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510
01513 1513화
체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생명이 달린 문제에 재고 따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뚜루루.
몇 차례 신호음이 들린 후 드웨인 센터장의 퉁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닥터 최의 전화라. 혹시 잘못 누른 건 아니겠지?”
“저번 달에도 통화하셨습니다.”
“누가 그걸 얘기하나? 이번 미국행에서 우리 UCLA를 빼먹어 놓고 뻔뻔하게 전화를 하다니, 무슨 염치인가?”
드웨인 센터장의 목소리가 여전히 서늘했지만 태수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부탁이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부탁이라. 나에게 좋은 소식이었으면 좋겠는데.”
“우선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현재 한 아이가…….”
태수는 상황을 먼저 얘기하고 왜 전화했는지도 덧붙여 설명했다. 그런데 드웨인 센터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그러니까 미국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 기증자를 찾아 달라고?”
“안 됩니까?”
“닥터 최, 내가 자네를 참 좋아하지만 밑도 끝도 없는 부탁까지 들어 달라는 건 좀 억지 아닌가?”
“그 점은 죄송합니다.”
태수가 사과하자 드웨인 센터장의 목소리가 좀 더 딱딱해졌다.
“LA만 해도 너무 넓고, 인구가 상당해. 게다가 한인타운까지 형성되어 있어서 한 명의 한국 사람을 찾긴 더 쉽지 않다고.”
“알겠습니다. 무리한 부탁을 해서 죄송합니다.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뭐?”
“다음에 다시 얼굴 뵙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럼.”
태수는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시간을 끌 상황이 아니었다.
태수는 코리아종합병원의 고정환 원장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드웨인 센터장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자, 잠깐! 닥터 최.”
“네?”
“무슨 사람이 그렇게 급해? 뭘 그리 섭섭해하나?”
“이쪽 상황이 위급해서 그런 겁니다. 섭섭하지 않으니까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그쪽 급한 건 알겠어.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고.”
“네?”
태수가 묻자 드웨인 센터장의 목소리가 바로 들려왔다.
“내가 도와주는 조건으로 뭘 해 줄 거냐고.”
“죄송합니다. 전 생명을 두고 거래하지 않습니다. 다른 분에게 연락해 보겠습니다.”
“그럼 코리아종합병원에 전화하겠지.”
“그건…….”
“그쪽에서 한인들에게 정보를 얻어 내는 건 원활할지 몰라도 이쪽에서 움직이는 건 상황이 다르지 않나?”
드웨인 센터장의 목소리가 다시 득의양양하게 변했다.
태수는 인상이 찌푸려졌다.
병원의 규모가 달랐다.
코리아종합병원은 한인타운에서 유명한 병원이고, UCLA는 LA 전역에서 가장 힘 있는 병원이었다.
동원할 수 있는 인원만 해도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태수는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이를 꽉 물었다.
숙여?
그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명을 놓고 하는 거래.
그것만큼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사실이 태수의 신념까지도 뒤흔들었다. 이 순간에도 중요한 건 류수찬의 생명이었다.
태수가 눈을 꽉 감고 자신과 타협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 드웨인 센터장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거창한 조건을 내세울 거라고 생각하나?”
“…….”
“내 조건은 언제나 하나야. 부르면 와 주겠단 약속이라도 해 달란 말이야. 그게 어려운 건 아니잖아.”
뜻밖의 조건에 태수의 눈동자가 살짝 떨려 왔다.
“센터장님.”
“우리도 의사야. 물질만능주의인 미국에서도 생명이 위급한 환자는 살리고 보는 걸 모르나?”
“…….”
“일단 이쪽에서 LAPD와 터미널 쪽에 협조를 요청해 볼게. 코리아종합병원에선 한인들을 중점으로 조사하라고 해.”
드웨인 센터장이 화끈하게 말하자 태수가 사과부터 했다.
“오해했습니다.”
“내가 오해하게 말했어. 그건 나중에 따지자고. 그리고 이번 일, 단단히 돌려받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제가 신세 진 건 이자까지 꼭 더해 드립니다.”
“아니까 나도 움직이는 거라고. 아침부터 바빠지겠네. 끊자고.”
뚝.
드웨인 센터장이 먼저 전화를 끊자 김혁권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 인간, 내가 알기로 상당히 계산적인데.”
“이번 일도 계산적으로 한 겁니다.”
“뭐, 일단 계산은 계산이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건 도움이 되는 거고.”
“일단 전 고정환 병원장님에게 먼저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태수는 다시 휴대폰을 눌렀다.
태수는 재차 고정환 병원장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드웨인 센터장이 지원해 준단 것도 이야기했다.
고정환 병원장은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대답해 왔다.
“그럼 이쪽에서는 한인 비상 연락망을 통해서 알아볼게.”
“가능할까요?”
“한인타운에서 머물렀다며. 그럼 어디선가는 잤을 거 아닌가. 그거 찾아보는 건 전화 몇 통이면 충분해.”
“정말 감사합니다.”
“한국 사람끼리 도와야지. 우리가 만리타국에 있어도 마음은 한국 놈들이니까. 좌우간 난 전화할 데가 많아서 일단 실례할게.”
고정환 병원장도 태수에게 통보하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
태수도 뜨거워진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젠 기다리는 일만 남았는데요.”
“맨날 기다리기만 해. 진짜 그 기증자 면상 좀 보고 싶네요.”
“제 말이요.”
“이거 너무 열 받아서 저녁 시간인데 배도 안 고프네.”
“그래도 일단 먹죠. 뭐라도 먹어야 우리도 힘을 내지요.”
“짜장면이나 하나 먹읍시다. 대충 때우자고.”
김혁권의 말에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1시간, 2시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배달시켜 먹은 짜장면 그릇도 이미 회수해 간 상태다. 그런데도 연락은 없었다.
태수는 잠깐의 틈을 타 류수찬에게 한 번 더 다녀왔다.
태수가 진료실로 돌아오자 3인용 소파에 길게 누워 있던 김혁권이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애는 어때요?”
“보호자가 있는데도 아프다고 칭얼거리기도 하고, 눈물도 보입니다.”
“좋아졌다는 거야, 뭐야?”
“정신적인 문제는 좋아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몸은 더 안 좋아지고 있죠. 보호자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보호자까지 곁에 없으면 무너질 정도로요.”
태수의 말에 김혁권이 톡 쏘듯이 물었다.
“이런데도 보호자 간을 이식하면 안 된다고요?”
“제가 답답하십니까?”
“지금은 닥터 최가 가진 그 의사로서의 신념이 밉습니다. 진짜 미워요.”
“저도 제가 답답합니다.”
태수의 말에 김혁권이 얼른 몰아붙였다.
“그럼 그냥 해!”
“김 간호사님.”
“……에이, 씨발. 진짜.”
벌러덩.
김혁권은 다시 소파에 누웠다. 그래도 짜증이 가라앉지 않는지 풀썩거리기도 했다.
태수는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밤 사이에 기증자 추적에 아무런 진전도 없다면 진행합니다.”
“정말?”
“그런데 아시겠지만 이건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수찬이가 자기 간을 가지고 버티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고요.”
태수의 말에 어느새 다시 일어나 있던 김혁권이 이를 악물었다.
“…….”
“이식해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면 좋죠. 하지만 이식 성공 자체가 확률이란 말입니다. 그 확률조차도 낮고요.”
“흠.”
“저라도 그냥 지켜보는 게 좋아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알았어요. 더 보채지 않을게.”
“그런 뜻이 아니라…….”
태수가 뭐라 말하려 하자 김혁권이 고개를 저었다.
“닥터 최 말이 맞지. 일치율도 낮은 이식수술이란 걸 알면서도 우격다짐으로 진행하면 어쩌자고.”
“…….”
“설사 진행했다고 해도 수찬이가 견뎌 낼 수 있을지 모르고, 잘못되면 그 원망은 또 어디서 어떻게 들어.”
“…….”
“나도 그 정도 상식은 있어요. 있는데도 마음이 급했다고요. 그건 미안합니다. 어떻게든 기다려 봅시다.”
“오늘 밤만입니다.”
태수의 말에 김혁권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소파에 누웠다.
태수도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진료실 공기는 너무도 무거웠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가벼운 농담도 던질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떠올라 아침이 밝았지만 태수와 김혁권은 각자 소파에 누워 쪽잠을 청하고 있었다.
기다리다 지쳐 잠들었다.
수시로 류수찬의 상태를 확인하며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새벽이 깊어질 때까지 휴대폰만 바라보던 두 사람은 잠깐 눕는다는 게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진료실이 고요함으로 가득할 때였다.
띠리릭.
소파 테이블에 올려둔 휴대폰이 반짝이며 울자 태수는 눈도 뜨지 않고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최태수입니다.”
“나야, 나. 응급은 아니라고.”
“아, 병원장님.”
태수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대답하자 박종석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진료실이라며. 왜 안 들어갔……. 들어갈 상황이 아니었나 보네.”
“뭐, 그렇지요. 아, 그리고 밤사이…….”
태수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자세하게 얘기했다. 목이 살짝 잠겼지만 보고를 하는 동안 서서히 풀려 갔다.
곧 모든 내용을 들은 박종석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고생이 많아. 이거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한 거 같기도 하고.”
“보너스 많이 주십시오.”
“그렇게 벌면서도 또 벌려고? 하여간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고 깊이를 모른다니까. 그보다 밥은?”
“간단히 먹고 있습니다.”
태수의 대답에 박종석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먹어야지. 김 간호사하고 나와. 밥이나 먹게.”
“죄송합니다. 다 끝나면 그때 아주 배 터지게 사 주십시오.”
“이 사람아, 어렵게 불렀는데 거기서 그러고 있으면 내 마음은 어쩌라고.”
“아르바이트 의사니까 마음껏 부려 먹으셔야죠.”
태수의 넉살에 박종석은 마지못한 듯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도시락이라도 좋은 놈으로 보내 줄게. 혹시 더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하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됐네, 이 사람아. 부른 내가 죈지, 최 선생이 능력자인 게 죈지. 좌우간 끊어.”
박종석의 안타까움이 가득한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태수는 슬쩍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봤는지 누워 있던 김혁권이 물었다.
“어디 갑니까?”
“어시스던트 구해야죠. 아침이잖습니까.”
“수술하게?”
“아직 확신은 없습니다.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어시스던트는 필요하니까요.”
태수의 말에 김혁권도 부스스 일어났다.
“그럼 나도 수술실 쪽에 한 번 가 봐야겠네. 수술에 필요한 것들이 잘 구비됐는지 확인해 봐야 하니까요.”
“전 어시스던트 구하면 수찬이에게 들렀다가 올 겁니다.”
“휴대폰은 잘 가지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마시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쪽잠 잤는데 피곤하진 않으세요?”
“이 정도도 나한테는 특급 호텔입니다. 먼저 갑니다.”
휙휙.
김혁권은 손을 흔들며 먼저 진료실을 나갔다.
태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젠 인도에서의 생활이 잊힐 만큼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초심을 잃지 않고 살아갔다.
어쩌면 그런 김혁권이 중심을 잡아 주고 있어서 태수도 편안함에 물들지 않는지도 모른다.
외과 의국으로 이동하는 사이 태수는 휴대폰을 들었다.
미국은 지금 저녁 시간이다. 중간에 한 번 전화를 달라고 했지만 아직까지 연락은 없었다.
마냥 기다리며 시간을 보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잠깐 여유가 있는 지금 혹시 알아낸 정보가 있는지 확인하는 게 옳았다.
태수는 그 생각으로 먼저 고정환 병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원장님.”
“어, 최 선생,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어.”
“뭐 좀 알아낸 게 있습니까?”
“이문규라고 했지? 그 친구가 머문 한인 게스트하우스를 찾았어. 그쪽 주인하고 얘기를 좀 해 봤는데 상당히 비관적이었다던데.”
그 소리에 태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비관적이요?”
“3일을 머물렀는데, 하루는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서 삶에 대해 엄청 떠들었나 봐. 식당에 있는 손님들한테 말이야.”
“…….”
“훌쩍 떠나고 싶다는 얘기를 상당히 많이 했다더라고. 좌우간 어디로 간다고는 말하지 않고 떠난 모양이야.”
고정환 병원장의 말에 태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