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60
제 1 장 법당에서 생긴 일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
소림의 내원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작은 법당만이 유독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싸늘한 날씨인데 법당의 창틈으로 뿌연 김이 몽글몽글 피어올라 따스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 작은 법당은 소림을 찾은 처자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목욕탕이다.
오늘의 순번은 남궁지가 특별히 요청한 대로 당예와 제갈영, 양소은이 함께하고 있었다. 장건에 대한 얘기를 비밀리에 나누기 위해서였다.
한데 특별한 불청객이 나타나고 말았다.
강호제일미로 소문난 미녀 백리연이었다. 본래 순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따르는 학사 출신의 이병이 끈질기게 요구하여 백리연도 들어오게 된 것이다.
먼저 들어와 있던 네 사람은 백리연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
“…….”
백리연은 먼저 목통에 들어가 있던 넷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백리연은 미리 와 있던 넷은 아랑곳 않고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당예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예, 예쁘다…….”
백리연은 당예를 힐끗 보더니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칭찬에는 익숙하지만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물에 젖어 아롱거리는 머리를 헤치며 발그레 달아오른 뺨으로 웃는 모습에 여자들도 반하고 말 지경이었다.
하지만 양소은은 애써 백리연을 외면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성격도 외모만큼만 했으면 얼마나 좋아?”
백리연이 살포시 인상을 쓰며 양소은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소림에 오는 도중에 시비가 붙었던 그 여자였다.
“양가장에서 왔다 했었나? 남의 일에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양소은이 혀를 찼다.
“어떻게 신경 쓰지 않겠어. 그 예쁜 얼굴을 두.번.이나 두들겨 맞았는데.”
따듯한 물의 온도 때문에 달아올랐던 백리연의 뺨이 더 붉어졌다.
백리연도 무가에서 태어난지라 누구와 싸워서 맞았다는 걸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자도 아닌 남자가, 그것도 얼굴을 때렸다는 것은 그녀에게 무척이나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흔한 말로 모든 남자가 자신을 다 경외시한다 믿었는데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랄까?
백리연은 대꾸도 하지 못하고 눈을 흘겼다.
‘하필 저딴 게 같이 있을 게 뭐람?’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괜히 볼 때마다 시비를 거는 양소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참자, 참아. 다 내가 예쁘니까 질투해서 저러는 거겠지. 아, 너무 예쁜 것도 죄라니까. 난 대체 왜 이렇게 태어난 거야…… 조금만 평범하게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씻고는 싶은데 사람이 차 있다고 해서 억지로 부탁해 온 자리였다.
백리연이 고개를 휙 돌렸는데 양소은이 다시 빈정거렸다.
“코는 좀 괜찮고? 자세히 보니까 좀 비뚤어진 거 같은데…….”
“뭐, 뭐?”
백리연이 놀라서 코를 만졌다. 그러나 아무 이상이 없었다.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이, 이게?”
양소은이 깔깔대고 웃었다.
“바보같이! 장난이야, 장난.”
“당신……!”
백리연은 부들부들 떨었다. 화가 나서 같은 목통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백리연은 씩씩대며 겉옷고름을 다 풀지도 않고 양소은을 노려보았다. 홍조를 띤 볼과 습기에 젖어 색기 가득해보이는 눈빛이 몽환(夢幻)처럼 아름다워서 양소은도 순간 흠칫했다. 그러나 곧 양소은은 지지 않겠다는 듯 백리연을 마주 쳐다보았다.
따스한 김은 천장으로 피어오르는데 분위기는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남궁지는 생각 외의 일에 살짝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고 제갈영은 백리연의 몸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으며, 당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약간은 초조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법당의 안에서 치러지는 여인들의 소리 없는 싸움처럼, 법당 밖에서도 역시 소리 없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복면을 한 괴인도 처음부터 손을 쓸 작정은 아니었다.
손을 뻗는 순간,‘내가 이 나이 먹고 꼬마 놈들과 뭐 하는 짓이냐?’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강호제일미의 목욕하는 모습은 그에게 너무나도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말만 들어도 눈앞에서 아른거릴 지경이었다.
여자를 좋아하는 그에게 강호제일미의 나신은 목숨을 반쯤 내주고서라도 바꿀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왕 내친걸음이었다.
괴인은 옆의 두 아이, 소왕무와 대팔을 가볍게 밀어놓고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괘씸한 아이…… 장건까지 제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괴인의 손이 느리디느리게 장건을 향해 날아간다. 옆에서 보면 거북이가 기어가는 듯하지만, 앞에서 당하고 있는 장건에게는 괴인의 수법이 다르게 보인다.
갈고리 같은 손이 공간을 띄엄띄엄 격하고 날아오는 것 같다.
장건이 피해야 한다 생각하면 여지없이 그 방향을 점하며 손이 이동한다. 손은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수십 개나 되는 손이 온 공간을 감싸고 있다.
그러나 잘 보면 괴인의 손은 여전히 장건의 어깨를 파고 들어오는 중이다.
장건은 기가 다 질릴 지경이었다.
‘이게 뭐지?’
얼핏 금나수처럼 보이는 그것이 사실은 무당의 상승절기인 현천유운장(玄天流雲掌)의 묘리를 담고 있다는 걸 장건이 알 리 없었다.
괴인의 몸에서는 별다른 공력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위기의 덩어리를 보려 해도 보이지 않았다.
장건은 어쩔 수 없이 용조수를 펼쳤다.
사사삿.
기마병의 진로를 막는 거마목(拒馬木)처럼 장건의 손이 괴인의 경로를 막아서며 팔꿈치와 손목을 잡아챈다.
불필요한 동작이 전혀 없는 장건의 수법은 최근 더 완숙해졌다.
어깨와 몸이 미동도 하지 않아 언제 손을 쓰는지 알아챌 수도 없을 뿐더러, 최적화된 궤도로 용조수를 뻗으니 상대는 갑자기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불쑥불쑥 손들이 튀어나오는 느낌인 것이다.
‘잡았다!’
장건의 왼손이 괴인의 뻗은 우완(右腕)에 닿고, 오른손은 왼 손목을 꺾었다.
흔들.
괴인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팔을 휘청거린다 싶은 그 순간 장건은 괴인의 팔을 놓쳤다. 분명히 손에 잡혔다 생각했는데 괴인의 팔은 어느새 장건의 손을 벗어나 있었다.
‘어?’
사람의 팔이 미꾸라지도 아닌데 어떻게 비틀려 있던 채로 아무렇지 않게 빠져나올까?
장건의 좌측 어깨에 괴인의 엄지와 검지, 중지 손가락이 찍어 누르듯 박혔다.
코끝이 찡할 정도의 통증이 장건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장건은 이를 악물고 소리를 참았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혈도가 잡혔는지 순식간에 기의 흐름이 막히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 왔다.
장건은 동요하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몸의 미세한 근육들을 재빨리 움직였다. 발바닥에서부터 다리, 허리, 상체까지 근육을 비틀어 금강권의 경력을 만들어냈다.
자그마한 소용돌이가 몸을 타고 오르며 점점 더 커져간다. 그러다가 회오리치는 경력이 막혀 가던 혈과 부딪쳤다.
탕!
마구 돌던 경력의 회전력에 막혀 있던 혈도가 억지로 열렸다. 회오리치는 금강권의 경력이 막힌 혈을 거칠게 통과하며 뚫고 나왔다.
장건의 머리카락이 빨래를 비트는 것처럼 쪼르륵 말렸다가 한꺼번에 산발하며 풀렸다.
푸르르르르.
‘오잉?’
괴인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분명히 제대로 점혈을 했는데 스스로 풀어 버린 것이다.
강호에 존재하는 기괴한 무공 중에는 요혈의 위치를 스스로 옮겨서 애초에 점혈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수법도 있다. 그러나 점혈을 당한 이후에 스스로 해혈을 할 수 있는 수법은 극히 드물다.
‘소림에 이런 수법이 있었나?’
괴인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그가 아는 한 소림에 이런 수법은 없었다.
장건은 근육이 꼬여 몸이 아팠지만 입모양으로 벙긋거렸다.
‘이제 그만해요.’
괴인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럼 비킬 거고?’
‘아뇨.’
‘네가 지금 나랑 장난하냐!’
이 순간에도 강호제일미는 하나둘 옷을 벗고 있다. 촤악 하고 물 끼얹는 소리가 조금 전 들렸다.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야 공력을 써서 장풍으로 날려 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강호제일미의 나신도 날아가는 것이다.
최대한 조용하게, 은밀하게 괴인이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엔 장이다.
팔괘장(八卦掌)!
빠르고 날카롭게 팔괘장이 장건의 가슴을 쳤다. 이상하게 점혈이 안 되니 아예 장으로 후려쳐 기절시킬 작정이었다.
안법을 사용하고 있는 장건은 괴인의 몸에 은은하게 감도는 위기의 덩어리를 감지했다. 마음대로 공력을 조절해 위기를 드러낼 정도이니 보통의 실력이 아니다. 그러나 무지막지한 공력이 깃들지 않았으니 장건에게도 방법이 있다.
장건은 양손으로 괴인의 장을 받았다. 그러고는 유원반배로 힘을 되돌려 우권을 뻗었다.
‘아차!’
무심코 몸에 익은 대로 한 행동인데 뒤를 생각하지 못했다.
빡 하는 격타음이 날 게 분명했다. 사람을 때리는 소리를 안에서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괴인의 가슴에 박힌 장건의 주먹은 그런 소리를 내지 못했다. 뭔가 푹신한 것을 때린 듯 푹 하고 장건의 주먹이 힘 빠진 소리를 내더니, 괴인의 양 어깨와 허리가 물결치듯 흐느적거렸다.
출렁.
‘어어어?’
때리긴 했는데 닿은 느낌만 있지 가격한 느낌은 없다. 그냥 힘이 쏙 빨린 느낌이었다.
장건의 머리에 퍼뜩 비슷한 광경이 떠올랐다.
‘설마?’
장건이 놀란 표정을 지은 것처럼 괴인도 적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건의 반격을 완전히 흘렸지만 그래도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 꼬마 좀 보게? 겨우 유원반배로 내 팔괘장을 되돌려?’
심지어 자신이 팔괘장에 가한 힘에서 한 푼의 가감도 없었다. 십을 보냈는데 십 그대로 되돌아 왔다.
그렇게까지 세밀하게 유원반배를 운용하는 무인은 본 적이 없다. 더구나 팔괘장은 맞는 순간 장력이 여덟 군데로 분산되어 퍼져서 통제하기가 쉽지 않은데 일일이 그걸 주워 담아 다시 보낸 것이다.
‘소문대로 한 실력 하는 놈이구만!’
자신이 공력만 제대로 쓸 수 있어도 한주먹거리도 안 될 테지만, 왠지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괴인은 코웃음을 쳤다.
‘이화접목(梨花?木)과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은 본래 소림보다 무당이 위라는 걸 알려주마!’
괴인이 재차 팔괘장을 뻗었다. 속도가 화살만큼이나 빠른데도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장건이 막기도 급급할 정도로 빨랐다. 장건은 겨우 팔괘장을 받아서 유원반배로 되돌려냈다.
장건의 권에 맞은 괴인의 몸이 한쪽부터 흐느적한다 싶더니 물결이 전이되어 다른 쪽으로 움직여갔다.
‘또?’
우권에 맞은 가슴이 뒤로 물러난 순간 부드럽게 허리가 나오고 옆구리가 돌면서 반대쪽 어깨가 빙글 회전한다. 타격된 곳에서부터 퍼진 동심원이 반대 어깨에서 팔꿈치로, 그리고 쭉 뻗은 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장은 장건을 향하고 있다.
‘윽!’
장건은 재차 괴인의 장을 받아내다가 기겁을 했다.
괴인의 위기는 은은하게 감돌 뿐이다. 그런데 이번 장력은 방금의 것보다 두 배나 더 되는 위력을 감추고 있었다.
‘어, 어떻게?’
내공을 더 썼다면 겉에 드러난 위기가 더 짙어지고 커졌을 터였다. 하지만 위기는 아무 변함이 없었다. 공력을 처음과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장력의 위력은 두 배로 강해졌다.
묵직해진 장력이 장건의 팔을 타고 올라 사지로 뻗어나가려 했다. 장건은 유원반배의 경락을 운공하며 다시 우권을 휘둘렀다.
두―웅.
이번에도 힘이 쭉 빨려나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장건의 주먹은 허무하게 파묻혔다. 괴인은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괴인의 몸 부분부분이 수차례의 원을 그리면서 예의 팔괘장이 다시 쏘아진다.
장건은 팔괘장을 받은 순간 숨이 탁 막혔다.
‘컥!’
한층 무겁다.
대략의 느낌으로 보건대 방금의 장력에 다시 한 배가 더해져서 세 배의 위력이 담긴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번에 다시 돌아올 때에는 몇 배지?’
한 번 돌 때마다 한 배의 팔괘장이 더해지니 네 배다.
벽돌을 쌓아올리듯 팔괘장의 공력이 증가하고 있다.
장건은 이제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유원반배로 팔괘장의 장력을 되돌리는 게 슬슬 버거워졌다.
장건이 가진 내공의 수위에서 유원반배로 받아낼 수 있는 공력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장력은 자꾸만 불어나고 그때마다 장건의 몸은 아우성을 질러 대고 있었다.
산 위에서 주먹만 한 눈덩이를 굴렸더니 산 아래에 도착했을 때에는 집채만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더라, 하는 얘기처럼 장력에 담긴 힘이 증가한다.
두―웅!
여섯 배.
여섯 배가 불어난 공력의 팔괘장이 장건의 몸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어쩔 수 없이 유원반배로 받아내긴 했는데 다시 되돌리기가 요원하다.
묵직한 쇳덩어리가 몸에 틀어박힌 기분이었다. 이제 장건은 자신의 내공을 한층 더해서 쇳덩어리를 밀어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언 발에 오줌 누기나 마찬가지였다.
괴인은 장건이 더한 내공까지 더해 팔괘장으로 되돌렸다. 일곱 배가 아니라 거의 여덟 배에 가까운 무지막지한 공력이 장건의 손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울컥.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장건은 아찔해졌다. 괴인은 처음과 다름없이 멀쩡한데 장건만 혼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무,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괴인이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장건은 오기가 생겼다.
‘저 흐느적거리는 동작에 뭔가…….’
장건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괴인의 모습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왼손만으로 유원반배로 팔괘장을 받으면서 팔을 크게 회전시켰다.
놀랍게도 팔에 더해지는 부담감이 한층 줄어들었다. 그러나 회전력 때문에 팔괘장의 장력이 손바닥에서 금방이라도 터질 듯 응축되고 있었다.
엄청난 공력이 담긴 장력이 손바닥에서 터지면 장건의 손은 통째로 찢겨 버릴 터였다.
장건은 괴인의 움직임을 흉내냄과 동시에 문사명을 상대했던 젊은 도인의 행동을 떠올렸다.
‘큰 원에서 작은 원으로…….’
손바닥은 크게 돌리되 팔꿈치는 그보다 작은 원을 그린다. 자연스레 손에 몰린 장력이 팔로 이동한다. 어깨로 이동시킨 장력을 순간 몸에 퍼뜨려 파괴력을 완화한 후, 유원반배의 수법으로 다리와 허리를 통과시켜 오른쪽 어깨에 장력을 보낸다.
그리고 오른팔로 원을 점점 크게 그리며 주먹을 뻗는다.
왠지 허우적거리는 자세가 꼴사납기까지 했지만 어쨌거나 다소 거친 원형을 그리며 팔괘장의 장력이 장건의 몸을 무사히 통과했다.
‘해냈다!’
장건은 환호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지만, 반대로 괴인은 놀라서 자빠질 뻔했다.
‘아니, 이 망할 놈이?’
한눈에 보기에도 어설픈 몸놀림으로 자신의 수법을 따라한 것이다!
하나 괴인은 결코 만만치 않은 자였다. 괴인은 예의 흐느적거리는 동작으로 원을 그리며 장건의 권을 받아냈다. 그리곤 권경을 고스란히 돌리며 다시 한 배의 공력을 더해 팔괘장을 내뻗는다.
처음의 팔괘장에 아홉 번이 더해져서 도합 열 배의 공력이 담긴 팔괘장이 장건을 향해 쏘아졌다.
장건은 유원반배로 괴인의 팔괘장을 받을 때에도 원형을 유지해보았다.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장을 받아내니 받는 순간의 충격이 한층 덜해진다.
숨이 막히고 쇠망치로 맞은 듯 경직될 정도의 충격이 아니라 무거운 물건을 든 정도다.
장건은 동작이 원에 가까울수록 충격이 완화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좋아!’
장건은 다시 유원반배와 원형의 동작을 융합해 괴인의 팔괘장을 되돌렸다.
괴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미친!’
첫 팔괘장에 담긴 공력은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 소리 없는 제압이 목적이었기에 죽일 정도의 힘은 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처음보다 열 배가 넘는 공력이 담긴 팔괘장은 황소라도 일격에 때려죽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이 담기게 되었다.
그런 위력의 장력을 쉽게 받아넘길 수 있는 무인은 강호를 통틀어도 흔치 않은 것이다.
그런데 점차 불어나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갑자기 안정을 되찾다니…….
‘오냐. 네가 어디까지 하는가 보자.’
괴인은 오기에 가까운 승부욕을 불태웠다.
열두 배…… 열세 배…….
괴인과 장건을 통과하는 팔괘장의 공력은 자꾸만 무거워져 갔다.
하지만 괴인은 다시금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뭐……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공력은 무거워져가는데 장건의 행동은 오히려 더 가벼워져가고 있었다.
허수아비가 버둥대는 듯한 동작으로 겨우겨우 팔괘장을 되돌리던 장건의 동작이 차츰 안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동작의 크기도 자꾸만 작아져서 이제는 팔로 원을 그리는 건지 세모를 그리는 건지도 알아보기 힘들다.
장건은 한층 신이 났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답이었어. 원을 통해서 힘을 옮기면 많은 힘이 들지 않아. 적은 힘으로도 부담 없이 큰 힘을 옮길 수 있어.’
유원반배의 단점은 자신의 내공 수위에 따라 받아낼 수 있는 공격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내공을 상회하는 강한 공격은 유원반배로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원을 조합하면 내공의 몇 배나 되는 힘도 받아낼 수가 있었다.
몇 번을 하다 보니 굳이 팔을 휘적휘적 크게 돌릴 필요도 없다는 걸 알았다.
장건은 남들이 하지 못하는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조정할 수 있다.
‘팔을 다 돌려서 힘을 소모할 게 아니라 뼈와 근육의 일부분씩을 움직여 원을 그리면 더욱 간단하고 빠르겠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벽력탄 같은 위험한 공력의 덩어리가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통과해 가고 있는데도 장건은 위기와 동시에 쾌감을 느꼈다.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에 대한 기쁨이 짜릿하다.
앞에 있는 상대가 상상도 못할 실력을 가진 고수이며, 동시에 소림의 내원에 난입한…… 그것도 소녀들이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려는 파렴치한이라는 것도 잊었다.
무려 이십 배나 되는 팔괘장이 장건에게 쏘아졌을 때, 이미 장건은 거의 움직임이 없어졌다.
왼손바닥으로 이십 배의 공력을 담은 팔괘장의 장력이 들어오자, 장건의 손바닥 위 근육, 팔뚝 안쪽의 소지구근이 비틀리면서 작은 나선으로 반회전을 한다. 단순한 원이 아니라 몸 안쪽을 향하는 나선이다.
그 나선의 흐름을 타고 장력이 이동하면 수장건이 이어받아 총굴건으로 보내고, 상완근이 다시 비틀리며 이두근으로 보낸다. 이두근의 비틀린 끝부분에서 삼각근으로 힘이 전이되고, 목 뒤의 등세모근으로 이동했다가 능형근과 두판상근을 거쳐 견갑거근까지 등 쪽을 일주한다.
근육을 무자비하게 꼬아 버리는 금강권의 나선 경기에 익숙해져서인지 근육이 반회전 정도로 뒤틀려 봐야 거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
몸 앞쪽에서부터 시작해 자연스레 등 쪽으로 옮겨간 장력은 소원근과 삼두근을 거쳐 장건의 오른팔 뒤쪽의 근육을 타고 지신전근까지 쉴 틈 없이 달린다.
팔뚝의 지신전근에서 손등의 지신전건을 타고 갈래로 흩어진 장력이 장건의 손가락 끝까지 이동하자, 장건은 주먹을 꾹 쥐었다.
손가락 끝에 몰려 있던 장력이 주먹을 쥠과 동시에 하나로 뭉쳐서 발출된다.
촤라락!
금강권처럼 심한 나선형의 파괴적인 경기는 아니었지만 나선의 흐름을 탄 팔괘장의 장력 역시 나선으로 꼬이며 괴인을 향해 짓쳐들었다.
‘무량수불!’
자기도 모르게 기겁하여 도호를 왼 괴인이었다. 처음으로 장건의 권을 받을 때 저릿함을 느꼈다.
괴인은 급히 허보를 밟고 야마분종(野馬分?)의 식(式)으로 권을 받고 누슬요보(樓膝拗步)에서 태극경(太極經)을 시도하여 가슴에 파고든 권력을 우장으로 이동시켰다.
찌르르르.
뼈가 울리고 근육이 찢기는 듯하다. 가시덤불이 혈도를 지난 것처럼 혈도 여기저기가 긁혔다.
이를테면 팔을 가지런히 벌려 왼 손등에 공을 놓고 팔과 어깨를 물결치듯 움직여 공을 오른 손등까지 움직이던 중에, 갑자기 미끈한 공이 가시가 촘촘히 박힌 가시공으로 바뀐 것과 같다.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움직여 다른 손으로 보낼 수는 있지만 피부에는 긁히고 찍힌 상처가 남는 것이다.
본래 괴인이 사용한 태극경은 음양이 서로 어우러진 태극의 모양처럼 원형의 동작을 이용하여 상대의 공격을 피해 없이 흘릴 수 있는 기예(技藝)다.
태극경은 안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노력한다고 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태극권을 극성까지 익히면 절로 몸이 그에 맞추어지며 태극경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태극경을 극한까지 익히면 지금의 괴인처럼 힘을 증폭시켜서까지 돌려보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사량발천근이다.
벌써 오래전 쇠촉이 달린 수십 발의 화살이 날아와도 아무런 공력을 일으키지 않고 상처 하나 없이 맨손으로 잡아낼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던 그다. 오히려 화살을 오던 속도보다 빠르게 되돌리기도 한다.
한데 그런 그가 고작 열대여섯이나 된 작은 소년에게 애를 먹고 있는 것이다.
‘네가 나한테 이러면 넌 멀쩡할 것 같으냐?’
괴인은 어금니를 깨물고 팔괘장을 뻗었다.
그러나 이미 괴인의 몸을 지난 장력은 부드러운 물결형으로 변해 있었다. 장건의 손바닥에 닿을 때에는 나선이 풀려 가시가 다 빠진 미끈한 공이 되어 있다.
하지만 장건의 몸에서 되돌아온 공은 또다시 가시공이다.
심지어…….
장건의 내공 중 일부가 된 독정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이 미친 호로 꼬마 놈!’
괴인은 몇 되지 않지만 아는 욕을 전부 내뱉었다.
괴인의 태극권이 제아무리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비슷한 수준인 풍진의 검은 태극경으로 되돌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내십존 중의 일인인 독선 당사등의 독정은 소량이었지만 괴인이 무시하기엔 어려운 것이었다.
가뜩이나 비대해진 데다 가시가 돋친 팔괘장의 공력을 옮기는 것도 피곤한 일인데, 독까지 체내에 쌓인다.
설상가상이라는 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거지 발싸개 같은 일이 어디 있어!’
괴인은 약이 올랐다.
자존심도 자존심이고 체면도 상했다.
그냥 이런 거지 같은 짓은 그만두고 단숨에 장건을 때려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먼저 포기한다면 같은 수법의 대결에서 진 셈이 되고 만다.
자신이 지는 것도 문제지만 태극권이, 나아가 무당이 지는 꼴이 되니 중도에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얼굴이야 가렸다 치더라도 스스로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빠드득.
괴인의 머리에 홍오가 떠오른다. 홍오의 주특기는 타 문파의 무공으로 그 문파의 제자를 쓰러뜨리는 것이다.
‘어디서 이렇게 홍오를 빼다박은 놈이 나타난 거냐! 소림에 처박혀 산다더니 이런 괴상한 놈을 어디서 구해왔어?’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홍오보다도 눈앞의 꼬마가 더 괴물이다. 홍오는 타 문파의 절기를 훔쳐 배우고 익히는 데 능숙했지만, 깨달음과 오랜 수련이 필요한 상승 절기만큼은 흉내내지 못했다.
한데 이 꼬마는 무당의 모든 무공이 추구하는 궁극의 형태인 태극 환경을 스스럼없이 흉내내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거의 움직임이 없어 겉으로만 보면 무당의 수법인지 알 수도 없을 지경이다. 처음부터 쭉 상대를 하고 있는 괴인이니 장건의 행동이 자파의 수법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장건의 수법은 놀랍게도 괴인의 환경보다 오히려 더 발전된 형태다. 몸과 경(經)을 함께 움직여서 힘을 흘려내는 무당의 수법에 비해 장건은 거의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환경을 해내고 있었다.
설상가상이라고 거기에 침추경과 독공까지 덤으로 붙여 보내니,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다.
‘이건 뭐 소면에 삶은 양고기와 돼지고기를 추가했더니 덤으로 구운 닭 염통과 튀긴 잉어를 고명으로 얹어주는 거냐!’
비유는 적절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괴인의 심정은 딱 그러했다.
이젠 발을 빼기도 어려워진 상황.
누가 어떻게 되든 끝까지 같은 방법으로 해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삼십 배…….
이제 장건과 괴인의 손을 오가는 팔괘장의 공력은 삼십 배에 달해 있었다.
흙벽에 짚단으로 지붕을 엮은 작은 초가집 따위는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위력이 담긴 것이다.
괴인의 한 수에 겁을 먹고 밀려나 있던 소왕무와 대팔은 처음부터 끝까지 둘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핏 보면 괴인은 맞고 장건은 막으면서 때리는 듯한 장면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순식간에 수십 번의 주먹질이 오가더니 장건의 주먹은 아예 괴인의 가슴에, 괴인의 손바닥은 장건의 손바닥과 딱 붙어 버렸다.
한데 장건은 꼼짝도 안 하고 있는 상태에 반해 괴인의 온몸은 연신 출렁인다.
‘내력 대결이다!’
소왕무와 대팔은 둘이 무엇을 하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한 수로 자신들을 밀어낼 만큼 엄청난 내공을 지닌 괴인과 장건이 대등하게 백중지세로 마주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엔 장건이 밀리는가 싶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아니었다.
‘잘한다! 대단하다, 내 친구 건이!’
소왕무가 침묵의 응원을 보내자 대팔이 눈짓을 했다. 자신의 주먹을 쥐고 괴인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뭐?’
‘지금 뒤통수를 패 버리면 돼.’
내력 대결에 들어가면 극도로 예민한 상태가 되어 외부에서의 충격에 약해진다. 더구나 상대와 백중지세로 내공을 겨루는 중이라 작은 방해만 받아도 큰 내상을 입는다. 주화입마를 당할 가능성도 굉장히 크다.
실제로 장건과 괴인은 서로의 내공을 겨루는 내력 대결은 아니었으나, 옆에서 보기엔 그런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소왕무가 주저했다.
‘하지만 그랬다가 죽으면 어쩌지?’
‘그래봐야 변태인데 좀 죽으면 어때.’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던 소왕무가 인상을 썼다.
‘야! 변태라고 막 죽이는 건 이상하잖아!’
‘아, 그런가?’
‘그러다가 장건이 다치면 어쩌려고!’
미묘한 대치 상태인지라 급작스럽게 균형이 무너지면 장건이 다칠 수도 있었다.
‘그럼 그냥 이대로 냅두리?’
‘젠장…….’
그때 둘은 무언가 꺼림칙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서서히, 하지만 매우 빠르게 불안감이 밀려들고 있었다.
‘어어어?’
우우우웅.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작은 파문을 일으킬 정도의 진동은 숨 한 번 고를 시간 동안 급격히 커져갔다.
‘어어어어!’
장건과 괴인의 몸이 두어 개로 보일 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흔들린다기보다는 잘게 떨고 있다.
둘의 발아래에 낮게 깔린 흙먼지가 회선(回線)을 그리며 밀려나가고 옷자락은 하늘로 치솟아오른다.
츠츠츠츳.
거대한 공력이 오가고 있음이 확실했다. 전신이 위축될 정도의 공력이다. 하늘로 솟은 장건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듯 나부꼈다.
그그그그그.
공기가 소리가 있는지 소왕무와 대팔은 처음 알았다. 공기 소리가 웅장하게 울리며 어깨를 짓누르는 듯하다.
소왕무와 대팔은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엄청난 고수가 내뿜는 살기를 그대로 받은 것처럼 모골이 송연했다.
‘야! 어떡하지?’
‘뭘 어떡해!’
‘이러다가 뭔가 잘못되면 어쩌냐고!’
‘그게 문제냐!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저 무시무시한 공력이 도중에 폭발하기라도 한다면 둘은 견뎌낼 재간이 없다.
‘장건이라면 몰라도!’
소왕무와 대팔은 눈을 마주쳤다. 둘의 눈에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튀어!’
소왕무와 대팔은 무작정 뛰었다. 이 정도의 공력이 발생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를 리 없다. 누군가 달려와 이 상황을 해결할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피하는 게 우선이다. 나중에 경을 치더라도 지금 달아나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어려울 터다.
‘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지!’
‘내 말이!’
괜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을 소왕무와 대팔은 독선의 일로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
소왕무와 대팔은 당예에게 부탁받아 장건에게 환단을 먹인 사실도 잊고 정신없이 달아났다.
☆ ☆ ☆
백리연은 천 쪼가리 하나 걸치지 않은 하얀 나신을 그대로 드러낸 채 자기 머리에 물을 한 통 퍼부었다.
촤아악!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백리연의 쇄골을 타고 내려와 동산 같은 가슴을 올랐다가 가파르게 떨어져 흘러내렸다.
백리연이 자연스럽게 옷을 벗고 물을 끼얹는다.
단순한 그 동작에 당예와 제갈영, 양소은과 남궁지는 멍해지고 말았다.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같은 여자인데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어쩜 사람이 저리도 완벽할 수 있을까?
백옥처럼 고운 피부 위로 윤기나는 까만 머리가 물에 젖어 비단결처럼 풀어헤쳐졌다.
달빛을 머금은 호수처럼 투명한 살결은 너무나도 투명하고 매끄러워 사람의 것 같지도 않다. 잡티 하나 없는 백설의 느낌을 고이 간직한 듯하다.
급격한 곡선을 그리는 몸매는 풍만하기 그지없다. 가슴은 손만 대면 터질듯 탱탱하고 엉덩이는 높이 솟았는데, 그 사이에 있는 허리는 부러질 것처럼 가냘프기만 하다.
유요(柳腰)라는 말처럼 가늘고 부드럽게 뻗은 허리는 백리연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단어 같았다.
청초하고 고아한 외모와 달리 옷을 벗으니 몸매는 풍만하고 색정적으로까지 보이는 것이다.
허벅지에서부터 종아리, 발목까지 이어지는 완연한 선도 흠잡을 데가 없다. 어찌나 피부와 선이 매끄러운지 물방울이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흘러내린다.
그야말로 완벽한 몸매.
이런 여자이니 어떤 남자라도 빠지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것일 터다.
‘와…… 진짜 불공평하다. 입혀도 예쁘고 벗겨도 예쁘면 난 어쩌라는 거야?’
제갈영은 아까부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같은 생각은 다른 세 명도 마찬가지였다.
백리연은 자신을 주시하는 네 쌍의 눈은 아랑곳 않고 가볍게 몸을 씻은 후 목통에 손을 대보았다. 물이 뜨거운지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그 모습마저도 아름답다. 그녀의 추종자들이 옆에 있었다면 ‘이 못된 물 같으니! 감히 뜨거워서 우리 백리 소저의 얼굴을 찡그리게 해?’ 하면서 길길이 날뛰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순간.
퉁.
묘한 울림.
작은 진동이 있었다.
“응?”
백리연이 목통으로 들어가다 말고 목통 안을 들여다보았다.
물의 표면에 파문이 일고 있었다.
백리연은 처음엔 몸에서 물이 떨어져 파문이 생긴 줄 알았다.
퉁퉁.
그러나 목통 안의 물 위에 연이어 동심원이 그려지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당예와 제갈영, 그리고 양소은도 목통 안의 물이 연이은 파동을 그리는 광경을 보았다.
“뭐지?”
불안한 기운이 엄습하더니 갑자기 목통 안의 물이 들끓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팍!
물이 끓으면서 물방울이 툭툭 터진다. 딱히 뜨거운 것도 아닌데 용암처럼 스스로 끓는 것이다.
“앗, 따가워!”
백리연이 목통에서 발을 빼고 밖으로 나와 몸을 움츠렸다.
마치 가시넝쿨에 발을 디딘 듯한 느낌이었다.
백옥 같은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다른 사람들은 통 안에 있었기에 백리연보다 피부에 느껴지는 반응이 살짝 늦었다.
양소은이 숨을 들이켰다.
“흡!”
누군가 근처에서 엄청난 공력을 전개하고 있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와 답답한 숨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다들 조심해!”
양소은이 벌떡 일어나 외치려는 순간.
말 그대로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꽝!
지척에서 벼락이 떨어진다면 아마 그런 느낌일 터였다.
온 세상이 갑자기 뒤흔들리며 한순간 귀가 먹먹해지고 시야가 까맣게 물드는, 그런 느낌.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소리가 목에 걸려 나오지 않는, 그런 느낌이다.
휘이이이.
싸늘한 바람이 분다.
다섯 사람은 멍하니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한쪽 벽면에 사람 머리 넷 정도를 합쳐 놓은 듯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완전히 가루가 되었는지 뿌연 먼지가 날렸다.
뚫린 구멍 사이로 뒤통수 하나가 보였다.
“…….”
“…….”
소녀들은 이 황당한 사태에 뭐라 말을 하지도 못하고 뚫린 구멍에 덩그러니 보이는 뒤통수만 응시했다.
“어?”
소녀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는지 뒤통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뒤통수의 주인은 소녀들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이런 곳에서 그의 뒤통수를 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남궁지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장……건?”
제 2 장 입을 다뭅시다
결국 일이 나고 말았다.
장건은 너무 놀라서 소왕무와 대팔이 죽어라 내달릴 때에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짧은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잘못을 했으니 차라리 당당하게 사과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면 그냥 도망치는 게 나을까 고민했다.
‘아니 갑자기 방향을 바꾸면 어쩌냐고요!’
괴인이 갑작스레 공력의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장건은 기겁을 해 공력을 분산시키며 다른 쪽으로 날려보냈다. 한데 워낙 공력이 쌓여 일부를 감당하지 못하고 뒤쪽 법당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물론 괴인이 공력을 바꾼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민감한 무인, 특히나 소림의 몇몇 무승은 이미 지독하게 쌓인 공력을 느꼈을 터다.
괴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해서 달아나야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장건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괴인은 벌써 달아나고 있었다.
‘아우! 큰일났다.’
장건은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하다가 뒤통수가 뜨끔해져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구멍의 안에서는 뿌연 김이 피어오르는 목통에 몸을 담그고 있던 네 소녀가 장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면이 있는 남궁지가 중얼거렸다.
“장……건?”
와르르르, 하고 장건은 몸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드, 들켰다!’
게다가 목통 밖에서 정신줄을 놓은 듯한 표정으로 서 있던 백리연의 모습이 대번에 눈에 들어왔다.
백리연은 아무것도 걸친 것이 없이 완전한 전라로 멍하게 서 있었다. 눈을 똥그랗게 뜬 백리연의 시선이 장건의 시선과 마주쳤다.
‘헉!’
장건은 물론이고 백리연까지 얼어붙어 버렸다.
“…….”
적막이 흐른다.
그 잠깐의 시간이 장건에게는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크, 큰일났다.’
하지만 이미 달아나기에는 늦었다.
“어떤 놈이냐!”
“누구냐!”
법당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경계를 서던 나한승들이 고함을 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나한승들의 얼굴은 분노로 달아올라 있었다.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내원 깊은 곳에 씻는 곳을 마련하여 둔 것인데, 결국은 발생하고 말았다.
이는 치욕적인 일이었다. 악적, 혹은 악적들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소림은 그야말로 뭇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고 말 터였다.
어떤 놈이든 잡히기만 하면 살생을 금하는 불가의 계율이고 나발이고 육시(戮屍)를 해 버릴 듯한 인상이었다.
‘으아악! 크, 큰일났다!’
벽에 바로 붙어 있던 장건은 나한승들이 오는 것을 보며 아찔해졌다.
막막해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부처님 죄송합니다. 아빠, 죄송해요. 다시는 안 이럴게요! 다시는 남 목욕하는 거 훔쳐보지 않을게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장건이 들키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장건은 울상을 지었다.
순순히 나가서 죄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기는 해야 할 텐데 나한승들의 표정이 너무나도 무시무시했다.
게다가 자신의 행동 때문에 실망할 아빠 장도윤과 굉목을 생각하면 더더욱 나서기가 두려워졌다.
그렇다고 숨어봐야 곧 들킬 것은 뻔하고…….
장건이 갈등하고 있을 때.
장건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이놈아, 뭐 해? 빨리 도망가야지!
‘할아……버지?’
불목하니 노인의 목소리였다.
오랜만이라고 반가워할 틈도 없이 장건은 달아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갑자기 장건의 몸이 전율했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발끝부터 머리칼 끝까지 찌릿거렸다.
불목하니 노인을 떠올린 순간 달아날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지난번 문각의 모습을 떠올린 것뿐이었다. 그래야 도망갈 수 있다 생각했다.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쑤욱.
마치 막힌 변이 빠져나가듯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굳이 막으려 하지 않고 내버려두니 기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건 아까운 일이라 생각했었는데 몸에서 흩어진 기는 연하게 뿌려져 있을 뿐이지 어디로 도망가지는 않고 있었다.
‘어? 됐나?’
몽롱…….
장건은 손을 들어보았다.
자신의 손인데도 불구하고 내 것이라는 감각이 없다. 자다가 팔이 눌려서 피가 안 통하면 느낌이 없어지는 것과 비슷했다.
‘기분이 이상하네.’
땅을 디디고 있어도 발에 감각이 묘하게 희미하다. 발로 땅을 디딘 것이 아니라 땅이 발을 받쳐주고 있는 것도 같고, 발과 땅이 하나가 된 것도 같았다.
땅의 차갑고 온화한 기운이 장건에게도 똑똑히 느껴진다.
손가락으로 공중을 휘저으니 밤의 공기가 평소보다도 상큼하게 다가오는 것도 느껴졌다.
‘이런 게…… 물아일체가 되는 기분일까?’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 하나에만 극도로 집중하고 있다가 우연찮게 들어선 길이었다.
장건이 문원처럼 존재감이 없이 흐릿해진 것은 장건 혼자서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었다.
바로 장건의 앞까지 달려온 무승들이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달아났다!”
“어떤 음적이 감히!”
장건이 바로 앞에 서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법당 안에 있던 네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눈을 부릅떴다가 손으로 마구 비볐다가 다시 눈을 크게 뜨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듯 구멍 쪽을 보고 있었다.
한데 시선이 분명 장건을 향하고 있는데도 초점은 장건에게 맞춰져 있지 않았다.
양소은이 번개처럼 목통에서 튀어나와 면포로 몸을 감싸곤 구멍으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장건과 거의 코를 맞댈 정도로 둘의 얼굴은 가까웠다.
양소은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뭐, 뭐야?”
양소은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흐릿하고, 흐릿해서 눈에 힘을 주고 보려 하면 갑자기 보이지 않기도 해서 환각에 빠진 듯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니?”
양소은이 재차 눈을 비볐다. 장건의 형상은 있는데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인지력에 문제가 생겼든 귀신을 보고 있든,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아미타불. 시주 분들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무승은 차마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고 고개를 내민 양소은에게 멀리서 묻고 있었다.
“저흰 괜찮긴 한데요…….”
두 무승 중 한 무승이 다른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저기! 악적이 달아난다!”
멀리서 그림자가 휙 하니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소저. 뒤는 저희에게 맡기시지요! 저 악적은 결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나한승들이 휘파람을 불며 그림자를 쫓아갔다.
삐이익―
그에 화답하듯 여기저기에서 휘파람이 울렸다.
삐익, 삐이익.
어디에 그 많은 나한승들이 있었는지 사방에서 튀어나와 그림자를 쫓기 시작했다.
양소은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한 채 장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장건은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크!’
장건은 곱게 만져질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정말로 탄로가 날 터였다.
스스슥.
장건은 정면을 보고 있는 채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나한승들이 간 방향과 반대였다.
장건의 걸음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 게다가 뒤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으니 다리를 크게 움직이지도 않는다. 이른바 ‘앉아서 나한보’의 개량형인 발바닥과 발가락으로만 움직이는 나한보였다.
당연히 양소은의 눈에는 장건이 뒤로 미끄러지듯이 물러나는 것으로 보였다.
장건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귀신이 허공에 떠서 거꾸로 가는 듯하다. 밤이라서 더 느낌이 스산했다.
스스슥.
어지간해서는 겁이 없는 양소은도 몸에 소름이 쭉 끼쳤다.
“으아아아아악!”
양소은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비명을 질러 댔다.
“귀, 귀신이야!”
장건은 벌써 그 틈에 멀찌감치 달려가고 있었다. 조금씩 물러나다가 아예 경공을 써서 순식간에 내달렸다.
평소보다 더 빨라서 말 그대로 바람처럼 사라진 것이다.
양소은이 ‘귀신이야!’ 하면서 비명을 지르자 부서진 법당 안의 목통에 몸을 숨기고 있던 당예와 제갈영, 백리연이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끼야아아악!”
참으로 때 지난 비명이었다.
☆ ☆ ☆
“아, 이런 젠장맞을.”
괴인은 투덜거리면서 달리고 있었다.
나한승들의 신법도 제법이었지만 괴인을 따르기에는 요원했다. 휘파람 소리도 언제부터인가 들려오지 않았다.
괴인은 그렇게 나한승들을 따돌리고 휘적거리는 걸음으로 단숨에 바람을 가르며 내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망할 놈. 정도껏 해야지. 나 여기 있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공력을 올리면 뻔히 들킬 걸 알면서.”
워낙 팔괘장의 공력이 커지니 괴인은 순간 아차 싶었다. 벌써 곁에 있던 두 꼬마가 낌새를 눈치채고 달아났을 지경이니 머잖아 근처에 있던 나한승들도 자신들을 알아챌 것이다.
하여 급한 마음에 공력을 날려 버리긴 했는데 재수 없게 일부가 법당 벽에 구멍을 낼 줄이야!
“하이구야.”
괴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살아생전에 최고 미녀를 보는 것이 꿈이었건만, 그 망할 꼬마 때문에 이 무슨 비루한 처지가 된…… 응?”
괴인이 갑작스레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을 단숨에 훑은 괴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까부터 보이는 전각 모양들이 죄다 똑같다.
“방금 지난 곳이구먼.”
괴인이 하늘을 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천장에 가려진 것처럼 달도 보이지 않고 사위가 유독 어둡다.
게다가 사람 그림자라고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아무리 소림에 바보만 살아도 이 같은 소동이 벌어졌는데 아무도 나와 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에잉. 벌써 진이 발동된 건가?”
소림의 내원에 자리한 건물들은 진법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사람을 해하거나 죽일 수 있는 진은 아니나 쉽사리 빠져나가긴 힘들다.
“소림의 내원을 들어오긴 쉬워도 나가긴 어렵다더니…….”
괴인은 달아나려는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완전히 걸음을 멈추었다.
“퉤엣.”
괴인이 진득한 검은 액체를 침처럼 내뱉었다. 장건 때문에 체내로 들어온 독액(毒液)이었다.
“요즘은 소림에서 독공도 가르치나?”
괴인은 아무도 없는 컴컴한 공간을 향해 불평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언제 그곳에 있었는지 모르게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노승 한 명이 나타났다.
“정규 과정에는 없지요.”
달밤에 정원을 거니는 걸음으로 노승이 다가오다가 가만히 서서 반장을 한다.
“아미타불.”
주변 공기가 진동하는 듯하다. 야음(夜陰)이 웅웅대며 파도처럼 일렁거린다.
괴인은 장건을 뒤로 내려두고 가볍게 혀를 찼다.
“항마보리선장(降魔菩提禪掌)? 쯧. 날 시험할 생각이라면 그만두게.”
청량한 목소리로 괴인이 손을 내저었다. 놀랍게도 그 한 수에 괴인을 향해 몰려들던 야음이 가볍게 물러났다.
고절한 한 수다.
노승, 굉운이 의외라는 눈빛을 했다.
괴인이 사이한 무공을 익혔다면 항마보리선장에 영향을 받아야 할 텐데 그게 아니다. 적어도 괴인이 사마외도의 무공을 익힌 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괴인이 물었다.
“이 같은 야밤에 방장 대사께서 직접 행차를 하신 연유가 무엇인가?”
방장 굉운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여시주들의 비소(秘所)에 음적(淫賊)이 나타났다 하여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럼 음적을 쫓을 일이지, 방장 대사께서는 왜 애먼 사람을 진법에 가두시는 겐가.”
“사건이 생긴 직후에 복면을 하고 달아나는 이를 본다면 누구라도 그가 범인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괴인이 딱 잘라 말했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닐세.”
“그렇다면 복면을 벗어주시지요. 떳떳한 사람이 얼굴을 가리고 다닐 필요가 있겠습니까?”
괴인은 복면을 벗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여차하면 손이라도 쓰고 달아날까 궁리하는 모양새였다.
굉운이 반장하고 있던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중지와 약지를 엄지로 말고 밀어내듯 장을 쳐낸 것이다.
굉운의 손바닥이 여러겹 겹치면서 괴인의 전면을 뒤덮었다. 하나하나의 손 그림자마다 거대한 위력을 지닌 것도 모자라서 빛살처럼 빠르기까지 했다.
“반야대수인(般若大手印)!”
기습공격에 괴인이 일갈하며 손을 마주 내밀었다. 양손을 휘저으며 굉운의 장영(掌影)을 공처럼 한데 모으는가 싶더니 팔을 떨쳐 장영을 흩어 버렸다.
반야대수인이 발출될 때와 괴인이 반야대수인을 마주할 때에는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흩어진 장영이 바닥에 튕겨지자 땅이 움푹 꺼지며 굉음이 울린다.
퍼퍼펑!
굉운이 웃었다.
“훌륭한 태극경입니다.”
괴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워낙 굉운의 반야대수인이 빠르고 강맹하다 보니 반사적으로 몸에 익은 수법을 쓰고 말았다.
굉운 정도나 되는 사람이 자신의 수법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방장의 실력이 듣던 것보다 훨씬 대단하구만. 대충 자리를 모면해볼까 했는데, 거 참…….”
장건도 그렇고 방장 굉운도 그렇고, 란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에잉.”
괴인이 복면을 벗었다.
복면을 벗자 괴인의 안면이 달빛에 완연히 드러났다. 머리를 상투로 틀어올린 젊은 청년!
바로 아침에 문사명과 장건이 만났던 그 젊은 도인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십 대 정도의 청년이 이제껏 소림의 방장 굉운에게 하대를 한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를 보는 굉운의 얼굴은 더 놀란 표정이었다.
“허어!”
굉운은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일 갑자도 전에 본 얼굴과 똑같은 얼굴인 것을.
“풍진 선배님께 말씀은 들었습니다만……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변하지 않긴 무슨, 그냥 반로환동(返老還童)한 거야.”
도인은 아무것도 아닌 냥 말했지만, 반로환동이란 네 자는 결코 아무나 내뱉을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무림 역사상 반로환동을 겪은 이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까 할 정도인 것이다.
굉운이 반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무당뿐만 아니라 전 무림의 홍복입니다. 감축드립니다.”
“별거 아니래도. 한 일 갑자 정도 산에서 좋은 공기 마시고 풀때기만 먹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걸 뭔 감축까지나…….”
도인이 곧 말을 멈추고 뒷짐을 졌다. 뒷짐을 지는 자세가 지극히 자연스럽다. 겉모습은 이십 대 청년이나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노인이다.
“뭐, 나야 그렇다 치고 음적인지 악적인지를 쫓는 중이라 했으니 마저 일을 보게나.”
“그 전에 왜 선배님께서 소림의 내원에 복면을 하고 들어오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게…….”
도인이 말을 하려는 찰나에 나한승들 여럿이 달려왔다.
“악적이 여기 있다!”
“멀리 달아나지 못했구나, 이놈!”
나한승들이 달려와 도인을 포위하고는 방장 굉운에게 가볍게 반장을 한다.
도인의 표정이 머쓱해졌다.
“험험.”
나한승들이 하나같이 눈에 불똥을 튀며 도인을 노려보았다.
“이놈! 감히 그런 짓을 하고도 달아날 수 있을 줄 알았느냐?”
법당에서부터 쫓아온 나한승들이었다. 도인도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험험…… 뭔가 오해가 있었는가 본데.”
“우리가 법당에서부터 널 쫓아왔거늘 무슨 발뺌이냐!”
그때 굉운이 나한승들에게 꾸짖듯 말했다.
“말을 삼가거라. 이분은 무당에서 오신 허량 진인이시다.”
“예?”
나한승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굉운과 도인을 번갈아 보았다.
허량이란 도명은 흔한 편은 아니지만 무당에서는 단 한 명만이 그 도명을 썼다.
한데 나한승들이 알기로 무당의 허량 진인은 홍오와 같은 시대에 강호에서 활약하던 대선배다. 나이가 한 갑자 반을 넘은 노인이지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새파란 어린 청년이 아닌 것이다.
“설마…… 환야(幻爺)를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굉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승들은 입을 떡 벌리고 허량을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환야 허량이라면 검성이나 검왕, 독선, 청성일검처럼 우내십존 중의 일인이 아닌가!
환야 허량은 강호에 무명(武名)을 쌓지는 못했으나, 간혹 무당의 본산에서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무위를 선보이곤 했다.
무당의 제자 백여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그의 옷깃조차 손댈 수가 없었던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였다. 그만큼 허량의 몸놀림이나 무위가 워낙에 신비로워 환야라는 별호가 생긴 것이다.
‘그런 사람이니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소림의 내원에 들어오는 일이 가능하기도 한 것이고…….’
굉운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한승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환야께서 왜 이런 짓을…….”
허량의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중얼거림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허량이 뭔가 변명거리를 찾다가 생각난 게 있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왜 내게만 이러는가?”
굉운이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 나 말고 다른 녀석들이 있었을 텐데?”
“진 안에는 허량 선배님밖에 없습니다만.”
“그럴 리가 있나!”
허량이 눈을 째릿 떴다.
“같은 소림의 제자라고 누군 봐주고, 나한테만 덤탱이 씌우는 거 아닌가?”
“진이 발동되면 예외 없이 누구나 이곳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는 선배님 외에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숨겨놓고 모르는 척하는 거 아닌가?”
“아미타불. 소승이 어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허량 역시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할 위인은 아니었다. 굉운은 어렴풋이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문원 사숙조이신가…….’
팔대호원에 펼쳐진 진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이는 소림에 몇 되지 않고, 그중에서 가장 유력한 이가 바로 문원이었다.
‘문원 사숙조가 모습을 드러내셨다면…….’
굉운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건이로군.’
문원이 모습을 드러낼 만한 사유라면 역시나 장건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두런거리는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사람이 듣기에는 어려운 먼 거리의 말소리였지만 허량이나 굉운이나 그 정도는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무공을 가진 이들이다.
“보게나. 내 말이 맞지. 이제야 오는가 본데, 내가 너무 빨리 뛰었나?”
왠지 모르게 의기양양해진 허량이었다. 굉운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나 하고 잠깐 의심했다.
두런대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가까이 오기 시작했다.
나한승들과 굉운이 모두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지금도 꽤 큰 일이 벌어진 셈이지만, 모든 강호의 이목이 소림에 몰린 이때 허량의 말대로 소림의 제자가 관련되어 있다면 더 처치곤란한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들려온 소리는 이들의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아이, 참. 여기서 이러지 말아요.”
“뭐 어때.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나저나 우리 여기까지 들어와도 괜찮은 거예요?”
“괜찮아. 사람도 없고 좋잖아.”
“하지만 소림사의 스님들께 들키기라도 하면…….”
“어허. 괜찮다니까. 봐. 아무도 없잖아. 여기만큼 조용한 곳도 없어.”
“하지만…….”
“그러지 말고 손 좀 치워봐.”
“어머! 거긴…… 부끄럽단 말예요.”
둘만의 사랑을 속삭이기 위해 어둡고 조용한 곳을 찾아다니는 연인들에게 출입 제한 지역만큼 매력적인 장소는 없는 것이다.
그들도 우연찮게 진에 휘말려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리라.
“쩝…….”
허량은 입맛을 다셨다. 적어도 굉운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굉운이 허량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곳은 얘기를 할 만한 곳이 아닌가 봅니다. 자리를 옮기시지요.”
“……그러세.”
굉운이 나한승들에게 눈짓했다.
굉운과 허량이 자리를 떠나자 나한승들이 철없고 발칙한 젊은 연인들을 내보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찬 밤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구멍 난 벽 안에서 다섯 소녀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워낙 황당한 일이 벌어진 터라 물기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젖은 채로 옷을 입은 소녀들이었다.
“확실해?”
당예의 물음에 양소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봤잖아. 장건이 확실해.”
제갈영이 끼어들었다.
“나도 봤어. 하지만 아냐.”
“뭐가 아냐?”
“건 오라버니가 그럴 사람인 거 같아? 오라버니가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댁들도 잘 알잖아.”
자연스레 네 쌍의 눈이 백리연을 향했다.
쌍코피가 터진 강호제일미는 장건이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네 쌍의 눈빛은 같은 생각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백리연은 그런 눈빛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상태가 아니었다.
물에 젖은 옷을 대충 입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것이 꼭 실성한 듯하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백리연은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설 힘이 없었을 뿐이었다.
얼굴이 자꾸만 화끈거리고 놀란 가슴이 쿵쿵거려서 어질거릴 지경이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로 처음 받은 남자의 눈길.
자신의 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기에 맨몸으로 어디에 나서도 부끄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백리연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나니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백리연 스스로도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한데 그런 백리연의 귓가에 제갈영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가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댁들도 잘 알잖아.’라는 말.
그 말을 들은 순간 백리연은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백리연은 가슴이 콩콩거리며 뛰는 소리가 들릴까 봐 애써 태연한 척하며 고개를 들었다.
“너희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너희들에게 관심이 없는 거겠지.”
“뭐라고?”
“하아. 아무렴 너희들이 목욕하는 모습 따위를 보려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훔쳐보려 했을까?”
백리연이 다소곳하게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누가 봐도 ‘당연히 나 때문이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양소은이 기가 막혀 하며 물었다.
“너나 좀 정신 차려. 홀딱 벗은 알몸을 다 보여 놓고 지금 그런 말이 나와? 그나마 우린 통 안에라도 있었지.”
“누가 그걸 몰라?”
백리연이 ‘하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보였지. 내 모든 걸 보여줬지.”
백리연을 제외한 네 소녀들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백리연의 태도나 말투가 기분 나쁘다 해도 같은 여자로서 적어도 지금만큼은 백리연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쩌겠어.”
“응?”
백리연의 그 말에 네 소녀들은 당황했다.
“뭐, 뭐가 이왕 어쩐다고?”
백리연은 이미 결심한 듯 말했다.
“내게 정식으로 사과를 하면 그를 받아줘야 할지도.”
네 소녀가 입을 딱 벌렸다.
백리연이 계속해서 말했다.
“나한테 함부로 굴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땐 내 잘못도 좀 있었고…… 나한테 마음이 있었는데 내가 자기를 알아봐주지 않으니 화가 나서 더 그럴 수도 있었겠지.”
백리연은 스스로 말해놓고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생각해보니 이제 다 이해가 되네.”
양소은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물었다.
“넌…… 그래서 지금 이게 용서가 된다는 거야?”
“아니, 용서가 안 돼.”
백리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좋으면 좋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애처럼 못난 행동을 하는 거지? 이러면 그동안 내가 목욕하는 걸 훔쳐보려 했던 수많은 색마들과 별다를 바가 없잖아.”
“그래. 색마. 색마 같은 행동을 했는데도 넌 건이를 받아주겠다고 하는 거야? 지금?”
갑자기 백리연의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백리연이 외쳤다.
“너, 너희들 따위가 상관할 필요 없잖아!”
“뭐?”
정말로 의외의 일이었다.
도도하고 거만하기까지 하던 천하의 백리연이 부끄럼을 타고 있다?
‘벗은 몸을 다 보여줘서 어쩔 수는 없는데 책임지란 말을 하기는 자존심이 상했나?’
‘너무 충격을 받아서 자기도 건이를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거 아냐?’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충격을 받은 건 확실해보였다.
다른 소녀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백리연은 후다닥 일어서더니 문 쪽으로 갔다. 그러고는 법당 밖으로 뛰쳐나가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 한 가지 잊은 게 있는데. 오늘 일은 그냥 덮어줬으면 좋겠어. 어차피 너희들은 별로 피해를 본 것도 없을 테니까.”
제갈영이 빽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피해를 본 게 왜 없어!”
“못생겼으면 말귀라도 잘 알아들어야지. 오늘 일은 남의 집안일이 될 테니까 신경 쓰지 말란 말이야.”
백리연은 제갈영을 한 번 째려보더니 곧 법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야! 남의 집안일에 끼어든 건 너잖아!”
제갈영이 소리를 쳤지만 백리연은 벌써 법당을 나가 버린 후였다.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들었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제갈영은 바닥이 젖은 것도 잊고 털썩 주저앉았다.
“으앙…… 뭐 저런 게 다 있어!”
양소은이 다가가 제갈영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울지 마.”
“건 오빠의 첫 번째 부인은 나야! 나란 말야!”
양소은이 계속 제갈영의 머리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다들 어쩔 거야?”
“뭘?”
“백리연이 말한 것처럼 정말 오늘 일을 덮어둘 거야? 아니면…….”
남궁지가 대답했다.
“덮지 않으면?”
“뭐…… 방장 대사께 말씀을 드린다거나…….”
“그럼 장건은 멀쩡할까?”
남궁지가 묻고는 스스로 대답했다.
“평생 면벽의 형벌을 받게 될지도 몰라. 심한 경우 거세까지…….”
당예와 제갈영이 동시에 외쳤다.
“그건 안 돼!”
양소은이 턱을 긁적거렸다.
“하긴…… 괜한 소문이라도 났다간 우리 혼삿길도 막힐 테고.”
제갈영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영이는 혼삿길 막히지 않아! 건이 오라버니랑 혼인할 거니까!”
제갈영의 외침을 무시하고 남궁지가 결론을 내렸다.
“오늘 일…… 완전히 덮을 수는 없어. 사실은 인정하지만 처벌은 원치 않는다는 쪽으로…… 해야겠지.”
제갈영과 당예가 손을 들었다.
“찬성!”
양소은은 어깨를 으쓱했다.
“너희들이 그렇다면 뭐.”
갑자기 당예가 남궁지에게 물었다.
“아! 그나저나 우릴 오늘 여기서 보자고 했던 이유는 뭐야?”
“얘길 좀 해보려고.”
“무슨 얘기?”
“지금 일어난 일과 같은 맥락으로…… 장건이 정말 여자에 관심이 없어 보여서.”
“그거라면 해결된 것 아냐?”
남궁지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대답했다.
“그럴지도.”
제갈영이 엉엉대며 주저앉은 채 주먹으로 바닥을 쳤다.
“남편 너무 실망이야. 그냥 보여달라고 하면 영이가 보여줬을 걸, 왜 훔쳐보길 훔쳐보냐고…… 정말 실망이야!”
양소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백리연을 날려 버릴 정도의 남자가 이럴 줄은 정말 몰랐어. 조금은 흥미가 있었는데 말이지.”
남궁지가 돌연 당예를 쳐다보았다.
“넌?”
“으, 응? 나?”
끄덕.
당예는 짐짓 화가 난 척 언성을 높였다.
“당연히 나도 이럴 줄 몰랐어. 이런 남자인 줄 알았다면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애초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거야! 당가의 일원으로서 이건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야.”
“그렇구나…….”
남궁지가 빤히 세 소녀를 보며 대답했다.
“난 좀 다른데.”
“으응?”
“그나마 뭘 좋아하는지 알았으니, 이젠 다가갈 방법이 생긴 거 아냐?”
흠칫!
남궁지의 말에 세 소녀의 몸은 순간 굳고 말았다.
서로 각기 다른 이유로.
☆ ☆ ☆
딱!
“아야! 왜 때리세요?”
딱딱!
“악! 왜 저만 두 대 때려요?”
“눈에 힘 빼라.”
딱딱딱!
“아우우…….”
“어허. 똑바로 무릎 꿇고 앉지 못할까.”
“예…….”
일찌감치 도망쳤던 소왕무와 대팔, 그리고 장건은 불목하니 노인 문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문원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이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짓을 해. 너희들 그러다 걸리면 어떻게 될지 생각도 안 해봤냐?”
소왕무가 항변하는 투로 대답했다.
“벌써 걸렸잖아요.”
딱!
“아욱!”
소왕무가 머리를 감싸쥐었다. 때리는 걸 보지도 못했는데 눈에서 불이 번쩍 났다.
“아무리 어리더라도 가릴 건 가릴 줄 알아야지. 이놈들아, 바깥에서 그러다 걸리면 애들 장난이겠거니 하고 몇 대 얻어맞으면 그만이지만, 여긴 소림이 아니냐. 아, 하물며 수행하는 녀석들이 착한 친구를 꼬드겨서 그럼 되니?”
착한 친구란 아까부터 아무 말 없이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장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소왕무가 칭얼댔다.
“하지만 저희가 욕심이 나서 그런 게 아녜요. 이게 다 건이를 위해서였다고요.”
따닥!
“아얏! 정말이에요. 건이 아버님이 부탁을 하셔서…….”
딱!
“건이 아버님이 아, 여자들 목욕하는 것 좀 훔쳐보게 해달라 부탁하시디?”
“그게 아니구요. 건이 얘가 너무 여자에 관심이 없어서 고민이 많으시거든요.”
“흠…… 그래서 여자들 목욕하는 걸 훔쳐보게 했다?”
“네. 저희는 진짜 아무것도 못, 아니 안 봤어요. 건이에게 다 양보했단 말예요.”
딱 딱!
“참으로 멋진 우정이다, 이놈들아. 잘못했으면 뉘우칠 줄 알아야지, 하이고…….”
덤으로 얻어맞은 대팔이 소왕무에게 눈을 흘기며 문원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나? 나야 뭐, 그냥 절에서 일하는 불목하니지.”
대팔이 벌떡 일어났다.
“에이 씨, 난 또 깜짝 놀랐잖아. 무슨 불목하니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그 순간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영롱한 타격소리가 울렸다.
빡!
“우악!”
대팔의 머리에 큼지막한 혹이 생겨났다. 대팔은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다시 무릎을 꿇었다.
“씨잉…… 보긴 건이가 다 봤는데 건이는 안 때리고 자꾸 우리만 때리셔.”
문원이 다시 혀를 찼다.
“아무래도 내 방장 대사께 알려서 너희들 혼 좀 내주시라 해야겠다. 계율원에서 곤장 백 대를 맞고 한 십 년 면벽을 해야 정신 좀 차리겠구나.”
소왕무와 대팔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넙죽 엎드렸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그것만은…….”
“시끄럽다, 이놈들아. 내가 너희들을 몰래 빼오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하긴 다른 놈 하나는 잡혔으니까 어차피 너희들도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겠다만.”
소왕무와 대팔의 얼굴이 순식간에 노래졌다.
문원이 장건을 생각하는 마음은 적지 않다.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텨내는 장건이 언젠가 소림의 위상을 드높여줄 거라 믿고 있었다.
그런 장건이 이런 지저분한 일에 연루되어 앞길이 막히지 않기를 원했기에 일부러 진법에서 빼내온 것이다.
‘철없는 애들이 그래도 친구를 생각한다고 한 일이라, 방장에게 부탁을 한다 해도…… 처자들이 문제겠구먼. 처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그냥 내버려두어야 했었나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서 장건이 잡히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대체 그놈은 누구였지? 보통 무인은 아닌 것 같던데.’
장건과 겨루다가 달아난 무인은 벌써 방장과 대면하고 있을 것이다.
‘진이 발동된 이상 내원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니 곧 정체가 밝혀질 테고, 당장은 얘들을 어떻게 돌려보내느냐 하는 게 문제인데…….’
그때, 갑자기 무릎을 꿇고 있던 장건이 절을 하듯 앞으로 쓰러졌다.
풀썩.
“응? 너 왜 그러니?”
소왕무와 대팔도 놀랐다.
“어어?”
“건아!”
쓰러진 장건의 이마를 만져본 소왕무가 기겁을 했다.
“열이 엄청나요!”
그때까지 아무 말도 않고 있어서 잘못을 뉘우치는 중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장건의 온몸이 펄펄 끓었다.
“하아아…….”
장건의 입에서 뜨거운 입김이 흘러나왔다.
대팔이 소리쳤다.
“그놈하고 싸우다가 내상을 입었나 봐요!”
장건이 괴로운 듯 몸을 틀었다. 한데 아랫도리가 크게 부풀어서 팽팽하게 바지가 튀어나와 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이 와중에 묘한 생각을 하다가 그러진 않았을 터.
문원이 급히 장건의 몸을 훑었다.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었고 턱과 목의 핏줄은 터질 것처럼 두드러졌다.
“어랍쇼?”
만져보니 피부가 불처럼 뜨겁다.
문원은 ‘으익!’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할아버지! 말씀해주세요. 건이가 왜 이러냐구요! 내상이 심해서 그런 거면 빨리 의원이라도 불러 와야죠!”
“가만 좀 있어 봐, 이놈들아. 이건 내상이 아냐.”
“그럼요?”
잔뜩 주름이 진 문원의 노안이 가늘어졌다.
그가 아는 한 이런 증상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춘약(春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