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06
제 1 장 뛰긴 뭘 뛰어!
휘이이잉.
벽에는 사람 둘이 어깨를 맞대고 지나가도 될 만한 크기의 동그란 구멍이 휑하니 뚫려 있다. 아니, 그건 구멍 났다고 하기엔 뭔가 이상했다. 그냥 원래부터 벽에 동그란 구멍을 뚫어둔 듯했다.
그렇게 생겨먹은 구멍을 낸 장본인이 바로 장건이다.
“어, 어어어!”
장건은 곧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한 짓을 깨닫고는 크게 경악했다.
“으아앗!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멀쩡한 벽에 구멍을 냈다. 그것은 장건에게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까워!”
장건은 울상을 지으며 벽으로 달려가 구멍을 매만졌다.
그런 장건을 보는 오황의 표정은 매우 더러웠다.
“에이이, 이런…….”
저 아이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는 물론이고 행동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도대체가 상식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래, 벽 정도야 부술 수도 있다.
한 십 년 외가 공부에 매진한 외문 고수나 이십 년쯤 내가 공부를 익힌 내문 고수라면 장력으로 벽을 날려버릴 수 있고, 나아가 벽을 부수지 않고 구멍만 낼 수도 있다.
장건의 나이나 연륜이 그만한 고수라 보기엔 많이 못 미치긴 해도, 강호라는 게 원래 온갖 기이한 일들이 생겨나곤 하는 곳이다. 거기까지는 오황도 충분히 이해한다.
누구도 살아날 수 없는 상황에서 기적처럼 생환하여 고수가 된 오황이니만큼 나이와 실력이 딱히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수법이 참으로 부자연스러웠다.
단언컨대 오황은, 오황의 입장에서는! 이제껏 그렇게 기기괴괴한 수법을 본 적이 없었다!
장건이 사용한 것은 지풍이었다. 아니, 사실 지풍이라고 보기도 어려웠지만 어쨌거나 손가락으로 공력을 발출했으니 지풍은 지풍이었다.
그러나 손가락을 튕기는 소림의 탄지(彈指) 수법은 아니었다. 그냥 손가락 끝에서 공력이 엄청난 빠르기로 쏘아졌다.
그렇게 공력이 순간적으로 폭발하듯 튀어나가는 것은 당가의 섬절에서 보이는 묘용이다. 평소 신법을 사용하지 않는 오황이 신법을 써가면서까지 피했을 정도로 섬절의 묘리가 제대로 담겨 있었다.
하나 섬절은 암기술이다. 지력을 발출하는 게 아니라 공력을 암기에 담아 던진다. 그걸 지풍으로 응용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그 섬절로 둘레가 네 아름이 넘는 구멍을 냈다는 것도 이상하다.
제대로 된 지풍이었다면 구멍은 손톱 정도의 크기로 났을 터였다. 장풍이었다면 벽이 두부처럼 뭉개졌을 테고.
저렇게 깔끔한 파괴력은 주로 권경을 발출하는 권풍에서나 보이는 것이다.
오황은 소림에 그러한 권공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시연을 본 적도 몇 번이나 있다.
그것은 바로 백보신권!
문각의 백보신권이 아니라 소림의 정통 백보신권이다.
그러나 장건이 손가락 끝에서 발출한 지풍은 백보신권과는 또 다르다. 참…… 이루 말할 수 없이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수법이었다.
입으로는 공명검이라고 해놓고 손가락을 쳐들었는데, 당가의 암기술인 섬절의 묘용을 담고서 소림 백보신권의 권경을 썼다!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야?’
오황은 얼굴을 구길 수 있는 한도까지 구겼다.
제아무리 단순한 무공이라도 각각의 사용법이 있는데, 명백히 한 시대를 풍미할 만한 최고의 무공들을 제멋대로 말도 안 되게 섞어버린 것이다.
내공 운용이 각기 다른 무공들을 어떻게 섞어 운용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왜 그런 짓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심마에 들었지. 아니, 심마에 들어서 이러는 건가?’
어쨌거나 거기까진 심마 때문이라고 싸잡아서 이해할 수 있었다.
한데 정신을 차리자마자 갑자기 달려가서 벽을 얼싸안고 아깝다 울부짖다니?
오황은 멍해졌다.
‘심마고 뭐고, 이거 그냥 완전히 미친놈 아냐?’
이런 미친 애가 강호를 몇 번이고 들었다 놓았던 소림 최고의 기대주라는 사실을 당최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석상이 딱딱거리며 움직이는 듯한 저 이상한 몸동작은…….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소름이 돋는다.
‘아! 저 녀석은 존재 자체가 부자연스러움의 결정체로구만.’
오황은 몸서리를 치며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래도 장건은 세상의 모든 무공을 섭렵하겠다던 홍오의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천재인 홍오조차 결국은 자신의 꿈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하물며 그것을 저 어린 소년, 장건이 해낼 수 있을 리 없다.
이대로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장건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아 광인(狂人)이나 폐인이 될 게 분명했다.
‘홍오를 생각하면 이부터 갈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라나는 새싹을 그냥 죽으라 내버려둘 수도 없고……. 에에잉!’
그제야 소림 방장이 친필로 초청장을 보낸 내막이 이해되었다. 그것도 대외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실 – 홍오가 사라졌다는 비밀 – 까지 언급해가면서 말이다.
‘이제 보니 나한테 저 짐 덩어리를 맡길 셈이었구만? 이런 귀찮은 일을 공짜로 시켜먹으려고!’
방장 굉운의 속셈이 괘씸하긴 하면서도 오황은 내내 장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평소엔 귀찮은 일이 닥치면 ‘내가 마음이 내키지 않고 귀찮으니 하기 싫다는 뜻, 그렇다면 하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지.’라며 넘겨버렸다.
그럼에도 오황이 넘겨버릴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부조화와 부자연스러움을 보고서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일례로 부자연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개방에 징벌의 철퇴를 내려주지 않았던가!
그러니 부자연스러움의 집합체인 장건을 보고서는 도저히 발걸음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망할. 이 빚은 톡톡히 받아낼 테다.’
오황은 굉운의 속셈을 알아챘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동참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왕 하기로 한 거, 제대로 해야겠지.’
생각은 길었지만 실제 행동에 이르기까지는 짧았다. 오황은 장건의 주의를 돌리려 헛기침을 했다.
장건은 그때까지도 울상을 지으며 벽을 매만지는 중이었다.
“엇험!”
오황의 헛기침에 장건은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떻게든 장건을 ‘자연스러운 놈’으로 만들어주겠다 생각한 오황과 달리, 장건은 ‘이상한 할아버지’ 때문에 애먼 벽을 부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상한 할아버지가 이제껏 작업한 것도 망쳐놨고 말이다.
“이놈 보게? 뭘 잘했다고 눈알에 힘을 줘?”
장건이 볼을 부풀렸다.
“멀쩡한 벽이 부서져서 아깝잖아요.”
“얼씨구? 그걸 네가 했지 내가 했냐? 너 괜히 나한테 뒤집어씌우려 그러지 마라. 억울하다.”
“제가 언제 할아버지가 그랬다고 했나요. 그냥 아까우니까 그런 거죠.”
“아까우면 이상한 짓을 하지 말든지. 아니, 그리고 그깟 벽이 대수냐? 공명검이니 뭐니 말도 안 되는 짓도 해놓고는 말이야.”
장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황을 쳐다보았다.
“제가 공명검을 썼어요?”
“공명검을 썼으면 황당하지나 않게!”
오황이 침을 튀기며 마구 삿대질을 해댔다.
“네가 임마! 손가락으로 나를 이렇게 가리키고는 ‘받아라, 공명검!’ 하면서 괴상한 권풍형 암기술적 지풍을 날렸잖아! 기억 안 나냐?”
“에엣? 제가 ‘받아라, 공명검!’ 그랬다구요?”
“내가 오죽 식겁했으면 오 년 만에 처음으로 경공까지 썼겠냐?”
“하지만 받아라! 하고 소리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장건은 확실히 말을 맺지 못했다. 심마에 들어 자기도 모르게 한 행동이라 기억이 가물거렸다.
“정말 그렇게 소리치지 않았다고? 확실하냐?”
“확실하지는 않지만 제가 그랬을 리가 없는 것 같은데요.”
“네가 안 그랬으면 여기 구멍이 왜 났겠어!”
뭔가 말이 안 되는 듯하지만 장건은 할 말이 없다.
장건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죄송해요. 누굴 다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죄송하면 죄송한 거지 아무튼은 뭐야, 아무튼은. 아무튼 요즘 애들은…… 에잉!”
장건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꾸벅.
“죄송해요.”
오황이 장건을 째려보았다.
“죄송하다고?”
“예, 할아버지를 다치게 할 뻔해서 정말 죄송해요.”
“이놈이 기분 나쁘게?”
“네?”
자꾸 오황이 말꼬투리를 잡는 게 이상했다. 제대로 사과하래서 했는데 왜 또 저럴까?
오황이 혀를 차며 말했다.
“너, 임마.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네가 심마에 들어서 마구잡이로 날 공격했다고 치자. 내가 그 정도도 이해 못할 좀생이로 보이냐?”
“…….”
“그리고 네가 나를 다치게 하고 싶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놈 웃기는 놈일세. 진짜 공명검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애들 장난 따위로 나를 다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광오함이 극에 달한 말이다.
그러나 오황을 아는 이라면 누구든 그의 말에 틀렸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그런 말을 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 이였다.
하지만 장건은 다른 의미로 욱하고 치밀었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다짜고짜 시비를 거는 셈이다.
도와주기는커녕 열심히 일해 놓은 것들을 엉망으로 만든 건 오황이 아닌가! 오황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괜한 자극을 받아서 멀쩡한 벽을 부쉈을 리도 없고!
그래놓고도 말꼬투리를 잡아서 계속 시비를 거니 장건이라고 화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공명검이 아닌 애들 장난으로는 안 다치신다구요?”
“당연하지. 털끝이나 상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그럼 진짜 공명검은 못 당하신다는 얘기네요?”
그 말을 듣자 말 잘하는 오황도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놈 보게? 네가 지금 나를 도발하는 거냐?”
“아뇨.”
아니라고 말했다고 아닌 표정이 아니다!
“도발하는 거잖아! 니이미, 내가 만만하게 보이니까 한판 붙어보자, 이거 아냐?”
장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전 그냥 일하러 갈게요. 할아버지도 괜히 멀쩡한 벽 같은 거 파손하고 그러지 마세요.”
장건이 휙 하고 몸을 돌렸다.
오황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분이 단단히 상했다.
“어쭈?”
오황의 입장에서는 무시도 이런 무시가 없다.
“어딜 간다고?”
장건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바빠서요. 할 일이 많거든요.”
그 말에 오황은 오 년 만에 두 번째로 다시 경공을 사용했다.
슥.
눈 깜짝할 사이에 오황이 장건의 앞을 가로막았다.
장건이 예의 보법으로 오황을 피해 지나가려 했다. 그러나 오황은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어찌나 귀신같은지, 장건이 걸음을 옮기려고만 하면 이미 그 방향을 선점하고 있었다.
장건은 할 수 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왜 이러세요!”
오황이 괴상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능글능글하게 다시 물었다.
“어딜 간다고?”
“일하러요.”
“무슨 일?”
“할아버지가 부순 벽도 고쳐야 하고, 연등도 만들어야 되고, 할 일이 많아요.”
오황이 어이가 없어 왁 하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크하하하하!”
“왜 웃으세요?”
오황은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웃다가 흘린 침까지 닦아야 했다.
“큭큭, 낄낄낄.”
한참이나 웃던 오황이 장건을 보고 말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지만 그 말마저도 이상하구나. 네가 무슨 머슴이냐? 일꾼이냐? 그런 일을 네가 왜 해?”
“…….”
장건은 대답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야, 임마. 오대세가, 십대문파를 다 가봐라. 거기의 어떤 제자가 궁상맞게 앉아서 연등을 만들고 벽을 고치는지. 그런 건 일꾼들을 불러서 하는 게지, 문하 제자가 할 만한 일은 아니란 말이다.”
장건이 뚱하게 대답했다.
“전 안 가봐서 몰라요.”
“쯧쯧.”
오황은 혀를 찼다.
“소림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왜 이래? 업둥이를 집어왔어도 이리 팽개치지는 않겠구만.”
아무리 최근에 험한 일을 겪었다지만, 천하의 소림이 아닌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당연히 알 것이다.
그런데 자파의 기대주를 잡역에 부려먹는다? 하루 열두 시진을 모두 무공 수련에 쏟아부어도 모자랄 마당에?
지금 이 순간에도 경쟁 문파들의 제자들은 피땀을 흘리며 무공에 매진하고 있을 것인데 말이다.
오황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었다.
“대체 네게 이런 일을 하라고 시킨 놈이 누구냐?”
“…….”
“말해보라니까? 누가 네게 이런 일을 하라 시키든? 보아하니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닌 것 같구만. 저 밖에 피안교와 금강문의 동상도 다 네가 한 일 아니냐? 오다 보니 온갖 탑이며 벽화며 죄다 네 손이 닿은 것 같던데?”
장건이 묵묵부답이자 오황이 다그쳤다.
“말해보라니까? 누가 네게 그런 잡일을 하라 시키더냐?”
“제가…….”
“응?”
“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시킨 사람 없어요.”
“나 참, 사람 황당하게 만드는구먼.”
장건이 볼을 부풀렸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예요. 대사형도 그렇게 말해줬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라구요.”
오황은 장건이 말하는 대사형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속가제자가 대사형이라 부르는 무자배라면 한 명뿐이다.
“무진이? 그 녀석이라면 내가 몇 년 전에 호남의 관제묘에서 중독되어 다 죽어가는 걸 살려준 적도 있다. 누구보다 강호의 험난함에 대해 잘 아는 놈이 너한테 이딴 잡일이나 하란 말을 했을 리가 없어.”
“그래도 노는 것보단 낫잖아요.”
“놀아?”
“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오황이 기가 차서 소리쳤다.
“내 평생에 소림의 제자가 할 일이 없어서 논단 소리는 처음 들어본다!”
장건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래서 저도 안 놀려구요.”
“오오오! 이놈 보게나!”
오황은 머리칼을 손으로 마구 헝클었다. 장건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잘못된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넌 임마, 무인이야, 무인. 무인이면 무인답게 무공을 갈고닦아야지. 왜 무인이 잡부 노릇을 해? 하루 열두 시진을 정진해도 대성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마당에 논다는 말이 어떻게 나와!”
“……무인.”
무인이라는 한마디를 읊조리듯 되뇐 장건이었다.
장건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지더니 이내 시무룩하게 변했다.
왜일까?
이 우울한 기분은.
언제부터였더라…….
이토록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신만 유독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 것은.
– 부럽다, 건아. 나도 너처럼 무공이 셌으면 좋겠다.
– 건아, 내 무공 좀 봐줘.
– 장 소협, 비무를 청하오.
장건은 갑자기 사방에서 들려오는 듯한 환청에 머리가 아파왔다.
무공무공무공무공…….
이 세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무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관심사도 오로지 무공뿐이었다.
강함과 약함을 구분하는 게 당연시되고, 강한 자가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약자는 참아야 하고……. 물론 그것 역시 무력이 기준이었다.
‘아아!’
장건은 잊을 수가 없었다.
검성!
소림사에 와서 엄청난 피를 부른 검성에게 어느 누구도 잘못을 묻지 않았다.
홍오가 폐인이 되어 사경을 헤맸는데도 아무도 검성에게 사과하라 하지 않았다. 당연히 검성도 홍오를 찾아와 사과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검성을 칭송했다.
그의 무공을 찬양하고 행적을 기렸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대명천지에 버젓이 일어나는가.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시퍼런 칼날을 휘두르며 사람을 해하는가.
그 이전에 청성일검 풍진도 장건을 보자마자 칼질을 해댔다. 그런데 장건이 죽지 않고 살아났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대단하다 칭찬하고 있었다.
강하다는 것만으로 면죄부를 얻는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장건뿐인 듯했다.
상대가 칼을 들면 같이 칼을 들든가 하지, 놀라 도망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때는 사람을 잘 다치게 했다고 칭찬하고, 어떤 때는 졌다고 수군거리고…….
이해할 수 없는 세상.
그곳에서 장건만이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겉돌고 있었다.
무공을 배우는 건 즐거웠지만, 끔찍하게 질리는 것도 다름 아닌 무공이었다.
무공을 익히는 건 즐거웠지만, 싸우는 건 즐겁지 않았다. 싸우지 않아도 얼마든지 무공을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길을 외면하고 있었다.
장건은 외로웠다.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보자마자 칼질하는 살벌한 곳이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 년도 채 남지 않았는데, 그 이 년이 아득히 멀기만 했다.
그래서 필요했다.
절대적인 자유!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극한의 자유!
그리고 그러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바로 공명검이 필요했다.
검성이 그러했던 것처럼, 장건도 공명검을 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건은 공명검을 얻어야 하는 이유가 꼭 그것이라고 단정할 수만도 없었다.
왠지 모르게 강해지고 싶은 자그마한 욕망. 그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황의 말에 더욱 가슴이 울컥했는지도 몰랐다.
– 무인이면 무인답게 행동해!
나는 무인인가?
나는 무인이 되고 싶은가?
장건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도 대답할 수 없었다.
무인이되 무인이 아닌 이상한 상황에 있는 게 바로 자신이었다.
이제는 이런 현실을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은 고통스럽고 몸은 피폐해져가는 것만 같다.
장건은 우울한 마음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조그맣게 되뇌었다.
“집에…… 가고 싶어…….”
조그만 소리였지만 오황이 듣지 못할 리 없었다.
장건의 혼잣말을 들은 순간 오황은 마음이 울컥했다.
‘이 망할 놈.’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도, 아무리 강호에 명성이 자자해도 결국 아이는 아이일 뿐이다.
철이 들기도 전부터 산에서 십수 년을 넘게 살아온 아이라면 더 그러하다.
특히나 집에 가고 싶다는 한마디는 지금 장건의 처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오황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현재 소림의 상황을 보면 장건이 얼마나 구반상실(狗飯橡實: 개밥의 도토리)에 고립무원(孤立無援) 같은 신세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당장에 등 뒤에 매고 있는 천으로 둘둘 싼 검, 소요매화검만 보아도 그러하다.
대외적으로 장건은 소림의 속가제자면서 검성에게 검법을 사사한 몸. 비록 단 한 번의 검무뿐이었다고 하더라도 검성이 인정하여 화산의 보검을 주었으니, 장건은 화산 검공의 맥을 잇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장건이 심마에 든 채 소림에서 방치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장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능력 있는 무인이 없다는 건 부차적인 문제다.
아마도 소림의 일각에서는 장건이 심마를 벗어나지 못하고 무너지기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화산의 이름만 높여주느니 그냥 없어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방장 굉운이 그 꼴을 보다 못해 굳이 외부인인 오황을 끌어들이려 한 것일 테고.
‘못된 중놈들 같으니.’
오황은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아이를 아무렇게나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삼 외부인인 자신을 부른 방장의 선견지명에 감탄을 해야 할 판이다.
오황은 기운 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장건을 쳐다보았다.
‘쯧쯧, 네놈도 참 고달픈 삶을 사는구나.’
생각해 보면 참 불쌍한 아이다.
강호에서 살벌하기로 두 번째 가라면 서럽다는 청성일검이 찾아와 칼을 날렸지…… 소림 대몰살이 될 뻔한 독선의 하독 사건도 있었지…… 검왕하고도 시비 붙었지…….
거기에 소림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도 아니고, 외면 받고 동떨어진 쓸쓸한 신세.
장건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 명확하게 인지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피부로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이 나오는 것일 게다.
‘오죽했으면 애 입에서 집에 가고 싶단 말이 나와!’
오황은 콧김을 킁 하고 내뿜었다.
“안 되겠다!”
장건이 놀라서 오황을 쳐다보았다.
“네?”
“아이는 아이답…….”
갑자기 오황이 장건을 보고 물었다.
“너, 몇 살이지?”
“열여섯요.”
오황이 말을 계속했다.
“아무튼! 열여섯이면 이제 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나이지만, 그래도 애들은 애들다워야 한다는 게 나의 신조다.”
장건은 뻘쭘한 얼굴로 오황을 바라볼 뿐이었다.
“할어버지의 신조와 제가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애가 애 같지 않으면 자연스럽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인데요? 전 오늘 할아버지도 처음 보는데요.”
“상관이 있게 될 거다.”
“……없는 거 같은데요.”
“이제 있게 될 거라니까?”
“이제 어떻게요?”
오황이 씩 하고 웃었다.
“이렇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황이 손을 들었다.
손가락 끝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심하게 울렁거렸다.
☆ ☆ ☆
“후음…….”
낮고 긴 한숨이 원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깨가 뻐근하고 고개가 절로 떨어질 만큼 목도 무겁다.
북해빙궁 고위급 인사의 내방이라는 문제도 당혹스럽기는 하다. 오랜 기간 적대관계였던 상대, 그것도 강호에서는 사마(邪魔)로 불리며 상종조차 꺼려지는 이가 소림을 방문하는 것이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소림을 방문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을뿐더러,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조차 막막할 지경이다.
그러나 원호가 힘들어하는 것은 정작 북해빙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일부에 불과하다.
총체적으로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은 바로 ‘부담감’이라는 한 단어다.
이제 원호는 방장이 된다. 그것은 곧 북해빙궁이든 굉목의 문제든, 소림사의 정책 전반에 걸쳐 그가 모든 대소사(大小事)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도 자기 대신 책임을 져주지 않는다. 최종 결정 또한 그가 내려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소림과…… 나아가서는 강호 무림의 안녕에 직결된 거대한 결정이 되는 것이다.
보통의 책임감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렵구나.”
원호는 탄식 아닌 탄식을 하며 어깨를 꾹꾹 눌렀다.
방장이란 자리가 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압박감에 시달릴 줄은 몰랐다.
원호는 혼잣말로 물었다.
“사백은 어떻게 이런 부담감을 견디셨습니까?”
공허한 목소리가 집무실을 흘러 다녔다.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굉운뿐 아니라 방장을 역임한 모든 조사들이…….
굉운도 말은 안 했지만 이렇게 힘들었을 터인데, 그런데 원호는 그런 굉운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고 원자배들을 선동하여 그런 굉운을 더 힘들게 만들지 않았던가.
미안한 마음에 앞서 존경스러운 마음부터 든다.
“사백께선 제가 할 수 있다 하셨지만,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도 답답하고 힘이 들어 최근에는 공양까지 걸렀다. 며칠을 굶었더니 공양간의 굉료가 직접 댓잎으로 싼 밥을 들고 원호를 찾아오기까지 했다.
굉료는 다짜고짜 밥을 탁자 위에 놓으며 말했다.
“쯧쯧, 얼굴이 많이 상했구먼. 사람이 아무리 바빠도 끼니는 거르지 말아야지. 우리가 하루 대여섯 끼 먹는 것도 아닌데 그것마저 사치라고 굶으면 되겠나? 내공으로 버틸 수는 있어도 그건 그냥 말 그대로 버티는 거지. 우리네 삶의 활력은 음식을 먹어야 나오는 거라네.”
소탈한 얼굴의 굉료를 보니 원호는 샘까지 나려 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절로 머쓱해졌다.
굉료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잔소리라고 생각해도 할 수 없지만, 큰일을 할 사람은 자신의 몸부터 챙겨야 하네. 자신의 몸조차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큰 뜻을 펴겠는가?”
“사숙님 말씀이 옳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네만, 세속에도 자네와 같은 고민을 하는 이들이 아주 많다네.”
“예?”
원호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눈으로 굉료를 보았다.
소림 방장이라는 중차대한 자리를 어떻게 세속의 일과 비교할 수 있을까?
“저와 같은 이가 한두 명도 아니고 아주 많다구요?”
“아주 많지.”
굉료가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자넬 곯리려는 생각이 아니니 그냥 대답해줌세. 바로 혼인이란 커다란 문제를 앞둔 남자들이 그러하다네.”
“네에?”
이 무슨 황당한 말인가!
굉료는 원호가 묻기도 전에 이유를 설명했다.
“보통의 민초들은 부자들처럼 일찍 혼인을 하지 못하고 비교적 뒤늦게 하네. 즉, 혼인은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독립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한 것이지.”
“그게 어떻게 저와 같단 말씀입니까?”
약간은 삐친 투인 원호의 말에 굉료는 껄껄 웃었다.
“혼인을 앞둔 남자들은 엄청난 부담감에 시달린다네. 가정을 이루고 처자식을 부양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몇 개로 늘어난 입을 먹여 살리는 것이 온전히 자신의 책무가 된단 말일세. 자신이 잘못하면 가족들 모두가 쫄쫄 굶게 되니 그 무게라는 것이 보통이 아니라네. 하늘이 땅에 붙은 듯 갑갑하고 밤에는 잠도 오지 않아 망연하기만 하고.”
원호는 어이가 없어 ‘허허’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뿐인가? 혼자일 때처럼 이 처자 저 처자를 마음대로 만날 수도 없네. 총각 때처럼 밤새 노름판에서 친구들과 굴렀다간 며칠 동안 바가지를 긁힐 걱정부터 해야 되는 게지. 그래서 혼인 날짜가 다가오면 달아날 생각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네.”
“사숙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제 일과 같을 수 있단 말씀입니까…….”
차마 그깟 일이 대소림의 방장보다 중요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그건…….”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세계가 있다네. 그건 누가 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다른 누가 크기를 가늠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네. 남들이 보기엔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지만 본인에게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일 수도 있는 것이라네.”
원호는 이해했다.
방장이란 자리도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겪는 건 분명 다르지 않은가.
“자네가 침식마저 잊고 오로지 ‘걱정’을 ‘걱정’하는 것처럼 말일세. 자신의 세계란 그런 것이지. 민초들이라고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생각해 보게. 전전긍긍한다고 혼인을 안 할 겐가? 인륜을 거스르고 평생을 홀로 살 텐가?”
“으음…….”
걱정을 걱정한다는 굉료의 말이 틀리지 않다.
원호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발전적인 고민에 빠져 있던 게 아니었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며 그저 기우(杞憂)에 빠져 있던 것이다.
원호는 고개를 수그렸다.
“부끄럽습니다. 제 수양이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수십 년을 정진하고 심신을 닦은 승려임에도 결국은 범인(凡人)의 번뇌 수준을 뛰어넘지 못했으니.
굉료가 고개 숙인 원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 역시 소림의 방장 자리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고 있다네. 소림의 누군들 그러하지 않겠나!”
“저는 범인이 틀림없나 봅니다. 방장 사백의 반이나 좇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그렇게 대단하다 생각하는 방장 사형이 말일세. 사실은…….”
굉료가 ‘험험!’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원호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조심스레 말했다.
“진산식 전날에 날 찾아와서 하도 푸념과 하소연을 해대는 바람에 내 숨겨두었던 곡주(穀酒)까지 털어야 했다네.”
“예엣?”
굉운이 술을 마시다니!
“쉿! 목소리가 너무 크네.”
이 놀라운 사실에 원호는 자기도 모르게 불호를 외고 말았다.
“아미타불. 몰랐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해탈하기까지 삶은 번뇌의 연속이라네! 그건 아무리 득도한 고승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지. 살아 있는 동안은 누구도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현명한 자는 새로운 번뇌를 맞이할지라도 현재의 번뇌에 굴하지 않는 법일세.”
“사숙…….”
원호는 가슴 한 부분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굉료의 법명을 중얼거리듯 외웠다.
굉료가 머쓱하게 웃었다.
“하하! 이거, 내가 괜히……. 원래는 이런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었는데.”
굉료는 민머리를 긁적이다가 그제야 본론을 말했다.
“방장 사형이 북해 문제까지 자네에게 넘겨버린 걸 알고 있네. 어떻게 할 생각인가?”
원호가 곤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흐음, 어려운 문제지. 그간 강호 무림과 척을 지고 살아온 북해빙궁이 수십 년 만에 강호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단순히 진산식의 손님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 그들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제대로 된 대처를 해야 할 걸세. 그것도 아주 빨리.”
원호는 무언가 자신이 놓친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급으로 결정할 문제라면 단순한 대접 차원에서의 대처를 말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고견을 들려주십시오.”
굉료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좋지 않은 얘기를 들었는데, 북해빙궁에서 본사에 찾아온다는 소문이 강호에 슬슬 흘러나고 있다 하네.”
“예상은 했습니다.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닌데 그들의 이동 경로를 보면 모를 수는 없겠…….”
흠칫.
원호는 말을 하다 말고 스스로 놀랐다. 굉료의 말에 담긴 어감이 미묘했다. 강호에 소문이 퍼지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한 일을 굳이 굉료가 찾아와 얘기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분명히 백의전에서 올라온 셀 수 없이 많은 보고 중에 사절단의 위치가 노출되어 소문이 나돈다는 정보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원호는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사절단의 안위가 걱정되시는 겁니까?”
굉료가 한순간에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알아챈 원호에게 적이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직까지는 징후가 없으나 불미스러운 생각을 가진 무리들이 나타날 것 같네.”
“이런……. 보고는 보았으나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상 이 같은 일 또한 처음인지라 다른 전주들도 자네와 마찬가지로 허둥대고 있다네. 백의전주도 정보수집에만 열을 올리지 이런 생각은 못했더군.”
“허어!”
“방장 사형도 참 못된 사람이야. 분명 방장 사형은 알고 있을 게 뻔하거든.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왜 굳이 모른 척하고 있느냔 말이지, 에잉.”
“아닙니다. 제가 모자란 탓입니다.”
원호는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꾸짖으며 물었다.
“외람되오나 사숙께서는 그 얘기를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필요하다면 좀 더 조언을 얻고 싶습니다.”
“제갈가의 사람에게 들었네.”
“예?”
난데없이 제갈가라니?
“그 왜 있잖은가. 건이를 졸졸 쫓아다니던 아이. 제갈가의 전 가주가 병환이 깊어졌는데도 돌아오지 않아 직접 가문에서 데리러 왔더군. 마침 잘됐다 싶어 만나고 왔네. 알다시피 제갈가는 본사와 오랜 시간 좋은 관계이지 않은가.”
“아!”
제갈가는 지모로 유명한 가문이다. 진법과 책략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책략이 뛰어나다는 것은 강호의 정세를 읽고 정보를 분석하는 능력 또한 뛰어나다는 뜻이다.
그런 제갈가에서 한 말이니 괜한 소리는 아닐 터다.
원호가 굉료를 보고 깊이 감사의 반장을 했다.
“지금 당장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겠네. 몸 챙기는 것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굉료가 집무실을 나가기가 무섭게 원호는 의자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북해빙궁이 소림으로 오고 있다…… .
그들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에만 골몰하고 있다 보니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말았다.
소림이 아니라 강호 무림의 반응을 먼저 생각했어야 했던 것이다!
북해빙궁과 강호 무림은 어떤 관계인가?
단 한마디로 사이가 정리되는 관계다.
적.
비록 마지막 칼부림을 한 것이 수십 년 전이라고는 하나, 수백 년이나 은원을 쌓아온 적이다.
무림의 은원은 천년을 우습게 여기는 법.
북해빙궁과의 싸움에서 사문의 제자와 사형제들을 잃은 이들의 은원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들은 북해빙궁이 중원에 발을 들였다는 소문만으로도 눈에 불을 켜고도 남을 터.
원호는 침음을 흘리고 말았다.
“바보같이……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북해빙궁 사절단의 안위를 가장 먼저 따져야 했는데.”
그렇다. 중요한 것은 사절단을 어떻게 맞이하느냐 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소림까지 무사히 올 수 있을는지, 그게 문제였다.
예전에는 아무리 사마외도의 무리라 할지라도 소림으로 오는 손님이라면 언감생심 건드리려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소림의 위상이 날로 추락하여 일반 무인들조차 소림의 경내에서 목소리를 높인 사건들이 있지 않았는가!
어떻게 하면 소림에 흠집을 낼 수 있을까 하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무리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만무하다.
소림에 손님으로 찾아온 북해빙궁의 사자가 도중에 해코지라도 당한다면?
소림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것은 물론이요, 강호의 뭇 사람들이 소림을 우습게 여길 것이 분명하다. 손님이 나쁜 꼴을 당하는 것이야말로 집주인에게는 크나큰 치욕이므로.
강호의 순리에서 첫 손가락에 꼽는 것이 복수다.
대의명분도 있겠다, 변명거리도 있겠다. 소림을 침몰시키기에 이만한 기회는 없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북해빙궁의 사절단에는 고위 관계자까지 있다 했다. 그가 만에 하나 변이라도 당한다면 북해빙궁과의 마찰은 필연적으로 생기리라.
그것이 이제껏 잠자코 숨죽여 지내던 북해빙궁과의 전면전으로 벌어질 수도 있다.
싸움은 두렵지 않으나 소림은 싸움의 빌미를 제공하도록 그저 이용만 당하게 될 뿐이다. 만일 싸움에 이긴다 해도 소림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시기가 좋지 않아…….”
최근 우내십존의 은퇴설이 나도는 와중이다. 바야흐로 강호의 구도가 재편성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시점이다.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많은 무인들이 서로의 실력을 뽐내기 위해 대거 강호로 쏟아져 나올 것이며, 각 문파의 세력 싸움도 치열해질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을 드러내어야 하는 이들에게 북해빙궁과의 전쟁은 오히려 바라 마지않는 일이 될 터였다.
어쩌면 그간 힘을 비축하고 웅크리던 북해빙궁 역시 그 같은 사태를 노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안의 중대함이 피부로 와 닿는다.
소름이 쭉 끼쳤다.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 소림이 먹잇감으로 전락하도록 만들 수는 없어.”
원호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북해빙궁의 사절에게 호위를 붙여야 한다.
그것이 가장 급선무다.
누구를 보내야 할까.
원호가 몇몇을 손꼽아 보고 있는데.
“사백님!”
갑자기 무자배의 승려 한 명이 헐레벌떡 원호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오황께서…….”
“본사에 드셨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 얘기로 호들갑을 떠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왜였을까?
원호는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그 뒤에 나올 말을 알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툭 하고 말이 튀어나왔다.
“건이냐?”
“예? 예. 오황께서 건이를 만났답니다.”
“건이!”
부들!
그 이름을 듣자마자 갑자기 손이 떨렸다.
“말하지 마라.”
“네?”
보고를 하러 온 승려가 더 당황했다.
“하, 하지만 말씀을 드리지 않으면…….”
듣기 싫다고 듣지 않을 문제가 아니었다.
원호가 진저리를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말해봐라.”
“오황께서 본사의 기물을 마구 파손하셨는데…….”
“뭣이? 오황께서 왜 본사에서 난동을 부리셨단 말이냐! 아니다. 건이를 만나서 어떻게 되었느냐? 그것부터 들어야겠다!”
“뛰고 계십니다.”
“응?”
잠깐 동안 원호는 승려의 말을 곱씹어보아야 했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라고?”
“뛰고 있습니다. 오황과 건이가…….”
“뛰긴 뭘 뛰어! 오늘 처음 본 사람들끼리 뭘 어떻게 했기에 다짜고짜 뛰어!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일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장건만 끼면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지 상상도 할 수가 없다.
뛴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원호는 미칠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됐다! 내가 직접 가봐야겠다.”
원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쨌거나 그에게 주어진 일.
회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이미 익숙한 일이다. 이제는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에 친숙함마저 느껴진다.
그것이 절대로 좋은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으으으, 장건 이놈.”
원호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당장에 닥친 일만 해도 버거운데 장건, 장건! 그놈의 장건이 늘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