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74
기수는 제갈세가와 악연이 있었다.
강호에 나오자마자 적으로 맞닥뜨렸고, 세 아들 중 막내인 제갈륜을 죽여서 그들의 원수가 된 상태이기도 했다.
그들 중 무공으로 기수를 두렵게 하는 자는 없었다.
기문진법만 조심하면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개인 대 개인일 때 얘기고, 거대 세력을 조직하고 운용하는 능력으로 따지자면 역시 그들은 분명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기수는 전략지도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광대한 지역. 얼핏 보기에도 부대와 부대 간의 상호 간격이라거나 점령하고 있는 요충지가 상당히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었다.
‘싸움이 이 정도 규모라면 역시 모사의 능력이 중요하다는 얘기군.’
그렇다면 거기에 맞서고 있는 무림맹 군사 단령문도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환우구종 중 도종의 전인이라고 알려진 만큼 무공 또한 깊어 보였다.
‘어쩌면 무림맹의 진정한 리더는 소림사가 아니라 장백천문일지도….’
기수는 진백과 시선을 맞춘 후 검지로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곳은 형산파가 빠져나간 자리.
특별히 그곳을 찍은 이유는 주변에 마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적과 싸우더라도, 가능하면 혈천제가 있는 천마교와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진백을 고개를 끄덕인 후 항마법사에게 말했다.
“우리 비룡검문을 이곳에 배치시켜주십시오..”
그의 입장에선 어디로 가건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기수가 찍은 곳을 고른 것이다.
단령문이 물었다.
“거긴 남궁세가가 주둔했던 곳이군요. 천마교의 세력은 미치지 않지만 삼황맹의 힘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전선은 장기간 교착상태고 사상자도 많이 나오고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파사현정을 위해 나선 마당에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항마법사와 단령문 모두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들이 돌아간 뒤, 진백은 즉시 이동 명령을 내렸다.
길 안내 맡은 소림승을 따라 꼬박 이틀을 걸어 도착한 곳.
고수진(苦水津)이라는 강변 나루터였다.
지도로 볼 때는 장원 바로 옆인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걸어서 이틀이나 걸렸으니 전략 지도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가늠이 되었다.
전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큰 싸움이었다.
고수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엔 수백 개의 군막이 세워져 있고 그 둘레에 나무 울타리들이 여러 겹 간격 맞춰 세워져 있었다.
대충 보기에도 적의 습격에 대비한 기문진 같았다.
안내를 맡은 소림승은 고수진을 담당한 군웅들을 소개해주었다.
종남파 장문인 장해량.
그는 입맹 할 때 이미 만난 구면이라 따로 인사할 게 없었다.
그리고 종남파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배치한 문파는 바로 사해문이었다.
소문주 호문평과 그 여동생 호운혜가 책임자로, 문주급 레벨이 아니기 때문에 난주의 모임엔 오지 않았었고 처음으로 진백과 인사를 나누었다.
기수는 그들과 구면이었다.
하지만 양십일의 모습으로는 초면이기 때문에 새로 인사를 텄다.
호문평은 전보다 체격이 더 커진 것 같았다.
농구선수 키에 근육이 빵빵해져서 거의 프로레슬러 체형이었다.
얼굴에 못 보던 흉터도 몇 개 생겨서 카리스마도 느껴졌다.
호운혜도 일전에 홍안산 동굴에서 따먹…. 만났을 때보다 더욱 성숙한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다만, 객지에 나와 고생을 해서인지 체중은 좀 줄어든 것 같았다.
배구선수 키에 살이 빠지다 보니 가슴의 볼륨부터 좀 감소한 것 같아서 다소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갸름해진 얼굴 라인이나 허리에서 다리로 이어지는 라인 쪽은 전보다 훨씬 보기 좋고 매력적이었다.
가슴도 예전엔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편이었는데 지금은 파묻혀도 숨은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양십일에겐 기회가 없겠지만…
종남파 장문인 장해량은 그외의 다른 문파 수장들을 소개해주었다.
진백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인사를 나누었지만, 사실 종남파와 사해문 외에는 다들 군소방파들이라 장해량 본인조차 이름을 잘 기억 못해 애를 먹는 느낌이었다.
비룡검문 문도들이 묵을 군막을 안내해준 후 수장들만 따로 군영 중간에 자리 잡은 커다란 천막에 모였다.
장해량이 진백에게 차를 권한 후 말했다.
“제가 이곳의 책임자가 되었지만 독단적으로 일처리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좋은 의견이나 계획이 있으면 언제라도 말씀해주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호문평은 다른 데 더 관심이 많았다.
“남궁세가와는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것은…..”
진백은 좌우를 둘러보았다. 다들 궁금해 하는 표정이었다.
처음 이곳에 와서 인사를 나눌 때, 군소방파 수장들의 안색은 밝지 않았다.
진백은 군막을 배정받으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남궁세가에서 쓰던 군막은 50여개. 하지만 그들을 끌어내리고 대신 자리를 채우게 된 비룡검문의 인원은 10개만 써도 충분했다.
지내는 동안 거주성은 좋겠지만, 고수진 전체의 전투력은 그만큼 떨어진 것이다.
안 그래도 화산파와 형산파가 망신을 당하고 도망친 사실이 전해지면서 무림맹 전체의 사기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들이 비록 못된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무림맹 전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백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특유의 온화한 표정을 유지한 채 비룡검문과 남궁세가 사이의 얽힌 얘기들을 찬찬히, 조근조근 얘기해주었다.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는 상황이니 오로지 진실을 가지고 정면돌파하는 것 밖에 다른 길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옆에 앉은 기수가 보기엔 좀 길고 답답한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차츰 진백의 얘기에 빠져들었다.
사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온갖 고난을 자처한 대목, 특히 남궁세가 가주와 직접 만나는 길을 찾기 위해 문주가 그 집 하인이 된 얘기까지 나오자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마다 한 문파의 수장들이다 보니 진백이 겪어야 했던 고뇌와 역경이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비룡검법이 어떤 경로로 전해졌는지, 그걸 전해준 사람이 누구고 남궁가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성공신화였기 때문에 진백의 얘기가 끝난 뒤에는 다들 표정이 바뀌어 있었다.
남궁가를 끌어내려 전력을 약화시킨 미운 문파에서 2대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옛 명성을 되찾은 입지전적 문파로 관점이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수진 주변의 전략적 요충지, 진법 통과요령, 경계근무 순번, 상호 연락 방법 등등을 얘기해줄 때도 다들 성의가 있었다.
할일에 대한 숙지가 끝나자 장해량이 대형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적은 강 건너 이 곳. 칠산령이라 불리는 산맥 지역에 숨어 있습니다. 삼황맹이 주력이고 녹림72채가 함께 하는데, 병력규모는 수시로 바뀌어서 적으면 5천에서 많을 때는 1만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1만이라….”
진백은 기수와 얼굴을 마주봤다. 예상보다 많은 수였다.
장해량이 두 사람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전면전을 펼치면 자기네들의 피해가 극심할 것을 알기 때문에 대부분 강을 건너와서 기습을 하는 정도입니다. 군량 운반만 조심하면 큰 위험은 없습니다.”
기수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를 통해 장해량의 마음이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우쳐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기수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전략이었다.
진백이 장해량에게 물었다.
“군량은 어떻게 운반합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은 호문평이 했다.
“우리 사해문이 배로 실어 나릅니다. 수심이 얕기 때문에 바닥이 얕은 배를 써서 조금씩 여러 번 날라야 한다는 게 번거롭지만 육로보다는 훨씬 수월하지요.”
“수심이 얼마나 얕습니까?”
“말이 강이지, 가장 깊은 곳이 허리 깊이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름이 되어 소나기나 내려야 그나마 수량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배가 없이도 건너다닐 수 있겠군요.”
“그래서 보초병과 신호체계가 중요한 겁니다. 놈들이 언제, 어느 쪽으로 강을 건너올지 모르거든요.”
기수가 별 생각없이 무심코 한 마디 했다.
“그건 우리도 적진으로 쉽게 갈 수 있다는 의미가 되겠군요.”
장해량과 여러 문파 수장들의 표정이 변했다.
다들 알고 있지만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얘기를 기수가 거론한 것이다.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그는 정도, 사도 아닌 자신만의 판단기준으로 살아가지만 그래도 정사대전이 벌어지는 이곳은 현재 무림의 중심이었다.
강호의 눈과 귀가 모조리 집중된 핵심 중의 핵심!
그런 이곳에서 정의의 편이 되어 싸우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환상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최전선에 배치되고 보니 일단 살고 보자, 지키고 보자 하는 분위기가 너무 강한 것 같았다.
인간의 본능이니 탓할 수는 없지만 실망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호문평이 말했다.
“남궁세가가 떠난 뒤 수색대 활동이 잠시 중단되었지만, 이제 비룡문이 왔으니 다시 재개할 수 있습니다.”
“수색대가 무엇입니까?”
“글자 그대로입니다. 강을 건너가서 적 진영을 수색하고 동향을 탐지할 뿐만 아니라 전투를 벌이기도 하는 소규모 부대입니다.”
“아! 역시 우리 쪽에도 공격수단이 존재하는군요.”
“원하신다면 내일 저와 함께 가시지요.”
기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겠습니다.”
역시 젊은 사람은 달랐다. 장해량과 군소문파 수장들은 지키는 걸 중시하지만 호문평은 적극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다음 날.
기수는 순우광, 조치성과 20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떠날 준비를 했다.
문주 진백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처음이니까 나서지 말고 관망하도록 하게.”
“걱정 마십시오. 문주님.”
기수는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포구 앞에 집결한 면면들을 보니까 마음이 달라졌다.
사해문에서 30여명, 종남파에서 10여명이 참여했고, 그 외 여러 문파에서 나온 사람들까지 합쳐서 총 규모는 100명 정도가 되었다.
결코 많은 수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
젊고 활기에 차있을 뿐만 아니라 싸우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차림새도 중원에서와 달리 다들 갑옷을 일부분씩 챙겨 입고 있었다.
감숙성이 전쟁터가 된 것은 처음 마교와 무림맹의 접전을 벌인 장소라는 이유도 있지만, 중원에서 멀리 떨어졌다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만약 하북이나 하남에서 이 정도 규모의 전쟁을 벌였다면 즉각 관군이 출동했을 것이었다. 감숙성은 워낙 먼 곳이라 무림인들끼리 치고 박고 해도 조정에서 그냥 방치해두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근래의 난주 일대엔 장창이나 대도 같은 큰 병기를 들고 대로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눈에 띠었다.
그런 분위기가 무림인들에게도 최소한 엄심갑 정도는 두르도록 만든 것이다.
눈빛과 차림새뿐만 아니라 배에 오르는 행동도 다들 절도가 있었다.
기수는 이들 앞에서 비룡검문의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제 회의에서는 진백이 자신의 지나온 일들을 얘기함으로써 지지를 얻게 되었지만 그것은 수장들 사이에서의 일이고, 진짜로 싸움을 원하는 젊은 전사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한 가지밖에 없었다.
힘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강은 폭이 얼마 안 되었다. 그나마도 모래톱이 많아서 정 급하면 옷 젖을 각오 하고 그냥 뛰어들어도 될 것 같았다.
물론 배가 있는데 그럴 이유는 없었다.
강을 건너자 호문평은 능숙하게 부대를 나누었다.
“우리 남매가 중군이 되겠습니다. 20명씩 두 개의 날개를 편성하여 좌우에서 중군을 호위해 주십시오.”
기수와 비룡문은 왼쪽 날개를 맡기로 했다.
호문평은 칠산령의 봉우리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으로 진입한 뒤, 돌로 된 가운데 봉우리를 지나 동쪽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게 오늘의 일정입니다. 질문?”
“없습니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일단 분위기 파악부터 하고, 질문은 나중에 하자는 게 기수의 생각이었다.
수색대는 셋으로 나뉘어 즉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기수는 숲을 빠져나가자마자 당혹감을 느꼈다.
강변에 그나마 우거진 숲을 지나고 나니까 칠산령에 속한 산들의 실체가 드러났다.
멀리서 봤을 때부터 좀 황량한 느낌이긴 했지만, 가까워지며 확인한 결과 산에 나무가 거의 없고 바위와 잡초, 덤불뿐이었다.
그나마 있는 나무도 강한 모래바람 때문인지 키가 크지 않았다.
중원에서만 살아온 순우광과 조치성도 황량한 풍경에 놀란 눈치였다.
“이래선 몸 숨길 곳이 바위 뒤밖에 없겠군요. 사형.”
“바위도 몇 개 안 보이는데?”
기수가 씩 웃은 후 그들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건 피차 마찬가지야. 적들도 숨기 어려울 거라고.”
“그렇긴 하겠네요.”
기수는 기감을 바짝 끌어올린 상태로 선두에 서서 길을 열었다.
그러다가 굴곡진 능선을 지날 때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사람의 기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인공구조물이나 적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우릴 지켜보고 있는데…’
기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훨씬 더 집중해서 주변의 상황을 읽었다.
함께 한 비룡검문의 제자들과 타 문파 무사들도 함께 긴장하며 숨을 죽였다.
마침내 기수의 입술 끝이 올라갔다.
“후후…. 거기 숨어 있었구나.”
기수는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경공을 시전하여 언덕을 단숨에 뛰어올라갔다.
적은 땅을 파고 안에 들어간 뒤 뚜껑을 살짝 걸쳐놓은 틈으로 밖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기수가 다가가자 뚜껑이 확 들춰지며 그 안에서 신호탄이 솟아올라가 공중에서 펑! 소리를 내며 터졌다.
동료를 부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