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204
204화
“그게 대체…?”
루스가 어리둥절하게 되묻는 사이. 단상으로 올라선 필립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어떤 놈들이었습니까?”
“역겨운 놈들이었지. 늘 그렇듯이.”
손수건을 받아든 이안이 얼굴의 재를 닦기 시작했다. 재와 섞인 코피가 찐득하게 묻어나왔다.
‘갈 거면 곱게 좀 갈 것이지.’
혀를 차는 이안의 뇌리로, 방금 전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혼돈의 파편은 신상을 물들인 혼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허의 표식을 곧바로 없애버리지는 못했다.
혼돈에 억눌려 있던 신성의 근원이 멋대로 신성력을 토해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성력은 공허의 표식을 태워버리기 시작하면서, 이안의 몸속까지 밀려들었다.
사도 퀘스트가 떠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물론 이안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거절했지만. 델라 루의 신성은 애초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이안의 몸속을 맴돌고는 물러났다.
그 과정에서 신성의 일부가 이안의 몸속에 스며들었다. 뒤이어 체력 수치 하나가 영구적으로 올라갔다. 아마도 델라 루가 축복을 내린 것이었으리라.
‘지능이나 정신력을 올려 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바스러지던 공허의 표식이 단말마 같은 혼돈력을 토해낸 건 그때였다. 혼돈의 파편은 신성력이 그 혼돈력을 태워버리기 전에 냉큼 자신의 일부로 빨아들였다.
그리고 늘 그렇듯, 환영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내용까지 지금까지와 비슷한 건 아니었다.
“계속 그렇게 기대 있으실 겁니까…? 상당히 불경해 보이는 건, 알고 계시죠?”
필립이 넌지시 물은 건 그때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저 뒤에 선 루스를 의식한듯한 말투였다. 상념에서 깨어난 이안이 피식댔다.
“어쩌라고. 내가 구한 신상인데, 도와준 덕은 좀 봐야지.”
“아. 신성으로 회복하려고 기대고 계셨던 거군요. 혹시, 어디 다치셨습니까?”
“마음이.”
“……?”
아무 말이나 내뱉은 이안이, 필립의 어리둥절한 시선을 무시한 채 신상에 머리를 기댔다.
거의 모든 종류의 신성력이 그렇지만, 델라 루의 신성력에는 특히 회복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었다.
신성력이 지칠 대로 지친 그의 몸에 조금씩 활력을 불어넣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몸속에 남은 불길한 기운들까지 녹여내고 있었다. 균사체들이 병균이나 포자라도 뿌려댔던 모양이었다.
‘고작 한 번만 덕 보고 말기엔 아까운데….’
이안이 나른하게 생각하던 그때.
“주교님과 사제님들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루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소를 흘린 이안이 내뱉었다.
“그것들을 아직도 그렇게 부르시는군.”
“…죄송합니다. 입에 익어서요.”
“당신이 밟고 있는 것들 어딘가에 섞여 있을 거요.”
“……!”
그제야 루스가 바닥을 뒤덮은 잿더미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찬란한 여신의 이름을 중얼대는 사이, 이안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정말 죽은 건지, 그 놈의 순환으로 돌아간 건진 모르겠지만.”
“순환… 이라니요?”
그래, 물어볼 줄 알았다.
이어진 필립의 대답에, 이안이 눈도 뜨지 않은 채 앞쪽을 턱짓했다.
“그런 게 있어. 가서 문이나 열어. 곧 나갈 거니까.”
“조금 더 쉬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곧 일행 분들이 이쪽으로 오실 텐데요.”
“글쎄. 그건 봐야 알 것 같은데.”
“……?”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묘한 불길함을 느낀 듯, 필립이 더 덧붙이는 말 없이 몸을 돌렸다.
이안이 다시 한번 중얼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감사 인사가 고작 이게 끝이오?”
물론 필립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슬쩍 한쪽 눈을 떠 신상을 돌아보면서, 그가 덧붙였다.
“내가 본 걸, 당신도 이미 알 텐데. 서부를 구하고 싶다면, 구경만 하지 말고 당신도 나와 내 동료들을 좀 도와 보시오.”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전에도 이런 식으로 신에게 말을 건 게 효과가 있었으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해 본 것뿐.
“……!”
정말 효과가 있었다. 신상에 맺힌 신성력이 은은하게 일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든 이안이 신상의 얼굴을 올려다 보는 그때.
“그, 이안 경….”
어느새 단상 바로 아래까지 다가온 루스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눈썹을 치켜든 채로, 이안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말씀하시오.”
“…감사합니다. 신상을 정화해 주신 것도, 제 목숨을 구해주신 것도.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신상을 정화한 은혜는 그쪽이 갚을 필요는 없을 것 같소.”
끙, 하고 신상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운 이안이, 손바닥으로 신상을 툭툭 치며 덧붙였다.
“찬란한 여신의 장녀께서, 직접 보답을 주시려는 것 같으니까.”
“……? 그건 또 무슨.”
쩌적, 돌이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 퍼진 건 거의 동시였다. 눈을 치켜뜬 루스가 소리가 난 신상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아래로 늘어뜨린 오른손에 은은한 빛이 뭉치고 있었다.
투두둑-
다음 순간 깔끔하게 잘려나간 신상의 손가락이 단상에 떨어졌다.
다섯 손가락은 신상에서 분리되고 나서도 저마다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델라 루여….”
루스의 입이 벌어지는 가운데.
몸을 숙인 이안이 돌로 만들어진 손가락들을 하나씩 주워들며 미소 지었다.
“어머니보다 통이 크시군.”
머릿수에 딱 맞게 줄 줄이야.
내부에 신성의 근원이 느껴지는 걸 보니, 신상의 남은 근원을 조금 쪼개서 담아준 모양이었다.
심지어 정보창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델라 루의 은총. 유물 등급의 장신구였다.
체력 수치 하나는 물론이고 체력 회복력까지 조금 올려 줬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상태 이상 저항력이었다. 중독을 비롯한 다섯 가지 종류의 저항력을 제법 많이 올려주는 것이다.
비단 이곳이 아니라도 두고두고 쓸만한 장신구였다.
‘내구도가 낮은 게 흠이지만….’
심지어 다섯 개가 전부 같은 능력치였다. 물론, 전부 가지고 있다 해서 능력치가 중복되어 오르지는 않았다.
“이걸 담을 주머니를 만들어 주시오. 목에 걸 수 있게. 다섯 개 전부.”
“…예. 그러겠습니다.”
이안이 손가락들을 품에 넣으며 내뱉었다. 루스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비로소 단상에서 내려온 이안이 어깨를 털었다.
잠깐 쉰 보람이 있었다. 두통과 현기증은 여전했지만, 이건 신도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마력 소모의 여파였으니까.
끼이이-
필립이 닫혀 있던 교회의 문을 힘껏 당겨 연 건 그때였다. 그러나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어둡던 장내가 조금 밝아진 게 전부였다.
문 너머를 응시하던 필립이, 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이안을 돌아보았다.
“왜 저것들이 아직도 움직입니까? 하늘은 왜 여전히 어둡고요…?”
“역시 그렇군….”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이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태연한 표정에 필립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역시라니… 알고 계셨던 겁니까?”
“예상은 했지.”
이윽고 문 앞에 잠시 멈춰선 이안이 거리를 눈에 담았다. 필립의 말대로였다. 아직도 하늘에는 먹구름이 넘실대고, 땅에는 널브러진 망자들이 꿈틀대며 기어 다녔다.
“그래도 싸울 필요는 없겠네. 저것들, 죽어가고 있어.”
태연하게 덧붙인 그가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도시의 망자들은 신상을 오염시키던 공허의 표식에서 힘을 공급받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대기 중에 섞인 오염된 마력에 반응해 아직 움직이는 것뿐, 곧 완전히 시체로 되돌아갈 터였다.
‘균사체들은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뒈진 거고. 허술한 척하면서도 나름대로 규칙이 확실하다니까….’
루스에게 어서 오라는 손짓을 보내던 필립이,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내뱉었다.
“왜 말씀을 하다 마십니까…? 어떻게 예상하신 건데요?”
“잘.”
이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하며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물론, 그의 뇌리에는 마지막 순간에 본 환영이 다시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건 지금까지 본 공허의 환영처럼 보랏빛이나 자줏빛으로 물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어둠 한복판이었다. 그리고 혼돈을 품은 존재감은 그 너머에서 느껴졌다.
교회의 문고리를 쥐었을 때 본 환영에서와는 다른 놈이었다. 어둠 너머의 기척은, 그놈처럼 이안을 단숨에 압도해 버리지는 못했다.
그 촉수 여럿 달린 놈은 공허의 절대자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이 기쁘지는 않았다. 우르릉, 하는 천둥 소리가 저 멀리서 울려 퍼졌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그제서야 자신이 보고 있는 환영이 공허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보고 있는 곳은 대륙이었다. 아마도 서부 어딘가. 그리고 환영이 끝남과 동시에 떠오른 퀘스트 창이, 그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줬다.
“그… 으으….”
신음하며 꿈틀대는 망자를 지나쳐, 이안은 대로로 접어들었다. 루스의 팔을 잡아끌며 걸음을 옮기면서, 필립이 덧붙였다.
“또 뭔가 보신 거군요. 뭐였습니까?”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여러가지를 종합해 봤을때….”
덤덤하게 말하던 이안이, 허리를 숙여 땅에 떨어져 있던 피 묻은 장검을 주워들었다. 흑검은 진작 아공간에 넣어 둔 상태였다. 그걸 들고 살아남은 주민들과 병사들 앞에 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의식이 여기서만 이루어진 건 아닌 것 같더군.”
“……?!”
이어진 말에 필립은 물론 루스도 눈을 치켜떴다. 손목만 움직여 검을 한차례 휘휘 돌린 이안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옆으로 따라 붙으면서, 필립이 말을 이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기 말고도 이런 끔찍한 의식을 준비하던 곳이 또 있단 겁니까? 거기서도 의식이 시작된 거고요?”
“아마도. 알아들었으면서, 뭐하러 또 묻냐?”
“…제가 잘못 이해한 거길 바랐거든요.”
그러시겠지.
짧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맥없이 손을 뻗는 망자를 본 척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 거리 곳곳에 죽음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망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필립이 중얼댔다.
“만약 다른 곳에서도 의식이 시작된 거라면… 이곳과 같은 종류의 의식을 준비했다는 뜻일 겁니다. 한날한시에 의식을 치를 생각이었던 거겠군요. 그렇다면…?!”
새삼스럽게 충격받은 표정이 된 그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서부의 타락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겁니다. 적어도 의식을 주도한 자들은요.”
당연한 얘길 늘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하네.
하긴. 필립은 그가 던져주는 작은 조각들만으로 퍼즐을 맞춰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안에겐 당연한 것도, 그에겐 큰 깨달음일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으리라.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내뱉었다.
“그래. 그 꼭대기엔 아마도, 내가 찾는 놈이 있겠지. 경이 찾는 그놈도, 아마 연관되어 있을 테고.”
“루 솔라여… 드디어….”
“내가 지금 하는 말들을 까먹지 마라. 같은 말 여러 번 하고 싶진 않으니까. 네가 알아서 잘 전달해.”
“물론이죠.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전달해 보겠습니다. 맙소사… 그저 암약만 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니…. 아니, 어쩌면 변방에서 그런 짓들을 벌인 건, 이런 순간들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군요. 저마다 준비하던 의식을 치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대륙이 어둠에 잠기게 만들기 위해서….”
다시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든 필립이 혼잣말 하듯 중얼대기 시작했다. 이안이 다시 앞을 바라보며 그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는 사이.
“이게, 이게 다 무슨 말씀들이십니까…?”
루스의 더듬대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타락한 사제들이 이 드네로브에만 있었던 게 아니란 겁니까? 이런 저주받을 의식이 또 준비되고 있고, 다른 곳에서도 이미 시작됐다고요?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
이젠 이 놈도 난리네.
이안은 헛웃음을 삼키며 루스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이 금발의 수도사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벅찬 이아기였던 모양이었다. 혼란에 빠지다 못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던 것이다.
하긴. 어쩌면 이게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이 세계의 인간 대부분은 타락자를 볼 일도 없거니와, 본다 해도 알아보지도 못할 테니까.
당연히 놈들이 얼마나 미친 짓을 벌이는지, 그 결과가 얼마나 끔찍한지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게 될 때쯤엔, 이승에서 보내는 마지막 순간이 될 테고.
아주 희박한 확률을 뚫고 살아남았음에도, 루스는 여전히 보편적인 상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그의 심정을 배려해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성문으로 이어진 대로로 접어들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그렇소. 그리고 거긴, 의식이 제대로 성공한 것 같더군. 이곳과 달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