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99
그동안 선실에 틀어박혀 시름에만 젖어 있던 황제는 전직 대학사 원의달을 만난 이후 생기를 되찾았다.
원의달은 비록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판단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 경륜이 녹아들어 더욱 노회한 상태였다.
“폐하. 척회왕이 그 정도로 철두철미한 준비를 했다면 보위를 되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도 대비하셔야 합니다.”
“오랜 시간이라…”
“물론 우리가 하기에 따라 그 시간은 단축될 것입니다.“
“무엇부터 해야 하겠소?”
“일단 현재 상황을 천하에 널리 알려야 합니다.”
“흐음….!”
원의달은 황제가 도망친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걸 알아차렸다.
“폐하. 척회왕의 흉계에 빠진 것은 불가항력이었습니다. 한신은 건달의 가랑이 밑을 기었고, 한고조는 초패왕에게 매번 지기만 하다가 구리산 싸움 한 번에 천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부끄러움 때문에 대사를 그르치지 마십시오.”
황제의 낯빛이 변했다.
그는 크게 깨달은 표정으로 원의달에게 말했다.
“원대부의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드는구려. 고맙소.”
“폐하의 영명하심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 위기도 얼마든지 극복하실 것이니 너무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황제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어떻게 하면 현재 상황을 천하에 알릴 수 있겠소?”
“일단 남경에서부터 시작하면 될 것입니다. 제가 사대부들을 모을 테니 폐하께서 교지를 한 번 내려주십시오. 그러면 온 천하로 소문이 퍼질 것입니다.”
“좋소. 자리를 마련해주시오.”
“그리고 이렇게 배에 계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마침 남경엔 옛 궁궐도 남아 있으니 그곳으로 가시지요.”
그것은 황제에게도 반가운 얘기였다.
“헌데, 척회왕이 공격해 올까봐 걱정이오.”
“이곳은 좌군도독부 관할입니다. 듣자하니 좌군도독 장현이 반란군을 제압하고 있다던데 그를 부르십시오. 기꺼이 어가를 호위할 것입니다. 그리고 북경 주변에 남아 있는 후군도독부에 칙령을 내려 황궁을 치도록 하고, 금군들에게도 척회왕을 잡도록 하면 모반은 오래지 않아 제압될 것입니다.”
“하하하!….”
황제는 궁에서 도망쳐 나온 이후 처음으로 기분 좋게 웃었다.
원의달의 얘기를 듣고 보니 희망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요인 중의 하나는 현재 몸을 의탁한 곳이 수적들의 배라는 점이었다.
그동안 공주만 만날 뿐, 되도록 선실 안에만 있었던 것도 강호의 도적무리와 상종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공을 세운 청년도 있지만 그는 혈매궁의 궁주라고 했다.
황제는 비록 무림인은 아니지만 혈매라는 단어가 정도 문파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꺼림칙한 느낌은 가지고 있었다.
원의달을 만나고 나니까 모든 것들이 명쾌하게 정리된 느낌이었고, 그 기분이 웃음으로 표현된 것이다.
남경으로 돌아간 원의달은 즉시 하인들을 총동원하여 남경에 사는 권세 있는 가문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사정을 얘기하자 모두 놀랐다.
그리고 황제를 옹위하는 모임에 모두 다 가입하기를 원했다.
사실, 남경이 한 때 제국의 수도였다고는 해도 현재는 정치 변두리에 속했다.
그런데 이번에 황제를 도와 보위를 되찾는다면 다들 개국공신에 준하는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중앙 정계 고위직으로 화려하게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원의달은 연판장을 만들어 모두의 명단을 적고, 그들 중 지명도가 높은 남경의 유력한 세가 가주 10여명, 그리고 안찰사, 포정사, 도지휘사 등 현진 고위관리들을 대동하고 다시 포구를 찾았다.
황제는 그들의 방문을 반가이 맞았다.
연판장에 적힌 명단을 보니 쟁쟁한 이름들이 가득했다.
나이 든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남경에서 조정을 다시 꾸려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원의달과 함께 도열한 신하들로부터 인사를 받은 황제는 크게 고무되었다.
이제 좌군도독부를 부르고 후군도독부와 금군에게 명령을 내리면 되는 것이다.
그때 공주가 들어와 조심스럽게 황제에게 물었다.
“부황폐하. 이들은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원대부의 말에 따라 천하에 이 사실을 알리고 전군에 칙령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원의달과 의논한 내용을 모두 들려주었다.
“아! 하지만…”
공주는 당황했다.
이렇게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 척회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부황을 시해하기 위해 천하를 뒤지고 있을 텐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위치를 알리는 것은 위험했다.
이들과 관련된 이들 중 세작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하물며 남경에 고정적으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더 더욱 위험했다.
공주는 황제에게 자기 생각을 얘기했다.
그러나 마음을 정한 황제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공주는 밖으로 나와 기수에게 그 얘기를 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늙은이들이 잔뜩 몰려왔다 했더니 그런 의도였군.:
기수 역시 남경에 내리는 것은 반대였다.
궁궐에 자리 잡고 칙령을 내리는 것이 보기엔 좋겠지만, 스나이퍼들이 노리고 있는데 참호 밖으로 나가서 깃발을 흔드는 꼴이나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기수는 수로맹주에게 몇 가지 부탁을 하고 공주와 함께 황제를 만나뵈었다.
“폐하. 소인이 한 가지 보여드릴 게 있사옵니다.”
자기를 소인이라 칭하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최고 지도자를 국민이 뽑는 게 아니라 자기들끼리 대대로 해먹는 전제군주제 시스템이니까 참기로 했다.
안 그래도 배가 강심을 향해 움직이자 남경에서 탄 대신들이 의아해 하던 참이었다.
“짐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그리하여 황제와 남경의 대신들 모두가 갑판 위로 올라갔다.
배는 어느새 포구를 떠나 강 중심에 나와 있었고, 측면에 작은 배 한 척이 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떠있었다.
기수는 그 빈 배를 가리킨 후 말했다.
“이제부터 저 배를 잘 봐주십시오.”
그리고는 진무에게 대도를 받아 들고 절을 한 뒤 한 소리 기합과 함께 점프하여 단번에 빈배로 날아가 착지했다.
황제와 대신들 모두 깜짝 놀랐다.
새가 아닌 사람일진데, 어떻게 해서 십여 장을 날아갔는지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빈배 갑판에 내려선 기수는 수직으로 점프하여 올라간 후 자유낙하 하면서 대도를 휘둘러 배의 돛대를 자르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파파팟!….
노련한 쉐프가 양배추 썰듯이 돛대가 잘려 배의 좌우로 튀어 강물 위에 떨어졌다.
황제와 대신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평소에 기수를 알고 지내던 수로맹 사람들과 사매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돛대의 밑둥까지 피짜 도우처럼 수백 개의 원판으로 잘라낸 기수는 다시 한 번 공중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이번엔 양손으로 불기둥을 뿜어내어 배를 순식간에 화염 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자기가 잘라서 공중에 띄운 나뭇조각들을 징검다리처럼 연달아 디디며 원래의 배로 돌아와 섰다.
황제와 대신들은 처음에 놀랐다가 나중엔 겁에 질렸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꿈을 꾸는 건 아닌가 하는 멍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황제는 기수가 호흡조차 거칠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그, 그대가 내게 보여주고자 한 게 이것인가?”
“그렇습니다. 외람되이 여쭙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좌군도독부와 맞대결 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 글쎄… 그것은…”
워낙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모습이라 쉽게 판단하기 어려웠다.
“다시 여쭙겠습니다. 만약 제가 좌군도독을 암살할 목적으로 침투한다면 그의 부하들이 저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거기에 대해선 확답할 수 있었다.
“그건 불가능할 것 같네.”
“척회왕은 저보다 더 고수입니다.”
황제와 대신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길게 여러 말로 이유를 대고, 따지고 할 필요가 없었다.
황제가 배에서 내리면 안 되는 이유를 기수가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황제는 황궁 지하비도를 빠져나올 때 느꼈던 공포를 되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가 무사히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동창 환관들의 희생, 자기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황제가 한숨을 내쉰 후 기수에게 물었다.
“그대와 척회왕의 무공 차이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제가 이긴다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황제는 지하비도에서 공주와 시녀들이 잠시나마 척회왕과 맞서 싸웠던 게 생각났다.
“림아. 너와 이 청년의 무공을 비교하면 어느 정도가 되겠느냐?”
공주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궁주가 저보다 훨씬 강해요.”
그녀도 방금 배를 순식간에 불쏘시개로 만드는 광경을 보고 질린 상태였다.
황제는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옥기린(玉麒麟)이로다…!”
옥이란 외모가 잘 생긴 사람에게 쓰는 형용사고, 기린이란 태평성세에 나타난다는 상상 속의 동물이었다.
무림에선 용(龍)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지만, 원래 용은 황제의 상징이라 아무나 함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황제 입장에서 기수의 늠름한 외모와 놀라운 무공을 형용하기엔 옥기린 정도가 딱 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늘부터 그대의 문파는 기린궁이라 부르도록 하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기수는 황제가 작명을 해준다는 건 대단한 영광이란 사실을 알기에 감사를 표했다.
황제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단지 이름 하나 바꿨을 뿐인데, 꺼림칙하던 강호 무림인이 지금은 마치 자기 호위라도 된 것처럼 마음에 쏙 들었다.
황제는 원의달을 향해 말했다.
“척회왕을 처단하는 날까지, 짐은 배에서 지내는 게 더 나을 것 같구려.”
“소신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원의달도 기수의 시범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마음 같아서는 남경에 황궁을 꾸미고 자기 아래로 대신들 줄을 쫙 세우고 싶었지만 척회왕의 무공이 이 청년고수보다 강하다면 좌군도독부 아니라 백만대군을 두른다고 해도 황제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황제가 없으면 권력도 없는 것이다.
“궁을 꾸미는 것은 여건이 안정된 뒤로 미루고, 나머지는 계획대로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시오.”
대신들은 포구에 내린 뒤 원의달의 집으로 갔고, 회의 뒤에 각자 역할을 분담했다.
배에 남게 된 황제는 예전처럼 선실에만 박혀 있지는 않았다.
희망을 가지게 된 이유도 있거니와 기수의 문파를 개명해준 이후 그를 좀 더 가까이 곁에 두고 싶어진 이유도 있었다.
황제는 자주 기수를 불러 현재의 상황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그가 보기에 기수는 이제까지 상대한 내관, 대신들과 뭔가 달랐다.
자유분방한 무림인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쓰는 단어라거나 세상을 보는 관점이 어딘가 좀 색다른 것 같았다.
백성이 근본이란 식의 얘기를 지나치게 많이 하긴 했지만 원칙적으로 동의하는 내용이라 별 상관은 없었다. 어쨌거나 황제 입장에선 흥미로운 대상임이 분명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고 고수이니 옆에 가까이 두고 싶은 게 어쩌면 당연한 본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황제와 대작을 하는 경우도 자주 생겼다.
황궁이었다면 어림도 없을 얘기지만 좁은 배 안에서 할 일은 없고, 대화상대가 기수밖에 없으니까 자연히 술상대로 이어진 것이다.
공주는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기뻐했다.
사매들도 혈매궁 대신 기린궁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 기뻐했다.
황제가 하사한 이름은 바꿀 수 없는 것.
여인들이 대부분인 문파에 기린을 상징으로 쓰는 게 약간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게 뭐 대순가. 황제가 작명을 해주셨는데…
특히 동창 출신 사매들은 거의 인생역전의 기분을 만끽했다.
수로맹주만 접근할 기회를 잡지 못해 안타까워 할 뿐이었다.
달이 뜬 저녁.
기수는 황제와 대작을 하다가 적당히 취해 밖으로 나왔다.
공주가 뱃전에 서서 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수는 속에서 화끈한 열기가 솟는 것을 느꼈다.
북경을 떠나온 이후. 사매들과 재회는 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배에 황제가 타고 있기 때문에 기수 본인부터 긴장이 되었던 것이다.
술도 한 잔 했겠다. 달빛 아래 어여쁜 공주도 있겠다.
기수는 슬쩍 다른 배로 옮겨 가서 멸절강기막이란 최고의 은폐엄폐 차단막을 마음껏 활용해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공주의 표정이 몹시 어두웠다.
기수는 그녀 옆에 서서 손을 대지 않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아냐….”
“네가 이렇게 수심에 찬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얘기해 봐. 우리 사이에 감출 게 뭐가 있어?”
공주는 긴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어머니를 죽인 흉수를 찾았어.”
“그게 정말이야? 누군데?”
공주는 단추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무림인이었던 그녀의 어머니가 죽을 때 손에 꼭 쥐고 있었다던 바로 그 단추였다.
“척회왕이 그 문양 그려진 단추를 달고 있었어.”
“정말이야? 그럼 너희 어머니가….”
“맞아. 모반의 기운을 감지하고 조사하시다가 척회왕의 손에 돌아가신 거야.”
“아! 그랬구나…”
그렇다면 공주에겐 척회왕이 불공대천의 원수인 것이다.
기수는 그녀 어깨에 손을 얹고 가볍게 감싸 안아주며 말했다.
“내가 기필코 그놈을 죽여 너의 원한을 갚아줄게.”
“정말?”
그녀 입장에선 원수가 너무 고수라서 엄두가 안 나는 일이었다.
기수는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 날 믿어.”
공주는 기수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