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Of Witches RAW novel - Chapter (1130)
EP.1136 #269_소유와 무소유(5)
#1130
1.
인간관계란 때론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걸 요구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엘로아가 시우의 연인이자, 동시에 스승님인 것처럼 말이다.
엘로아는 시우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
세상이 그를 적으로 돌려도 엘로아만큼은 망설임 없이 그의 편에 설 만큼.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제 심장을 꺼낼 수 있을 만큼.
시우가 어떤 잘못을 하건, 응석과 어리광을 받아주고 싶을 만큼 말이다.
그게 아마도 ‘연인’ 엘로아 티페레트가 보여주는 모습이겠지.
그러나 앞서 말했듯 엘로아는 시우의 스승님이기도 하다.
제자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려 할 때 단호하게 회초리를 드는 것.
오냐오냐만 하지 말고 잘못을 훈계하는 것.
이게 바로 스승이 갖춰야 할 덕목이다.
“후우우….”
엘로아는 창틀에 턱을 괸 채 긴긴 한숨을 쉬었다.
밤새 내린 눈에 소복소복 덮인 유리창 위로 뽀얀 김이 서렸다 사라진다.
사랑스러운 제자는 얼마 전 페리윙클과 불륜을 저질렀다.
한 번의 실수라고 해도 이견의 여지가 없이 엘로아가 엄하게 꾸짖어야 할 잘못이었다.
물론 페리윙클의 묘한 수작이 있었음을 들었다.
엘로아가 처음 ‘성’에 눈을 뜨게 된 계기가 페리윙클과 시우의 폭풍 교미 엿보기(강제)였던 만큼 두 사람이 과거 어떤 관계였으며, 어떤 식으로 지내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옛 섹스파트너’ 쯤이 되겠지.
페리윙클에 대한 질투는, 정말 놀랍게도, 딱히 없다.
당장 엘로아 자신부터가 스승님이면서 연인이 되겠다는 당돌한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던가?
더하여 페리윙클이 시우에게, 엘로아를 포함한 연인들에게 갚지 못할 은혜를 베푼 만큼 그녀를 비난하거나 공격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시우는 다르다.
사랑스러운 제자는 분명 ‘더는 연인을 늘리지 않겠다’라고 약속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기에 약속인 법이고, 약속을 어기는 건 신뢰의 상실을 의미한다.
도로시만 해도 그의 행실에 무척 속상해하지 않았던가?
연인 관계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신뢰를 저버린 시점에서 엘로아는 스승으로서 시우를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아아아….”
엘로아는 조금 전보다 더 길어진 한숨을 쉬며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었다.
시우가 바람을 피우고 걸린 그날.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약 30분간 시우를 단단히 꾸짖은 엘로아는 지엄한 벌을 내렸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날 찾아오지 말게. 이건 벌이라네. 잘못을 곱씹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게나.’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스승님 접근 금지’ 7일형.
이는 시우를 향한 벌임과 동시에 엘로아에게도 혹독한 일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오는 그를 볼 수 없는 것.
같은 저택에 머물면서 5분 거리에 있음에도 그를 만날 수 없는 것.
밤에 사랑을 나눌 수 없는 것까지 포함하여 엘로아에겐 무척 힘든 일이었다.
하물며 마지막에 본 시우가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면 말이다.
“너무 험하게 말한 것은 아닌지….”
워낙 많고 대단한 일을 해내서 가끔 망각하지만 시우는 아직 어리다.
갓 서른을 넘긴 꼬꼬마다.
작은 실수를 너무 험하게 꾸짖고 가혹한 처사를 내린 건 아닐까?
그의 마지막 표정이 눈에 아른거려 당장에라도 가서 위로해주고 싶다.
“아닐세. 그렇기야말로 더욱 바른길로 이끌어야지. 그게 스승의 의무이니 말일세.”
엘로아는 고개를 붕붕 흔들며 혼잣말로 마음을 다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스멀스멀 걱정이 다시 샘솟는다.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겐가?”
하지만 결국 또 이렇게 창문을 하염없이 지키며, 하루종일 시우가 있는 학회장실 쪽을 바라보고 마는 것이다.
자나깨나 제자가 걱정되는 스승님이었다.
그때.
-벌컥!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홍 머리카락 위로 두 귀가 쫑긋 위로 솟는다.
이 발걸음 소리는 분명 시우의 것.
엘로아의 가슴이 쿵쾅쿵쾅 두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시우.”
시우다.
사랑스러운 제자다.
아직 징계가 끝나기까진 며칠이 남았지만 그가 엘로아의 숙소로 찾아왔다.
그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두둥실 날아오를 뻔했던 엘로아는 다급히 스승님 페르소나를 되찾았다.
안된다.
응석을 받아주면 안 된다.
분명 일주일이라고 했는데 멋대로 약속을 어긴 제자.
경우에 따라선 더 크게 혼내야 했다.
물론 반성하는 기색이 충분히 보일 경우….
용서할 의향이 아주 없지는 않다고만 말해두겠다.
“스승님.”
엘로아가 하루 중 90% 이상 머무는 침실 문까지 벌컥 열리더니 시우가 들어왔다.
이번에도 삐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내린 엘로아가 근엄함을 유지하며 물었다.
“시우, 내 분명 일주일 동안 찾아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겐가?”
“페리윙클 님에게 질내사정할 겁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엘로아는 반사적으로 시우의 형량을 책정했다.
‘스승님 접근 금지’ 30일 형.
엘로아는 그만 울고 싶었다.
2.
“제가 너무 급하게 말을 했는데…. 이렇게 된 겁니다.”
놀라다 못해 넋이 나갈 뻔했던 엘로아지만 사정을 듣고보니 화낼 일도, 꾸짖을 일도 아니었다.
시우는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보면 도와주려 든다.
누군가는 그것을 호구끼가 짙다고 느끼겠지만 그의 다정함과 상냥함에 구원받은 인연이 얼마나 많던가?
“물론 제 욕망을 채우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딱 페리윙클 님의 자성마법을 해석하는 단초를 마련하려는 거죠.”
마법 복제는 1인 1회 한정 랜덤이다.
어떤 마법을 골라올지도 돌려돌려 돌림판이다.
통제를 포기하고 켠켠이 쌓아올리길 선택한 페리윙클의 마법 특성상 단 하나만을 뽑아온다면 뭘 뽑아도 ‘꽝’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녀의 자성 마법은 20개의 조각 전부가 모여야 의미가 있으니 말이다.
추측컨대 아주 약간 운이 좋아지는 정도에 그치지 않을까?
그럼에도 이 작업은 중요하다.
특정 자성마법을 다룰 때 0부터 시작하는 것과 1부터 시작하는 건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기초가 부실하던 야매 마녀 출신이던 시우가 다양한 분야를 폭넓게 이해해야 하는 기초학과장을 도맡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
설명을 들은 엘로아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오해는 풀렸지만 그의 말을 쭉 듣고 있자니 새로이 염려할 게 생긴 까닭이다.
“괜찮겠는가?”
그레텔의 진단, 그리고 예언을 종합해보자면 시우가 내면의 무의식에 잡아먹히기까지 남은 슬롯은 단 두 개.
즉, 마법 복제가 가능한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시우도 그 점에 대해서는 유념하고 있으며, 다름 아쉬움도 있다.
자성마법 중 하나를 복제해 올 수 있다는 건 어마어마한 파워업 이벤트다.
조금 쓰레기처럼 들리겠지만 헤세드 학회장으로서 지위를 이용해 좋은 먹잇감을 물색한다면 껑충 도약하는 것도 가능할 터이다.
지금 당장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도 언젠가 오늘의 선택이 아쉬워질 수도 있겠지.
몸을 아예 빼앗기길 각오하지 않는 이상 더는 무의식에 의존할 수 없게 되는 것도 부담스럽다.
연꽃도 없으니 이젠 정말 혼자만의 힘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다.
세상 일이란 게 아무도 모르지 않던가?
노예 생활하며 3년 뒤 지금처럼 소중한 연인들과 함께하게 될 줄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네, 각오한 바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합쳐도, 페리윙클 누님을 도와주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멋대로 결정 내려놓고 뭘 묻는 겐가?”
“그래도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엄격한 스승님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애쓰는 엘로아지만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듯, 제자 이기는 스승도 없는 모양이다.
“알겠네, 시간이 남는다면 식사라도 들겠나?”
“오, 스승님 특제 요리인가요? 메뉴가 뭔가요?”
“…맛있는 토끼라네.”
“음, 토끼 맛있죠.”
군침을 다시던 시우의 손을 들어 올린 엘로아가 손가락을 입안에 쏘옥 넣고 우물거렸다.
말캉말캉한 혀와 쫀득한 입술, 손마디를 살살 깨무는 이빨의 감촉이 퍽 선정적이다.
“…아.”
“…….”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아직 며칠 남은 징계기간이지만 엘로아는 유야무야 그 일을 넘겼다.
시우도 이 정도면 충분히 반성했을 것이라 믿으며 말이다.
결코 그간의 별침이 힘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날 점심.
시우는 스승님의 토끼 풀코스를 아주 맛있게 먹어치웠다.
3.
끝내 단절로 끝난 그날의 대화를 끝으로 시우는 페리윙클에게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요 한달 간은 거의 한날한시에 자고 일어났던 만큼 뜻밖에도 적적함이 컸다.
“잘됐지 뭐.”
페리윙클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받아들였다.
제 딴엔 거리를 둔다고 생각했는데, 내심 그를 의식하고 신경 쓰고 있던 게 분명하다.
고작 며칠 안 본 사이에 허전함을 느낄 만큼이나 말이다.
“몸정이라도 든 건지 원….”
위험했다.
선을 명확하게 긋고 있는 만큼 경계선 너머 스며들듯 이어지는 관계가 얼마나 위험한진 페리윙클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만약 시우가 ‘해결해주겠다’는 식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저도 모르게 그를 의존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르지.
인간의 마음이란 건 오랜 세월 동안 마인드컨트롤을 통해 마법을 통제해온 페리윙클에게조차 복잡한 것이니.
그 끝엔 아마도 비슷한 형태의 비극이 있을 것이다.
페리윙클은 마지막으로 짐가방을 확인했다.
시우가 건네주기로 한 미스틸테인도 사양할 것이며, 관념과 학부장직도 사임할 것이다.
현세로 떠날 생각이다.
당분간 호화로운 호캉스 생활이나 보내면서 복잡해진 머리를 비워야지.
“…그래도 마음은 고맙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시우 혼자서라도 미스틸테인 연구를 이어갈 수 있게 최대한 자료를 모아 정리해 두었다.
그 위에는 개인적으로 준비한 선물을 짧은 편지와 함께 남겨두었고 말이다.
“페리윙클 님, 실례하겠습니다.”
엘로아 이후에도 연인들을 찾아가 설득한 시우가 그녀의 저택(도시법을 피해 아슬아슬할 정도로 현대식 인테리어를 구축한)을 찾았을 땐.
고마워.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은 없겠지만 잘 지내.
그대의 발걸음에 행운이 가득하길.
밥 잘사주는 예쁜 누님으로부터.
간발의 차이로 텅 빈 저택과 그녀가 남긴 짧은 편지만이 반겨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