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65
00166 166화
“자네가 그렇다면 내가 더 권할 수는 없겠군. 대신 언제든지 마음에 안 들면 전화 해. 내가, 음. 굳이 나한테 전화할 필요도 없을 거 같은데.”
“다들 좋게 봐 주시는 거죠.”
“아니야. 전에 우리끼리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어. 다들 그러더군, 만약에 자네가 전문의였다면 절대 NGO에서 나가지 못하게 했을 거라고.”
닥터 제임스의 말은 곧 태수가 여러 분야의 의사들에게도 인정받고 있다는 뜻과 같았다.
태수는 계면쩍은 얼굴로 말했다.
“레지던트라서 다행입니다.”
“나도, 또 다른 닥터들도 마찬가지야. 언제든지 필요하면 전화해.”
“그럼 든든한 빽도 있겠다, 한국 돌아가서 막 질러 버릴까요?”
태수가 찡긋 거리자 닥터 제임스가 외려 반색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야. 잘되면 혁신이고, 안 되면 내가 데려가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한번 아주 제대로 질러 보겠습니다.”
“난 자네의 그런 화끈함이 참 마음에 들어.”
“그런 의미에서 한 잔.”
태수가 술을 권하자 닥터 제임스는 푸근한 미소를 띄우며 잔을 부딪쳤다.
쨍.
맑은 유리 음색이 울린 후 술로 가득한 잔이 단숨에 비워졌다.
태수가 다시 잔을 채우는 사이였다.
닥터 제임스가 손을 아래로 내리더니 곧 묵직한 가죽 뭉치를 테이블에 올렸다.
텅.
소리만 들어도 그리 가볍지 않은 느낌이다.
닥터 제임스는 그 가죽 뭉치를 태수를 향해 내밀며 말했다.
“펼쳐 봐.”
“이게 뭔데…….”
“펼쳐 보라니까.”
닥터 제임스의 독촉에 태수는 어쩔 수 없이 가죽 뭉치를 감싼 가죽끈을 풀었다.
가죽 뭉치는 돌돌 말려 있었는지 가로로 넓게 펼쳐졌다.
그 내용물을 확인한 태수의 눈이 순간 커졌다.
모스키토 클램프부터 소형 디버까지.
수술 도구 세트 일체였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건지 은빛 광택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수술 도구를 다뤄본 태수다.
이 수술 도구들이 결코 범상치 않다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이걸 왜…….”
“졸업선물이라고 할까? 얼마 전에 학회에서 받은 거야. 그런데 나한테는 30년 넘게 같이 한 친구들이 있어서 말이지. 어때 마음에 드나?”
“아니, 이건 마음에 들고 말고가 아닌 거 같습니다. 이걸 제가 어떻게 받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태수가 펄쩍 뛰었다.
하지만 닥터 제임스는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버려.”
“네?”
“난 필요가 없고, 자네는 쓰지 않겠다니까 버려야지.”
“그래도 그건 아닌 거 같습니다.”
태수의 얼떨떨한 얼굴을 본 닥터 제임스가 나지막이 물었다.
“왜 써전들이 자기 수술 도구가 있는지 아나?”
“어렴풋이는 압니다만.”
“그럼 정확하게 이야기해 주지. 내 손과 눈에 길들여진 수술 도구 아니, 친구들은 세상 그 어떤 어시스던트보다 훌륭한 보조가 된다네.”
“…….”
태수는 그 말에 부정하지 못했다.
실제로 카프레네도 전용 수술 도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전용 수술 도구는 카프레네의 전담 수술 간호사가 관리했다.
그것만큼은 절대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았다.
전해 듣기로는 카프레네의 수술 도구들은 그와 같이 무덤에 함께 묻혔다고 한다.
평생의 동료.
그건 같은 의사도 아니고 간호사도 아니었다.
물론 그들로 인해 집도를 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는 건 사실이지만, 정말 자기의 손과 같이 움직여주는 건 길들여진 수술 도구들이다.
카프레네와 함께 무덤으로 들어간 수술 도구들도 같은 이유였다.
카프레네가 태수에게 남겨 주지 않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건 카프레네의 수술 도구지, 태수의 수술 도구가 아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손에 길들여진 수술 도구는 정밀한 수술을 할 때 특히나 도움이 된다.
태수의 시선은 어느새 반짝반짝 윤이 나는 은색 수술 도구들로 향해 있었다.
이런 명품에 소유욕이 없다?
그건 누구라도 콧방귀를 뀔 거짓말이다.
특히나 의사들에게 보여준다면 천금이라도 주고서 가져 가고 싶어 할 거 같았다.
물욕이 없다고 생각한 태수도 그럴진대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눈을 떼지 못하는 태수의 귀에 다시 한 번 닥터 제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왼손에 메젠바움, 오른손에 엘리스.”
나지막한 목소리.
정신을 집중했어도 아차 하면 듣지 못할지도 모를 자그마한 목소리다.
하지만 태수는 의식을 넘어서 본능적으로 두 가지 수술 도구를 손에 쥐었다.
순간 태수가 자신의 멈칫했다.
“아, 이게.”
“그동안 다그친 보람이 있네. 자, 손에 쥔 느낌이 어떤가?”
“……따뜻합니다.”
태수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차가운 수술 도구가 따뜻하다라. 자네에게 맞는 거 같은데.”
“그런데 여기.”
태수가 눈짓으로 수술 도구의 손잡이 부분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뚜렷하게 음각으로 ‘DR. J’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 스펠링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깊었다.
닥터 제임스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 준다고 내 이름을 새겨놓았더군. 내가 선물한 거니까 누가 뭐라고 하면 데려와. 그리고 그 수술 도구들은 독일 장인이 하나하나 피땀 흘려 만든 거라니까 쉽게 무뎌지진 않을 거야.”
“정말 주시는 겁니까?”
“그럼 지금까지 놀리는 걸로 보였나?”
“받아도 됩니까?”
태수의 눈빛이 어느새 초롱초롱해졌다.
이젠 거부하기도 싫었다.
손에 착 감기는 느낌.
마치 자신의 손이 수술 도구로 변한 착각까지도 불러일으켰다.
이건 태수도 욕심이 났다.
오히려 그 눈빛에 닥터 제임스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태수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미소도 지을 줄 아는군.”
“이런 선물을 받고도 덤덤하면 그게 이상한 놈이죠.”
“그건 또 그래.”
“하하. 제가 한 잔 아니, 계속 따르겠습니다.”
태수는 얼른 수술 도구들을 갈무리한 후 빈 닥터 제임스의 잔을 채웠다.
오른손은 술병을 들었지만 왼손은 가죽 뭉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태수의 마음에 쏙 드는 수술 도구다.
한국에 돌아가면 하나 장만할까 했던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친 뒤였다.
“자, 우리도 이제 마지막 잔을 채워볼까?”
“네. 잠시만요.”
태수가 술병을 들려고 하자 닥터 제임스가 한 발 빨랐다.
“이번에는 내가 채우지.”
“그래도.”
“내가 한데도.”
닥터 제임스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태수가 멈칫했다.
그 사이 닥터 제임스는 자신과 태수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탁.
정민수의 자리에 있던 스트레이트 잔을 가져와 자신의 옆에 놓고 술잔을 채웠다.
그 순간 태수는 닥터 제임스의 행동을 이해했다.
마지막 세 번째 잔.
주인이 없는 잔이 결코 아니었다.
이런 좋은 자리에 꼭 함께 하고 싶은 사람.
두 사람이 서로를 볼 때마다 항상 마음속으로 떠올리는 사람.
바로 카프레네를 위한 잔이었다.
조금은 들떠 있던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건 순식간이었다.
그런데 외려 닥터 제임스는 잔을 들며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 마지막 잔 들지.”
“네.”
태수는 천천히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 사이 닥터 제임스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카프레네를 위한 잔을 한 번 내려다보고, 앞에 앉은 태수를 또 한 번 바라봤다.
피식.
왠지 모를 부러움.
그 때문이었을까?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가득 머금은 닥터 제임스가 마지막 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단 한 번도 자네를 부러워 한 적이 없어. 닥터 최를 만나기 전까지 말이야.’
그리고 예전에 부탁을 받았던 그 이야기.
반지를 가진 의사를 모른 척하지 말라고 했던 그 부탁.
‘이 정도면 만족한가?’
속으로 물으며 닥터 제임스는 카프레네를 위한 잔에 자신의 빈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땡.
맑은소리.
어쩌면 카프레네의 대답일지도 몰랐다.
***
이튿날 오전.
숙취에 정신이 없을 줄 알았던 태수와 정민수는 뉴델리 공항을 나서는 길이었다.
닥터 제임스의 출국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길이다.
정민수는 숙취로 꺼멓게 죽은 얼굴로 투덜거렸다.
“노인네. 술은 진짜 말술이야.”
“그러게.”
짧은 대화였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두 친구의 모습이 똑같았다.
택시 정류장 쪽으로 향하던 태수는 문득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태수는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었기에 정민수에게 물었다.
“혁권 씨에게 전화해야겠지?”
“만나긴 만나야 되는데.”
“해장에 좋은 데로 안내해 달라고 하지 뭐.”
“그거 좋은 생각인데?”
정민수가 반색하자 태수도 미소 띤 얼굴로 휴대폰을 들었다.
곧 김혁권의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도착했어요? 혹시 베이스캠프에서 수술 잡아놓고 안 보내 줍디까?”
“닥터 제임스와 어제 한잔했거든요.”
“그 양반이랑? 그 술고래 양반이랑 마셨으니 뭐 늦게 전화할 만하네.”
그래도 썩 곱지 않은 목소리에 태수가 물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별로. 나야 집에서 뒹구는 입장인데. 그보다 어딥니까?”
“공항입니다.”
“거기 있어요. 내가 갈 테니까.”
김혁권은 언제나 같이 화끈하게 말하고는 통화를 종료했다.
태수는 잠시 휴대폰을 바라보다 정민수에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야 할 거 같은데.”
“그럼 들어가 있자. 여기 뭐 볼 것도 없는데.”
“그러자고.”
태수도 그 의견에 동감하는지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 정도 지난 후에야 김혁권이 공항에 도착했다.
낡은 자동차를 몰고 왔지만 태수와 정민수는 대중교통이 아닌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여기까지 와 주시고, 감사합니다.”
태수의 인사에 김혁권은 운전하며 대답했다.
“감사는 무슨, 그보다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출국할 때까지 쉴까 합니다.”
“그럼 관광은 나중에 하고 일단 우리 한잔 꺾고 시작할까요?”
김혁권의 말이 끝남과 동시였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태수와 정민수가 동시에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으욱.”
술은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 사정을 모르는 김혁권은 룸미러로 뒤를 힐끔거리며 투덜거렸다.
“반응이 왜 이래?”
“술보다 해장부터요. 어제 무지하게 달렸습니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태수와 정민수가 질린 얼굴로 대답하자 김혁권이 입가에 작은 미소를 그렸다.
“그 노인네는 분명히 술내기로 자격증 딴 걸 거야. 아니면 사람이 그렇게 마실 수 있나.”
“그럴지도 모르죠.”
“그럼 일단 해장부터 하러 갑시다. 술은 나중에 마시고 관광부터 해 보자고, 두 사람 다 인도 구경은 처음이죠?”
“네.”
“그럼 가이드 아주 잘 구하신 거야. 게다가 공짜 가이드잖아. 내가 아주 제대로 관광시켜 드릴게.”
부아앙!
김혁권은 신이 난 얼굴로 차를 몰아갔다.
그러나 기분을 내는 거 치고는 자동차 출력이 좋지 않아 그리 빨리 달리진 못했다.
태수와 정민수는 사흘 동안 말 그대로 먹고 놀았다.
낮에는 김혁권의 안내로 관광을 하고 저녁에는 가볍게 술도 한잔 마시면서 카슈미르에서 못다 나눴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기도 했다.
그렇게 술을 마시며 곁들였던 안주는 대부분 고칼로리였다.
김혁권이 비쩍 마른 두 사람이 안쓰럽다며 계속 열량 높은 음식만 권한 탓이다.
덕분에 두 사람의 얼굴은 빠르게 원상복귀 되어 갔다.
3일 만에 어느 정도 보기 좋은 정도로 변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 어느새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뉴델리 공항까지 배웅을 나온 김혁권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거 진짜 아쉬워서 어떻게 하나.”
“한국 한 번 들어오시라니까요.”
“그거야 천천히 하자고요.”
김혁권은 아직도 한국으로 들어오는 걸 꺼려 했다.
혼혈만이 느껴본 시선이 너무도 큰 상처인 모양이다. 그나마 태수가 물어서 이 정도 대답에서 그치는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