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120
120화
120. 따듯한 햇살처럼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르고, 모친은 노예였기에, 탕난은 태어났을 때부터 노예였다.
그러나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숨어 있어도 남의 눈에 저절로 드러나기 마련.
탕난은 5살 무렵에 모친을 여의었으나, 여아로 오해를 살 만큼 외모가 특출났고, 글을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체득하며 깨우칠 만큼 영특해서 주위에서 그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운도 좋아서 소궁주의 눈에 띄어 몸종까지 되었다.
소궁주는 탕난을 신임했고, 화(火)의 기운을 타고났다는 걸 알고 궁주를 설득하여 천지궁의 비전무공인 화행기(火行氣)까지 배울 수 있게 했다.
탕난을 몸종이 아닌, 친우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재도 뛰어났던 탕난은 빠르게 성장하면서, 노예 신분에도 불구하고 다른 후기지수들을 뛰어넘어 소궁주 다음으로 강하다는 평가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탕난을 소궁주보다 더 아끼던 이가 있었으니, 소궁주의 친여동생 혁련무조였다.
혁련무조는 탕난을 처음 보자마자 반하여 이후로 물심양면으로 후원했고, 혼원수(混元樹) 아래에서 성년식을 마친 직후 궁주를 찾아가 성년이 된 선물로 탕난을 요구하여 양도받았다.
사실 이는 소궁주와 머리를 맞대어 고민한 결과였다.
탕난은 소궁주의 몸종이었으나, 공식적으로는 궁주의 소유였고, 소궁주가 궁주가 되기 전까지는 탕난을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할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년이 되면서 독립할 수 있게 된 혁련무조는 궁을 떠나 탕난과 혼인하였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너무나 컸다.
천지궁에선 남녀불문하고 독립하더라도 혼원수(混元樹)가 점지한 상대와 혼인하지 않으면 신분이 내궁도에서 외궁도로 격하하고, 금전적인 지원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궁주의 혈육이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탕난은 평생 돈을 버는 일과 담을 쌓고 살아오면서 씀씀이만 컸던 혁련무조를 풍요롭게 부양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해야 했고, 큰돈을 버는 일일수록 집을 오래 비워야만 했다.
하지만 탕난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갈수록 외로움이 커진 혁련무조의 불만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밖에서 다른 여자들을 만난다는 걱정과 새로 살림을 차렸다는 의심까지 하게 되었다.
사실 수많은 여자가 탕난에게 접근했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를 유혹하기도 했으나, 탕난은 흔들리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불안했던 혁련무조가 이를 믿지 못했을 뿐.
결국 그녀는 탕난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영원히 독점하겠다는 광기 어린 결심을 하고 독을 먹였으나, 위기의 순간 때마침 찾아온 소궁주가 혁련무조를 제압하면서 탕난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날로 혁련무조는 소궁주와 함께 천지궁으로 돌아갔고, 탕난은 강호를 떠돌면서 자의 반 타의 반 무위를 떨쳐 천하의 고수로 꼽히고 무림영웅록에까지 기재되었다.
그렇다면 탕난은 혁련무조로 인해 여인에게 불신을 가지게 되고, 복수심을 품어 여인들을 함부로 대하면서 옥면음마라는 별호를 얻게 된 걸까?
아니었다.
그는 혁련무조를 원망한 적이 없었고, 복수심 따위는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잘못이라 생각해 미안해했고, 다시 만날 수는 없었지만, 혁련무조만이 유일한 아내라는 신념을 지키며 살았다.
인연이 닿은 여인들에게도 늘 정중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선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연심을 품게 된 여자들의 생각은 달랐고, 지독한 사랑은 집요한 미움의 씨앗을 틔워 옥면음마라는 경멸적인 별호로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자기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한 탕난은 누구에게도 억울함을 토로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무도 정확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탕난은 송웅의 궁금증을 풀어주겠다고 혁련무조와의 인연과 옥면음마로 불리게 된 과거의 사연을 말해주진 않을 것이었다.
다만.
“가만 보니 개방은 단순히 천하에 넘치는 거지들의 많은 숫자만을 믿고 힘을 떨치려는 게 아닌 거 같군. 거지들을 통해 다양한 소문을 수집하고, 그렇게 수집한 소문을 활용하여 뜻을 이루려는 의도가 보이네.”
때로 대화 중에 듣고자 했던 말보다 더 가치 있는 말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송웅은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느낌을 받았다.
“탕 선배, 잘 듣고 있으니, 계속 말씀해 보십시오.”
“나는 강호를 떠돌다가 소문에도 경중(輕重)의 힘이 있음을 알았네. 단순히 많은 소문을 경의 힘이라 하고, 많은 소문 중에서 진실을 가려낸 걸 중의 힘이라 하지. 또한 경중에 따라 소문의 위력도 달라지더군. 떠도는 소문을 긁어모으기만 한 건 기껏해야 소인배에 불과한 대부를 뜻대로 이끌 뿐이지만, 진실로 밝혀낸 소문은 민중을 좌지우지하여 대인배에 이른 제후까지 절로 믿고 따르게 할 힘이 있다네.”
송웅은 물었다.
“탕 선배, 소문에서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사람이 작정하고 속이려 하면 꾸며낸 말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네. 그러니 발품을 팔아서라도 직접 소문의 근원을 찾아내서 진위를 밝혀내야겠지.”
“아무리 애를 써도 근원을 찾지 못하면 어찌해야 합니까?”
“근원에 가장 가까운 소문의 출처 주변에서 올바른 질문을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해야 하겠지.”
“올바른 질문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뭐라고 올바름을 단정할 수 있겠는가. 단지 주관적인 의견은 있네.”
“듣고 싶습니다.”
“일단 어떤 반박과 거짓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하겠지. 그다음으로 거센 바람처럼 대상의 마음을 동여매게 하지 말고, 따듯한 햇살처럼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어젖힐 수 있도록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하네.”
탕난은 자기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라는 듯 이후 아무 말도 없이 먹기만 했다.
그리고 송웅은.
“방주님, 조가현에 가보니…….”
다시금 열심히 퍼넣고 씹고 꾸역꾸역 삼키면서 쉴새 없이 떠들었다.
* * *
지한위조연합의 병력은 결전을 치를 목적지까지 하루거리를 남겨두고 다시 야영에 들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사위가 캄캄한 밤이 되자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두고 불침번을 서는 경계병을 제외하고 모두 잠이 들었다.
진천은 대부들과 다른 군장들처럼 자신만을 위한 막사를 치지 않았다.
병사들, 낭인들, 회원들, 산융족들처럼 스스로 풀을 베어낸 자리에 멍석 하나 깔고 누웠을 뿐이다.
하지만 잠을 자진 않고, 가부좌한 채로 무상제일공을 운기하며, 최근에 깊이 자각하게 된 칠정(七情)에 심취했다.
‘기이하군.’
감정이란 무인에게 독과 같아서, 감정을 비울수록 위력이 강해진다는 깨달음이 곧 무상제일공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그래서 감정을 느끼기 어려워 무상제일공을 쉽고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감정을 받아들임으로써 막대한 선천기를 얻고, 여러 무공을 창안했으며 더불어 경지 또한 높아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점도 있었다.
‘욕망만은 다른 감정들만큼 흥이 생기지 않는다.’
사실 이제까지 이루었던 성취는 무공이든, 학문이든, 사람이든, 간절히 바라고 원한 결과라고 할 수 없었다.
처음엔 진 상궁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했던 거고, 이후로는 꼭 성과를 이루고자 했던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욕망에 흥이 생기지 않는 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덕분에 수면욕, 식욕, 명예욕, 재물욕, 색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심신을 오직 건설적인 성장에 할애하여 지금의 자신이 될 수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경팔맥과 십이경락을 막고 있는 나머지 기운이 녹지 않는 건, 분명 욕망에 흥을 느끼지 못해서인 게 분명하다.’
즉, 다른 사람들만큼 욕망을 느낄 수 있어야만, 오른 다리의 장애도 치유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생기지 않는 욕망을 어떻게 느끼란 말인가.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져, 오른 다리의 장애가 불편하지도 않았고.
한편으로 욕망이 생기면 자신이 나쁜 쪽으로 변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아니면 선천기에 녹아든 기운이 압도적으로 많아졌으니, 욕망을 통한 감흥이 아니라도 무공을 이용해서 막힌 기운을 해결할 수도 있지 않을까?’
관점을 바꾸어 칠정을 바라보고, 무상제일공과 무상제일공의 이치를 기반으로 창안한 심법들을 운기하고 관조하며 방법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몰입하여 자정을 넘기고, 새벽을 맞이하던 시점에 문득 육감의 자극을 받아서 눈을 떴다.
오른쪽을 바라보자 이곳에 있지 말아야 할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진천은 주위에서 자는 병사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한 음성으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남 선배.”
복우파의 우호법 일도경혼 남익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웃었다.
“확실히 당신이라 부를 때보다는 낫군. 선배로 대우해 주어 고맙네, 진 방주.”
“별말씀을. 근데 그 복장은 어찌 된 겁니까?”
남익은 강호 방파의 사람이지만, 굳이 소속을 따지자면 중행범연합 쪽의 편. 그런데 지한위조연합의 군복을 걸치고 있었다.
“문주가 지한위조연합에 은밀히 침투할 때 도움이 될 거라며 입고 가라고 했네.”
“남 선배는 살행도 하는 겁니까?”
“사람을 죽이는 건 강호인의 특기이고, 방파를 운영하는 데 있어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지라, 나 같이 방파에 속하면 큰돈을 벌 수 있는 살행과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게 되지. 물론, 최근 십 년 동안은 맡을 일이 없었으나, 젊을 때는 종종 하던 일이었네.”
“남 선배를 보냈으니, 표적이 대단한 고수겠군요.”
“정확히 지목한 표적은 없고, 숫자도 특정 짓지는 않았으나, 군장 한 명은 반드시 죽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나를 찾아왔습니까.”
“그럴 리가. 진 방주를 내가 무슨 재주로 죽인단 말인가.”
이때, 오른쪽에서 이릉이 걸어왔다.
그는 남익을 한 번 보고 물었다.
“진 방주님 별일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안자고 뭐합니까?”
“순찰 중이죠.”
“훌륭합니다. 계속 일 보세요.”
이릉은 남익을 다시 한번 보고 지나갔다.
“기도는 약한데, 눈빛이 예사롭지 않군. 누군가?”
“천수환도 이릉입니다.”
“과연.”
“최근 개방에 입방하여, 장로이자 총순찰이 되었습니다.”
“축하하네.”
조금 뒤엔 조을이 다가와.
“진 방주, 언제든 불러라.”
“그러죠.”
남익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지나갔다.
그다음엔 혁련미림과 탕난이 다가왔고.
“진 방주님, 달이 밝네요.”
“그러네요.”
“진 방주, 산책하기 좋은 날이야.”
“맞습니다.”
마치 남익이 이곳에 없는 것처럼 진천만 보고 지나갔다.
남익은 말했다.
“그 짧은 사이에 엄청난 고수들과 인연을 맺었군.”
“그래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진 방주에게 살심을 품었다가는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
“그 전에 내 손에 죽게 될 겁니다.
“그렇겠지. 사실 나는 문주의 명을 따르지 않을 것이네. 진 방주만이 아니라, 다른 군장도 죽일 생각이 없어. 지금은 그저 진 방주에게 인사하러 왔을 뿐이네.”
“그러시군요.”
“배웅을 부탁해도 되겠는가?”
“알겠습니다.
일어나서 남익과 함께 걸어가는데.
“진 방주님, 안녕하십니까.”
불침번을 서고, 야간 순찰 중인 병사들이 얼른 좌우로 물러나고,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 시간에 어딜 가냐고 추궁하지 않고, 의심의 시선을 보내는 이도 없었다.
산하의 병사들만이 아니라, 다른 군단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태도가 더욱 살갑고, 정중했다.
남익은 이릉 등을 보았을 때보다 더 놀라 말했다.
“모든 병사가 진 방주를 신뢰하고 있군.”
“함께 어울리고, 같은 음식을 먹게 되니, 자연스레 식구(食口)가 된 거 같습니다.”
“식구라…… 이곳에 와서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네.”
야영지를 벗어나 제법 멀리까지 나왔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무기를 든 십여 명이 나타나 주위를 둘러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