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3_4
“……놀고먹는 휴가 생활을 보낸 줄 알았더니만, 또 흥미로운 연구를 하고 있었군, 닉시 소위.”
대령은 멋들어지게 난 제 수염을 매만졌다. 그의 눈에서 맛있는 먹이를 발견한 뱀과 같이 반들거렸다.
“그래서 이걸 내게 말해 주는 이유는 뭐지?”
“이 특허의 지분을 전부 대령에게 넘기겠습니다. 어차피 주인 없는 연구였거든요. 특허권은 물론이고 실험 보고나 원하신다면 모든 연구 자료들까지 드리죠.”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역사에 남을 발명을 해 놓고 모든 지분을 포기한다니.
대령이 아는 닉시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었다.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인생을 걸어도 모자랄 결과를 선뜻 내놓을 수 있다는 건, 필시 그것과 거래하는 ‘무언가’는 그에 상응하는 것일 터.
‘군을 떠나고자 함인가.’
“거래 조건은?”
대령이 말했다.
닉시는 대수롭지 않은 듯 잔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하 감옥에 가둬 놓은 남자를 풀어 주세요.”
대령의 얼굴이 처음으로 의문으로 구겨졌다.
“뭐?”
“아무 조사 없이, 멀쩡하게, 풀어 주세요.”
거래 조건은 억만금 돈도, 명예도, 저의 자유도 아니었다.
모든 가치를 돈과 숫자로 환산하던 그녀의 인생에, 그냥 사람 하나.
그녀가 내놓은 것에 비하면 정말 하찮은 것이었다.
* * *
벤자민은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이마 쪽의 아릿한 통각이었다.
머리를 짚기 위해 손을 들었다. 어쩐지 답답하다 했더니, 손엔 붕대 같은 것이 감겨 있었다.
벤자민은 손가락을 까닥이며 몸을 일으켰다.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겨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러자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왔다.
“일어났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가벼운 말투와 붉게 올려묶은 머리. 제키 마티아스였다.
그는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테러가 있을 예정이었던 호텔. 폭음. 건물이 흔들리는 바람에 샹들리에가 떨어지려 했고, 닉시를 구하려고 그녀를 밀쳐냈다.
그 이후론 기억나지 않았다.
“그 녀석은?”
“달링이라면 멀쩡합니다. 아까 핫도그도 세 개나 먹었고. 건강에 해로운 자극적인 맛이 그리웠다나 뭐라나.”
살아 있다면 다행이었다. 벤자민이 긴 숨을 내뱉었다.
제 몸도 그다지 크게 다친 것 같진 않았다. 머리랑 옆구리가 찌르르 아픈 것만 빼곤 손가락도, 발도 멀쩡히 움직일 수 있었고.
“그럼 여긴 어디지?”
“파리. 23사단 부대 안입니다.”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전등을 켜고 있어도 어두컴컴한 방 안. 사방이 막혀 있었다.
침대 외엔 큰 가구들도 없었고, 문은 손바닥만 한 철창이 달린 철문 하나만 있었다.
“환자를 둘 만한 곳은 아닌 것 같은데.”
“정확히 보셨네. 여긴 지하에 있는 격리 시설이거든요.”
‘설마 신분을 들킨 건가. 하지만 신분을 들켰으면 이렇게 편하게 누워 있진 못했을 텐데.’
벤자민이 머리에 감겨 있는 붕대를 만지작거렸다.
제키가 그의 생각을 눈치를 채곤 입을 열었다.
“아직 벤자민 씨의 출신에 대해선 들키지 않았습니다. 달링이 대령이랑 무슨 거래를 한 건진 모르겠지만, 아까 상부에서 당신을 조용히 석방하란 지시가 떨어졌거든요.”
그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벤자민은 아직까지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일이 크리스마스니까 특별 사면이란 명분으로 여길 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얌전하게……”
“크리스마스? 그럼 오늘이 24일이라고?”
제키가 고갤 끄덕였다.
꼬박 이틀이나 누워 있었던 것이었다. 어쩐지 머리가 안 돌아가고 계속 현기증이 나더라니.
“아무튼 내일이면 여길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내일 기차역까지 태워 줄 테니까.”
제키는 손에 들고 있던 꽃바구니를 벤자민이 누워 있는 침대 옆 작은 책상에 올려놓았다.
크리스마스 하면 빼놓지 않는 빨강과 초록빛의 식물. 포인세티아꽃을 중심으로 화려하게 꾸며 놓은 꽃바구니였다.
벤자민은 지긋지긋하단 시선으로 그것을 노려보았다.
며칠 전, 마을 이장이 그의 집을 막무가내로 찾아왔을 때가 생각나서였다.
그때 길버트는 양손 가득 포인세티아 화분을 챙겨온 뒤, 벤자민의 집 안 곳곳에 벌레 약 설치하듯 꽃들을 배치했다.
가구가 꽉 들어찬 집에 겨우 적응했더니만, 이젠 집 안이 꽃집이 되었다.
이건 또 뭐냐. 잠을 방해받아 심기가 불편한 벤자민이 물었다.
그러자 길버트는 마을에서 전해지는 미신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서 크리스마스로 넘어가는 날 밤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찾아온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악몽을 꿀 수도 있으니까, 꽃을 놔둬서 원혼이 찾아오는 걸 막는 거예요. 게다가 벤자민 씨는 특히 원한 있는 유령들이 많을 테니까 미리 방지해 놔야죠.]그리곤 마을 사람들이 차라리 벤자민을 마을 입구에 세워두면, 유령들이 마을엔 얼씬도 하지 않고 다 그쪽으로 가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내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정 많은 마을 사람들 절반은 화가가 즐거운 크리스마스 날에 마을 입구에서 토템처럼 서 있길 원하지 않았고, 결국 그의 집을 꽃밭으로 꾸며주기로 결정했다.
벤자민은 미신 같은 건 믿지 않았다.
그러나 분위기상 꽃을 거절하면 마을 사람들이 마을 입구로 쫓아낼 것 같았다.
그랬기에 그는 마을 이장을 말리지도 못하고 멀뚱히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원한 많은 유령이 찾아올 것 같은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고.
그럼 그 녀석의 집도 지금쯤 이런 꽃판일까.
벤자민이 툭 입을 열었다.
[그럼, 그 녀석은?] [그 녀석? 아, 닉시요? 아뇨. 자긴 미신 같은 거 안 믿는다던데. 닉시도 원한 있는 유령이 많을 사람이에요?]벤자민은 길버트의 질문에 그제야 아차 싶어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저를 제외한 이곳 사람들은 그녀가 군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저만 아는 비밀. 비밀의 내용 자체는 그다지 영양가 없는 것이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제 집이 휘황찬란해지는 걸 봐줄 법한 정도로.
“……미신 같은 건 믿지 않는데.”
“응?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벤자민의 중얼거림에 제키가 반문했다. 벤자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갤 저었다.
단출한 병문안을 끝낸 제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원래는 남의 병문안 같은 건 잘 안 오는 사람이거든요. 근데 누가 계속 당신이 죽었나, 살았나, 문 앞을 왔다 갔다 하는게 워낙 신경이 쓰여서.”
제키는 제 어깨너머로 철문을 가리켰다.
그곳에 작게 나 있는 구멍 너머로 노란 머리통이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쪽이 살아 있는 것도 확인했고. 난 볼일 끝났으니, 가보겠습니다.”
―툭툭.
제키가 벤자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야기 잘 나눠 보라고요.”
철문이 큰 소릴 내며 열렸다가, 도로 닫혔다.
열린 직후 바로 노란 머리칼을 가진 사람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를 내며 뛰쳐 들어올 거라 생각했던 벤자민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대신 손바닥만 하게 뚫려 있는 작은 구멍 모퉁이에 다시 노란 머리카락이 비죽 모습을 드러냈다.
벤자민이 몸을 일으켰다.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았는지 즉각 옆구리에서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결국 몇 발자국 걷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 서는 수밖에 없었다.
“……환자를 움직이게 하는 건, 병문안 온 사람의 자세가 아닌 것 같은데.”
벤자민이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노란 뒤통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 거기 있을 건가?”
“…….”
“이봐.”
묵묵부답.
그제야 그는 약간의 기시감을 느꼈다.
“닉시.”
그래도 돌아보지 않는다.
기묘한 분위기에 벤자민이 걸음을 내딛으려 할 차였다.
“곧 석방될 거야.”
평소와 다름없는 낭랑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뭔가 묘하게 밋밋했다. 감정의 고저가 없는 것처럼.
“이르면 오늘 밤. 늦으면 내일. 제키에게 널 기차역까지 바래다주라고 했으니, 그대로 오베르로 가면 돼.”
“넌.”
“난 안 가.”
안 가겠다고?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뜻이야, 그게.”
“말 그대로야. 난 안 가고 여기 있겠다고.”
“그럼 언제 돌아올 건데.”
“안 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오베르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그녀가 외쳤다.
벤자민은 시근덕대는 닉시의 뒤통수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나도 가지 않겠어.”
“뭐? 미쳤어?”
닉시가 경악스러운 얼굴로 뒤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닉시는 입술을 꾹 깨물곤 다시 철문에 등을 기댔다.
“돌아가.”
“싫어.”
“이 감옥에서 썩고 싶어? 여기 계속 남아 있으면 넌 감옥행, 저승행 둘 중 하나라고!”
“넌 왜 같이 가지 않겠단 건데.”
“하아…….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제발 말 좀 들어.”
닉시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를 얌전히 보내줄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오로지 지금뿐.
그녀가 노엘 휴거의 꿈을 팔아서 만든 아주 천금 같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 기회.
“……제발 가. 내가 너 때문에 뭘 포기했는데.”
“뭘 포기했는데.”
―끼익.
닉시의 등 뒤, 철문을 사이에 두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해 봐. 네가 뭘 포기했는데.”
[강낭콩 하나만 있어도 여러 사람이 먹고살 만한 식물을 만들 거야.] [내가 못 끝내면 언젠가 네가 끝내 줘.] [난 네 천재적인 능력이 올바르게 사용됐으면 좋겠어.]닉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주먹을 쥔 그녀의 손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객관적으로 봐도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손해도 없을뿐더러,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고, 합리적인 교환이었다.
난이도 있는 흥정에 성공해서 뿌듯하진 못할지언정, 왜 이런 기분일까. 평소답지 않게.
[후회할 거야. 네가 뭔 짓을 한 건지 알게 되면 죽도록 괴로워질 거라고.] [그래. 네가 차라리 감정을 못 느끼는 녀석이라 다행이야.]“사람이 되길 포기했어.”
“그게 무슨…….”
“날 끝까지 믿어 준 그를 배신하고, 그의 꿈을 팔았어. 그 녀석이 죽을 때까지 평생을 바쳐서 연구했던 건데.”
평생을 ‘누군가를 위해서’라는 고결한 신념 하나로 살아왔던 노엘 휴거의 의지였다.
고귀했고, 선량했다.
그가 하던 연구는 결코 누군가의 돈벌이로 전락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근데 내가 그걸 내가 돈밖에 모르는 더러운 새끼한테 팔아 치웠다고.”
“…….”
“널 위해서.”
“…….”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라도 가.”
영문 모를 허탈감이 밀려왔다.
닉시는 새삼스럽게 자신이 무슨 후회할 짓을 저질렀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깟 연구가 뭐라고.
어차피 죽은 사람이 가졌던 의지가 뭐라고.
저보고 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도 아닌데. 어째서. 왜, 이런 불쾌함을 느껴야 하는 건지.
평소 같았으면 싸게 먹힌 장사라고 좋아했을걸.
왜 고개도 들 수 없게, 차마 그를 마주 볼 수도 없게.
태연하게 ‘내가 널 구했으니까 고마워해!’라고 웃을 수도 없게.
이런 모습을 벤자민이 알아 버린다면.
그가 제 가족이나 다름없는 죽은 자의 꿈을 널 지키기 위해 팔아 버렸다고 한다면?
[난 네 이런 모습이 아주 짜증 나.]“그런 건 얼굴 보고 이야기해.”
“싫어.”
“왜.”
그야. 당연히.
“넌 어차피 내 이런 모습이 짜증 날 테니까.”
그걸 알게 되면 분명히 그는 자신을 싫어하게 될 것이었다.
당연했다. 스스로조차 자신의 이런 모습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차에, 그라고 다를 게 뭐 있겠는가.
늘 자신을 떠났던 사람들과 똑같을 것이다.
신물 나겠지. 매번 상황을 개판으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에.
진절머리 나겠지. 남의 평생을 고기 팔듯 태연히 팔아치웠으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모습에.
그러니까.
“그러니까 보기 싫어.”
등 뒤에서 차분히 가라앉은 숨소리가 들렸다.
긴 한숨 소리에 그녀의 몸이 흠칫 떨렸다.
“너. 날 보기 싫은 게 아니라, 무서운 건가?”
무섭다는 말은 뇌가 비정상으로 망가져 있는 닉시에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문득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무서운 거야. 맞지?”
정확히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게 될지 알 수 없어서.
듣고 싶지 않아서.
그가. 벤자민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누군가가.
“내가 더는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까 봐 무섭나?”
순간, 그의 입에서 떨어져나온 ‘사랑’이란 단어 하나가 한순간에 닉시의 숨통을 조여 왔다.
닉시는 제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닉시.”
듣고 싶지 않았다.
“난, 네가―”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