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28
엉겁결에 자영을 따라간 기수에게 한백랑이 옷 한벌을 내밀었다.
“네 천막을 만드는 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동안 이걸로 갈아입고 저쪽에 가서 왕씨 부인을 찾아. 그녀가 옷을 고쳐서 네게 맞춰줄 거니까.”
“아, 알았다…습니다.”
같은 호위니까 말 놔도 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일단 그건 분위기 좀 보고 나중에 하기로 마음먹었다.
새 장포는 한백랑의 옷과 색이 같았다.
‘이걸 입고 좌우로 나란히 서면 한 팀으로 보이긴 하겠네.’
왕씨부인이란 여자는 솜씨 좋게 그 옷을 고치고, 안에 입을 옷도 주었다.
그렇게 갈아입고 나가니 한백랑이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
“잘 어울리네.”
기수 입장에선 의외였다. 아까 그렇게 죽일 듯 노려보고 말도 험하게 하던 그녀의 태도가 지금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한 팀이 되었으니까 이제부터는 잘 해보자는 건가?’
기수도 아량이 있는 남자니까 한백랑의 태도 변화에 얼마든지 맞춰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백랑이 기수에게 심하게 대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자영의 성격을 워낙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자기 군막으로 돌아온 자영은 머리가 허연 노인을 자기 군막으로 불러들인 후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기수가 궁금해서 한백랑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바둑공부.”
“예?”
“추룡선생이란 분에게 매일 한 시진에서 길면 세 시진씩 바둑을 배우고 있지.”
“아! 그렇군요.”
약간은 섭섭했다. 사귀자고 데려온 남자를 본 체 만 체 하다니.
한참 시간이 지난 뒤 그 추룡선생이란 자가 나왔다.
작은 키에 얼굴이 네모나고 수염이 잔뜩 난 얼굴이었는데, 상당한 고수로 느껴졌다. 그가 예리한 눈빛으로 기수를 훑어본 후 물었다.
“자넨 뭔가?”
“예. 오늘부터 자영아가씨의 호위가 되었습니다.”
“그래? 흐음….”
그는 별다른 말없이 휘적휘적 떠나갔고, 잠시 후 군막 안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으아악!… 왜 안 되는 거냐고!”
기수는 깜짝 놀라 군막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한백랑은 손짓으로 제지했다.
“우리는 아가씨가 부르기 전에 먼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멈추어 서서 기다리려니까 자영의 화난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왜 자충이냐고! 내가 한 수 빨랐어야 되는데!”
기수는 바둑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 안에 엄청난 깊이가 있다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50년 동안 바둑을 둬 온 기원 최고 고수 할아버지도 정통 교육 받은 초등학생한테 꼼짝 못하고 지는 게 바둑이라고 했다.
또, 배울 시기를 놓치거나 기재가 없는 사람은 평생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프로한테 절대로 못 이긴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무공의 세계와도 비슷한 것 같았다.
그나마 이쪽엔 영약과 기연이라도 있지만 바둑엔 그마저도 없으니…
잠시 후 뭔가 뒤집어엎는 소리가 들리더니 자영이 천막 밖으로 나왔다.
짜증 가득한 그녀 얼굴은 이전에 봤을 때와 사뭇 달랐다.
기수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자영의 화난 얼굴은 사하나 호운혜에 비해 특별히 나을 것도 없었다.
‘단지 여자 얼굴에 반해서 이렇게 위험한 곳에 발을 들여놓다니…’
기수는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때 자영이 기수를 발견하고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수는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누구인지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너. 정말 너무한다. 아무리 변덕이 심하고 싫증을 빨리 내는 성격이라도 그렇지. 사귀자고 한 남자를 잊어버려?’
슬쩍 옆을 보니 한백랑이 미소 짓고 있었다.
이삼일 내로 퇴출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때 자영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맞다. 양십삼. 호호호!… 내가 이름을 잘 기억 못해서…”
기수는 그게 아니라 사람 자체를 잊어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 이 얼굴은 너무 임팩트가 없구나. 내 본래 얼굴이었다면 바둑과의 경쟁에서 이겼을 텐데.’
자영이 물었다.
“너 바둑 둘 줄 아니?”
“아뇨. 모릅니다.”
“너. 몰래 추룡선생 거처에 잠입해서 죽이고 와줄래?”
“예?”
“호호!… 농담이야. 농담.”
생글생글 웃는 자영을 보며 기수는 다시 무릎에 힘이 빠졌다.
그녀의 쌍꺼풀 있는 두 눈은 그 자체로 크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아래쪽 눈두덩 애교살이 장난이 아니었다.
웃을 때마다 그게 도톰하게 올라오면서 눈 형태를 반달 모양으로 만들어서 참을 수 없을 만큼 귀여운 인상을 만들어버렸다.
조금 전 바둑에 져서 화낼 때의 얼굴은 더 이상 기억나지도 않았다.
“우리 사귀기로 했지? 뭐부터 할까?”
“그, 글쎄요….”
뭐 이런 대책 없는 아가씨가 있단 말인가.
남녀관계가 장난이냐? 그냥 바둑 한 판 두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기수는 그녀가 버릇없이 제멋대로 자랐고, 오빠의 간섭을 싫어하며, 아직 남자와 잠자리 경험이 없는 여자라고 판단 내렸다.
남자를 경험한 여자라면 사귄다는 말을 이렇게 무게 없이 뱉지는 않을 것이었다.
옆에서 한백랑이 거들었다.
“남녀가 사귈 때는 주로 시서(詩書)를 논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기수는 한백랑을 노려봤다. 자기를 엿 먹이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남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알고 있지만 시서를 논하는 것은 고문은 될지언정, 연애행위는 절대로 될 수 없었다.
다행히 자영도 거기엔 동감하는 듯 했다.
“지루해. 너. 나를 즐겁게 해 줄 재주 같은 거 없어?”
“글쎄요…. 제가 워낙 둔해서…”
너를 위해 춤추고 노래라도 하라는 거냐? 침대 위에서라면 즐거움을 넘어 천국 왕복을 시켜줄 수도 있다만…
그때 전령 한 명이 와서 한백랑에게 보고했다.
“건곤방에는 양십삼이란 방도가 없답니다.”
한백랑이 기수를 노려봤다.
기수는 황급히 양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서류엔 양명이라고 적혀 있을 겁니다. 그게 본명입니다. 양십삼은 가족과 친구들이 불러주는 이름이라서….”
한백랑은 미심쩍을 표정으로 기수를 노려보다가 서류를 고쳐 적어서 다시 전령에게 들려 보았다.
기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는 요물이야. 기본적인 사고도 못하게 만들다니….’
자영이 미소 지으며 물어보는 바람에 정신이 멍해져서 기본적으로 습득한 정보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원래 양명이 하루 뒤면 깨어날 거라는 데도 생각이 미쳤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은 좋지 않아. 기회를 봐서 빠져나가야겠어.’
그때 자영이 기수의 양손을 보고 물었다.
“거긴 왜 그렇게 붕대를 감고 있어?”
“좀 다쳤습니다.”
“그래? 아주 잘 듣는 금창약이 있는데… 한백랑. 네가 치료 좀 해 줘.”
“알겠습니다.”
자영은 말도 없이 돌아서서 자기 천막으로 들어가 버렸다.
기수와 뭘 할지 몰라서 멍하니 서있기보다는 방금 전에 진 바둑을 복기하는 편이 차라리 더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바둑돌 놓는 소리를 들으며 한백랑이 기수에게 턱짓을 했다.
“따라와.”
옆 천막으로 들어간 그녀는 금색 통과 붕대를 꺼내어 탁자에 놓았다.
“이걸 바르고 새 붕대를 감아. 혼자 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녀가 나가자 기수는 약통을 열고 냄새부터 맡아보았다.
청량한 향기가 그윽해서 보타문의 금창약 못지않은 효능일 거라 짐작되었다.
상의를 벗고 붕대를 전부 푼 후에 확인해 보니 상처는 대부분 아물고 있었다.
그러나 팔뚝과 손바닥엔 완치 후에도 흔적이 남을 것 같았다.
기수는 사공명을 생각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흉터 남기만 해봐라…’
기수는 금창약을 찍어 조심스럽게 상처마다 발랐다.
나름 소중한 피부라 ‘새살아 돋아라!’ 주문을 외우며 정성을 다해 문지르다 보니 시간이 예상보다 많이 걸렸다
그때 휘장이 걷히며 한백랑이 고개를 들이밀고 말했다.
“왜 이렇게 굼떠?”
그러다가 그녀는 기수의 벗은 상체를 보고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완벽하게 발달한 가슴과 복근, 팔의 근육들.
거기에 상처까지 더해지니까 야성미가 철철 넘쳐흘렀다.
그녀의 변하는 표정과 시선을 보며 기수는 생각했다.
‘그래! 바로 저게 남자를 아는 여자의 눈빛이지.’
자영에게 무시당했던 에고가 조금은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뭘 그렇게 빤히 보십니까?”
“응? 아, 아냐… 너. 우리 교를 위해서 정말 열심히 싸웠구나?”
“그런 셈이죠.”
“팔의 상처가 특히 심하네. 맨손으로 칼 든 적과 싸우기라도 한 거야?”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핫!”
기수는 팔을 움직이면서 근육들에 힘을 주어 울룩불룩 튀어나오도록 만들어 한백랑의 반응을 즐겼다.
한백랑은 급히 휘장을 도로 내리고 말했다.
“빨리 끝내. 호위는 개인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없어.”
나름 냉정한 어조로 말하는 것 같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기수는 씩 웃으며 나머지 약을 발랐다.
사실, 자영과 나란히 있어 비교되어서 그렇지, 한백랑도 상당한 수준의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인상은 좀 차갑고 날카로워 보이지만 20대 중반의 한창 나이이고, 키가 큰데다 몸매도 꽤 육감적인 편이었다.
기수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좀 더 긍정적으로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이 정도 자리라면 적의 중요한 정보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거야. 멸천제의 소식도 금방 알 수 있을 거고. 그러니까 당분간 이 위치를 고수하자.’
사실, 역용술과 선풍비라면 아무리 위급한 상황에 처한다 해도 몸 하나 빼내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저녁 먹고 돌아온 한백랑과 막 교대하려는 참에 덩치 큰 고수 두 명이 찾아와서 말을 걸었다.
“네가 양십삼이냐?”
“그, 그렇습니다만…”
기수 입장에선 그들의 태도나 말투가 영 기분에 거슬렸다.
그러나 옷차림새나 내뿜는 기도에서 마령급이라는 사실을 짐작했기 때문에 저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한백랑이 대신 나서서 말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천제님이 부르셔.”
“누구를? 양십삼을?”
“응. 아가씨가 남자를 호위로 채용했다는 말을 듣고 화가 많이 나셨어.”
“그걸 어떻게 알았지?”
“모를 리가 있나. 추룡선생이 와서 다 얘기했는데…”
“그랬군…”
기수는 속으로 놈을 욕했다.
‘고자질쟁이 새끼!’
마령이 한백랑에게 비키라는 손짓을 했다.
“어쨌든 빨리 데려가야 돼.”
한백랑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기수는 좀 도와달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봤지만 한백랑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암천제의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두 마령을 따라 암천제에게 가면서 기수는 갈등했다.
‘이건 별로 안 좋은데… 중간에 째는 게 최선이겠지?’
그러나 그렇게 하면 자영과는 영영 이별이 될 것이었다.
‘일단 암천제를 만나서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자.’
그렇게 암천제의 군막에 도달해 보니 암천제가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에 봤던 싸가지 없는 인상 그대로였고, 흰옷 입은 미녀들을 병풍처럼 둘러놓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구레나룻을 길러서인지 전보다 조금 더 연륜이 있어 보였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기수를 훑어보았다.
“이놈이냐?”
기수는 한쪽 무릎을 꿇고 군례를 올렸다.
“천제님을 뵙습니다!”
암천제는 인사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기수를 데려온 부하 마령에게 명령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서 죽이고 묻어버려라.”
마령이 놀라서 물었다.
“예? 그,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기수는 강력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그래선 안 되지! 아무리 천마교의 삼천제라고 해도 인명을 그렇게 가벼이 여겨선 안 되지. 보자마자 죽이라니!’
그러나 암천제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영아는 하루만 지나면 이런 놈이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거다. 그러니 오늘밤에 치워버리는 게 최선이야.”
“예! 알겠습니다.”
기수는 의외로 마음이 담담했다.
‘역시 암천제의 동생 곁에 머무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이었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장소까지 가면 죽는 건 자기가 아니라 마령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냥 여기서 다 죽여 버릴까? 암천제부터…’
마교 삼천제 중 하나를 제거한다면 무림맹 입장에선 만세를 부를 일이었다.
그러나 무림맹을 위해서가 아니라, 암천제의 행실이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죽이고 싶었다.
‘너. 파천강기 헤드샷이라고 들어봤냐?’
기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무리 마교 삼천제라고 해도 그걸 막아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수가 막 진기를 끌어 올리려고 할 때. 뒤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오빠!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자영이었다. 그녀와 한백랑이 기수를 되찾기 위해 온 것이다.
기수는 한백랑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기수는 알 수 있었다. 자기를 살리기 위해 그녀가 자영에게 말해서 앞장세운 게 분명했다. 고마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