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943
00946 946화
안정적인 수치를 봐서 그런지 긴장된 표정이 조금 부드럽게 변했다.
태수는 그런 이선정 간호사에게 간이 의자를 권했다.
“잠깐 앉아서 쉬세요.”
“집도하신 선생님이 먼저 쉬셔야죠.”
“이 정도는 끄떡없습니다. 앉으시라니까요.”
태수는 이선정 간호사를 반강제적으로 간이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 난 후 자그마한 병실엔 침묵이 감돌았다.
태수와 박성민, 이선정 간호사의 시선은 윤사라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가끔 ECG나 의료기계의 수치를 확인할 뿐, 아직 긴장이 덜 풀린 얼굴로 윤사라가 깨어나기만 손꼽아 기다렸다.
한편, 중환자실 밖에 있는 기다란 나무벤치에 한 사람이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깔끔한 옷차림이었고, 옆에는 카메라가 놓여 있었다.
그 남자는 다름아닌 김성국 기자였다. 모든 기자들이 기자회견장으로 몰려났지만 그는 미리 태수와 이야기가 되어서인지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런 김성국 기자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계속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뿐만 아니라 유리문 열리는 소리가 나면 번뜩 고개를 들어 누가 나오는지도 바로바로 살폈다.
김성국 기자는 윤사라의 수술이 성공했을 거란 걸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걱정이 되는 건 역시 온전한 정신으로 깨어나느냐 하는 문제였다.
아무리 수술이 성공적이었다고 해도 정신적인 문제가 발견된다면 그건 실패한 게 되어 버린다.
윤사라가 무사히 깨어나야 자신이 계획한 다음 일이 제대로 진행될 터였다.
“최 선생 명예와 윤사라의 인생이 달린 문제니.”
그래서 더욱 초조함을 숨길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계속 안절부절못하던 김성국 기자가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였다.
곧 꺼내 든 건 달마도였다. 아주 도력 높은 스님에게 어머니가 어렵게 받아 왔다고 태수에게 큰소리 떵떵 쳤던 바로 그 달마도다.
그걸 쉼 없이 문지르며 김성국 기자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거라도 줄 걸 그랬나. 젠장. 5천 원짜리한테 뭘 더 바래.”
스스로 실토했지만 정작 김성국 기자는 그 달마도를 계속 매만지며 마음속으로 빌고 있었다.
한편, 윤사라를 지켜보고 있는 태수와 박성민, 이선정 간호사는 뿌리를 내린 듯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되면 차트를 작성할 뿐, 그 외에는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변화한 거라고는 신경외과에서 찾아와 윤사라의 머리에 뇌파 측정 기계를 설치한 일 뿐이다.
“뇌파상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
신경외과 전문의의 말이 긴장된 마음에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었다.
그 외에 수시로 김인호가 들락거리고, 서영우도 걱정되어 한 번 더 찾아오는 등 의료진들이 자주 오갔다.
병실에 들어오는 건 몇 명 되지 않았고, 대부분은 유리문 밖에서 안을 힐끔거리고는 물러가는 정도였다.
혹시 모를 후유증을 대비하기 위한 나름의 배려였다.
태수 입장에서는 모두가 관심을 가져 주는 게 정말 고마웠다. 이런 고마움을 윤사라도 같이 느꼈으면 하는 바람도 커져 갔다.
그렇게 초조한 시간이 지나던 중이었다.
빠르게 손목시계와 ECG를 번갈아 바라보던 박성민이 울컥했다.
“2시간 후면 깨어난다며. 벌써 3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안 깨어나는 건데.”
“…….”
“서 선생, 돌팔이 의사 같으니라고. 안 되겠어. 얼른 전화해서…….”
박성민이 부산한 손길로 휴대폰을 꺼낼 때였다.
“돌팔이 왔어요.”
그 소리에 박성민이 놀라 바라보자 서영우가 살짝 인상을 구기며 들어오고 있었다. 박성민은 잠시전에 험담했다는 사실도 개의치 않고 득달같이 다그쳤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아직도 안 일어나는 거냐고요.”
“깨어날 때가 되긴 했는데.”
“그건 수술 직후에도 이야기했고, 아까도 이야기한 거 아닙니까. 마취 분야 전문가가 하는 말이 왜 틀리냔 겁니다.”
박성민은 억눌린 목소리로 들들 볶았다.
아무리 갑갑해도 여기는 중환자실이고, 서영우도 존경받아 마땅한 의사인 탓이다. 그래서 다그치되 정도를 넘진 않았다.
서영우는 그런 박성민의 마음을 이해하는지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길어야 5분 안에는 깨어날 겁니다.”
“아까랑 이야기가 다르잖아요.”
“어떤 마취의라도 1분 1초까지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의사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박 선생도 잘 알잖아요.”
톡 쏘는 말투.
똑같이 마취를 하더라도 환자 상태에 따라서 깨어나는 시간이 다르다는 걸 일컫는 말이었다.
박성민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이렇게 다그치기만 할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는지 약간 풀이 죽은 얼굴로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내가 지금 마음이 좀 급하네요.”
“알아요. 아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시라고.”
“그래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박성민의 시선은 다시 윤사라의 얼굴로 향했다.
그사이 서영우는 태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최 선생은 괜찮아?”
“괜찮습니다. 꼭 깨어날 거니까요. 좀 늦어져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래. 그나저나 둘이 나이를 바꾼 것도 아니고.”
서영우는 닦달하는 박성민과 정반대로 너무도 침착한 태수를 비교했다.
그러는 사이 태수가 물었다.
“밖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기자회견실은 아주 난리 난 거 같아. 기자들이 슬슬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는 모양이야.”
“말이 많아지겠네요.”
“성공 소식을 전하면 쑥 사라지겠지. 그 외에 다른 의료진들은 각자 환자들 돌보는 중이야.”
서영우의 말에 태수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상황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신속대응센터의 업무를 중단할 순 없었다. 그건 태수도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대화 소리는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서영우가 말한 5분이 거의 다 되어 갈 무렵이다. 윤사라를 지켜보던 박성민이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어? 사라야, 윤사라.”
갑자기 박성민이 윤사라를 부르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태수도 윤사라의 얼굴을 확인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켜보는 사람들의 속이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르고 너무도 평온하기만 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모습이었다.
“으음.”
인공호흡기 옆으로 신음 소리도 가늘게 새어 나왔다.
마취가 풀려 깨어나고 있다는 의미다.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는 병상에 바짝 다가갔다. 서영우는 그 틈바구니에 끼어들 자신이 없는지 반대로 한 발자국 물러난 상태였다.
먼저 발견한 박성민의 목소리가 다시 중환자실을 울렸다.
“사라야, 내 말 들려?”
“선배.”
“아, 왜?”
“쉿. 지금은 지켜봐야 합니다.”
태수가 낮게 충고하자 박성민의 눈빛이 약간 흔들리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태수의 말이 옳았다. 마취에서 이제 막 깨어나는 중이다. 그 전에는 장시간 잠들어 있었다.
잠깐 깨어났었다고 해도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또 달랐다.
게다가 서둘러 부른다고 환자 입장에서 보면 정신이 번쩍 차려지지 않는다.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정신이 돌아올뿐이다.
“…….”
“…….”
병실은 이내 쥐 죽은 듯이 고요하게 변했다. 그러나 모두 윤사라에 대한 시선을 단 한순간도 돌리지 않고 똑똑히 지켜봤다.
윤사라는 마취와 수면의 후유증이 좀 있는지 쉽게 정신을 차리진 못했다.
하지만 서서히 실눈을 뜨고 손가락을 꿈틀거리는 등 깨어나고 있다는 걸 모두에게 확실히 보여 줬다.
이내 눈이 반쯤 떠졌지만 약간 초점이 흐릿한 눈빛이다.
태수는 재빨리 플래시를 들어 양쪽 눈을 번갈아 비춰 봤다.
동공은 한 박자 늦게 수축되었다가 확대되었다. 좌우로 움직이는 빛을 무의식중에 따르는 속도도 조금 더뎠다.
그러나 착실하게 따라왔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반응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점점 의식이 또렷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태수는 거기까지만 확인하고 플래시를 치우며 말했다.
“선배, 신경외과.”
“오케이.”
삐익!
박성민은 얼른 간호사실 호출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저 뒤에 있는 간호사실이 들썩이더니 김인호와 신경외과 전문의가 빠르게 안으로 들어왔다.
“깨어…….”
“쉿.”
박성민은 태수에게 지적받은 그대로 의사들에게 행동했다.
그 의미를 아는지 김인호와 신경외과 전문의가 시선을 마주치고는 빠르게 좌우로 흩어졌다.
서영우도 어느새 IV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analeptic(각성제) 소량 투여할게. 깨어나는 데 좀 더 도움이 될 거야.”
“뇌파는 이상 없어. 확실히 깨어나는 중이야.”
“오래 잠들어 있어서 시간이 더딘 거 같아.”
각각 전문분야에 맞는 진단 결과를 바로 알려 줬다.
그사이 태수와 박성민도 지켜만 보고 있진 않았다. ECG(심전도 모니터)와 별도로 청진기를 착용하고 복부와 흉부를 살폈다.
박성민이 먼저 말했다.
“심장 소리…… 좋고, 호흡도 나쁘지 않아.”
“복부는 먹은 게 없어서 그렇지, 각 장기의 소리가 좋은 편입니다.”
“그럼 이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야?”
“곧이겠죠.”
태수는 그렇게 확신했고, 박성민과 이선정 간호사, 그리고 다른 의사들도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든 시간이 길었던 만큼 깨어나는 시간도 길었다.
그래도 모든 일에는 결과가 나타나는 법이었다.
흐릿하던 윤사라의 눈동자가 어느 정도 또렷해졌고, 눈을 깜빡거리기도 했다. 손가락, 발가락을 꿈틀거리는 움직임도 더욱 커졌다.
그 모습을 다들 긴장된 얼굴로 내려다본 사이였다.
윤사라의 갈 곳을 잃은 눈동자가 스르륵 옆으로 움직이더니 태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저 느낌이 아니다. 정확하게 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성민도 그 시선을 따라가 보더니 태수를 얼른 팔꿈치로 지분거리며 말했다.
“야, 너 보잖아. 뭐라고 이야기 좀 해 봐, 인마.”
태수는 그 소리가 귀에서 귀로 쏙 빠져나갔다. 그저 시선을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했다.
그러나 박성민의 말대로 지금쯤은 뭐라고 말을 건네야 할 때였다.
태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윤사라에게 물었다.
“사라야,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
인공호흡기 때문에 대답은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행동이라도 보여 의사 표현을 해야 했다.
그런데 바로 반응이 오지 않았다.
혹시 못 알아보는 건 아닐까?
덜컥.
태수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몇 번이나 검사하고 신경외과 전문의까지 대동한 상태였다.
그래도 만약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다면…….
태수는 스스로 몹쓸 생각이라고 자책하면서도 만의 하나란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그런 생각을 더 이상 이어 가고 싶지 않았다. 만의 하나라도 그런 말도 안 되는 확률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의사란 그 희박한 확률도 생각해야 했다. 그래야 그 이후의 일을 준비하고 치료 방법을 바꿀 수 있었다.
그때였다.
윤사라의 고개가 천천히, 아주 미미할 정도로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걸 본 순간 태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알아본다고?
진짜 자신을 알아보고 있다고?
머릿속에 그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때였다.
턱.
태수를 밀어낸 박성민이 자신을 격하게 가리키며 윤사라에게 물었다.
“사라야, 아니 마드무아젤, 이 운전기사는 생각나? 해변을 따라 자유를 만끽하며 달려갔던 그 행복한 순간을 함께한 게 기억나냐고.”
“박 선생님, 그렇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요. 좀 비켜 봐요.”
툭.
박성민을 밀어낸 이선정 간호사가 윤사라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걱정 가득한 얼굴에 억지 미소를 그린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언니 기억해?”
“이모.”
박성민이 그 순간 끼어들며 말하자 이선정 간호사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아, 진짜. 선생님.”
“…….”
박성민은 어깨를 움츠리며 윤사라만 바라봤다. 이선정 간호사도 이 중요한 순간에 더 따지고 싶지 않았는지 다시 윤사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기억나?”
끄덕.
윤사라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한다는 그 표현에 이선정 간호사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때 신경외과 전문의가 한 소리 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수도 있어.”
“…….”
“확실하게 기억하는지 확인하려면 직접 말을 들어 봐야 하는데…….”
신경외과 전문의의 시선이 김인호에게 향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김인호가 뒷말을 이었다.
“말을 하는 건 이상이 없을 겁니다. 문제는 자가 호흡이 가능한지 전 확신이 없다는 겁니다. 박 선생님.”
“잠시만요. 아주 잠깐만 기다려 봐요.”
박성민은 할 일이 주어지자 번개같이 움직였다.
한 번 확인한 심장과 폐를 또다시 꼼꼼하게 점검을 마치고 ECG의 수치도 면밀히 관찰한 박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치나 반응상으로 spontaneous respiration(자가호흡) 가능성은 높은 편이야. 1차 수술 중에 발생했다던 기흉도 지금은 흔적도 없어.”
“그럼 자가호흡으로 전환합니다.”
태수가 말하자 서영우와 박성민이 같이 움직였다.
호흡기를 떼는 역할은 태수가 담당했다. 서로 눈짓으로 타이밍을 잡은 후 서서히 자가호흡으로 전환했다.
“전환됐어.”
“뗍니다.”
태수가 윤사라의 입에서 인공호흡기를 들어 올렸다.
“후우.”
동시에 윤사라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숨소리에 태수와 의료진도 같이 숨을 내뱉었다.
“하아.”
“됐어. 자, 그럼 사라 양, 이제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내 보아요. 급하게 하지 않아도 돼. 아주 천천히. 자연스럽게. 마치 조금 전에도 말을 했다는 듯이 천천히.”
박성민의 말이 유독 많아졌다. 긴장할 때 나오는 특유의 버릇이었다.
물론 그걸 탓하는 의료진은 없었다. 지금은 박성민처럼 떠들어 줄 의사가 필요한 탓이다.
태수는 박성민과 달리 윤사라의 손을 꼭 쥐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천천히 대답해도 돼. 약속한 대로 이렇게 다시 서로를 보고 있잖아.”
“…….”
태수의 말을 듣는 순간 윤사라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리고 코끝부터 빠르게 뻘겋게 변해 갔다. 코를 물들인 홍조는 눈까지 연결되었는지 어느새 눈이 충혈 되었다.
이어서 눈에 자그마한 이슬 같은 게 맺혔다.
마지막으로 윤사라의 입이 열리더니 꽉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 생님.”
“그래, 사라야, 내 이름도 기억해?”
“최…… 태…… 수.”
어렵게 한 글자씩 이야기한 윤사라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단지 이름만 들었지만 태수 입가에 정말 뿌듯한 미소가 그려졌다.
됐다.
그제야 응어리졌던 가슴 한편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