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e Genius Top Star RAW novel - Chapter 72
도준의 시선이 양복의 사내와 함께 출입문으로 가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여자의 걸음이 무척 빨랐다.
여자는 어깨까지 늘어뜨린 웨이브 머리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코트 위로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실크 스카프를 두르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도준은 뛰어난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관찰력이 연기의 기본 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늘 사람을 관찰해 온 덕분에 도준은 어렵지 않게 여자를 알아보았다.
‘······백정아?’
체형이나 분위기가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공항을 지나는 사람들은 여자와 그 옆을 지키듯 딱딱한 분위기로 캐리어를 끄는 남자에게는 그다지 시선을 두지 않고 지나쳤다.
한때의 난리로 백정아 본부장의 얼굴을 모르는 이들이야 없었지만, 직접 본 이들은 많지 않았으니 얼굴을 가리면 알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팀이, 도준이 부근의 시선을 모두 사로잡은 채였다.
“부장님.”
“어?”
도준이 함께 걷던 진성현 부장과 시선을 맞춘 채 턱짓했다.
“저 사람······ 백정아 같지 않아요?”
도준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낮아졌다. 도준의 말에 시선을 돌린 진성현 부장이 출입문으로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보았다.
“어······ 머리 스타일이 달라져서 그렇지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뭐지······.”
진성현 부장이 의심쩍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본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외국으로 나간 지 이제 고작 몇 개월이 지난 상황이었다. 남은 평생을 외국에 틀어박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돌아오기에는 너무 빠른 시점이었다.
“뭐 잠깐 한국에 다녀가는 걸 수도 있지만······.”
“그럴까요.”
도준이 회의적인 어조로 말했다. 백정아와 그 일가의 뻔뻔함을 생각한다면, 당장 연초에 SG 미디어로 복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복직은 너무 시끄러워질 수도 있으니······ 아예 SG 그룹 다른 쪽에 갈 수도 있고······.’
도준은 생각하며 찌푸렸다.
“설마 업무에 복귀하는 건 아니겠지? 아직 여론이 좋진 않을 텐데. 그건 또 무시하면 그만이겠지만······. 자기가 한 일들 반성은커녕 이를 갈고 있다던데.”
진성현 부장이 쓴웃음을 삼켰다.
사람들을 뚫고 도준과 진성현 부장이 체크인 카운터에 다다랐다. 이코노미 클래스에 탑승하는 규홍, 수진과는 갈라서 도준과 진성현 부장은 비즈니스 클래스 탑승 카운터에 줄을 섰다.
비즈니스 카운터의 줄은 사람 없이 한산했다. 앞선 손님이 카운터에서 짐을 부치고 있었고, 도준과 진성현 부장이 선 줄 주변에는 손님이 없었다.
자신의 차례가 오길 기다리며 도준이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형. 부탁드릴 게 있는데.”
“어? 뭔데.”
“SG 미디어 쪽 사업이나······ 내부 상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는 거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안 그래도 떠나기 전 가볍게 얘기를 해두려고 했던 내용이었다.
“SG 미디어?”
“네.”
업계 돌아가는 소식에는 빠삭한 진성현 부장이었다. 발도 넓고, 많은 배우를 보유한 소나무 엑터스 내부에서 영향력이 있으니 진성현 부장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이러쿵저러쿵 진 부장에게 소식을 알려 오는 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SG 미디어는 업계에 핵심 축 중 하나였다. SG 미디어 소식을 알고자 하면 깊은 속사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내부 분위기 정도는 진성현 부장이 쉽게 알 수 있었다.
단지 진성현 부장이 그런 게 왜 궁금하냐고 물을 까봐 걱정했 도준이었다. 백 본부장과의 일도 끝났으니 연기에만 집중하라고 할 수도 있었다.
‘대충 백정아가 돌아오게 될까 걱정도 되고,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려고 했었는데······.’
그 정도로만 말해도 진성현 부장은 충분히 도준에게 SG 미디어 소식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 한국으로 돌아온 백정아를 눈으로 본 상태였다. 진성현 부장은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신경이 쓰이겠지. 백정아가 진짜 돌아오는 거라면 또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백정아가 여론의 몰매를 맞게 된 데에 드러나게 도준이 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미 그전에 도준의 일을 어떻게든 방해하려고 했던 백정아였다.
아직까지 앙심을 품고 있을 수도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진성현 부장이 말했다.
“들려오는 얘기만 들을 게 아니라, 미리 알아 보고 우리한테 피해가 될 것 같은 일이 있으면 미리 대비를 하는 게 낫겠다.”
도준은 끄덕였다. 도준이 준비 중인 일에는 SG 미디어에 대한 정보가 무척이나 필요했다.
진성현 부장이 적극적으로 나서 준다면 도준으로선 무척 좋은 일이었다. 이제 도준만 관리하는 매니저가 아니라, 소나무 엑터스의 부장이 된 만큼 많은 것을 알아내는 데 더 좋은 위치이기도 했다.
“네. 너무 그쪽에 신경 쓰실 필요는 없고요.”
“그래. 무리하는 일은 없어.”
도준의 염려를 안다는 듯 진성현 부장이 답했다.
짐을 부치고 수속을 모두 마친 후, 도준과 규홍, 수진이 입국장에 들어가기 전 진성현 부장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다들 몸 조심하고······ 규홍이 수진이는 도준이 문제 없이 촬영할 수 있게 잘 도와주고.”
“네, 부장님.”
규홍이 깎듯하게 답했다. 일주일 전, 횟집에서 규홍에 이어 진성현 부장에게 잔소리를 잔뜩 들어야 했던 수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도준이 너도 촬영 잘하고.”
“네. 잘할게요.”
“바뀐 스케줄 표 보니까 첫 촬영이 키스신이더라······ 좋겠다. 나도 드디어 초희 씨랑 같은 현장에서 일하나 싶었는데.”
진심으로 부러워 하는 듯한 진성현 부장의 말에 도준이 헛웃음을 지었다. 도준의 로드 일을 못 하는 아쉬움의 원인이 도준이 아니라 송초희였나 싶어졌다.
***
촬영지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고됐다.
촬영 때문이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가 보는 유럽에 두근대던 도준의 마음도 이내 식었다.
바르셀로나까지 직항으로 가는 시간만 열다섯 시간이 넘었다. 비즈니스석이라고 해도 비행기에서 보내는 시간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비즈니스보다 훨씬 비좁은 이코노미에서 시간을 보낼 스태프들이 걱정될 정도였다.
거기에 바르셀로나에서 도착해 끝이 아니었다. 국내선으로 경유해 세비야로 향했다. 세비야 공항에서 내려서는 다시 팀을 위해 마련된 버스를 타고 달려 론다로 가야 했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다 쓰고 다음 날 론다에 도착하고 나자 도준도 스태프들도 피곤에 절어 있었다.
론다의 새파란 하늘보다 숙소의 침대가 더 고픈 상황이었다.
“도준 씨 방은 여기예요. 바로 옆 방이 감독님 방이고······. 매니저분은 저 따라오세요.”
미리 도착해 사전 준비를 마쳐 놓은 스태프가 도준에게 방을 안내해주었다. 촬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백여 명이 넘는 대인원을 수용할 숙소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팀마다 따로 숙소 생활을 해야 할 뻔했다.
규홍과 수진의 방은 각각 도준의 방이 있는 복도의 끝쪽 방이었다. 두 사람은 송초희와 다른 출연진들의 스태프들과 함께 방을 쓰기로 되었다.
새로 도착한 스태프들이 각각 방을 찾아 들어가며 짐을 풀자 숙소가 금세 북적거렸다.
도준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연 채 캐리어를 눕혔을 때였다.
“어, 도준 씨 왔어요?!”
“아······ 선배님, 안녕하세요. 안 그래도 인사 가려고 했는데······ 짐부터 풀려다가······.”
반갑게 인사를 해 온 건 송초희였다. 배우들 중에서는 송초희가 어젯 밤, 가장 먼저 도착해 있었다. 당장 내일부터 도준과 송초희의 촬영이 있었다.
제작비 문제와 촬영지 허가 문제로 한 달이라는 시간 안에 대본에 있는 모든 촬영씬을 소화해 내야 했다.
도준도 송초희와 같이 컨디션 조절을 위해 하루 정도 먼저 오길 원했지만, 미리 찍어두어야 하는 광고 촬영 스케줄이 겹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누적된 피로 때문에 도준의 반응 속도가 평소보다 현저하게 느렸다.
느릿한 도준의 말투에 송초희가 피식 웃었다. 송초희도 어제 숙소에 막 도착했을 때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짐 풀고 푹 쉬어요. 내일 당장 촬영도 있는데. 인사는 내일해도 되고······. 감독님 어차피 지금 촬영 나가셨어요.”
“그런가요.”
“아, 배는 안 고파요? 곧 저녁 시간인데.”
“네. 이동하다가 대충 떼웠더니······ 그리고 너무 피곤해서 배고픈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하하. 그럴 만하죠. 나도 어제는 아주 죽을 뻔했다니까? 그럼 얼른 자요. 저녁이니까 자고 일어나면, 아침일 거고······ 시차 적응할 필요는 없겠네요.”
“그렇겠어요. 바로 자는 게 낫겠어요.”
도준이 웃으며 끄덕였다.
송초희는 함께 일하기 무척 편한 상대였다. 미팅 자리에서도 그럴 거라 짐작했지만, 대본 리딩을 한 이후에는 완전히 확신하게 된 도준이었다.
경력이 경력이니만큼 연기는 말할 것 없었고, 프로페셔널한 자세도 갖추고 있었다. 선배인데다 나이도 연상이기 때문인지 상대 배우인 도준도 나서서 배려해주는 편이었다.
대체로 배려하는 입장에 있던 도준으로서는 편하기도 하고, 고마웠다.
“문 닫아줄게요. 왔다 갔다 하는 소리에 제대로 못 쉬겠네. 스태프들한테도 잔다고 말할게요. 잠 깨우지 말라고.”
“그래주시면 고맙습니다.”
“고맙긴. 내일 촬영 때 봐요!”
그렇게 인사를 나눈 후 송초희가 자신이 말한 대로 도준의 방문을 닫아주었다.
도준은 오래 비행기와 차를 타느라 찝찝했던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침대에 몸을 뉘였다. 침대에 눕기 무섭게 잠에 빠져들었다.
***
새로운 환경이었음에도 도준은 세상 모르고 숙면을 취했다. 덕분에 피로도 씻은 듯 가셨다. 아침에 눈을 뜬 후에야 도준은 창밖의 풍경에 감탄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국적인 풍경이 도준을 감싸 안았다.
“와······.”
도준은 자신을 깨우러 온 규홍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가 조식으로 준비된 빵을 먹었다. 조식을 먹은 후에는 소화를 시킬 겸 규홍과 숙소 근처를 돌았다.
서울의 겨울은 춥기만 했는데, 간단히 걸치고 나온 패딩이 무색할 만큼 춥지 않았다. 규홍도 걸은 지 5분도 안 돼 패딩을 벗어 버릴 정도였다.
관광지인 누에보 다리에서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동네 사람들이 몇 번 지나간 것 외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두두두두두―
조용한 가운데 시끄러운 헬기 소리가 규홍과 도준의 고막을 울렸다. 촬영팀이 띄운 헬기였다.
헬기에 탄 카메라맨이 론다의 푸르고 선명한 풍경을 잡아내고 있었다.
“바로 간단히 리허설하고, 촬영 들어갈 것 같아요. 촬영지까지는 여기서 걸어서 십 분 정도래요.”
숙소로 들어가며 규홍이 도준에게 스케줄을 건넸다.
도준이 끄덕이며 비행기 안에서도 닳도록 읽었던 대본을 떠올렸다.
‘해외 촬영······ 다른 게 문제가 아니었어······.’
시간의 흐름대로 촬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장면만 골라 찍다 보니 캐릭터를 맡은 배우로서 감정선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물론 다른 드라마나 영화도 꼭 극중 시간 순서대로 장면을 찍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정도가 너무 심했다.
‘첫 촬영이 엔딩 씬이나 다름없다니······.’
이제 처음 상대방과 하는 실전 연기인데, 감정이 가장 고조되어 있는 커플을 연기해야 했다. 게다가 키스 신이었다.
에서는 서브 남주인공이라 키스신이 없었고, 의 경우에는 사극이라 키스신이여 봤자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거기에 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본격적인 키스 신은 처음이었다.
지문에는 분명하게 ‘(진하게)’ 라고 적혀 있었고, 이윤오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생각해 보면, 무척 긴 키스신이 될 것이 분명했다.
실제 키스를 해 본 적이 없는 것도 문제였지만 키스하는 모습을 리얼하게 흉내내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드라마, 영화 속 키스신을 엄청나게 돌려보긴 했지만······.’
연습이라고 해도 혼자 거울을 보며 각도를 연습한 것이었다. 과연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어쩐지 액션 연기보다 어려운 느낌이었다.
***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시간, 뚝떨어진 절벽을 배경으로 촬영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도준의 염려는 한 발짝 현실에 다가서 있었다.
끝
ⓒ 천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