였는데 세월이 바꿔놔도 너무 바꿔 놨단 말이야. 그 시절을 모르고 이제 널 봤더라면 지금처럼 지내긴 힘들었을 거야. 아닌게 아니라 여름 초에 토냐가 널 데려와서 그 때 그 애라고 했을 땐 어디 가서 뱃놈질이라도 몇 년 하다 온 게 아닐까 싶었거든.” 배를 타다 왔다라, 그것 참 적절한 지적이었다 섬사람은 모두 뱃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보리스가 여전히 미소만 짓자 부닌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참 말이 없어. 열 다섯 먹은 녀석답게 좀 떠드는 것도 괜찮을 텐데. 친구도 좀 사귀고. 열 여섯 되려면 이제 얼마나 남은 거냐?”
올해도 몇 달 남지 않은 터라 문득 생각난 모양이었다. 보리스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미 열 여섯인데요.” “뭐야? 이 녀석이, 그럼 생일인데 말도 안하고 넘어갔단 말이구나!” 예상대로 대뜸 한 대 쥐어 박혔다. 부닌은 대장장이답게 손 쓰는 것이 거칠었으나 보리스는 별로 싫게 생각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과 같은 행동은 나우플리온과 지내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씁쓸하기도 하고, 그립기도 해서 보리스는 고개를 흔들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저씨 생신은 언제인데요?” “몰라. 가족들이 죽은 후로는 희미해져서, 잘 생각이 안 나.” 부닌은 오래 전 트라바체스 남부에 퍼졌던 돌림병으로 부인과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다고 토냐가 말해 준 일이 있었다. 아마 그러고서 마음이 허해져 전쟁 같은 곳에 나갔을 것이다. “실은 너도 그 동안 안 좋은 일을 많이 겪었던 것일 테지,. 안 그러냐?그 때 네 녀석도 열 둘 먹은 어린애의 눈은 아니었지만, 지금 역시 열 여섯 짜리의 얼굴은 절대 아니야. 그렇지만 내 굳이 물을 맘씨까진 없다. 훌훌 털기로 했으면 이번에야말로 오래오래 시골에 묻혀서 살아봐.” “예. 그럴 생각이에요.” 몇 년이 될 지는 몰랐다. 때로는 이대로 영영 숨어 지낼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전처럼 도피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지금처럼, 단순하고도 보람 있는 일상을 보내다 보면 상처 많고 거칠어진 그의 마음도 어쩐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때로는 처음부터 벨노어 백작을 따라가지 않고 대장장이 조수가 되었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 같아서는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남은 해가 순식간에 흘러갔다. 짧은 가을을 건너 긴 겨울을 나고 섬을 떠나 처음 맞는 봄이 왔다. (시입니다.) 몇 번이고 바다에 나갔지만 / 동전 몇 개도 남기지 못했네 / 젖은 비스킷 질리도록 먹고 / 굵어진 잔뼈뿐인 늦은 청춘 /(한줄을 띕니다.) 오늘은 낯선 항구를 걸어봤지 / 붉어진 바닷가 모퉁이 선술집 / 누군가가 리라를 타고 있구나 / 냠펀 잃은 늙은 여자인가 / 난 공허한 눈으로 들어갔었네 / 아무런 기대도 없이,.(시끝남) 4월 즈음부터 그와레 성은 크게 활기를 띠었다. 봄 축제를 앞두고 근처 마을들이 돌아가며 대목장을 여는 시기가 돌아온 것이다. 보리스는 토냐네 여관이 바쁠 즈음 종종 가서 바깥일을 도와주곤 했는데 그 날도 그 사내가 와서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노래가사입니다.) 빛나는 여신 앞에서 정신 잃고서 / 평생 처음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네 / 시름이 있어 슬픈 곡조를 타오? / 깎다 만 생선뼈뿐인 빈손 청춘이지만 / (한줄을 띕니다.) 못난 선원놈 이야기도 들어보오 / 길곱 바다의 보물과 빛나는 금화 / 집채만한 문어 얘기도 들어보오 / 물론 그 모든 것은 거짓말이지만 / (한줄을 띕니다.) 위로가 된다면 무슨 말이든 하리 / 아무런 사심도 없이,. (노래끝남.) 장작을 옮기고 있던 보리스는 사내에게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었다. 노래하는 사내는 남쪽 어느 항구 출신이라는 젊은 등짐 상인인데 웬일인지 한 달이 되도록 사들일 것도 없는 작은 성 그레에서 떠날 생각을 않고 있었다. 보리스는 이미 그가 토냐의 관심을 끌려고 사흘이 멀다하고 와서 갖은 노래를 다 불러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은 보리스뿐 아니고 여관에 드나드는 사람들이라면 거의 다 눈치채고 있었다. 사내는 키가 작고 얼굴이 가무잡잡했지만 영리한 눈매에 묘한 순함마저 갖고 있어서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게다가 노래도 꽤 잘 했다. 토냐는 시치미를 떼고 모르는 체 했지만 사내가 그리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며칠 전에 듣자니 부닌 아저씨가 심심해서 여관 주인인 토냐 아버지 의향도 떠본 모양인데 아무래도 곧 경사가 있을 것 같다는 전언이었다. “아, 가져왔니?” 다 팬 장작을 부엌에 가져다주자 토냐가 냉큼 받으면서 뒤꼍 쪽을 흘끗거렸다. 노랫소리가 멈췄으니 갔는가 궁금해서 그러는 것일 터였다. 보리스가 싱긋 웃자 토냐는 자신의 행동을 들킨 것이 무안하여 얼굴을 붉히며 다른 얘기를 꺼냈다. “사흘 뒤에 대목장 열릴 때 큰 경매가 있을 거란 이야기 들었어? 값진 골동품이 몇 개 있어서 그런지 아노마라드에서도 손님들이 여럿
왔다더라. 너도 구경 갈 거니?”
“아저씨께서 대장간 낮일만 끝내고 가자고 하시던걸요.” 보리스가 대장간 조수가 된 지도 벌써 열 달이 흘렀다. 토냐의 여관이나 부닌의 대장간에 드나드는 그와레 사람들도 이젠 말수 적고 성실한 대장간 조수 소년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오오, 다행이구나. 너희 또래 애들은 누구나 대목장을 기다리지만 요번에는 너 때문에 기다린 애들도 많을걸.” 토냐가 눈을 찡긋거렸지만 농담을 눈치채지 못한 보리스는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저를 기다린다는 건가요?” “점잔만 빼는 너 때문에 속 태우는 계집애들이지 누구긴 누구겠어? 대목장쯤 되면 계집애들도 용기를 내서 목석 같은 사내애한테 말도 걸어 보고 그러는 거지.” “누가 저 때문에 속을 태운다고 그래요?” “생각보다 꽤 많단다. 오오, 계집애들이 멀리 가지도 못하고 맴돌거든 가능한 한 골고루 기회를 주렴. 잘생겼다고 소문난 대장간 조수님, 네 긴 머리카락을 보면 누나도 마음이 두근두근한단다.” ”,.놀리려고 그러는 것 다 알고 있어요.” 그 무렵 보리스의 머리카락은 등을 다 덮을 정도로 자라 끈으로 헐렁하게 묶고 다녔다. 토냐는 여관 일을 오래 한 쾌활한 아가씨답게 말씨가 짓궂었고, 보리스를 놀리는 것도 꽤 좋아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토냐 주위를 맴도는 젊은 상인 이야기로 대번에 반격했을 텐데, 보리스는 그냥 그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상창을 해결하려 했다. 뒤꼍으로 가는 문을 밀고 나가는데 등 뒤에서 토냐가 까르르 웃으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내가 전에 말했잖아, 귀찮은 일 안 만들려면 머리 좀 짧게 자르라고!” 근처 마을에서 연속으로 열린 대목장 때문인지 확실히 오늘은 새로 들어온 손님이 많았다. 바쁠 듯하니 일을 좀더 보아줄까 싶어 뒤꼍을 가로질러 마구간 쪽으로 갔을 때였다. 바삐 길을 가던 한 남자가 보리스의 모습을 보고 놀란 듯 우뚝 멈추어 섰다. 보리스는 눈치채지 못한 채 건초를 한 아름 안고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남자는 방향을 바꾸어 여관으로 들어왔고, 마침 밖으로 나온 급사 한 사람을 붙들고 보리스 쪽을 손가락질하며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대목장이 다음날로 다가오자 손님은 한층 더 많아졌다. 그 날도 일을 돕다 보니 점심 식사도 여관에서 했고, 대장간으로 돌아온 것은 거의 3시가 다 될 즈음이었다. 토냐가 챙겨준 식료품을 한 아름 안고 언덕을 올라와 보니, 고급스런 마차와 낯선 사람 몇 명이 대장간 앞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그 중 볼일이 있어 보이는 사람은 한 눈에 봐도 부잣집 마님이 아닌가 생각되는 화려한 복장의 중년 여인이었다. 부닌 아저씨는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누가 오는구나 네가 여기 조수라는 애니? 뭘 좀 고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주인은 어디로 갔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보리스는 이 부인이 부자이긴 해도 귀족은 아니리라고 판단했다. 뒤에 하인들이 있건만 이 부인은 당연한 것처럼 자신이 나서서 말을 걸고 있었다. “주인 아저씨께선 잠시 자리를 비우셨나 봅니다. 고칠 물건은 뭔가요?” “요런 것도 고칠 수 있는가 모르겠다. 좀 작은 거라서,.” 뒤에서 하인이 상자를 가져왔고, 곧 보리스의 손에 건네졌다. 보석따위를 넣는 것인 듯, 세공이 많이 된 상자 안에는 엄지손가락 굵기의 흑진주가 스무 개 가량이나 꿰어진 값진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좀더 자세히 보니 목걸이줄 끝의 걸쇠가 떨어져 나가 걸 수가 없게 된 모양이었다. 이런 것은 세공사에게나 가져가야겠지만, 이곳은 외지이고 해서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저씨가 돌아오셔야 대답을 드릴 수 있겠군요. 혹시 시간이 있으시면 조금 더 기다리시는 게 좋겠어요.” “이런, 안 되는데. 지금도 잠깐 빠져나온 건데 이미 늦었어. 게다가 목걸이는 내일 당장 필요한 거란다. 그러지 말고 네가 목걸이를 갖고 있다가 아저씨한테 보여주고, 만일 안 된다면 내게 다시 가져다 줄 수 없을까? 심부름 값은 줄 테니까 말이야.” 차림새를 보아 분명 아노마라드에서 온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귀족들처럼 막무가내로 자기 입장만 강요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비교적 합리적인 방법이라 보리스는 조금 생각하다가 수락했다. “그러시지요.” 부인은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의 이름을 말해 주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부닌은 저녁이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이 정도로 오지 않고 있으니 그 부인은 분명 고쳐서 가져다 줄 거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아저씨를 찾으러 가려 해도 이렇게 값비싼 물건을 집 안에 놓아두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잃어버리기라도 했다가는 갚을 길도 없을 것이다. 저녁식사 시간도 훌쩍 지났을 즈음, 보리스는 결국 자신이 도로 가져다주는 수밖에 없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가다가 토냐의 여관에 들러 부닌 아저씨에 대한 것도 물어보자고 생각했다. 언덕을 내려가다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부인은 무얼 믿고 자신에게 이런 값비싼 물건을 맡겼을까. 분명 외지에서 온 사람이 틀림없는데 오자마자 자신에게 ‘네가 여기 조수라는 애니’라고 물은 것도 이상했다. 그와레에서 열 달 동안 살았지만 가능한 한 조용히 살아온 터인데, 어떻게 외지인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단 말인가. 토냐의 여관에서는 아저씨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부인이 묵고 있다는 여관으로 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와레에서 가장 비싼 여관 ‘사프란 대문’은 오래 전 벨노어 백작과 로즈니스가 묵었던 곳이기도 했다. 여관 입구를 올려다보니 오랜만에 감회가 새로웠다. “롤리아니 부인께 심부름이 있어서 왔습니다.” 여관 주인이 확인하려고 급사를 올려보내자 곧 심부름꾼이 내려와 올라오라고 전해 주었다. 뒤따라올라가니 방조차도 벨노어 백작이 정신을 잃은 그를 데려왔던 바로 그 곳이었다. 묘한 우연이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아니면 이 방이 여관 안에서 제일 좋은 방이고, 그들 모두는 부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심부름꾼이 문을 열고 들어간 뒤 막 뒤따라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싸악!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울린 것과 동시에, 보리스의 손은 벌써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열 달 동안 사람을 상대로 휘둘러 본 일이 없는 검, 그러나 꾸준히 수련하여 감각만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 정면으로 내리쳐져 온 검을 정확히 막으며 밀쳐냈다 곧장 연속 공격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그는 이상한 것을 느끼고 자세를 방어로 바꾸었다. 공격해온 검에 날이 없었다. 연습용 검이었다. 보리스는 검을 내리친 상대가 노련해 보이는 검사인 것을 보고 대뜸 물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해칠 마음은 없었다. 용서해라.” 주위에 무기를 빼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검사도 곧 검을 내렸고, 방 안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우승자라 하더니 과연 놀랍습니다. 노련한 용병들 못지 않게 빈틈 없는 솜씹니다.” 팔걸이 의자에 기대앉아 그를 보고 있는 사람은 목걸이의 주인인 롤리아니 부인이었다. 그녀는 기쁜 듯 미소를 띠더니 말했다. “우선 너를 시험한 걸 사과해야겠구나, 하지만 다치게 할 마음은 없었다는 걸 알겠지? 지난 실버스컬(Silver Skuii) 우승자인 보리스 미스트리에, 그게 네 이름일 거야.실버스컬을 구경했던 하인 하나가 네 얼굴을 알아봐서 바로 내게 알려 줬단다.” 이런 식으로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기에 보리스는 난감해졌다. 부인이 말을 이었다. ”네게 좋은 제안이 있어서 무리인 줄 알면서도 이런 일을 하게 됐구나. 아아, 먼저 내가 누구인지부터 말해야겠지. 나는 롤리아니 칼츠, 칼츠 상단의 안주인이란다.” 칼츠 상단? 너무도 유명한 이름이었기에 오히려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잠깐만에 곧 깨달았다. 아노마라드 제일의 상인인 드메린 칼츠라면 그도 직접 본 일이 있는 사람 아닌가? 그렇다면 저 부인은 드메린 칼츠의 부인이란 건가? “,무슨 용건이십니까.” 분명 이 부인은 두 가지로 그를 시험했다. 하나는 검술 실력일 테고, 또 하나는 일부러 값비싼 목걸이를 맡긴 일일 것이다. 그런 식의 시험이 간단하고 효과적이긴 할 테지만, 불시에 시험 당한 입장에서는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상대가 무지막지한 부와 권력의 소유자라는 걸 안 이상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최근의 조용한 생활이 마음에 든 보리스는 사소한 일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부인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너를 고용하거나, 또는 후원자가 되고 싶단다. 어느 쪽이든 원하는 방향으로 선택하면 되는 거야, 내게는 바로 네 또래의 아들이 하나 있는데 굉장한 말썽 덩어리지. 그 애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줄 친구가 되어 주었으면 한단다.” 천만뜻밖의 이야기였다.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올렸다. “호위 검사를 고용한다고 생각하면 간단하겠지만, 사실 내가 원하는 건 조금 달라. 그 애는 형제도 없고, 너무 귀하게 자란 탓인지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없어서 앞으로 어찌될지 참 걱정이란다. 최근엔 안 좋은 버릇도 생겼고, 그러니 네가 친구도 되어 주고 때로는 선생님처럼 혼도 내주고 하면서 지내 줬으면 해. 저택에 와준다면 나와 남편도 너를 고용인이 아니라 아들 친구답게 대할 생각이야. 물론 돈이라면 원하는 대로 줄 것이고, 그 밖의 모든 생활도 우리 쪽에서 책임질테니 너는 몸만 와주면 된단다. 자, 어떻게 생각해?” 롤리아니 칼츠 부인은 막대한 지위에 비해 말씨나 태도가 상냥스럽고 솔직해서 예전 벨노어 백작부인처럼 불쾌한 사람은 아니었다. 시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상황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러나 그녀의 제안은 처음부터 안될 말이었다. “친질한 제안은 고맙습니다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내키지 않습니다.” 너무나 빨리, 그것도 딱 잘라 끊는 대답이 나오자 칼츠 부인은 좀 당황했다. 이처럼 좋은 제안을 재고의 여지도 없이 거절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왜지? 무슨 다른 문제라도?”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그냥 대장장이 일 쪽이 더 마음이 들기 때문이죠.” 그렇게 말하며 검을 거둔 보리스는 몇 걸음 다가가 목걸이 상자를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본래부터 이것이 목적은 아니셨던 것 같지만, 어찌됐든 고치지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칼츠 부인이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보리스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방에서 물러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며 그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같은 여관의 똑같은 방에서 몇 년 전 받았던 제안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가 한 선택은 그 때와 반대였다. 이젠 그때와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대조를 이루마음 속에 인상을 남겼다.
2. A winter Meets a Spring
대목장은 점심 이후부터 크게 붐볐다. 보리스는 어느새 인파 틈에서 부닌 아저씨를 잃어버렸다. 잃어버렸다고 미아가 될 건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보리스는 그냥 혼자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활기를 구경했다. 과거 화려하고 귀한 것을 많이 봐오기도 했고, 본래 욕심도 없는 터라 장에 나온 물건들에는 별 관심이 가지 않았다. 다만 웃고 떠드는 사람들만이 그의 관심사가 되었다. 모두가 행복해 보인다,. 어머니 손을 잡고 나온 꼬마들도, 한껏 예쁜 드레스로 멋을 낸 소녀들도, 벌써 술이 얼근하게 올라 어깨동무를 하고 돌아다니는 동네 사람들도 근심이라고는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겠지만, 이런 날에는 잠시 잊어도 좋은 것이다. 그런 모습이 얼마나 좋은가,.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한가롭고 단란한 일상을 이젠 전처럼 까마득히 먼 이야기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주위의 풍경으로 느낄 수 있게 된 자신이 조금은 신기했다. 토냐의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건 것도 이것으로 세 번째였다. 아직은 친분 없는 사람 앞에서 짓는 미소가 어색하여 편하게 대답해주지 못한 것이 약간 미안했다. 토냐의 말대로라면 그녀들도 나름대로 용기를 낸 것 일 텐데. 그러나 대목장의 풍경 속에 달의 섬에서 마지막으로 지낸 봄 축제의 모습이 겹쳐지고, 금발 소녀라도 보일라치면 단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만은 어쩌지 못했다. 물론 그 사람처럼 짧은 머리를 한 소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벌써 1년이 흘렀으나 조금도 흐려지지 않는 기억 속의 소녀도 다가오는 21일에는 스무 살 아가씨가 될 거란 생각하자 새삼 모든 것이 아쉬워졌다. 다시 가볼 수 없는 곳에서 그녀는 점점 어른이 되고, 그도 어른이 되겠지. “여기 있었군! 한참이나 찾았다!” 덥석 팔을 잡는 바람에 놀랐지만 부닌 아저씨였다. 예상대로 그는 벌써 어디서 술을 몇 잔 얻어 마신 모습이었다. “얼른 가자! 경매 시작된단다! 벌써 좋은 자리는 다 놓쳤겠는걸!”
굳이 구경할 필요가 없던 야외 경매 장소에 가게 된 것은 순전히 부닌 아저씨의 술기운 탓이었다. 이미 경매는 시작되어 있었다 초반인지라 소박한 물건들이 주로 나왔다. 대목장의 경매는 물건을 팔기보다는 본디 구경거리가 목적이었으므로 방식이 좀 특이했다. 물건을 팔고 싶은 사람이 직접 나와 자기 물건을 경매에 붙이는데, 경매사가 안내를 하면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 중 아무나 가격을 불렀다. 물론 최종 가격을 불러 놓고 꽁무니를 뺄 방법은 없었으므로 섣불리 끼여들 수는 없었지만, 덕택에 분위기는 쾌 소란스러웠다. 네 번째로 물건을 갖고 나온 사람은 직업적으로 골동품을 모으는 늙은 상인인 듯했다. 시작 가격 자체가 매우 높은 대신 볼만한 물건도 많아서 저절로 주위가 조용해지며 관심이 쏠렸다. 물론 물건들은 하나 둘 부자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팔려나갔다. 보리스는 칼츠 부인이 왔는가 궁금해져서 경매장 안쪽까지 걸어갔다. 마침 늙은 상인이 새로운물건을 꺼낸 시점이었다. 경매사가손나팔을 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자, 이것은! 고상한 장식이 아주 인상적인, 부인네들의 필수품 되겠습니다! 그야말로 궁정에서나 쓸 법한, 덮개 달린 거울입니다! 엄지손톱보다 큰 사파이어가 박혀 있는데 그야말로 진품이지요, 보석 가격만 해도 1천 엘소가 넘을 물건입니다. 완전히 새 것이나 다름없는 그런 물건을 살 사람은 몇 명 없었기 때문에 경매사의 외침은 구경꾼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었다 보리스는 사람들 틈에서 칼츠 부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하인들을 다섯 명이나 이끌고 와 있었다. ”,.한 것이니 약소하게 4천 엘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부인의 모습을 보고 나니 오히려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되었다. 돌아서려던 보리스는 얼결에 경매사가 하얀 천으로 덮은 테이블에 올려놓은 물건을 보고 말았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저것은 예프넨이 갖고 다니던 어머니의 유품이 아닌가! “4천 1백 ” 바로 옆에서 가격을 부르는 어떤 젊은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저것이 저기에 있는 거지? 혹시라도 다른 물건인가 싶어 사람들을 혜치고 맨 앞줄까지 가서 보았지만 틀림없는 예프넨의 물건이었다. 그가 잘못 볼 리가 없었다. “여기 4천 1백 50엘소.” 물건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보리스는 거의 판단력을 상실할 지경이었다. 저것이 어떤 물건이었던가. 예프넨이 단 하나뿐인 어머니의 추억으로 소중히 간직하다가, 죽기 직전에 동생을 위해 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팔았던 물건이다. 틀림없이, 그 물건이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그 시절의 아픈 기억이 송두리째 되살아나 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몇 달 동안의 작은 행복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흡사 죽은 형이 다시 살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저것을 되찾아야 했다. 또다시 남의 손에 들어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아아, 저것을 되찾는다면 죽은 예프넨이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4천 5백.” 넋을 놓고 바라보는 사이 어느새 가격이 올라 있었다. 4천 5백이 불러지고 나서 한동안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보리스는 거의 미 칠 듯한 심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단숨에 높은 가격을 부르고 사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돈이 부족했다. 그에게는 단돈 5백 엘소도 없었다. 4천 엘소나 되는 큰 현금은 아마 부닌 아저씨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 덮개 거울을 사들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팔때는 고작 3백 엘소였던 물건이 사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값이 올라 있었다. 그 때의 그들이 얼마나 시세를 몰랐던가 하는 것도 실감이 났다. 불가능하다고 생각될수록 고통은 커져갔다. 우연으로라도 다시 못 보겠지 싶었던 물건을 발견했는데 당장 사들일 수 없는 자신이 죽고 싶을 정도로 원망스러웠다. 이 정도로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일은 평생 한 번도 없었을 정도였다. 그때였다. “저희 마님께서 얘기하고 싶어하십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칼츠 부인이 보낸 것이 틀림없는 하인이었다. 보리스는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경황이 아니었다. 그러자 하인이 다시 말했다. “마님께서는 혹시 지금 경매되는 저 물건에 관심이 있으신가 궁금해하십니다.” 얼른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 때 낯선 사람이 보리스와 이야기하는 것을 이상하게 본 부닌 아저씨가 가까이 왔다. “무슨 일이냐?” 그 때 하인도 다시 한 번 말했다. “관심이 없으십니까?” 그 순간 텅 비어버린 머릿속에서 갑자기 한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다른 문제는 다 잊어버린 보리스가 급히 물었다. “관심 있습니다. 데려가 주세요.” 부닌 아저씨에게 상황을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덮개 거울의 가격은 이미 충분히 높아졌고, 이제 낙찰자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금 후 거의 마지막이리라고 생각되는 가격이 불려졌다. “4천 6백.” 보리스는 칼츠 부인 앞으로 갔다. 부인은 소녀처럼 생기 있는 미소로 보리스를 맞았다. “저걸 갖고 싶니? 내가 사줄 수 있어.” “그 대신 제가 함께 가기를 원하십니까?” “물론이야.” 그 순간의 보리스는 예프넨의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영혼이라도 팔아 넘길 지경이었다. 자유를 파는 것쯤, 못할 것도 없었다. 결정이 내려졌다. “그렇게 합시다.” 칼츠부인이 경매사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녀의 입에서 거침없이 가격이 튀어나왔다. “6천. 이걸로 끝이겠죠?” 부닌은 보리스의 갑작스런 얘기가 처음엔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대목장의 기분 좋은 술은 이제 다 깨버렸다. 그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정말로, 간단 말이냐.” “,.” 보리스에게도 많은 회한이 남았던 결정이었다. 비록 결정하던 순간에는 망설일 정신조차 갖지 못했지만, 그와레에 남겨두고 가는 아쉬움도 컸다. 열 달 동안 익숙해졌던 조용한 생활을 이런 식으로 접게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네가 좀더 오래오래 있어줬으면 했는데,.” “저도 그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닌은 보리스가 그런 결정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몇 천 엘소라는 돈은 그 역시 대장간이라도 팔지 않는 한 손에 쥐지 못할 거금이었다. 하나뿐인 가족의 유품이라는데, 그걸 가지겠다는 것을 어찌 탓하겠느냐고 말했다. 가족을 잃은 사람으로서 둘은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 후 부닌은 예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다. 사실 네가 이곳에 이만큼이나 머물렀다는 것이 도리어 특별한 일이었던 건지도 몰라. 처음 봤을 때부터 이런 시골에서 조용히 살아갈 만한 녀석 같지 않았거든. 좋은 곳으로 간다니 내 마음도 좋구나. 가서 안부 전해라. 상창이 달라지거든 언제든지 돌아와도 좋다는 건 알고 있지?” 출발은 당장 내일 아침이었다. 그 날 저녁 보리스는 가진 돈을 대부분 털어 비단 장갑을 한 켤레 사서는 토냐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토냐 역시 갑작스런 결정에 당혹을 금치 못하는 얼굴이었다. 보리스는
선물을 내놓으며 말했다. “혼인 잔치 하시게 되면 꼭 부르세요.” 어색한 미소밖에 보일 것이 없었다. 처음 왔던 때처럼 갑작스럽게 그렇게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토냐는 눈물이 나는지 제대로 된 인사말도 해주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5년 전에 그랬듯 보리스는 다시 한 번 아노마라드로 가는 낯선 사람들의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럼 내가 가르쳐 줄까?” “아니. 관심 없어.” 하얀 돌로만 지어진 환한 테라스에 늦봄의 햇살이 반짝였다. 바닥에는 청색과 백색의 관상용 돌멩이가 죽 깔렸고 난간 쪽에는 크고 길쭉한 잎을 가진 녹색식물이 심어져 그늘을 이루었다. 일반적 저택의 방 하나에 맞먹을 정도로 넓은 까닭에 하얀 테이블 주위에는 의자가 다섯 개나 나와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라고는 하인 하나와 두 소년이었다. 테이블에는 색색빛깔 과일에 건포도를 넣어 구운 과자며 달콤한 푸딩 따위가 그릇이며 접시마다 가득했다 꽃무의가 든 찻주전자에서 약한 김이 올랐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손댄 기색이 없었다. “파티도 싫고, 시장 구경도 그저 그렇고, 인형극 구경도 시들하고, 맛있는 것도 찾지 않고, 마법에도 관심 없고, 카드놀이도 모르고, 도대체 좋아하는 게 뭐니?” “별로.” 루시안 칼츠는 ‘뭐 이런 일이 다 있지’하는 표정으로 양손을 펼쳐 올리며 잔뜩 쳐든 턱을 한 바퀴 돌렸다. 어머니인 칼츠 부인이 보리스를 붙여 준 이유를 모르는 루시안은 어머니가 또래 친구를 데려왔다고 했을 때 어떤 녀석일까 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이렇게 재미없는 녀석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실버스컬에서 우승하는 걸 봤을 땐 멋있어 보였지만 같이 놀기엔 영,. “아참, 그렇지! 넌 실버스컬 우승자잖아! 검술이라면 분명 좋아하겠지?” 좀 떨어진 곳에서 테라스 난간에 기댄 채 바깥 풍경을 보고 있던 보리스가 루시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야말로 보리스의 관심을 끌었구나 하는 생각에 루시안은 신이 나서 눈을 반짝였다. “나도 옛날에 좀 배웠거든? 그럼 우리 대련할까? 응?” 보리스는 루시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쪽 입술을 올리며 미소했다. 수락한다는 의미였다. “좋았어! 그럼 좀만 기다려. 야, 바나나! 가서 검술 연습장 치워놨냐고 물어봐, 얼른!” 루시안은 분주히 하인을 떠밀다가 무심코 과자도 한 개 집어먹고, 다시 떠들다가 목에 걸려서 기침도 하고, 과자를 녹이려고 차를 따라 마시다가 뜨겁다고 비명도 지르고, 그러다가 갑자기 검술 연습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어야겠다고 생각해 내고는 저택 안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런 루시안을 보고 있던 보리스는 입끝을 점차 많이 올렸고, 모두가 사라졌을 즈음 드디어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하,.” 웃음소리를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뭇가지의 새들만이 푸드덕 날아갈 뿐이었다. 아노마라드 남부의 한 전원에 위치한 드메린 칼츠의 대저택에 온지 어느덧 닷새가 흘렀다. 고풍스런 벨노어 성과는 달리 실용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최신식을 강조하여 지은 이 대저택은 놀랍게도 대부분 1층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위층이 있는 것은 중앙에 쌓은 4층뿐이었고, 그 탑을 중심으로 1층뿐인 건물들이 미로에 가까울 정도로 넓게 이어져 있었다. 보리스도 이 집의 구조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익숙해지기 힘들었던 것은 루시안 녀석의 성격이었다. 보리스는 이미 루시안을 두 차례에 걸쳐 만난 일이 있었다. 한번은 렘므로 넘어가기 위해 로젠버그 관문으로 가던 길목에서, 또 한번은 물론 실버스컬 대회장에서였다. 대강 무책임할 정도로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녀석이란 것은 짐작했는데, 직접 대해보니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무모함도, 넘쳐흐르는 활기도 보리스의 상상 이상이었다. 상상 이상이란 좋은 의미가 아니고,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조금 거리를 두며 자신이 말려들지 않도록 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볼수록 재미있었다. 이곳은 루시안의 집이고 보리스는 일의 고용인이니 권위를 세우려면 그것도 가능하고, 명령조로 자기식에 따라오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루시안은 그런 방법을 몰랐다. 오히려 손님이라도 부른 것처럼 자기 쪽에서 재미있게 해주려고 굉장히 머리를 쓰고 있었다. 예전 보리스와 란지에의 관계와는 전혀 달랐다. 아니, 그런 식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해도 보통 자신과 정반대로 보이는 상대를 만나면 와락 뛰어들기보다는 물러서서 떠보려고 하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지 알아보지도 않고 첨벙 뛰어드는 개구쟁이처럼 모든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구김살 없는 성격이라고는 해도, 실은 조금 지나치다. 나쁜 의미에서 지나친 것이 아니라 이처럼 큰 부자의 집에서 외아들로 귀하게 자란 아이치고는 조금 이상한 성격이라 할만했다. 그렇게 죽 생각하던 보리스는 자신이 왜 저 녀석의 일에 이렇게 마음쓰는거지,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얏, 찾아냈어! 자 보라고. 이건 레이피어(rapier)야. 너도 알지? 나 이거 어렸을 때 꽤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요샌 잊고 있었거든?.” 옷을 갈아입고 달려온 루시안이 보인 검은 날이 매우 가늘고 끝이 뽀족한 가벼운 검으로 사실 보리스의 검과 맞대련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순순히 응하여 함께 검술 연습장이란 곳으로 갔다. 복잡한 복도와 방을 여러 개 지나 남쪽 건물들 쪽으로 가서야 겨우 천장이 환하게 뚫린 널찍한 방에 이를 수 있었다. 한쪽 벽을 보니 연습용 검이 여러 개 걸린 것이 보였다. 그 중에 루시안의 것과 비슷한 것을 하나 골라잡았다. “어라? 네가 쓰던 검은?” “네 검과는 격이 맞지 않으니까 시작할까.” 일부러 날이 무딘 것으로 골라잡은 보람이 있었다. 루시안은 오랫동안 검을 잡지 않은 것인지 동작부터 서툴러져있어 금방 실수를 연발했다. 보리스의 검이 루시안의 팔에 가볍게 몇 번 명중했지만 상처는 전혀 나지 않았다. “에이 나도 예전엔 잘했는데! 나도 다시 검술 배운다고 해야겠다. 바나나! 가서 선생님 좀 구해달라고 아버지한테 말씀드려 둘래?” 루시안에게 ‘바나나’라고 불리지만 본명은 ‘바나다’인 하인은 옆에서 하품을 하며 대꾸했다. “주인 어른께선 안 믿으실 게 뻔합니다요. 도련님의 변덕이 어디 한두 번이었어야죠. 그렇게 불렀다가 채 사흘도 안 되어서 다시 내보낸 선생님이 벌써 몇 분입니까? 주인 어른 아니라 저부터도 안 믿겠습
다요.” 보통 부잣집 도련님 같으면 대뜸 야단치고도 남을 말이었지만 루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간단히 수긍해버렸다. “그런가? 그럼 조금 더 생각해 보는 편이 좋을까? 그렇지만 목이 말라! 바나나, 가서 음료수 좀 가져다 줘.” “그럽죠, 도련님.” 바나다가 복도를 통해 멀어지자 갑자기 루시안은 검을 거두고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넌 어디서 그렇게 멋진 검술을 배웠니? 처음부터 잘 했던 건 아니겠지? 몇 살부터 배운 거야?” 루시안이 한꺼번에 여러 가지 물을 때는 전부 대답할 필요가 없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구나 처음엔 스승이 필요한 거야.” “그럼 네가 나 좀 가르쳐 주면 안될까?” 보리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루시안은 실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 뻔하니까,” “잘 들으면 가르쳐 줄 거야?” 보리스는 무표정하게 하인이 한 말을 인용했다. “못 믿겠는데,” “뭐야! 넌 우리 집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나를 못 믿겠다는 거야? 난 말야, 아버지나 어머니가 날 못 믿는 건 이해해. 바나나 녀석이 못 믿는 것도 이해하지. 그럴 만 했거든. 그렇지만 넌 내 방식을 자주 본 것도 아니고 아직은 나를,. 뭐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듣고 있던 보리스는 웃지도 못하고 그냥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꼬인 말을 되 다듬으며 궁리하던 루시안이 갑자기 외쳤다. “에잇, 좋아! 말을 잘 듣기로 맹세할 테니까 가르쳐 달라고!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고 그래야 재미있는데 내가 지기만 하니까 너도 재미없고 나도 재미없잖아? 뭘로 맹세할까? 음, 맹세장을 써 줄까?” ‘팽세장’이라는 말은 평소 아버지의 입에서 얻어들은 ‘위임장’, ‘임명장, ‘고소장’ 등등을 바꿔서 방금 급조한 말이었다. 스스로도 말이 되나 싶어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는데 보리스가 입을 열었다. “종이 같은 건 필요 없고, 약속하고 싶다면 이렇게 하자. 하루에 한 번 한 시간씩 연습, 어길 때는 그 랄 하루 종일 나를 형이라고 부르고 형답게 대하는 거다. 할수 있겠어?” 루시안은 매일 한 시간씩 연습이라는 대목에서 좀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낙천적 성격답게 곧 외쳤다. “좋아!” 보리스는 잠시 말없이 루시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보리스보다 키가 조금 작은 루시안은 금빛 눈썹을 장난스럽게 번갈아 일그러뜨리고 있다가 자기도 보리스를 올려다봤다. 더 시간이 흐른 뒤 보리스가 말했다. “왜지?” “왜라니? 뭐가 왜야?” 루시안은 보리스의 엄숙한 얼굴을 보자 두손을 들어 ‘얼굴풀어’라고 말하듯 얼굴 앞에서 위아래로 흔들어댔다. 그러나 보리스는 웃지 않고 물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번거로운 일을 감수하면서 이 검술을 배우려는 이유가 뭐냐는 거지.” 그러자 루시안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가 검술말고 다른 것은 재미없다면서?” 기분이 묘했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정말로 루시안에게 검을 가르치게 되고 말았다. 지금껏 누구를 가르치려는 마음을 먹어본 일이 없었고, 더구나 이곳에 올 때는 꼭 필요한 일만 하면서 이들과 어울리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아노마라드에 와서 겪었던 달갑지 않은 추억들 때문인지, 그는 아노마라드 사람의 풍요로운 무신경함을 싫어했다. 그리고 루시안은 어찌 보면 그런 성품의 전형이라고 할 정도로 걱정도 없고 모든 행동이 거침없는 소년이었다. 그런 녀석에게 뜻밖의 약속을 해버리게 된 것이다. 혼자 있게 되었을 때 자신의 마음을 몇번이나 돌아보려 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보리스는 마치 나우플리온이 벨노어 저택에서 그를 제대로 가르치기 시작한 후로 한 것과 비슷한 고민을 하며 이틀을 보냈
다. 생각 외로 루시안은 꽤 오랫동안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연습을 했다. 그러나 보름 가량이 지나자 결국 변덕이 재발하고 말았다. “오늘은 가야 될 데가 있어. 오늘만 빠지자, 응? 그 대신! 오늘 하루 형님이라고 불러줄게. 자, 형님!” 판단 착오였다. 유감스럽게도 부잣집 귀한 도련님인 루시안은 쓸데없는 자존심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형이라고 부르는 것쯤, 백 번이라도 해주겠다는 태도로 싱글거리는 것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보리스가 온 이후로 떼어놓아도 상관없게 된 하인 바나다에게 손을 흔들며 낮잠이라도 자라고 말해 주는 등 각종 아량을 베풀던 루시안은 이윽고 마구간으로 가서 말 두 필을 끌어내라고 명령했다. 마구간지기는 왠지 모르게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또 어디,. 멀리 가십니까?” “응, 말 타고 이 근처 한 바퀴 돌아보려고.” “산책이십니까요,.?” 루시안의 애마는 손질이 잘 되어 털에 윤기가 흐르는 갈색 말이었다. ‘형님’한테는 검은 말이 어울릴 거라며 보리스가 탈 말도 직접 골라 주었다. 마구간지기의 걱정스런 눈길을 뒤로 하고 둘은 저택을 출발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응, 저기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데야. 도시 구경 가.” “아까는 근처를 돌아본다고 하지 않았어?” 보리스는 루시안이 거짓말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루시안은 좀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그러다가 멀리 가볼 수도 있는 거지 뭐. 안 그래?” 한 시간 가량 달려 도착한 곳은 아모치아라는 소도시였다. 파노자레 산맥에서 채취되는 진귀한 약초들을 파는 장이 한 달에 한 번씩 열리기 때문에 외지에서 모여드는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특히 마법 시약을 만드는 진귀한 약초들을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으로도 이름이 났는데, 그것은 아모치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륙 최고의 마법 학원이라고 불리는 네냐플(Nenyaffle)에서 설치한 시약 제조소가 있어서 안정적인 수요처가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루시안은 익숙한 걸음으로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더니 어느 잡화상 입구에 이르러 멈추었다. 보리스의 눈치를 좀 보는 듯했지만 결국 안으로 들어갔고, 안에는 다섯 명의 젊은 사내들이 모여 앉아 있다. 루시안을 보자 반색을 했다. “아이고 어서 오십쇼, 루시안 도련님. 오늘은 친구분도 데려오셨군요?” 보리스가 죽 둘러보니 사내들은 루시안 앞에서 비굴할 정도로 미소를 짓고 있긴 했지만 그리 질 좋은 사람들로 보이지 않았다. 잡화상처럼 보였던 이 가게도 좀 두리번거리니 일상적으로 쓸 법한 물건들은 별로 없고 골동품처럼 보이는 이상야릇한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꽤 좁고, 퀴퀴한 냄새까지 났다. 루시안은 씩 웃더니 말했다. “친구가 아니고 ‘형님’ 이야. 어쨌든 구경만 할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럼 얼른 가자. 시간이 별로 없어.”’‘형님’ 이라는 말에 사내들이 의아한 눈초리로 보리스를 보았지만 금방 관심을 거뒀다. 사내들은 가게 안쪽의 쪽문으로 나가더니 다시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어느 큰 집 처마 아래에 난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고 보니 그곳은 십여 개의 테이블이 놓인 널찍하고 고급스런 홀이었다.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