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Of Witches RAW novel - Chapter (923)
EP.929 #202_미아(3)
#923
1.
가뜩이나 꼬여가는 상황 속 리디아는 실로 갑작스러운 손님이었다.
이 드넓은 아파트 단지에서 콕 찍어 은신처를 방문했다는 건 다 알고 왔다는 의미다.
문전박대하고 모른 척 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그녀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귀염둥이, 오랜만이야?”
단발로 깔끔하게 쳐낸 짙은 금발.
금화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눈동자.
팔꿈치 바로 아래까지 오는 하얀 장갑과 드레스.
마지막으로 보았던 리디아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미심쩍어하는 세 쌍의 시선을 태연하게 받아들인 리디아는 거실로 곧장 발길을 옮겼다.
“손님이 왔으면 술이라도 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무시무시한 눈길로 노려보는 린네.
황망하지만 확실한 적의가 새겨진 눈으로 바라보는 엘로아.
어처구니가 없어 반쯤 멍해진 시우 앞에서도 리디아는 여유가 넘쳤다.
시답지 않은 농담을 내뱉으며 손수건을 깔고 소파에 앉는 리디아는 아공간을 열어 근사한 술잔 네 개와 척 봐도 고급스러운 샴페인까지 꺼내 들었다.
“없으면 뭐. 손님인 내가 집들이 선물로 사온 셈 칠게.”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손님이지만, 반대로 ‘정말 여기 올 일 없는 사람인가?’를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애초에 강경파의 손에 갑문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의뢰한 장본인이 리디아 아니던가?
물론 그와는 별개로 리디아의 대담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공적이며 도로시를 인질 삼은 납치범.
거래가 성사되기 전까지는 철저히 몸을 숨기는 게 상식적이다.
필요악을 자처하고 있다 해도 공적 사회의 거두(巨頭)인 주제에 엘로아와 린네, 그리고 시우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모든 의문에 앞서 시우는 물었다.
“도로시 님은 어딨죠?”
“의식은 잃게 해 뒀지만 잘 지내고 있어. 말했잖아? 난 약속은 지킨다고. 너희가 갑문만 손에 넣으면 무사히 돌아갈 거야. 상황을 봐서는 뭐, 녹록지 않아 보이지만.”
“…전에도 느꼈지만 성격 참 안 좋으시네요..”
“그런 말 많이 들어. 술 비싼 건데 안 마셔?”
태연자약하게 샴페인을 홀짝이던 리디아는 멈칫했다.
“네 유치한 수작에 놀아나 주리라 생각했나?”
언제 꺼내 들었는지 모를 린네의 대태도가 가느다란 리디아의 목 밑을 받쳤기 때문이다.
리디아는 흥이 깨진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잘 지냈어? 건강해 보이네. 전에 당한 상처는 어때?”
“낭군만 아니었다면 그때 넌 죽었다.”
살갗을 슬쩍 파고든 예리한 칼날 위로 핏방울이 굴러도 리디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린네, 기다리게. 어차피 여기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마그누스를 제압해서 인질을 받아낸다. 그러면 이 도시에 볼일은 없다. 갑문이니 범람이니 알 바 아니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라인업이 화려하긴 해도, 날 조용히 제압할 수 있겠어?”
뚝뚝 흐르기 시작한 금빛의 빛무리와 묵빛으로 일렁이는 대기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러나 지금 창밖으론 엔젤 수색대가 마녀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있다.
화약이 가득 쌓인 테이블에서 불똥을 튀기는 순간 예정된 결말은 단체 폭사밖에 없다.
애초에 리디아도 인질의 효용이 아닌 자폭스위치를 믿고 태연하게 집들이를 왔을 것이다.
“이해했으면 치워야지? 술맛 떨어지게 뭔 짓이야.”
“…….”
리디아는 잔으로 칼날을 밀어냈다.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상처를 훑자 몇 바늘을 꿰매야 할 상처가 말끔히 사라졌다.
그러나 흉흉한 분위기까지 수복되는 건 아니었다.
오손도손 술잔을 나눌 수 없는 날카로운 분위기가 테이블 위로 흐른다.
“그대가 왜 여기에 있는지부터 들어야겠군.”
“말해 뭐해. 나도 갇혔어.”
리디아가 설명하길 그녀 역시 이 주머니 공간 안에 있었다고 한다.
도시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탐색하던 도중 우르쉬라가 위치 로드를 공격.
예상치를 웃도는 전력을 지닌 위치로이드가 활동을 시작하며 발이 묶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리디아는 필요에 의해 온건파 타이틀을 취했을 뿐 엄연히 공적이다.
어쩌면 우르쉬라, 프리실라와 합공해 시우 일행을 공격하려 했을지도 모르고 또 다른 꿍꿍이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예상했네. 왜 우리를 따라 주머니 차원으로 들어온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상황을 봐서 이득이 되는 노선을 타려고 했지.”
리디아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의심에 허심탄회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의뢰인이 의뢰를 잘 수행하려는지 지켜보려는 의도도 있었고. 까놓고 말해 나한테 베스트는 당신들이 우르쉬라와 프리실라를 상대하는 동안 갑문을 손에 넣는 거였으니까.”
한마디로 어부지리를 노렸다는 말이다.
만약 리디아의 의도가 성공했다면 도로시는 돌려받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녀는 여전히 유효한 패를 손에 쥐고 있었을 테니.
“미리 말하건대 안심해. 도로시가 안전하다는 말까지 거짓말은 아니니까. 아무리 나라도 공작님의 엄포까지는 무시하기 힘들거든.”
애초에 공정한 거래라고 순진무구하게 믿고 있진 않았다.
“신용할 수 없는 상대라는 건 알았네만, 너무 속이 보이는군.”
“그러니까 차라리 날 신뢰하기 딱 좋은 여건이지. 어차피 나나 그쪽이나 상황 대차게 꼬였잖아? 서로 딴생각 품기 어려울 만큼.”
리디아는 그런 속내를 밝힌 직후에도 떳떳했다.
그런 태도가 역설적으로 신뢰도를 부여하는 게 아이러니다.
침묵을 이어나가던 엘로아.
“그거론 믿지 못하겠네. 그대도 알다시피 갑문에 대해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또 있지.”
“속삭임의 마녀?”
“그러네, 그대가 릴리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가?”
다 제쳐놓고 양보해도 이건 중대사안이다.
이렇게 일이 꼬인 걸 보면 릴리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릴리스는 다른 마녀의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변장이 가능하며, 단순한 연기를 넘어서 그 사람의 사소한 습관 심지어 자성마법까지 사용이 가능하다.
지금 릴리스는 ‘비겁의 마녀’로 변장해 괴수의 왕을 부리고 있지만 또 리디아로 변해 이곳에 오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런 건 불가능하지. 악마의 증명이나 다름없잖아. 대신 임시 동맹을 맺은 기념으로 그년 뒷조사한 정보를 가르쳐줄게.”
“릴리스에 대한 정보를?”
릴리스는 케테르 이상으로 베일에 싸인 마녀다.
엘로아가 일전부터 추적해왔지만 작은 단서조차 잡지 못했을 만큼 말이다.
“릴리스의 자성마법은 ‘역사’와 관련되어 있어. 가령 이미 죽은 마녀의 육신을 뒤집어쓰거나 자성마법까지 운용이 가능하지. 반대로 말하자면, 아직 죽지 않은 마녀는 흉내 낼 수 없다는 의미야.”
“…그건 몰랐던 사실이군. 하지만 시원한 해명이 되진 못할 걸세. 진짜 금화의 마녀는 이미 죽었고, 여기에 있는 리디아 마그누스는 릴리스가 흉내 낸 것이라면?”
“그러니까 악마의 증명이라고. 내 결백은 온전히 주장할 수 없어. 하지만….”
한번 목을 축이는 리디아.
“내가 마음만 먹었으면 강경파 측에 합세하는 것도 가능했고 이 은신처에 엔젤을 끌어들여 당신들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것도 가능했어.”
“…….”
“이런 불경한 도시에 고립된 날 억지로 쫓아낸다면 난 공작님네를 더 귀찮게 만들 수밖에 없어. 협박이나 위협을 늘어놓는 게 아니야. 아무런 악의 없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미리 전하는 거야. 나도 내 나름대로 살아남아야 할 테니까.”
리디아의 말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여차하면 뒤통수 칠 생각으로 주머니 차원에 몰래 들어온 건 사실이다.
하지만 상황이 꼬이며 곤경에 처했고 함께 위기를 이겨나갈 조력자로 시우 일행을 택했다.
한배를 타기 껄끄러운 건 이해하지만 배 밖으로 밀어낸다면 살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동맹하자.
“거 엄청 뻔뻔하시네….”
나름 뻔뻔하게 살아온 시우조차 말문을 잇지 못하게 하는 철면피식 동맹 제의였다.
“원래 자본가는 뻔뻔하단다. 몰랐니?”
“…….”
엘로아는 적의 적이 아군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위기가 왔다 하여 리디아가 다른 생각 없이 협조하리라고도 기대치 않는다.
“그대에겐 다른 선택지도 있었네. 그런데 왜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쪽에 붙겠다는 겐가?”
최후의 관건이다.
리디아는 대수롭지 않은 듯 답했다.
“이쪽에 붙는 게 기댓값이 훨씬 높으니까. 그리고 내 몸값을 가장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는 진영이니까.”
“이미 인질을 잡아놓고, 앞뒤 다른 말을 해놓고, 생존을 위해 협력하자 제안 해놓고. 또 대가를 요구하겠다고?”
“경우에 따라선. 하지만 말이야 공작님. 대가가 언제나 물질적인 걸 뜻하진 않잖아? 난 공작님 진영과 우호도를 쌓아두는 것도 아주 좋은 기댓값이라고 생각 중이야.”
“그럴 일은 없을 걸세.”
“두고 볼 일이지. 세상에 절대는 없으니까.”
딱 잘라 말한 엘로아와 능청떠는 리디아의 말로 대화는 일단락.
이후 세 사람은 리디아의 영입 여부에 대해 논의했다.
시우는 도로시를 인질로 잡은, 태연자약하게 마녀를 사고팔고 인간을 죽이는 리디아가 싫었다.
린네는 리디아가 어떤 꿍꿍이를 또 품고 있을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엘로아 역시 아주 조금도 리디아를 신뢰하지 않았다.
줄지어 이어지는 부정적인 평가에 리디아가 한마디 말을 얹었다.
“더불어 말하자면 난 아주 유능해. 내가 어떻게 당신들이 숨을 곳을 단번에 찾아냈겠어. 조력자로 삼는다면 후회하진 않을 거야.”
결과는 다소 싱겁게 나왔다.
감정상 호오와 달리 지금 리디아를 내치는 건 너무 큰 리스크를 지녔다.
차라리 그녀를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감시하면서 정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조커로 활용하는 편이 가장 안전책이라는 게 최종 결론이었다.
“좋아, 그럼 오늘 하루 힘들었으니까. 상황 좀 지켜보다가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여보자고.”
언제나 다른 사람 머리 위에 서 있는 인생이었기 때문일까?
자연스레 그룹의 리더라도 된 양 지시사항까지 늘어놓는 리디아.
하지만 휴식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기에 자연스레 거실에서 저마다 할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팽팽해졌던 긴장의 끈이 느슨해지는 그 순간.
“…음.”
시우는 곤란함을 느꼈다.
체취를 너무 마셨기 때문이겠지.
발기가 가라앉질 않는다.
하지만 린네가 느끼는 곤란함은 시우보다 한층 컸다.
한참이나 괴롭힘을 당하다가 기분 좋아지려는 딱 그 순간 방해를 받은 것이다.
“…….”
막 결핍의 저주에서 벗어난 마녀치고 린네의 절제력이 매우 우수한 편이었다.
단, 한번 불이 붙으면 이글이글 타오르는 탐닉심은 그런 절제력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두 사람의 묘한 시선이 자꾸만 서로를 힐끗힐끗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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