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 or Die RAW novel - Chapter 584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584화
배세진은 고요히 손안의 대본을 내려다보았다.
시즌 2의 대본.
이미 몇십 번, 몇백 번을 읽고 낭독하여 머릿속에 목소리로 선명히 그릴 수 있는 극본이 온갖 첨삭 필기와 함께 펼쳐진다.
혼자 한 건 아니었다.
‘…도움을 많이 받았어.’
이걸 완성하기까지 자신이 대본만 들고 있으면 슬그머니 와서 참견하던 멤버들이 있었다.
그는 발단이 되었던 류청우의 말을 떠올렸다.
-그렇구나. 그럼 상대 역할이 있으면 좀 구상하기 편할 것 같아?
대본의 상대역으로 대사를 받아주기.
아역 시절 초기에는 어머니가 가끔 해주셨고, 그 후에는 상대 없이 혼자서 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배세진은 ‘너희가 오히려 내 시간을 뺏고 있다’라고 냉정하게 끊는 대신, 멤버들이 대사를 읊도록 그냥 두었다.
조금 민망하지만 즐거웠기 때문이다.
‘이건… 사실 그룹 활동이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잖아.’
이건 무대 퍼포먼스나 곡 프로듀싱이 아니고, 하다못해 아이돌 배세진의 솔로 활동도 아니었다.
철저히 연기자 배세진의 개인 작업이었는데도 멤버들이 참견하는 건 순수한 친근감이나 호의의 문제였다.
-뭐, 크흠, 그래 주면… 고맙고.
그래서 그는 (내색하진 않았으나) 그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인 것이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나중에 쉬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정말 도움이 되었다.
‘시간 낭비가 아니었어.’
자신과 사고 방식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는 것은 대본을 더 다각적으로 보게 해줬다.
배세진이 혼자서 낭독했더라면 알지 못했을, 그의 사고가 닿지 않는 사각(死角)에서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배세진은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한 해석을 조금 수정했다…….
“세진 씨.”
“…!”
배세진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여긴 촬영장이다.
“세진 씨 차례요.”
“네.”
그는 매니저의 부름에 대본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눈이 빛났다.
‘제대로 하자.’
여긴 강원도 설산.
시즌 2. 그의 첫 촬영이었다.
배세진이 맡은 역, 정이솔.
그는 공감 능력이 결여한 사이코패스로 반사회성 인격장애가 있는 의대생이다.
기묘한 고층 건물에 갇혀서 탈출하려는 사람들 속에서 거리낌 없이 식량을 절대 가치로 삼아 비인륜적인 살인 행적을 벌인다.
심지어 주인공도 아무렇지 않게 죽였다.
그러나 정이솔이 계산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주인공이 그에게 죽는 순간 과거, 극의 시작 시기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즌 2가 시작하는 순간.
-허억,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은 정이솔을 만나자마자 죽인다.
배세진은 이미 그 장면을 촬영했다. 시즌 1 촬영 때, 배우들의 감정선 연결을 위해 거기까지 이미 촬영해둔 덕이다.
그러니 시즌 2, 이미 죽은 정이솔을 맡은 그는 극 중에 별로 등장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배세진의 역할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탁.
촬영 시작을 알리는 신호.
짧은 슬레이트 소리가 끊기는 순간, 촬영 장비를 잊는다.
…….
정이솔은 입을 열었다.
“안녕.”
“……!”
그는 자신이 앉은 간이의자에서 평온하게 다리를 꼬고 있다.
손에 든 것은 클립으로 잡힌 문진표, 걸친 것은 흰 가운.
마주 보는 것은 이 극의 주인공.
그리고 그들이 있는 이곳은…….
휘우우우우…….
끝없는 흰 눈과 싸늘한 바람이 몰아치는, 황량한 설산이다.
주인공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이게 뭐야.”
정이솔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네 심상.”
“…….”
그렇다.
이 정이솔은 극 중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다.
주인공이 기절하거나 잠이 들거나, 극한의 상황에 몰릴 때. 즉, 의식이 없을 때 그의 머릿속에서 나타나는 주인공의 망상이었다.
“왜 네가 여기 있어!”
“아마도 내가 네 트라우마겠지. 그 외에 적당한 전문 용어는 쓸 수가 없네. 나는 네 상상의 소산물이니까.”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한겨울 황량한 설산의 풍경 속에서 간이의자에 마주 보고 앉는 것이다.
마치 심리 상담을 받듯이.
그리고 주인공의 행동을 하나씩, 평가하며 그의 숨은 속내를 집어주는 것이다.
-이명희를 동료로 들인 건 섣부른 판단이야. 지난번에도 편의점에서 죽었는데 이번이라고 더 길게 살아남을까?
-아랫배 화상, 오른쪽 어깨 관통상, 왼쪽 발목 골절. 지금 넌 심리 상담이 아니라 진짜 의사가 필요해.
-이명희를 경비실에 두고 왔잖아. 지금 네 선택과 내가 했던 선택, 다를 게 없는데.
심상 풍경이 언제나 설산인 것은 아니다. 주인공은 현실에서도 환각을 본다. 그럴 땐 바로 옆에 그가 앉아서 대화를 나눌 것이다.
때로는 고통을 주고, 때로는 침착함을 주고, 가끔은… 놀랍게도 위안을 주면서 말이다.
-…다른 쪽을 골랐더라도 상황이 더 나아지진 않았어.
그러나 모든 말은 어투에 따라 그 뜻이 변하는 법.
사실 배세진은 이 상상 속 캐릭터를 본래의 정이솔보다도 더 공격적이고, 사악한 느낌으로 구현할 생각이었다.
‘상상이니까 더 그렇지.’
직접 살해당한 주인공의 머릿속이니, 당연히 정이솔은 좀 더 두렵고 무서운 존재로 그려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파트의 대본 연습 당시, 상대역인 주인공의 대사를 맡아준 멤버들이 밝힌 의견들은 각자 조금 달랐다.
그 점에 흥미를 느낀 배세진은 각자의 의견을 좀 더 진지하게 캐물었다.
특히 한 사람에게.
-저, 저…… 그럼. 그냥 제 생각이지만,
선아현.
그는 앨범을 기점으로 그룹 세계관에서 다소 의문스럽고 섬뜩한 인물을 맡고 있었다.
어딘가 정이솔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더 깊게 주인공과 정이솔의 심리 상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이 인물이, 주인공의 상상이라면… 오히려 더 인간적이지 않을까요? ‘정이솔이 좋은 사람이었다면’ 하는, 그런 바람이 투영, 됐을 것 같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결정적인 한 마디.
-그, 주인공은… 정이솔을, 죽였잖아요.
-……!
-죄책감이, 없지 않았을 것 같아요. 주인공은 좋은 사람이니까…….
배세진은 꽤 깊게 고민했다.
그리고 그의 고뇌에 박문대는 간단히 조언했다.
-어느 쪽이든 형이 연기하면 개연성은 충분할걸요. 형이 전문가니까.
-근데 굳이 따지자면….
다른 각도의 의견.
-사람들이 그걸 더 좋아할 것 같긴 합니다.
-아…!
정이솔이 좀 더 우호적인 것이, 보기 재밌다!
극 외부에서, 시청자가 보는 시선 말이다.
-…좋아. 고마워.
그래서 정이솔은 주인공의 심상 세계에서 이렇게 등장하는 것이다.
냉정하고 잔인한 이야기를 하지만, 주인공의 아픔에 약간 동요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갈수록, 그가 온정적인 건지, 시청자가 살짝 기대하거나 헷갈리도록.
‘나로서도, 이편이 더 연기하기가 더 재밌어….’
사실 공감 능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생존 효율만을 중시하는 정이솔 같은 캐릭터는, 배세진의 취향은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주인공에 대한 동정심, 약간의 공감을 회복해 나가는 것 같은… 이 심상 세계 속 정이솔의 미묘한 변화.
‘비록 주인공이 상상하는 가짜지만.’
이걸 연기할 것이 좀 기대가 됐다.
배세진의 그 마음을 거쳐 완성된, 정이솔.
그는 이제 고개를 들어 아직도 패닉 상태인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내 상상이라고? 꿈… 이거, 꿈이야?”
“마음대로 생각해. 지금은….”
정이솔이 볼펜을 눌렀다.
“일어날 시간이야.”
“아…….”
주인공이 눈 위로 쓰러졌다.
정이솔은 시선을 두지 않았다.
컷!!
그렇게 배세진의 이번 시즌 첫 씬은 깔끔히 OK를 받았다.
“아, 너무 좋아요! 특히 여기, 시선 주지 않는 게 좋아. 이상하게 참 미학적으로도 마음에 들어.”
감독이 만족스럽게 중얼거리고, 주변에서도 기분 좋게 촬영 장비를 정리했다.
이후 몰아서 이루어진 촬영에서도, 배세진은 단 한 번도 NG 사인을 받지 않았다.
다만 촬영장의 관계자 모두가 깨달았다.
배세진이 대본에 없는 애드립을 쏟아 넣은 건 아니다.
그러나 어투에서, 동작에서, 눈길에서… 정이솔의 연기에 ‘여지’를 주고 있었다.
내담자.
주인공을 향한.
“…우리 이솔이 캐릭터가 조금씩 변하네?”
“예. …그게 더 매력적인 것 같아서요.”
“어어. 맞아요. 그대로 해요. 세진 씨가 생각해 온 대로 해.”
감독은 즉시 컨펌했다.
그 치밀한 캐릭터 구성, 섬세한 순간을 탁 잡아내는 탁월함에도 촬영장에선 감탄하고 혀를 내두를지언정 경악하진 않는다.
경악은 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생기는 거니까. 그건 평판이 안 좋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본래도 미친 듯이 잘하던 사람이 또 한 번 신들린 듯이 잘하면, 놀라움 대신 두터운 신뢰에 레이어가 한 겹 더 쌓인다.
‘진짜 천재는 천재구나.’
이렇게.
“진짜… 진짜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촬영 후. 배세진은 따듯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받아들며, 촬영된 것을 돌려보기도 전에 알았다.
‘…잘했을 거야.’
마음속에 부드럽고 빠듯한 충족감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충실한 촬영 후.
“세진 선배님!”
“…아, 네.”
“오늘 강원도 맛집 가서 회식하는 거… 못 오셔서 아쉽습니다, 정말. 스케줄 있으시다면서요.”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가 사회성 좋고 서글서글하게 물었다.
배세진은 약간 어색하게, 하지만 제법 힘 있게 대답했다.
“예…. 근처에 그룹 촬영이 있어서. 바로 합류할 거라 어쩔 수 없어요.”
“아아… 와, 그럼 테스타 분들이 지금 근처에 계신 거겠네요?”
“네.”
이전의 배세진이었다면 ‘무슨 속셈이야?’ 같은 얼굴로 왜 말을 거는 건지 떨떠름하게 보았을 테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도리어 성공적으로 시간을 잘 맞췄다는 생각에 약간 들뜬 심정으로, 매니저가 오기 전까지 다른 배우들과 가벼운 스몰토크도 즐기지 않았는가!
“저, 혹시 류청우님 사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제가 그분이 국가대표실 때부터 팬이라서….”
“…오늘 가서 바로 물어볼게요.”
“오, 감사합니다!”
배세진은 자신의 발전한 사교성에 만족했다.
그리고 힐끗 보니, 저기서 매니저가 오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이동…….’
그러나 매니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와 제작사 직원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배세진과 눈이 마주치자, 반색하며 말한다.
“세진 씨, 잠시만요.”
“……?”
“저희가 이런 대화를 좀 나누었는데…….”
그리하여 뜻밖의 소식 하나를 들은 채로, 배세진은 어쨌든 빠르게 20분 거리에 있는 이 산의 산장으로 향한 것이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다들 미리 찍고 있겠지!’
그가 없는 반나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쩌면 이미 CM송 같은 건 서너 개쯤 후보를 팍팍 찍어낸 상태일지도 몰랐다.
배세진은 사실 본인이 이 팀의 작곡에는 썩 기여하는 바가 크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작사는 약간이라면!’
지금부터 열심히 참여하면서, 너희 조언이 촬영에 큰 도움이 됐다고 이야기하면 다들 좋아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신나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너 꼴이 그게 뭐야…?”
마당에서 얼굴에 검댕이 묻어 꼬질꼬질한 박문대를 만난다!
* * *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
박문대는 배세진은 산장 안으로 안내했다. 그러면서도 주변을 살피며 쓱쓱 움직이는 게, 어디서 제작진이라도 튀어나올까 봐 경계하는 모양새다.
누가 보면 좀비 사태 발발 이후 일주일쯤 지난 후라고 착각할 만큼 몸에 긴장과 체념이 배어 있다.
‘뭐, 뭐야.’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있었죠.”
간단했다.
테스타는 여기서 의식주를 다 챙겨 받으며 안락하고 즐겁게 CM송 만들기만 고뇌하는 게 아니었다.
“그게, 알고 보니까 알아서 살아야 하더라고요….”
“…….”
자기의 일을 스스로 하자!
“그래도 CM송이 하나 통과될 때마다 용돈 주고 시내로 외출시켜 주신다고 하더군요…. 그전까진 추노처럼 잡혀 올 거라고 하시던데요.”
“…….”
뭐, 거기까지도 괜찮았다고 한다. 요리든 청소든 힘쓰는 일이든 간에 다들 그럭저럭 괜찮게 했으니까.
소박하게 자연인 생활하면서 작곡하기, 어렵지 않았단 말이다.
다만….
“그 할 일을 저희 마음대로 맡는 게 아니었어요.”
제작진 주도하에 게임을 통해서, 각자의 순위에 따라 제비를 뽑고 역할이 배분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선아현이 요리를 해…?”
“…….”
“박문대가… 장작을 패고?”
그렇게 됐다.
배세진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 와중에 박문대가 목장갑으로 소중히 꼭 감추고 있던 것을 쓱 보여줬다.
검댕이 묻어나오는 포일.
“제가 몰래 나와서 군고구마라도 구워오는 중입니다. 아직 제작진한테 안 들켰어요.”
“…지금 카메라 있는 곳에서 말하고 있잖아?!”
“다 매수했습니다.”
카메라 감독들이 엄지를 들었다. 장작불 군고구마의 위력이었다.
“…….”
배세진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오래 잃을 수가 없었다.
“다, 다른 멤버들은.”
“사냥 팀입니다.”
“……?”
“차유진, 이세진, 류청우 형. 이렇게 셋이 사냥 팀이거든요. 일단 그렇게 아시면 돼요.”
박문대가 다시 뚜벅뚜벅 발을 옮겼다.
배세진은 혼란에 빠졌다!
사, 사냥?
아니, 애초에 말이다.
“작곡은?”
“아직 시작도 못 했어요.”
그 말에 경악하기도 잠시, 배세진은 작곡이라는 단어에 바로 멤버 한 명을 떠올렸다.
아직도 박문대의 입에서 나오지 않은 한 사람!
테스타 앨범마다 프로듀서를 맡은 사나이!
“그래, 김래빈은? 래빈이가 작곡…….”
“깍두기입니다.”
“……??”
박문대가 설명했다.
“막내라서, 깍두기래요.”
“…….”
“아무것도 하면 안 되는 역할입니다.”
김래빈 봉인!
“그, 그럼 작곡은 누가 하는데?”
“형이요.”
“…….”
제가요?
“예. 형이요. 남은 제비가 메인 프로듀서였거든요.”
배세진은 갑작스러운 직분에 얼어붙었다.
눈 오는 설산에 딸린 아궁이에서 장작을 휘적이느라 꼬질꼬질해진 박문대가 군고구마를 내밀며 엄숙히 말했다.
“아셨으면 시작합시다. 지금 3곡이 밀렸는데… 일단 형이 시작만 해주시면 다들 참여할 수 있대요. 아, 래빈이 빼고요.”
“…….”
“오늘 한 곡 스케치는 끝내야 노역 할당량… 아니, 마감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배세진은 차마 그 군고구마를 받아들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 3곡 아니야.”
“……?”
“4곡이라고.”
배세진이 눈을 피했다.
아까 제작사 직원이 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우, 우리 드라마 제작사에서 재밌을 것 같다고, 여기 제작진한테 추가 경매 요청해서… PPL 넣었대.”
“…….”
테스타 노동 리스트 갱신.
CM송… 아니, OST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