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02
3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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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학당의 봉서는 싸움이 끝난 다음 날 저녁 남의 눈을 피해 전달되었다. 북쪽 반민 거리에 부상당한 사람들의 진료를 다녀오던 사예 아버지를 통해서였다.
봉서에는 서명도 무엇도 없고 글귀 한 줄과 위치 표시가 된 지도 한 장뿐이었다. 표시된 장소에서 만나자는 뜻이리라 짐작되었다.
시현은 서둘러 귀수관의 일을 정리하고 하채원 인을 만나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귀수관 상황에서는 시현의 일이 늘면 늘었지 돌 인간 탐색에 큰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반면 지은학당 쪽은 대릉읍 참석을 가져간 지 꽤 시일이 흐른 만큼 탐색에 진전을 기대할 만했다.
물론 귀수관 사람들은 시현이 서격원도 열어주지 않고 떠나려 하자 온갖 핑계를 대며 그를 붙잡으려 들었다. 시현은 사람들의 애걸복걸을 한참 듣고 있다가 한마디만 했다.
“그대들이 나를 이대로 붙들어 놓아도 정말 괜찮겠는가? 류씨 사인이 금주령 해제를 하기 위해 귀수관 총치총령이 되겠다고 하면 어쩌려고 한없이 그러는가.”
일행은 바로 다음 날 귀수관을 나올 수 있었다. 변란 중에 행사와 예식을 금하는 법도 덕택에 송별례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귀수관 사람들의 법도 집착엔 최소한 일관성은 있었다.
비 갠 아침, 성벽 축조 준비에 한창인 귀수관 북문 자리를 수레 두 대가 빠져나왔다.
전투로 쑥대밭이 된 위에 장대비로 땅이 질어져 지면이 온통 거칠었지만, 단이 산지를 다니기 위해 새로 장만한 수레는 많이 흔들리지 않고 잘 달렸다.
귀수관이 멀어지자 도로 사정도 나아졌다. 일행은 한나절이 지나기 전에 지도에 표시된 장소에 다다랐다.
“표시된 위치는 정확하게 여기가 맞습니다만….”
야트막한 고개 아래 수레를 세운 단이 지도를 펴들고 말했다.
마을이 지척인 장소였다. 고갯길이 잘 닦여 있고 내가 흘러 고개 아래 샘과 연결되었다. 등 뒤는 거친 황야였지만 샘 주위엔 풀이 돋았고 고개 위에는 비교적 나무가 우거졌다.
하지만 정작 표시가 있는 곳에는 넓은 공터뿐 아무것도 없었다.
단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 거 되게 몸 사리는 친구들이네요. 남이 생고생할 때 코빼기도 안 비친 것도 모자라서 이젠 숨은 걸 찾아가기까지 해야 해?”
“어쩔 수 없지 않으냐. 그이들은 모두 관에 수배 중이라니.”
“하지만 그 하씨 채인이란 사람은 극상격 아닙니까? 극상격은 웬만한 짓을 해도 죄 같은 거 안 받… 아 맞다.”
단은 근처를 어정어정 돌아다니는 죄 받은 극상격을 곁눈질하고 말을 멈췄다.
사예가 고개 위쪽 노송이 몇 그루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냥 시문 좋아하라고 여기로 부른 거 아냐? 저기가 수약재 자리잖아.”
“정말인가?”
시현이 눈을 빛냈다. 수약재는 류해선 인이 생전에 사람을 만나지 않고 저술에 집중하고 싶을 때 머물던 암자였다.
사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엉. 근데 어차피 올라가도 뭐 없을걸. 옛날에 무너지고 근처 마을도 위치를 옮겨서….”
“저기 위에서 누가 오는데요. 아! 채인 님이다.”
고개 위쪽을 바라보던 호란이 말했다. 흰바위마을에서 만났던 하채원이 남여에 올라 고개를 내려오고 있었다. 남여를 진 하늘인 남자 두 사람도 눈에 익었다. 흰바위마을 관아에서 은실과 함께 호란과 맞붙었던 이들이었다.
하늘인이 진 남여는 성큼성큼 가까워져 순식간에 고개 아래에 도착했다. 일행과 몇 장 떨어진 곳에서 가마를 내린 채원이 흰색과 먹색 장포를 펄럭이며 달려왔다.
시현 앞에 도착한 채원이 허리를 꺾어지도록 숙이며 인사했다.
“첫비 같은 자비시여! 불초 하채원이 위 없는 이를 뵙습니다.”
“고개를 들라. 다시 보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군. 그대와 일행 모두 무탈하였는가.”
“예. 문께서 너그러움을 베푸신 덕택에.”
그가 허리를 펴고 말했다.
“감히 가마에 올라 무상 앞에 나타난 참람됨을 용서하소서. 제가 본디 걷기를 싫어… 아니, 걸음이 느려, 무상을 기다리게 할까 서두르느라 그리하였습니다.”
“…괘념치 않는다.”
시현은 대답하다가 기시감을 느꼈다. 류해선의 혈맥을 이은 사람이 준 충격과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류해선의 학맥을 이은 사람 역시 시현의 생각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런데 고개를 든 학맥의 계승자가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시선은 시현의 뒤쪽에 있는 혈맥의 계승자에게 가 있었다.
채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인이 아니십니까. 대체 어쩌다가 사인 같은 분이 무상과 함께.”
그 자리의 모두가 채원과 사예가 아는 사이라는 것, 그리고 좋게 아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채원의 목소리는 억지로 내는 것처럼 딱딱하고 눈은 욕을 하고 있었다.
반면 사예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엉,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 안녕?”
“통탄할 일입니다. 세상에 도리대로 돌아가는 일이 단 한 가지가 없군요. 제가 이제부터 문을 수약재로 모시려 하는데, 사인께서는 오지 말아주시겠습니까?”
사예가 머리를 긁적였다.
“채의 너 아직도 나한테 삐져 있구나.”
“이제는 채인입니다.”
“어 그랬지. 근데 어차피 너 폐격당하지 않았어?”
“설마요. 사인과 같은 취급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니, 소문으론 너 따라다니던 애들 여럿 폐격됐다길래, 너도 됐을 줄.”
늘상 유들유들하던 채원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내렸다. 그가 책을 읽는 것 같은 말투로 다시 말했다.
“사인께서는, 수약재에, 오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엉 뭐 그래. 난 여기 있을게 갔다 와.”
사예가 마음 쓰지 않는 얼굴로 손을 쓱쓱 저었다. 사예 몫까지 두 배로 마음 쓰는 얼굴이 된 시현이 물었다.
“그대들의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두 사람 다 귀수관의 의법사이니 오래 알고 지냈을 텐데.”
“과연 영명하신 문께서는 이미 답을 알고 계시는군요. 사인 같은 분과 오래 알고 지내야 하는 것 자체가 삶이 사람에게 내리는 난문 아니겠습니까?”
시현은 어쩐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채원이 고개 쪽으로 안내하듯 팔을 펼쳤다.
“가시지요. 변고 후 저희가 수약재를 복원하여 새로 지었습니다. 자리에 모시고 다시 배례를 올리겠습니다.”
“알겠다.”
시현은 수레 곁에 남는 사예와 길에게 눈인사를 하고 채원을 따라 발걸음을 뗐다. 단과 호란도 그 뒤를 따르려 했다.
하지만 단은 두 걸음도 못 걷고 사예에게 두루마기 뒤쪽을 덥석 잡혔다.
“어딜 가, 밥 만들어 줘! 이 양심 없는 놈, 너 나랑 만나고 지금까지 니 손으로 밥이고 간식이고 한 끼도 안 했잖아!”
“아니 사예 님, 아직 밥때도 아닌데….”
“나는 괜찮으니 여기 있거라.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니 다들 먼저 식사라도 하고 있거라.”
시현은 단을 놓아두고 호란과 함께 언덕을 올랐다. 호란이 고개 아래를 몇 번 돌아보는 것을 보고 시현이 물었다.
“너도 아래에 있고 싶으냐? 가도 괜찮다.”
“네? 아… 아니에요.”
사양은 했지만 호란이 결정을 고민한 것을 느끼고 시현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고개 위 노송 사이에 숨은 듯 자리 잡은 작은 암자에 이르자 다른 생각이 머리에서 사라졌다.
옛 건축을 기록 그대로 재현한 고아한 목조 암자, 멋스러운 파초체가 흐드러진 수약재의 현판도 마음을 끌 만했다.
하지만 시현의 시선이 붙잡힌 곳은 류해선의 거처를 복원한 암자가 아니었다. 뜨락 한쪽에 돌바닥이 있고 그 가운데에 원형의 마력회로 석판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채원이 말했다.
“수약재 터에서 발굴된 것입니다. 삭은 천에 싸여 온전한 상태로 나온 것이, 사고로 파묻힌 것이 아니라 선대의 누군가가 일부러 숨긴 듯하더군요. 암자를 복원하면서 이 물건 역시 기록에 있는 대로 배치했습니다.”
“이 마력회로는 어떤 기능을 하는가.”
시현이 심각하게 물었다. 채원이 답했다.
“저희가 간이 너무 쪼그매서 작동을 해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기물의 구조를 분석하고 남은 기록으로 유추한바, 저희는 조사께서 이 물건을 사용하여 돌 인간과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
시현은 발아래의 물체를 내려다보았다.
석질의 둥근 판 위에 자리 잡은 복잡한 회로는 깨지거나 벗겨진 곳 하나 없이 멀쩡했으나 세월이 내려앉은 티가 여실했다. 원래의 색을 알 수 없게 변색된 금속 선과 석판의 마모된 표면은 지나간 백 수십여 년의 세월을 실감하게 했다.
중시조들과 돌 인간들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운모나 감람에게서 몇 번이나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실질적인 증거를 눈으로 보는 것은 또 마음이 달랐다.
“그렇군. 정말로 선현께서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계셨군.”
시현의 혼잣말에서 씁쓸함을 읽어낸 채원이 말했다.
“문께서 오해하고 계십니다. 중시조들께서 후대에 경고를 남기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특히 조사께선 다양한 방법으로 말과 증거를 남겨 후일에 대비하려 하셨습니다.”
“하면 어째서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 채 변고를 맞게 되었는가?”
“불행히도 그 모든 염려와 안배들이 중간에 대부분 멸실되었기 때문이지요. 아니 사람의 손에 멸실당했다 해야 할까요.”
채원이 두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 한 저희가 관에 쫓기는 몸이 된 것이 어째서이겠습니까? 다천관 중시조 홍씨 가문이 무엇을 하려다 정변으로 멸족을 당했겠습니까? 길다면 긴 200년 동안 사실을 알아내고 세상에 알리려 한 이들은 끊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다만 항상 덮으려 하는 사람이 더 많았던 것뿐이지요. 그때마다 많은 기록과 증거가 불살라졌고요.”
“과연. 짐작한다.”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얼굴의 씁쓸함은 더 깊어졌을 뿐이었다.
채원이 살짝 웃고 암자를 가리켰다.
“안에 드시지요. 말이 나온 김에 제 한탄이라도 들어주시겠습니까. 이야기가 길어질 듯합니다.”
시현과 호란은 채원을 따라 암자의 툇마루에 올랐다. 채원의 하늘인 근시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방문을 열어주었다.
방 안을 본 순간 시현의 눈이 화등잔보다 더 커졌다. 크지 않은 방이 창문 두 쪽 자리만 남기고 책으로 꽉 차 있었다. 벽마다 선 책장이 터져나갈 것 같았고 서안과 보료 주위에도 위태할 정도로 높은 책더미가 쌓여 있었다.
보료 앞의 큰 서안과 그 옆 손때 탄 문방구가 놓인 서탁을 제외하고는 책이 놓이지 않은 곳이 없는 것 같았다.
“조사의 저서와 일지, 읽으셨다 기록 남기신 책을 모조리 모았더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사본입니다만. 아, 하지만 저 서탁의 벼루와 연적은 조사께서 직접 사용하셨던 물건입니다.”
채원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문간에 선 남자 근시가 고개를 설레설레하며 말했다.
“채 도련님, 왜 중요한 거 다 있는 연구소 놔두고 무상을 이곳으로 모시자고 벅벅 우기시나 했더니… 역시 수집품 자랑하고 싶으셨던 거죠?”
“무슨 소리냐, 전언판을 보여드리려 모신 것이다. 그리고 연구소는 훨씬 북쪽인데 마땅히 우리가 내려와 마중해야 하지 않느냐.”
채원이 근엄하게 말했다.
시현은 완전히 정신 팔린 얼굴이 되어서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류해선 인의 일지라고? 그런 것이 남아 있었는가?”
“예. 일상 기록도 있지만 절반쯤은 발상을 저서로 묶으시기 전의 초고라고 할 수 있지요. 여기 놓아둔 것은 원본이 아니라 필사본이긴 합니다만.”
“볼 수 있는가?”
“물론입니다.”
“보시던 서책까지 있다고? 하지만 자주 인용하신 상완론 같은 것은 소실되지 않았는가?”
“저희가 발견해서 복원했습니다. 다만 완전히 복원된 것은 상편뿐이고….”
두 극상이 선 채로 이야기를 늘리기 시작하자 채원의 남자 근시가 노골적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채원이 소실된 고서는 복원했어도 주위 사람들의 극상에 대한 경외심은 소실시켜 놓고 복원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근시가 구박하고 싶었던 대상은 채원이었겠지만 시현이 대신 화들짝 놀랐다. 시현이 호란을 돌아보고 괜스레 변명했다.
“아, 물론 돌 인간에 관한 문제를 가장 우선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이것은 본론에 들어가기 전의 사담 같은 것이고, 류해선 인이 생전에 남긴 기록이나 행적이 돌 인간 일과 아예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고….”
“어… 아니에요 시문 님. 근데 저, 역시 아래 내려가 있어도 될까요?”
호란이 애매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시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