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 or Die RAW novel - Chapter 57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57화
“뭘 기다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선아현은 하차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패기 있게 말을 꺼낸 것 치고는 금방이라도 눈물 콧물 다 짤 것 같은 표정이다.
누가 보면 자기가 하차하는 줄 알겠군.
반대로 내 뇌는 점점 차가워졌다.
‘이건 속된 말로… 존버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내가 이미 데뷔한 아이돌이었다면 일단 자숙하면서 기다려 본다는 선택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승전이 코앞인 오디션 참가자에게는 불가능한 접근법이었다.
사람들이 오디션에서 성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놈이 기어코 버티고 있는 모습은 반감을 더 키울 뿐이니까.
그냥 오디션도 아니고, 케이블이면서 현재 시청률이 10%를 넘고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한 이 프로그램에서는 더 자살행위다.
‘어차피 결승에서 떨어질 거라면, 빨리 사퇴해서 정황을 파악하는 게 차선이다.’
일단 ‘건강 문제’ 같은 모호한 말로 모른 척 뭉개두자.
그편이 데미지가 가장 적었다. 혹시 박문대가 진짜 억울한 거면 해명하기도 편할 것이다.
그리고 알아봐서 진짜 이 새끼가 잘못한 거면… 당사자를 찾아가서, 사과를…….
젠장, 그 여자애도 자퇴까지 했는데 나라도 박문대가 활동하게 그냥 두진 않겠다.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다.
“박문대가 아니라는 증거가 없으면 기다려도 상황만 악화될 뿐이야.”
“하, 하지만… 세, 세진이도,”
“그때는 바로 합성 사진 찾았잖아. 마침 스마트폰도 있었고.”
“…….”
저렇게 운이 좋은 경우는 별로 없지.
선아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짧은 침묵이 다시 숙소에 흘렀다. 그때였다.
“…계십니까?”
또다시 누군가 숙소 방문을 두드렸다.
“…….”
“어.”
큰세진의 짧은 답을 듣고 방문이 열렸다. 김래빈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차유진이 졸졸 따라왔다.
남의 숙소에 왜 따라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부러 온 거면 정말 더럽게 눈치 없는 놈이었다.
김래빈은 방 분위기가 어지간히 쓰레기 같았는지, 바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개인 연습, 지금 끝났습니다….”
“…….”
얘네 둘 자율 연습 빼먹고 온 거였군.
별 도움은 안 됐지만, 솔직히… 고맙긴 했다.
나는 마지막 인내심을 짜냈다.
“가서 연습해.”
“…! 아, 아니…….”
“며칠 안 남았는데 후회하지 말고.”
“…넌 어쩌고?”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차 상담해야지.”
“…!!”
“아, 아니야…….”
마지막으로 여론 한 번 더 확인해 보고, 예상대로 가고 있으면 하차 사유나 잘 짜내봐야겠다.
“예? 형, 왜 갑자기…….”
김래빈이 기겁했다. 아무래도 이 사회성 없는 놈은 아직도 소문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피곤하다.’
더 뭘 떠들고 싶지가 않았다. 어차피 내일쯤 되면 주워듣겠지.
나는 그냥 김래빈을 지나쳐서 문으로 향했다. 바로 작가를 만날 생각이었다.
그러자 양옆에서 어깨가 붙들렸다.
“자자, 문대야. 일단 너 쉬었다가 일어나서 생각해 봐.”
“마, 마, 맞아. 이, 일단… 쉬, 쉬고. 머리를 쉬고.”
두 명이 달라붙자 순간적으로 육탄전에서 밀렸다.
덕분에 진압당하는 개처럼 질질 끌려서 침대로 도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 미쳤나?
“미쳤냐?”
“너나 정신 차려. 지금 너 일 터진 거 확인하고 삼십 분도 안 지났거든. 몇 달간 이 고생한 걸 삼십 분만에 버리게?”
“그러니까 미룰수록 상황만 나빠진….”
“어차피 지금 하차해도 기사는 내일 아침에나 뜰 거 아냐. 아침에 해도 똑같다고.”
큰세진과 선아현은 나를 침대로 도로 몰아넣었다.
“뭐든 맨정신으로 결정해야 후회 안 할 거 아니야! 너 지금 쫄아서 제정신 아닌 거 알아?”
“뭐?”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멈췄다.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지.
“난 제정신이야.”
“응. 아니야. 너 지금 당황하고 겁먹었어.”
큰세진이 작게 덧붙였다.
“…내가 전에 그랬거든.”
“…….”
“아니면 너 내가 말하기 전에 알았을걸. 지금 하차하든 내일 아침에 하차하든 차이 없다는 거.”
“…!”
그건…….
젠장. 맞았다.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내가 패닉 상태라니.’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 빌어먹을 부동심 특성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계속 드는군.
일단 이놈들이 미는 대로 침대에 누웠다.
선아현이 안도하는 소리가 대놓고 들렸다.
“대체 무슨 상황인…….”
“자자, 나가자.”
큰세진이 김래빈과 차유진을 몰아서 방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선아현이 그 뒤를 따라서 나가더니, 침을 삼키며 내게 말했다.
“쉬, 쉬어.”
끼이익.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방문이 닫혔다.
‘…나가 봤자 저놈들 침대가 여기 있는데.’
뭐, 세 시간쯤 뒤에 머쓱하게 들어오든 연습실에서 자든 알아서 할 것이다. 내가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 넘치는 상황이 아니다.
나는 눈을 감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박문대의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해 봤… 자 갑자기 가능할 리가 있나. 사회적 죽음에 진짜 돌연사까지 당하게 생겼는데.
‘상태창.’
여전히 아무 변동도 없는 상태창을 불러 봤자 눈에 들어오는 건 하나뿐이었다.
[!상태이상 : 데뷔가 아니면 죽음을]“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
왜 하필 나였는가.
왜 하필 박문대인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알아낼 방법도 없다는 건 더럽게 짜증 나는 일이었다.
당연히 아침까지 갑자기 뾰족한 수가 생각날 것 같지도 않았다.
갑자기 상황이 좋아질 리도 없고 말이다.
‘행운을 바라는 건 바보짓이지.’
보통 경악스럽게 나쁜 일이 삶에 예고 없이 찾아올 수는 있어도, 반대의 경우는 극히 드문 게 당연했다.
로또가 될 확률과 길 가다 교통사고 당할 확률을 비교해 봐라. 후자가 압도적이다.
날 봐라. 초자연적 기적이 일어나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는데 그 인생도 이미 망했을 줄이야.
“……허.”
젠장. 더 초조해지기만 한다. 어차피 할 거 당장 사퇴하고 싶어지는군.
‘…그래도 오늘 밤은 넘겨볼까.’
아무것도 기대되는 건 없었다.
순전히 말린 놈들 성의를 생각해서, 나는 한숨을 쉬고 팔짱을 뺐다.
상념이 어지러웠다. 내가 뭘 해야 합리적일지 계산을 할수록.
‘어디로 가도 답이 없다…….’
그렇게 설핏 잠이 들었던 것 같다.
* * *
펑!
나는 웬 소음 때문에 정신을 차렸다.
‘…나무 박살 나는 소리?’
덜 깬 채로 눈만 돌리자, 방문을 박차고 들어온 선아현이 보였다.
“무, 무문대야.”
선아현의 얼굴이 시뻘겋다.
‘또 뭐가 터졌나.’
나 말고 다른 놈이 혹시 터진 거면 그 덕에 좀 묻어갔으면 좋겠군.
선아현이 내 코앞에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화면이 켜진 스마트폰이었다.
“이, 이거 봐…!”
화면 빛이 눈을 찔렀다. 나는 눈을 찌푸리고 스마트폰을 잡아 들었다.
‘어디서 났지.’
촬영장 반입금지 품목을 손에 들고 떨떠름하게 화면을 읽어내렸다.
“…!”
기적이 일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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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 아이돌 주식회사 출연자인 박문대 최근 논란 당사자입니다. (632)]: 공개적으로 이런 글을 적는다는 것이 아직 많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더는 죄 없는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글을 적습니다.
저는 생리대 도난사건 이후로 자퇴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생리대를 훔친 것은 박문대가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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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아주 구체적으로 당시 정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글쓴이는 별것도 아닌 꼬투리로 몇몇 질 나쁜 동급생들에게 학기 초부터 지속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뒷담으로 시작한 괴롭힘이 점점 수위가 올라가더니, 결국 버틸 수 없을 지경까지 갔다. 그러나 집안 사정으로 인해 대처가 힘들어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생리대 도난 건이 터졌다. 아무래도 놈들은 반에서 별 친한 친구도 없이 혼자 다니던 박문대한테 도난을 뒤집어씌워서 두 배의 재미를 노렸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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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행간에서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지 않지만, 아마 이 조롱이 성추행급이었던 것 같다. 글쓴이는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완전히 멘탈이 박살 나며 열흘간 무단결석했다.
그리고 이 기간에 박문대가 그대로 자퇴했던 것이다.
글쓴이는 본인이 피해자면서도, 박문대가 누명을 쓴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자퇴 후 박문대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사과와 안부를 묻는 문자에 대한 박문대의 답은 이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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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잘못한 건 없으니 당연히 사과할 건 없으며, 자신은 어차피 자퇴하려 했기에 괜찮다. 그러나 네가 힘들어서, 널 괴롭힌 가해자들을 고발하고 싶은 거라면 돕겠다.’라는 장문의 답변이 왔습니다.]========================
글쓴이는 당시 항우울제를 복용 중이었으며 학교 근처에만 가도 과호흡을 일으킬 상태였기 때문에 고발을 진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박문대와 흐지부지 말을 끝냈지만, 사건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난 후에도 계속 그것이 신경 쓰여 연락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없는 번호라고 떴다.
‘…박문대는 휴대폰을 해지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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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온 문대를 봤을 때, 워낙 스타일과 인상이 바뀌어서 알아보진 못했습니다. 이번 논란이 나고서야 박문대가 그 친구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학교 다닐 때도 조용했지만, 누구한테 폐 끼치거나 이상한 친구 아니었습니다. 자퇴한 후에는 사려 깊고 착한 친구였다는 것을 깨달았구요.
부디 문대가 이번 일로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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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주인공이 녹음본을 토대로 고등학교 때 가해자들에 대한 고소를 진행할 것이라는 통쾌한 문장으로 끝났다. 아래로 몇 가지 인증 사진이 붙어 있었다.
최신 댓글에서는 현실 부정하는 사람들이 몰매를 맞고 댓글을 삭제하거나 도망가고 있었다.
그리고 태세 전환한 의견들이 베스트 댓글을 점령했다.
-미친 어쩐지 이상했어 문대 엄청 담백해 보이던데 저런 음습한 짓 할 리가 없지ㅠ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박문대랑 글쓴이 루머 퍼뜨리던 자칭 동창분들 합의금 준비하세요~ㅎㅎ
-아…ㅠㅠ글쓴분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진짜…문대야 진짜 고생했어 어쩌면 좋아…
“…….”
속이 울렁거렸다.
‘박문대가 아니었다고’
심지어 그걸 당사자가 나타나서 인증까지 하며 증명했다고.
그것도 사건 일어난 지 하루 만에.
“…….”
“돼, 됐어!”
선아현이 뭐라고 떠들기 시작했지만, 제대로 듣기 힘들었다.
머리가 띵했기 때문이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내가 뭘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좋아진다고?
이렇게 그냥 해결이 돼?
안도와 기쁨보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게 낯설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삶이 변한다면, 웬만하면 나쁜 쪽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했다고 생각했는데.
…남의 몸에 들어와서 반례를 체험할 줄이야.
“야!!”
문을 박차고 우르르 사람이 들어 왔다. 큰세진을 필두로 같은 팀 놈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리더였지.’
저 정도로 친해지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 했다. 리더가 슈뢰딩거의 사퇴 상태니 연습을 바꾸기도 애매했겠어.
간밤에 이놈들도 여러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야! 내가 뭐랬어! 기다리랬지?”
큰세진이 선아현을 보고 상황을 파악하고는 큰소리를 쳤다. 벌써 다 알고 온 모양이었다.
“…그러게.”
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고맙다.”
“…!”
이놈들 아니었으면 벌써 간밤에 때려치우고 짐 뺐다가 아침에 후회할 뻔했다.
“덕분에 방송 계속하네.”
나는 웃었다.
선아현은 ‘아니다’, ‘다행이다’를 반복하며 행복해했다. 큰세진은 씩 웃었다.
“고마우면 소 사줘.”
“……서로 없던 일로 하자.”
“야!”
돈 없어.
나는 투덜거리는 큰세진과 축하하는 팀원들의 말을 들으며, 그제야 안도했다.
‘이제 결승까지 조용히 연습할 수 있겠군.’
“이거 가져와 줘서 고맙다. 어떻게 가져왔냐?”
“다, 달라고 부탁했어!”
선아현이 밝게 웃으며 폰을 가져갔다. 이제 결승까지는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가 스마트폰에서 눈을 뗀 사이, 상황이 더욱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줄은 몰랐다.
첫타는 골드 1이 올린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