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570
소메이요시노 (9)
“오호, 그러니까 말을 줄이면, 또 다른 너를 잡기 위해 여기 왔다?”
“너무 줄였는데.”
사는데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친구만 한 게 없다.
베니스는 내 조그만 말 한마디에도 깜짝 놀라 하며, 기특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기적이고 극단적인 남자의 따분한 이야기인데, 마치 그것을 삶의 활력으로 삼겠다는 것마냥 행복해하고 있으니.
처음 봤을 때의 그 권태감은 이제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베니스는 여행의 새로움과 대화의 즐거움에 항상 어깨를 씰룩거렸고. 내가 입을 열기만 하면, 거리를 좁혀 귀를 기울여왔다.
“그런데 신기해. 씨를 뿌리는 게, 아이를 낳게 하려는 게 아니라 힘을 늘리기 위한 수단이었다니.”
“왜. 이제와서 생각이 바뀌었어? 우월한 수컷이니 뭐니 하던 거.”
“아니?”
“아님 말고.”
베니스는 킥킥대며 뒷목을 잡고, 뼈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뒤로 꺾었다.
시원한지 나지막이 흘리는 ‘앗’ 소리에 내 아랫도리가 잠시 움찔거렸다.
한동안 관계를 잦게 갖다보니 이런 조그만 자극에도 반응하게 됐다.
“그래, 딸아이를 살리려고, 딸아이와 멀어진 건가….”
“어.”
“외롭겠군.”
“처음엔 그랬는데. 이젠 뭐. 혼자 해먹으려고 만든 세력에, 사람도 많이 들어왔고.”
“그래도 약은 꾸준히 먹지 않나?”
“이건 그냥 달고 사는 병같은 거야.”
대화를 나누던 도중, 베니스의 걸음이 멎었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 한 재단을 향해 있었다.
다음 관문으로 가는 길.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걸어 드디어 도착했다.
“왕이 똑같은 왕을 쓰러뜨리기 위해. 정령의 힘을 키운다라.”
이마에 땀 한 방울을 닦아낸 베니스.
“그럼 난 대서사시의 동료?”
“아주 잠깐 출연하는 엑스트라지.”
내 부정에 베니스가 쯧 혀를 찼다.
“그럼~ 내가 할 말이 없는데. 음~”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는 척을 하더니, 손가락을 튕기는 베니스.
녀석은 이윽고 날 보며 웃었다.
“아님 말고다.”
*****
-다음 관문에 들어가자마자 나를 소환해라. 만약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늦어지면?
-음~ 울지 않을까? 이렇게 즐거운 여행을 그만둘 순 없거든.
[우우우웅!]귀에 일어나는 이명을 조금씩 잠재우니 어두운 신전이 눈 앞에 나타났다.
나는 입구에 서서 주위를 가볍게 한번 둘러보았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고. 벽에는 어떠한 마법 처리를 가했는지, 빼곡하게 룬이 쓰여 있었다.
‘일단, 베니스를 먼저 소환할까.’
자리에 서서 혼에 연결된 베니스를 부른다.
바닥에 앉아 손으로 가볍게 원을 그리자, 원형으로 이어진 마법진 위로 마력이 일어나며 베니스가 나타났다.
“…….”
눈을 껌뻑인 그녀가 자신의 두 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기억도 온전하고. 상태도 나쁘지 않아.”
나를 보더니 싱긋 웃는 베니스.
“네 경박한 얼굴도 똑같군.”
곧바로 손을 뻗어 내 팔에 팔짱을 끼더니, 주변을 한 번 기쁘게 둘러본다.
베니스는 ‘오~’ 감탄사를 내뱉었고. 팔짱낀 팔에 힘을 주며 내게 물었다.
“여긴 어디지?”
“내가 아냐.”
“밖에서 뭐 공략법 같은 거. 들은 적 없나?”
“아니?”
관문이 내주는 시련이 어려우면 얼마나 어렵겠냐.
다른 S급 던전을 돌아본 결과, 비교적 이곳에서 겪는 일들은 식은 죽을 떠먹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장 먼저 두 재단 사이에 있는 벽에 손을 얹었다.
-덜컥.
안쪽 보석이 들어가더니 스스스- 열리기 시작하는 문.
돌이 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방이 퍼즐처럼 움직였다.
우리가 방을 움직인다기보단, 방이 알아서 다음 방으로 안내해주는 느낌.
-덜컥.
“오호, 여기가 그 싸움터로군.”
“아는 게 있어?”
“엿들은 게 있어서.”
“그럼 진작에 말했어야지.”
베니스는 방의 건너편에 눈짓을 했다. 내 시선이 그녀를 따라가니, 저 앞에 검은 그림자가 이곳을 향해 마력을 뿜어댔다.
공격일까.
하며 손을 뻗는데, 상대에게서 뿜어진 마력이 도중에 바닥으로 처박히더니. 아래에서 토끼의 형태를 한 정령이 튀어나왔다.
“…이건?”
베니스는 내 물음에 답했다.
“첫 번째는 정령과 얼마나 친해질 수 있나. 두 번째는 정령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나. 그리고 세 번째는….”
지금까지 내가 헤쳐온 관문을 차례차례 읊더니, 신전 옆 벽에 어깨를 기대고 스스로 팔짱을 낀 그녀가 앞을 가리켰다.
“정령의 힘을 얼마나 끌어낼 수 있는가.”
“…그 말은 그러니까.”
“네가 첫 번째나 두 번째 관문에 계약한 정령을 소환해 싸우는 거지.”
나는 검은 그림자가 소환한 정령을 바라보았다.
거친 철갑옷을 입고, 자랑스런 뿔을 들이대며 전의를 불태우는 상대 토끼.
“네가 종속한 님프나, 아니면 다른 정령을 써도 좋다.”
“…흠.”
나는 베니스를 바라보았다.
기간제이긴 하지만, 여기 SSR등급 정령이 있는데. 굳이 내가 R이나 SR등급 정령을 쓸 필요가 있을까?
“뭐, 나?”
내 빤한 시선에 베니스는 눈을 껌뻑이더니, 기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림없어.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우둔한 생각을!”
“편히 좀 가자.”
“네 정령 감응이 늘었으니, 질 일은 없을 거고. 처음부터 나를 다루는 것보단, 다른 정령을 쓰는 게 훨씬 숙련도가 빨리 오를 거다.”
합당한 근거를 중심으로 내 투정에 반박하는 베니스.
내가 주인인 건지, 얘가 주인인 건지.
종속관계임을 생각하면 베니스가 하는 말은 정말로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 맞았다.
정령을 다루는 숙련도를 늘리려면, 여기서 다른 정령을 꺼내는 게 맞다는 거다.
‘…….’
나는 손을 가볍게 펼쳐 공중에 진을 그렸다.
[뀨!!]거대한 기상을 내뱉으며, 두 다리를 벌린 흑묘.
님프를 꼬시는 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한 토끼가 상대 토끼를 보곤 고개를 기울였다.
‘정령술사끼리 겨뤄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내 싸움에 정령술이 주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정령은 언제나 내 마법의 보조나, 공간 장악에 이용하곤 했다.
심지어 지성이 없는 정령을 다루는 건 거의 처음. 녹슬다라는 표현을 쓸 필요도 없는 초심자 그 자체다.
‘다만, 힘을 늘리는 법은 알지.’
정령 감응에 재능은 없어도, 내 체질은 정령과 찰떡이다.
-웅웅.
토끼의 연결선에 마기를 불어넣자, 흑묘의 털이 곤두서더니. 검붉은 마력이 철철 흘러나왔다.
[……!]두 다리를 세우더니, 쫑긋. 귀를 펴는 녀석. 토끼의 붉은 눈이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상대 정령술사, 검은 그림자도 나에게 맞서 정령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킥, 키익!”
파란색 마력옷을 뒤챈 갑옷토끼가 전의를 불태우며 땅을 채고 돌진했다.
-타다다닥!
토끼치곤 꽤나 잽싼 속도. 투구에 달린 뿔을 들이밀며, 금방이라도 우리 흑묘를 꿰뚫을 기세로 돌진했다.
“끽, 끼이익!”
흑묘는 달려오는 토끼를 내려다보며, 떡하니 석상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설마 상대의 속도에 압도되기라도 한 걸까. 내 미간이 좁혀지려던 순간, 토끼와 이어진 선에서 어떠한 감정이 느껴졌다.
여유.
포식자가 겁 먹은 피식자를 들여다보며 느끼는, 그런 우월감이 흑묘로부터 느껴진다.
‘아.’
흑묘는 마지막까지도 나를 돌아보며, 귀엽게 울었다.
[뀨.]-타닥!
“끼이익!”
토끼가 흑묘를 향해 발돋움을 하며 마지막 스퍼트를 밟았다.
나는 흑묘를 믿었고. 흑묘는 나를 믿었다. 흑묘의 몸이 갑자기 꺾이더니, 단 두 번의 스텝만으로 몸을 돌려 토끼의 뿔을 피해버렸다.
-쉬익!
레슬링처럼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돌려차기.
흑묘의 몸에서 피어나온 마력이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하늘을 향해 터져나왔다.
“키이익!!”
-파앙!
갑옷토끼가 입고 있던 갑옷이 반파되며 순식간에 벽으로 날아갔다.
흑묘는 쓰러트린 갑옷토끼에게 재빠르게 올라타더니.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용맹하게 울었다.
“낑… 끼이잉.”
[뀨우우웃!]날 봐라.
그리 말하는 흑묘의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고대 로마, 콜로세움에 등장한 검투사라도 되는 양. 쇼맨쉽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우리 흑묘.
“물이 올랐군.”
이를 보던 베니스가 기가 막혀했다. 내가 봐도 그렇다.
[뀻!]확실하게 끝낼 수 있는 순간. 흑묘는 자신의 하체를 내려 완전히 상대 토끼의 몸 위를 점했다.
저 머리를 두드리기만 하면 끝나는데.
“낑… 낑!”
[뀨우! 뀨!]끝나는데….
“어?”
“응?”
경기를 관람하던 세 명 모두가 의문을 표했다.
우리만이 아니라 저 검은 그림자조차도.
흑묘의 움직임이 정말로 약간 이상했다.
녀석은 전보다 조금 더 길어진 손으로 토끼의 머리를 붙잡더니, 아주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갑옷을 입은 토끼는 저항하지 못하고 흑묘에게 희롱당했으며, 시간이 좀 지나자 갑옷토끼의 저항은 완전히 풀려버렸다.
“주인을 닮았군.”
기가 막히긴 해도 내 상관은 아니지만, 상대는 어떨까.
까만 그림자를 바라보니 녀석은 잔뜩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손톱을 씹으며 날 애타게 바라보는 녀석.
뭔가 잘못된 것 같다며 내게 항의하는 듯한 사인이다.
그래도 신전이 멀쩡한 걸 보니, 이미 시작한 승부는 끝나지 않는다. 그런 룰이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낑, 끼잉! 낑!!”
[뀨!]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갑옷토끼를 억눌러, 주인에게 보이는 충성심을 절망으로 깎아내리는 흑묘.
갑옷토끼의 울음소리에 기분 좋음이 섞여들며, 까만 그림자와 토끼와의 연결선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파닥파닥!
대련장은 이미 그들만의 모텔이 된 지 오래.
상대방이 무릎을 꿇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로의 주인도 잊고 폭풍교미 중인 토끼들.
갑옷토끼를 범하는 흑묘의 우월감에 가득찬 앞니가 번들거렸다.
베니스는 상대방이 안쓰러운 듯 혀를 쯔쯔 찼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짚었다.
“우월한 수컷에 굴복했군, 저 남자는 토끼보다 못한 수컷이었나 봐.”
“입 열지 마. 미안해 죽겠으니까.”
두 토끼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 정령들은 역소환이 되었고. 절망한 상대방이 녹아들 듯 사라졌다.
신전이 다시 우리를 다음 방으로 안내하며 나는 이 빌어먹을 암투가 끝났음을 인지했다.
*****
-정령 토끼를 위한 숭고한 갑옷[12p]
신전의 제단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이런 비밀 상점이 등장한다.
첫 번째 관문이나 두 번째 관문에서 보여준 활약상에 따라 포인트가 지급되는데.
10포인트면 하급 정령에게 중급의 힘을 부여할 정도로 훌륭한 아티펙트를 살 수 있었다.
세 번째 관문의 클리어는 10연승.
마지막 한 번을 앞둔 사쿠는 방금 전투에서 끔찍한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토끼상, 토끼상…!”
벽을 짚은 사쿠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갑옷토끼의 눈이 흔들리며, 사쿠를 애타게 바라보았다.
상대는 누구보다 빠르게 정령을 키웠고, 사쿠의 대응이 늦었다.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빠를 줄이야. 공격이 닿기만 했다면 저기에 누워있는 것은 흑묘가 될 터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
“…토끼 상?”
쓰러진 갑옷토끼에게 마력을 불어넣으며 응원하던 사쿠가 두 눈을 의심했다.
“뀨!”
[낑, 끼이잉! 끼이잉!!]가증스런 놈이 하체를 아래로 내리더니, 갑자기 우리 토끼를 범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 어?? 왜, 왜? 왜??”
저번에는 마을에서 난교가 이뤄지더니, 이번에는 자신의 정령이 맥이기 시작한다.
사쿠는 불쌍하게 범해지는 토끼를 보며 투명한 벽을 마구 후려쳤다.
“아와와와와왓…. 다메!”
토끼는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교미 속도를 보여준다더니.
허리를 미친 듯이 흔들기 시작하는 흑묘에게, 미처 저항하지 못한 갑옷토끼가 앙앙 울었다.
얼굴이 빨개진 사쿠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소리쳤다.
“으아앙! 토끼님!!”
자기 정령이 따먹히는 경우는 난생 처음이다.
사쿠는 진심으로 울먹였지만, 이윽고 연결선을 통해 들어온 감정에 그녀는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엣….”
조금씩 신음을 흘리는 갑옷토끼가 정복당하고 있다.
사쿠는 느껴지는 시선에 앞쪽에 있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뭔가 미안한 듯한 그림자의 모양새. 사쿠는 훌쩍이곤 애탄 얼굴로 토끼를 바라보았다.
갑옷토끼와 흐려지는 인연.
이윽고 계약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쿠의 머릿속에, 야릇한 상상이 떠올랐다.
‘…만약 이게 사람간의 싸움이었다면.’
저기에 제압당해 누워있는 건 자신이지 않을까.
순간 떠올린 남성의 몸체는, 두 번째 관문 장로의 집에서 보았던 그 사람의 몸이었고.
-퍼엉!
머리에 열이 올라 폭발해버린 사쿠가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양 뺨을 손으로 꾹 짓눌렀다.
“……므으으으.”
오랜만에 찾아온 고향에서 웬지 이상한 경험만을 잔뜩 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