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84
그가 손을 훌훌 털며 우진과 최영도에게 어깨동무했다.
“영도 후배가 한 얘기는 이제 한 귀로 흘려버리고, 세희 후배가 편하게 톤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자고. 팀이잖아?”
“네!”
“알겠습니다, 선배님!”
“아, 참. 그나저나, 영도 후배한테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그럼요.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선배님!”
최영도 선배가 호탕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강식 선배가 짓궂은 얼굴로 물었다.
“단순히 선후배 사이인 거야?”
“예?”
“자네랑 세희 후배 말이야. 공연도 접고 매일 병실까지 찾아갔을 정도면, 흠.”
“아, 하하하….”
“정확하게 무슨 관계인가?”
최영도 선배가 멋쩍게 웃었다.
이내, 그의 얼굴이 빨개졌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어디선가 BGM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기분 탓은 확실히 아닌 것 같다.
우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쉬세요!”
오전·오후 연습 내내, 명세희 선배는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흔히들 ‘20대 여배우 기근’이라 말하는 현상 속에서, 대학로 최고의 극단이라 평가받는 ‘배우 마당’을 대표하는 배우였던 그녀였다.
비록 20대 끝물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 강제 휴식기를 가진 뒤 30대 초반이 되어서야 복귀를 했다고는 하나.
그녀가 여태껏 쌓아온 연극 경력, 그리고 한 차례 증명됐던 안정적인 연기력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은가.
그런데,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상처와 트라우마만 극복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넘어야 하는 벽이 한 가지 더 있는 기분이 자꾸 들었다.
바로, 잃어버린 감을 되찾는 것.
그것만 어떻게 하면 될 것 같은데….
다른 배우들과 합을 맞추는 게 이렇게나 힘든 일이었나.
“하아.”
오늘은 정말 힘든 하루였다.
계속 회의감이 들고 있었으니까.
“미안해 죽겠네….”
텅 빈 연습실에서, 어느새 홀로 앉아있었다.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책했다.
연출님과 작가님, 그리고 동료 배우들이 얼마나 답답해할까.
자신이 제 역할을 잘못해서 연습 일정에 차질을 빚고 있는데, 누구 하나 화를 내거나 싫은 소리를 하는 법이 없다.
다들 착해서, 미안한 마음이 더욱 크다.
“연습밖에 없다, 세희야….”
그녀는 약간 어질러진 연습실 이곳저곳을 정리했다.
소품들을 정리하고, 바닥을 쓸면서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잠을 줄이는 수밖에.
남들이 온종일 연습하고 퇴근할 때, ‘나’는 한두 시간 더 연습하고 집에 간다!
라는 마음으로 대본을 집었다.
그때였다.
– 탁.
“……?!”
갑자기 불이 꺼졌다.
뭐지?
어둠 속에서, 세희는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이윽고,
– 탁!
다시 불이 켜졌다.
그와 동시에,
“에?”
놀란 세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습실 입구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거, 혼자만 연습하지 말고 같이 좀 합시다!”
최영도 선배가 활짝 웃으며 외쳤고,
“오늘 후배님 때문에 연습을 제대로 못 해서, 나머지 공부 좀 하려는데 같이 좀 해도 되겠어요?”
이강식 선배가 ‘허허허-’ 너털웃음을 지었으며,
“자자, 다들 커피 한 잔씩 들고 시작하시죠!”
우진이 양손에 든 커피를 흔들어 보였고,
“선배님! 치사하게 혼자만 연습하십니까!”
“이미 잘하시는 분이 얼마나 더 잘하시려고! 욕심쟁이시네요!”
아직 신입인 배수정과 양효제가 명세희의 양옆으로 다가가 귀여운 애교(?)를 부렸다.
“…….”
명세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끝이 흐려진 한 마디를 내뱉었다.
“…다들, 고마워요.”
그날.
‘배우 마당’ 지하실의 불빛은 늦은 밤까지 꺼지지 않았다.
172화
공연이 불과 2주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어떻게 연기하면 좋을지 아직도 감을 못 찾겠다….
캐릭터의 감정선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팀원들에게 이러한 고민을 털어놓자니, 배우로서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었다.
거기에 덧붙여서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강식은 워낙 대선배라 쉽사리 연기 조언을 요청하기가 힘들었다.
오히려 그의 연습을 방해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다가가지 못했다.
최영도에게는 그동안 너무나도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다시 연기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 사람.
그런 그에게 더 이상 의지하고 기댈 수가 없었다.
고마움보다 미안함이 더 커서.
양효제와 배수정은 이번 무대가 데뷔작인 후배들이다.
본인들이 할 것도 바쁠 텐데, 무작정 다가가 징징댈 수가 없는 노릇 아닌가.
해서, 비록 연극 무대는 처음일지라도 여태 보여준 실력이나 성과 등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우월해 보이는 우진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내부 오디션에서 보여준 연기만 보더라도 분석을 얼마나 철저히 하는 배우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으니까.
다만, 그 타이밍을 못 잡고 있던 찰나였다.
하지만,
“…실제로 제가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저는 수영이란 인물이 느끼는 감정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경험을 했었거든요.”
명세희는 여전히 촉촉해져 있는 눈가를 닦으면서 말했다.
이제는 모든 걸 털어놓고 함께 고민하면서 해결책을 찾고 싶어졌다.
복잡하게 고민만 하다가는, 찝찝한 상태로 무대 위에 올라갈 것 같았다.
그러느니, 속 시원히 모두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
우린 ‘팀’이니까.
그래서, 그녀는 혼자서 속으로 삼켜왔던 얘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최영도 선배에게서 들었던 그녀의 과거 이야기로 말이다.
연습실 바닥에 ‘빙-’ 둘러앉은 상태인 A팀 배우들은 그녀의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병실에 혼자 있으면, 정말 외로워요. 부모님께는 말씀 안 드렸었거든요. 지금도 모르세요.”
“헐.”
“다친 것도 서러운데, 찾아와주는 사람도 없어 봐.”
“어떻게 이겨내셨어요?”
우진이 물었다.
오전에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당사자의 입을 통해서 직접 듣고 싶었다.
그러자, 명세희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영도 오빠가 병실에 매일 와줬었어.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병실로 출근하시더라고.”
그녀의 옆에 앉은 최영도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시선이 애꿎은 바닥만을 향했다.
“쏘 스윗하셔라….”
“선배님, 츤데레십니다!”
20대 초반 젊은 세대인 배수정과 양효제가 추임새를 넣었다.
부끄러운 듯, 최영도가 손을 ‘휘휘-’ 저었다.
이내 이강식 선배가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옛날 생각에 잠기게 되네.”
“왜요, 선배님?”
“남몰래 사내 연애하는 배우들 지켜보는 게 은근히 재밌거든. 지금 저 두 사람처럼.”
“……!”
“선, 선배님!”
“다 보여, 여기까지 와서 속일 생각일랑 하지들 마!”
이강식의 짓궂은 한 마디에, 최영도와 명세희가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푸하하하!
웃음꽃이 피었다.
“내가 못 살아….”
명세희가 입을 삐쭉 내밀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최영도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따라 앉았다.
“아직은, 비밀입니다….”
그의 말에, 우진은 곧장 이강식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선배가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맨입으로?’
…두 분은 아무래도, 짓궂은 장난꾸러기한테 제대로 걸리신 것 같네요.
* * *
어느 배우가 그렇지 않겠느냐만.
명세희에게 연기는 삶이었고, 배우는 천직이었다.
무대 위에서 살고, 무대 위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왔을 테니까.
그러다 보니, 연기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는 위기를 겪으면서 받은 상실감과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최영도라는 사람이 있었기에, 모든 것을 극복하고 다시 무대로 돌아올 수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런 경험이 있으니,
“저에게 영도 오빠가 힘이 되어주었듯, 젊은이에게는 누나가 힘이 되는 존재일 거잖아요.”
“그렇지.”
“영도 오빠는 제가 하루라도 빨리 사람들과 다시 만나고, 작업했으면 좋겠다고 했었어요. 제가 영도 오빠였어도, 똑같이 그랬을 거예요.”
잠시 두 사람의 비밀연애에 초점이 맞춰졌었던 대화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작품 얘기로 바뀌었다.
“그런데, 수영이는 그렇지가 않아요. 동생이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길 바라요. 그런 바람이 말 그대로 바람에서만 끝났으면 모르겠는데, 행동으로 옮기잖아요. 전 이 부분이 당최 이해가 되질 않아요. 그게 더 동생을 힘들고 외롭게 한다는 것을, 수영이가 정말 모를까요?”
심도 있는 고민이었다.
대본 안에서 주어진 상황은 배우가 실제의 삶에서 경험했던 것과 결이 비슷했다.
다만, 말 그대로 실제와 다른 그림이 펼쳐지고 있으므로 감정의 괴리가 온 것이다.
캐릭터의 감정을 가장 잘 파악하고 표현해야 하는 배우부터가 아직 이해가 덜 됐는데, 어떻게 진심이 담긴 연기가 나오겠는가.
전체적인 합은 괜찮으나, 유독 명세희와의 앙상블이 잘 나오지 않고 있는 원인이 명백해졌다.
연출이나 작가는 전체적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다.
연기 디테일, 그리고 서로 간의 연기 호흡을 고려하는 것에 있어 전문가는 배우다.
그러니, 이제는 배우들끼리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세희 선배가 설정한 수영 캐릭터의 전사(前史)가 뭐예요?”
명세희가 양껏 고민을 쏟아내는 동안 조용했었던 청중의 침묵을 깨는 목소리.
우진의 질문이었다.
명세희는 잠시 뜸을 들이며 곰곰이 생각했다.
“선배 연기는 분명 좋아요. 톤이 안 맞는 것 같은 느낌이 분명 들긴 하지만, 미세해서 그냥 넘어가도 문제없는 정도라 보거든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지금 단순히 목소리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면?”
“선배의 연기에서 캐릭터의 전사가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여쭤본 거예요. 대본에 나와 있지 않은 부분들에 대해서, 선배가 설정한 것들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우진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으나, 그 내용은 상당히 민감했다.
극의 방향성, 혹은 작품의 전체적인 의도를 놓고 토의하는 것엔 거부감이 없지만.
지금 그가 내뱉은 말들은 개인의 연기와 관련된 부분들을 지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캐릭터의 설정 부분에 대한 의문 제기는 결국 개인의 분석을 터치하는 부분이고, 그것은 곧 연기 방식에 대한 지적과 다름없었기에.
게다가, 후배나 친구도 아니고 선배에게 연기 방식을 조언한다는 건, 굉장히 조심스러운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도, 우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아끼지 않았다.
필요한 얘기고, 누군가가 꺼내야 할 얘기라고 생각했으며.
무엇보다, 예전처럼 감을 되찾기를 절실하게 원하는 명세희의 진심이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연기 방식에 관한 조언이라 해서, 자신의 말을 기분 나쁘게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선 것도 있었다.
“그렇구나….”
우진의 말을 들은 명세희가 침음을 내뱉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읊조렸다.
“우진 후배 말이 맞아. 전사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어. 그 부분이 부족했던 것 같네.”
“불안하신 건가요?”
“어…?”
우진이 흔들림 없는 두 눈으로 명세희를 바라보며 되물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