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210
210
변해가는 세계
천마의 방 안에 있는 게임기들에 언제부턴가 먼지가 쌓여갔다. 게임기 위에 쌓인 수북한 먼지의 두께는 며칠 만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게임기로 넘쳐나는 천마의 방 안쪽에는 하나의 문이 더 있다. 통짜 금속으로 만들어 방어 마법을 새기고 안전을 비는 제사를 몇 달 동안 지낸 뒤, 부적까지 도배해가며 만든 문은 흉악한 것을 봉인하는 봉인이라 해도 믿을만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에는 사정이 있다. 문 안쪽은 천마의 수련장이고, 문은 천마의 힘을 버티기 위해 마족들이 필사적으로 설계한 물건이었다.
천마는 자기 수련에 주변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고, 천마가 마신이 된 초기에는 가벼운 수련만으로 성이 박살 나고 마족이 죽어 나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마족들이 필사적으로 만든 게 저 문과 안쪽의 수련장이었다.
그러니 마신을 가둬놓는다는 점에서 봉인이라는 감상도 틀린 건 아니었다.
반년 동안 열리지 않던 문이 열렸고, 천마, 천마신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 천마가 방을 나오자 석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발록 둘이 고개를 숙였다.
발록, 또는 투귀. 다양한 세계에 있는 전승을 근원으로 하는 이 마족은 전투력이 정평이 나 있었다. 입구를 지키는 둘은 발록 중에서도 오우거가 변한 경우로, 일어서면 성의 천장에 머리가 닿아 성안에서는 항상 구부정하게 다녀야 했다.
“밖이 시끄러워. 무슨 일이지?”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전쟁? 자세히 말해보도록.”
천마가 호기심을 보였다.
“세계 대전이라 불리는 전쟁이 벌어져 전 세계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 밖에 모인 저것들은 공격을 위한 군대인가?”
“천마께서 바라신다면, 저들은 즉시 그 어떤 병사보다 용맹한 투견이 될 것입니다.”
“단지 방어를 위해 모였다는 거군. 쯧. 한심한 것들.”
천마는 입 발린 말에 넘어가는 어수룩한 인간이 아니었다. 아부와 간언도 구분하지 못하는 인간은 천마신교의 교주로 군림할 수 없다.
발록의 말은 듣기엔 좋았지만, 파고들면 저건 그냥 방어를 위한 병력이란 뜻이었다.
“죽여주십시오!”
“그래.”
뼈까지 치미는 살기에 발록이 눈을 감았다. 천마의 살기 앞에서는 대전에서 살아남은 발록의 경험도, 전의가 피에 흐르는 종족이 가진 전의도 소용없었다.
바람이 지나갔고, 눈을 뜬 발록은 자신의 몸이 터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고, 놀람이 채 가시기도 전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천마가 다른 발록에게 물었다.
“어령, 어령은 어디 있지?”
“여기 있사옵니다.”
허공에 두둥실 나타난 서큐버스가 팔짱을 끼고 땅에 내려섰다. 팔에 얹힌 풍만한 가슴이 한 차례 출렁였다.
“말해봐라.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어령은 천마에게 그녀가 폐관에 든 후로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위원회의 내분과 세계 대전의 발발. 그리고 생화학 폭탄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근원 세계의 정세를 폭넓게 읽고 있었다.
몽마, 사람의 정을 채취하고 꿈을 넘나드는 종족의 장점은 넘치는 색기에만 있는 게 아니다. 꿈은 뇌의 활동이고, 특히 기억과 관련된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몽마들은 꿈을 넘어 다니며 사람들의 꿈속에 있는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꿈은 사람이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꿈에 대한 마법과 주술도 존재하지만, 그건 병의 치료나 특수한 상황에서 쓰이는 거지 일상에선 쓰이지 않는다.
서큐버스이자 마신의 사도인 이어령은 세계에서 가장 은밀한 영역을 염탐하는 첩자였다. 뛰어난 서큐버스만이 간신히 할 수 있는 기술이기에 알려지지도 않았고, 대처법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세계 대전. 세계 단위로 벌어지는 전쟁.”
천마가 입맛을 다셨다. 그녀가 겪은 가장 큰 전쟁은 열네 번째 재앙, 마신과의 대전이다. 북대륙의 문명을 지워버린 전쟁도 천마에겐 부족했다.
병력이 모이는 시간을 벌기 위해 북대륙을 버리고, 그걸로 시간을 벌어 준비가 끝난 위원회 병력으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시시한 전쟁이었다.
규모는 컸지만 마지막 결전 빼고는 즐길 거리도 없던 전쟁. 그게 열네 번째 재앙과의 전쟁에 대한 천마의 감상이었다.
다른 전쟁은 심심풀이도 안 된다. 천마가 겪은 두 번째로 큰 전쟁은 정마대전이었다.
그건 쥐꼬리만한 땅에서 제들이 최고라 우기는, 근원 세계의 원숭이들만 못한 것들의 싸움이었다.
천마의 눈에 비친 정마대전은 이름만 거창한 애들 싸움이었다. 애들이 빽빽대는 것도 귀찮아서 천마가 혼자 나서 정리했다. 진심의 반도 내지 않고.
광대한 근원 세계를 보고 나니 중원이라는 대륙에서의 일들은 소꿉장난으로 변했다.
천마는 싸움이 고팠다. 진심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싸움이. 세계 대전이라는 말이 삭막한 천마의 가슴에 물을 뿌렸다.
세상 모두가 싸우는 싸움. 천마의 머리에 몇 사람의 이름과 얼굴이 스쳤다.
“세계 대전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있다면, 당연히 규모도 그만하겠지?”
“예, 말 그대로. 위원회를 필두로 전 세계가 전화의 영역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옵니다.”
어령은 천마와 같은 차원 출신의 사람이었다. 기녀로 하오문 소속이던 그녀는 저쪽 세계에서의 천마를 아는 얼마 안 되는 인물이었고, 천마의 전투를 지켜본 몇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근원 세계에서 천마를 보자마자 납작 엎드렸다.
근원 세계에 와서 어령은 신세계를 보았다. 무림이 좁게 느껴지는 세계. 방대한 세계. 그러나 이 넓은 세계에서도 그녀는 천마가 보여준 것과 같은 위압감을 보여주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힘의 문제가 아닌 자질의 문제였다. 싸움의 자질, 지도자의 자질, 살인의 자질.
하오문(下汚門), 직역하면 낮은 곳에 있는 더러운 집안, 또는 문벌이 된다. 하오문의 구성원은 사회 하위층으로 이뤄지며, 그들은 살기 위해 밥 대신 눈칫밥을 먹는다.
교육받은 하오문도가 가진 눈썰미는 무인보다 더 나은 점마저 있다. 발달한 근육과 손의 굳은살을 보고 사람의 직업을 알아맞히는 무인은 드물지만, 하오문에서는 그 정도는 기초에 해당한다.
어령의 눈에 천마는 하늘이 내린 마귀 그 자체였다. 하늘의 그물이 그녀를 잡아 벌하려 하면 그물을 찢고 하늘을 찢어버릴 위인.
잠시 고민하던 천마는 결정을 내린 뒤 발을 옮겼다.
“바깥에 있는 것들 전부 모아.”
“명을 받듭니다.”
어령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성 밖에 있는 마족들을 모았다. 딱 맞춰 천마가 성문을 열고 빠져나왔다.
천마는 아무 기세도 뿜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나타난 것만으로 장내 소음이 사라졌다. 그림 같은, 기적 같은 광경이었다.
천마가 오합지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전쟁다운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녀는 싸우고 싶었다. 진짜 전쟁이 뭔지 한번 보고 싶었다.
천마와 겨루며 전쟁까지 치른다. 얼핏 불가능해 보이는 조건이지만, 그게 언제나 가능한 사람이 세상에 딱 하나 있다.
투신의 성자, 그녀의 허락도 없이 감히 싸움의 신이라는 별명을 사용하고 있는 건방진 놈.
투신의 성자라면 언제 어디 있든 전쟁을 벌일 수 있다. 현 투신의 성자는 역대 최고라고 불리는 인물.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내가 마신이다. 그리고 이 내가 피를 원한다. 길을 열어라.”
번개가 튀었다. 구색만 맞추고 있던 성벽이 안에서 바깥으로 폭발했다. 막혀있던 시야가 시원하게 뚫렸다. 천마가 걸음을 뗐고, 성벽을 터뜨린 우라누스가 오른쪽, 어령이 왼쪽을 차지했다. 그리고 둘 옆으로 마신의 사도들이 차례차례 자리를 차지했다.
“첫 목적지는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우라누스가 천마에게 물었다.
“북대륙 전부. 다음 투신을 친다.”
전의가 피에 흐른다는 종족의 투지. 그리고 재앙 투신을 섬기는 성인. 그 힘이 어떤지 직접 보고 싶었다.
마신은 종족의 언을 사용하지 않았다. 마족 자체가 마신의 권능에 의해 태어난 종족. 마신의 신자들이 가진 마신의 영혼이 족쇄가 되어 마족을 지배한다.
모든 마족은 마신의 신자를 거스를 수 없다. 마족에게 있어 절대적인 규칙이고, 천마는 그 규칙의 꼭대기에 있었다.
***
“천마가 어떻게 나올지 몰랐는데, 안심했어.”
윌리엄은 상공에서 촬영한 천마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거의 구름 높이에서 찍었는데도 천마를 둘러싼 마족의 군대가 움직이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천마가 북대륙 순례를 마친 다음에는 저 숫자는 억 단위로 불어나 있을 것이다. 마족을 조종하는 마신의 성자. 종족의 언을 가진 투신의 성자.
둘 다 억 단위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저 둘의 싸움이 세계 대전의 큰 한 축을 차지하리라는 건 틀림없었다.
“아직까진 계획대로 잘 흘러가는군요.”
“내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 과학은 저것까지 예상했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
윌리엄이 다른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근원 세계 곳곳을 살피는 정보력. 위원회의 전유물이던 그것은 이제 윌리엄만의 것이 되었다.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전쟁을 모두 관측할 수 있는 건 과학밖에 없었다.
“권능 압축 폭탄. 가설은 예전부터 세우고 있었습니다. 예측 범위죠. 단, 메인 컴퓨터가 아닌 제 사견이지만요.”
“사견?”
“메인 컴퓨터의 연산에 권능 같은 걸 끼워 넣을 수는 없어서 말입니다. 지긋지긋한 과학의 진리성 때문에.”
“과학의 사도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제로.”
“그러니까 제가 별종이라 불리는 겁니다.”
윌리엄은 여러 화면을 돌려봤다. 전쟁 초기, 대부분이 탐색전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작된 전쟁의 끝이 어딜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초기부터 자원을 낭비하며 싸우는 건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거나, 무식하거나, 내일이 없는 놈들이다.
갈등 구역에 비해 충돌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프로만 리슈타인을 잡을 수는 없나? 변수가 생긴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저들이 될 것 같단 말이야.”
제로가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없습니다. 추측하기로 그들이 사용하는 기술은 연금술을 필두로 한 마법, 그리고 유전 변형을 거친 벌레를 이용한 네트워크와 원격 신체 조종 기술. 모두 과학이 추적, 탐지할 수 없는 것들이죠. 과학의 여력을 모두 투입해 찾는다면 2년 내로 찾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한가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프로만 리슈타인을 잡고 싶은 건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보 격차가 좁혀지는 건 저도, 저희 메인 컴퓨터도 끔찍이 싫어하는 일이라서요.”
“그렇단 말이지…….”
윌리엄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두드렸다. 프로만 리슈타인이라는 이름이 가시처럼 목에 자꾸 걸렸다.
환한 조명이 비추는 방 안. 중앙 대형 산업 단지와 북대륙 0번 공업 단지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과학 기술의 우위가 전쟁에서 어떤 결과로 돌아오는지 대전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모두 안다. 전쟁이 터지면 과학이 먼저 공격당하리라는 건 뻔했고, 주요 시설을 미리 봐둔 구역으로 빼돌렸다. 저들은 빈 껍질을 상대로 몸을 불사르고 있었다.
불타는 공장을 보며 윌리엄이 말했다.
“이 생명도 몇 년이나 더 탈지 궁금하군.”
“대략 2년 정도 더 타지 않겠습니까?”
“그건 과학의 예상인가?”
“예상입니다.”
“사견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윌리엄이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부드러운 가죽이 그의 몸을 감쌌다.
해저 깊은 곳에 있는 위원회 본부가 나설 일은 당분간 없다. 그때까지 그는 마지막 평화를 만끽할 생각이었다.
‘고생하고 있는 다른 녀석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이게 마지막이라 하면 이해해줄 것이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조용한 공간에서 윌리엄의 눈이 감겼다. 제로가 소리 없이 방을 빠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