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 (Shin Yun-hee) RAW novel - chapter 115
“세상 모든 내외지간이 저희 부모님처럼 다정할 수야 없다지만, 숙부와 숙모는 너무 데면데면하신 거 아닙니까?”
어김없이 완이 거들었다. 그제야 화령군이 맞받아쳤다.
“완이 너, 말 잘했다. 형님 내외의 사이는 세상에 둘도 없이 유별난 것이니 우리 내외하고는 비교하지 말아라! 아니, 세상 어느 내외를 갖다 대 보거라. 너희 부모 같은 내외지간이 또 있는지!”
“그렇죠. 저희 부모님은 너무 지나칠 정도로 금슬이 좋으시죠. 맞아요. 과유불급이라 했으니 그것도 과히 정상은 아닙니다.”
화령군의 열변에 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수가 제 아우를 두고 제 숙부의 역성을 들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내외지간이 숙부 내외처럼 서먹서먹해서야 말이 됩니까?”
“그렇게 숙모를 멀리하실 거면 무엇 하러 굳이 혼인을 하셨습니까?”
다시 두 녀석의 협공이 시작되자 화령군은 삽시간에 전의를 모두 상실했다.
“어여쁘신 숙모님 얼굴에 주름이 패면 그건 모두 숙부의 탓입니다.”
“꽃처럼 아름다우신 분 그냥 두었더라면 더 좋은 배필을 만나셨을 것을.”
영특한 두 조카와 입씨름을 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진즉에 깨우쳤으면서도 무의미한 반항을 해 보았던 화령군은 되로 주고 말로 받고 말았다.
“초연(初緣)도 아니신 분이 어찌 그러하신지.”
“그러게 재혼은 신중하셔야 한다고 그리 말씀드렸건만.”
“숙모님 미색에 홀딱 반해서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시더니.”
“숙모님 때문에 가슴앓이하던 시절은 벌써 잊으셨나 봅니다.”
그러다 수와 완이 한숨까지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자 화령군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차마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어린 조카들의 말이 모두 옳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로서도 억울한 측면이 있지만, 그 내밀한 속사정까지 어린 조카들 앞에서 털어놓을 수야 없지 않은가.
“아무리 어렵다고 하셔도 평생을 함께할 반려이신데 좀 가까워지도록 노력을 하셔야죠.”
“부부는 비익연리(比翼連理)라 하지 않습니까.”
“한 새가 눈 하나와 날개 하나만 있다면 어찌 능히 하늘을 날겠습니까?”
“그러시다 영영 멀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조카들 맹공에 화령군이 숫제 정신을 놓아 버리려는 절체절명의 순간, 그를 구원하는 힘찬 음성이 들려왔다.
“어이, 꼬맹이들! 어머니가 찾으신다!”
훤칠하게 잘생긴 호리호리한 청년은 아이들의 외삼촌 문원우였다. 갓 소년의 태를 벗어난 방년의 나이로 사내다우면서도 또한 곱상한 얼굴이 무척이나 미목수려했다.
“삼촌 정말?”
“지금?”
외삼촌의 말에 반색하는 수와 완의 말투는 도로 제 나이 또래다워졌다.
“그래. 얼른 가 봐.”
원우가 그저 가볍게 고갯짓 한 번 했을 뿐인데도 집요하게 제 숙부를 괴롭히며 심술부리던 두 아이는 짹짹 지저귀는 작은 참새들처럼 안채를 향해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와, 신난다!”
“와아!”
흥분해서 달려가는 아이들 뒷모습을 보고 원우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화령군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사돈어른은 또 여기서 저 녀석들에게 놀아나고 계셨습니까?”
“사돈도령!”
그야말로 화령군은 원우를 보며 구사일생의 안도감을 느꼈다.
“제가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저 녀석들 도발에 절대로 휘말리지 마시라니까요.”
“하지만…….”
“저 녀석들, 요즘 제 아우들 때문에 매형이 안채 출입을 계속 통제해 심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직도?”
“아직도가 뭡니까? 매형 성정을 몰라서 이러십니까? 안채에 지금도 금줄이 쳐 있습니다.”
“뭐? 금줄이?”
원우의 말에 화들짝 놀란 화령군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수와 완을 낳고 근 십 년 만에 다시 제 형수가 아이를 낳은 것이 지난 동지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첫아이들에 이어 또다시 쌍둥이 남아들을 낳았으니 몸조리에 각별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삼칠일은 물론 아이들 백일도 얼마 전에 분명히 지났다.
그런데 아직도 금줄이라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혹여 그새 형수님 건강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문제가 생길 게 무에가 있습니까?”
“그런데 어찌?”
“어찌 그러겠습니까? 수와 완이 때처럼 누님이 고생할까 싶어서 지레 겁먹은 매형이 설레발이신 게죠!”
여락재의 가주인 수와 완의 아버지는 세상 그 무엇보다, 제 목숨보다 더 안해를 아끼는 사람이었고, 그 안해가 모든 것에 우선하였으니 자식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또한 그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아, 그랬구먼. 그래도 아직까지 금줄이라니 형님도 참……. 그래, 정말로 수하고 완이도 여태 안채에 잘 드나들지 못하는가?”
“정말 몰라서 물으십니까?”
원우가 되묻자 화령군은 제 질문이 어리석었다는 걸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 형님이 어떤 분이시던가! 자기 안해의 일이라면 천하에 둘도 없는 고집쟁이에 미련퉁이가 되어 버리는 분이시니 어린 자식들이라 하여도 형수님 곁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을 게 뻔하다.
작년에 형수의 임신을 확인한 이후로 최고의 명의와 의녀를 찾아서는 아예 여락재에 상주하도록 한 형님이 아니신가.
“하여 낮이면 그만저만 잘 지내다가도 밤만 되면 제 어미 보고 싶다고 울고불고하는 통에 저희 어머니께서 저 녀석들 달래느라 병이 다 나셨을 정도란 말입니다.”
“저런, 안사돈께서 참으로 고생이 크시겠구먼.”
쌍둥이를 끔찍하게 아끼는 아이들의 외조모인 연숙은 오래전에 모진 고초를 겪은 후로 퍽 오랫동안 요양을 해야만 했다. 여락재의 가주인 그녀의 사위는 제 안해를 위하는 것과 똑같이 제 장모를 위하였으니, 넓은 대륙 곳곳을 샅샅이 뒤져 명의를 데려다 제 장모를 돌보게 하고, 온갖 좋다는 천하의 명약을 구해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끼마다 복용토록 하였다.
또한 아픈 딸은 제 몸보다 더 어머니를 걱정하여 애써 살피고, 아들도 지극정성으로 어머니를 위하였으니 몇 년이 흐르자 마침내 연숙은 건강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연숙의 늘그막에 있어 가장 큰 기쁨은 딸이 제 목숨을 걸고 낳은 두 손주, 수와 완이었다.
연숙은 여락재의 큰살림은 물론, 가주인 제 남편과 함께 마을의 정착민들을 돕느라 바쁜 딸을 대신해 기꺼이 어린 손주들을 직접 돌보았다.
그러나 말과 달리 어린 손주들을 틈만 나면 업고, 안고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두 아이가 먹고, 입는 하나하나까지 모다 손수 챙기려는 연숙을 보며 그녀의 사위가 근심스레 말했다.
사위의 근심에 그리 장담했던 연숙이었지만, 아무래도 근자에 들어서는 부쩍부쩍 자라나는 두 개구쟁이를 감당하기가 녹록지 않았다. 게다가 제 아비의 안채 통금 명에 두 녀석이 잔뜩 뿔이 나서 심통을 부리는 통에 더욱 힘에 부쳤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화령군에게 말해 무엇하겠느냐는 표정으로 원우가 경고했다.
“그러니 여락재에 머무시는 동안 저 악동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어느 아이가 안 그렇겠느냐만 수와 완, 두 아이는 유독 어미 품을 좋아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거의 유모와 외조모의 손에 키워지다시피 했다. 원래 허약했던 어미가 난산 끝에 두 아이를 낳고는 퍽 오래도록 몸조리를 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어미야 금보다 옥보다 귀하고 한없이 사랑하는 아이들을 제 품에서 한시라도 떼어 놓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하기 짝이 없는 아비는 그걸 결단코 허용치 않았다.
그러다 대여섯 살 무렵이 되어 겨우 어머니가 건강해져서 온종일 그 품에서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게 되었으나, 날마다 밤이 되면 아버지에게 내쫓겨야 했다.
아직 일곱 살이 되기도 전이니 남녀의 구별이 없을 때였다. 그러나 나어린 자식에게도 가차 없는 아비였다.
어미와 함께 자지 못하는 것이 못내 서러워 밤마다 할머니 품에서 울다 잠이 들었으나, 그래도 아이들은 아버지 없는 낮 동안은 향기롭고 달콤한 어미 품에서 행복하였다. 그러다 작년에 어머니가 아우들을 임신하게 되면서 또다시 그 품을 빼앗기고 말았다.
혈기왕성한 두 녀석을 상대하느라 자칫 기력이 쇠하면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청천벽력 같은 아버지의 명이 원망스러웠으나, 수와 완도 아버지 못지않게 저희 어머니의 건강과 안위를 간절히 바라는 터라 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해산 전부터 시작된 출입 통제가 이미 다섯 달을 넘어가고 있으니 가슴속에 불만이 쌓일 대로 쌓여서 건드리면 곧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두 녀석의 심술이 여락재는 물론 마을 곳곳에 퍼지고 있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참이었다. 그런데 성정이 유하며, 그 기질이 온후하고 무른 편인 화령군은 수와 완, 두 녀석의 심술의 대상으로 딱 안성맞춤이니 더욱 조심해야만 했다.
“알았네.”
고개를 끄덕이던 화령군이 원우의 차림새를 보고 물었다.
“한데 사돈도령은 어딜 나가시는가?”
“포구 과물전에 갑니다. 어제 들어온 배로 파사국(波斯國)의 석류라는 과일이 왔다 해서요. 마게타국(摩揭陀國)과 탁사국(吒社國)의 과일도 들어왔다 하니 가서 한번 살펴보라고 매형이 그러십니다.”
“그래? 하면 나도 함께 가도 되겠나?”
아직 여장 그대로인 화령군을 보며 원우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아무리 바람이 좋았다고 해도 예까지 오는 데 뱃길로 보름은 걸렸을 것이다.
“오자마자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아닐세. 내 금세 형님과 형수님께 인사만 드리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시게.”
화령군은 비록 저보다 나이는 열 살 가까이 어리고 가깝고도 멀다는 사돈지간이라도, 죽이 잘 맞는 원우와 함께 포구로 나갈 생각에 벌써 들뜬 표정이었다. 그러다 원우의 말에 금세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화령군 대감, 이번에는 군부인이 또 뭐라 하셨기에 이리 오신 겁니까? 아니, 뭔 말을 하기는 하셨습니까?”
역시 그 쌍둥이 녀석들의 외삼촌이었다. 에두르지 않고 정곡을 콕 찌르는 솜씨가 조카들보다 더 예리하면 예리했지 결코 조금도 무디지 않았다.
“뭐라 하기는…….”
“대감, 군부인께서는 솔직하며 담박하신 성정입니다. 그 마음에 무엇을 숨겨 두고 재고 따지는 분이 아니시니, 그분 하신 말씀을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원우는 작년 가을에 화령군과 혼례를 올린 군부인 민 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 바닷가 포구 마을에서 함께 자란 동무였기 때문이다.
지난봄, 여느 때처럼 여락재로 찾아왔던 화령군은 어릴 적부터 보아 오던 깡마르고 눈만 커다랗던 훈장의 어린 딸이 아리따운 처녀로 자란 것을 발견하고 당황했다.
화령군은 예정했던 것보다 더 오래 여락재에 머물렀다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다시 돌아와서는 여름 내내 그 민 씨 처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다 마침내 여름의 끝자락에 이르러서 그녀가 제 병든 어머니와 어린 아우들을 위해 나이 많은 관리의 후처로 들어가려 작심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분개한 화령군이 민 씨 처녀를 설득하던 끝에 작은 소동이 벌어지고 말았다.
해당화처럼 고운 민 씨 처녀가 중늙은이에게 시집가겠다는 것을 말리는 이유로는 궁색하였으나, 화령군은 끝끝내 밀어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