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34)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34화 >
“안드레이를 뛰어넘는 놈이 나왔군.”
러시아의 거장 알렉세이의 미간이 거칠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깊은 두 눈동자는 여전히 브라운관을 향해 있었다. 현을 짚는 왼손은 물론, 활을 쥔 오른손의 움직임까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으니. 특히나 비브라토를 준비하는 모습에서는 가히 절정에 이른 거장처럼 좌중을 집중시킨다.
“이봐, 역대 콩쿠르 최연소 수상자 나이가 몇이었지?”
“러시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안드레이가 최연소였습니다. 당시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고요.”
누군가의 물음에 에바가 곧장 대답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콩쿠르인 만큼 그간 수많은 천재가 브뤼셀로 향했다. 허나 에바는 지금 브라운관에 투영된 아이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기껏 해봐야 열 살을 조금 넘었을 법한 어린 소년.
“어떻게!”
누구랄 것 없이 동시에 감탄 섞인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일반적인 베토벤의 해석이 아니다, 스스로만의 해석을 통해 소나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활과 현이 사랑을 속삭이듯 서로를 매만질 때는 땀에 전 손이 절로 움켜쥐어졌다. 감정을 현 위에 실어 봄날을 투영시키자 벚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 애절한 봄날의 끝이었다. 그 아이의 소나타에 거장들이 눈과 귀를 빼앗겼다. 마치 홀린 것처럼.
영원할 것 같은 침묵의 끝에서,
“국적은요, 중국?”
중국의 거장 등륜이 혹시나 하며 기대했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답변에 실망 어린 시선을 거두었다. 거장들은 말을 아낀 채 침묵을 지켰다. 수백 명을 검별 해야 하는 거름망. 본래 신예들의 연주를 한 음절도 듣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자세가 마음에 안 든다며, 첫 음이 썩은 사과마냥 상해있다고, 연주는 좋으나 감정이 없는 쓰레기라며 혹독한 악평을 아끼지 않는 이들이었다. 헌데 지금은 한 시간이 넘도록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게 말이 된단 말인가? 이 아이는 이번 브뤼셀을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콩쿠르에도 참가한 적이 없네!”
순백의 도화지 마냥 깨끗한 아이의 이력은 거장들의 눈을 의심케 했다. 저만한 실력을 지녔는데 그럴듯한 콩쿠르 경력은커녕, 사사 받은 스승조차 없었다. 그제야 왜 퀸과 런던이 동시에 저 아이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는지 이해가 되었다. 만약 저 연주를 듣고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면 두 사람 다 귀머거리가 된 것일 테지. 그때였다.
“다시 한번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등륜의 제안이었다. 모두의 마음을 대변한 듯한.
*
‘외국인이 많네.’
호텔 내에서 외국인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더 이상 관광호텔의 이미지를 고수하지 않는 시대. 대대적인 비즈니스 호텔로의 변모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절정은 수년 뒤 맞게 될 테고. 입맛이 떪은 감을 씹은 것처럼 씁쓸해지는 와중이었다.
“어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찾은 레스토랑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낯익은 두 분이. 어머니는 물론 정장을 차려입으신 아버지의 모습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서방,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아, 아닙니다. 장인어른!”
어머니의 얼굴에 감격한 기색이 가득하다. 아버지의 입에서 장인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할아버지 또한 괜스레 아버지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간 해묵었던 감정을 풀어냈다. 뜻밖의 만남에 내 입에서는 미소가 떠나갈 생각을 못 했다.
“현아, 좋으냐?”
할아버지의 물음에 난 정말 어린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난 삶이었다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으니.
“강서방, 앞으로 내 도움이 필요하거든 부담 갖지 말고 얘기하게, 내 힘닿는 선까지는 도와줄 테니. 혹 화학 산업에는 관심이 없는가? 자네 대학시절 공부했던 것을 보면 꽤 적성에 맞을 것 같은데 말이지.”
관심 있다고 하십쇼, 아버지!
고부가가치의 중심에 있는 화학 산업은 앞으로 무궁무진한 발전을 거듭한다. 캐시카우가 되는 기반 소재는 물론, IT와 바이오산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4차산업의 영역에서 좋은 밑거름이 되지 않는가. 괜히 대기업들이 앞다투어 화학 전쟁에 뛰어들었던 것이 아니다. 하물며 앞으로 동주가 개발해낼 독자적인 신소재는 머지않아 다가올 갖은 풍파조차도 이겨내게 만드는 원천이 된다.
지난 삶 동주의 이력을 살펴보고는 한탄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가만히 놔둬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을 동주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각설하고 그러니 맘만 잡수신다면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버지!
그나저나.
‘왜 이렇게 시끄러워?’
맞은편에 앉은 서양인 여성이 날카로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과도한 제스쳐를 취하며. 저놈의 아줌마가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시점인데!
* * *
“오빠아! 정말이야?”
손유하가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들뜬 표정을 한 채 매달렸다. 아이고, 이러다 내 목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훗날 길쭉길쭉하게 자라는 얼음 여왕답게 손유하는 또래에 비해 팔다리가 길었다. 그에 비해 나는 짧은 편이었고, 조금만 참자. 몇 년만 지나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을 하니.
“현아, 정말 잘 됐다. 서울에 남을 수 있게 돼서!”
박선영 또한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아가씨는 다른 의미로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한데.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제안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셨다. 하지만 기필코 어떻게든 부모님을 서울로 오시게 할 것이리라. 감정의 고리를 완전히 풀어낼 기회이니.
“참, 현아. 콩쿠르에 테이프도 함께 보냈지?”
“물론이죠.”
때마침 연회에서 촬영했던 비디오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니. 그건 그렇고 언제쯤 연락이 오려나. 이거 뭐, 인터넷이 보편화 되지 않은 시대이다 보니 함흥차사가 따로 없다.
“아마 지금쯤이면 선별작업에 한창일 거야, 수천 명이 지원하는 콩쿠르니까.”
그렇게나 많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 수가 꽤 많았다. 아무래도 국제 콩쿠르이니 당연할 테지만.
“그 중에서도 이력을 살펴서 선별된 이백 명의 영상만 심사를 한다고 해, 나머지에게는 기회조차 없지, 그래서 내가 걱정했던 거야. 현이 너는 이력이 없어서 웬만한 추천장으로는 힘이 들 테니까.”
아무렴, 현의 여왕과 런던 심포니의 수석 지휘자이다. 두 사람의 명성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니. 헌데 박선영의 표정을 보니 괜스레 나 또한 긴장되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가드너 한테도 부탁해 볼 걸 그랬나.
‘쯧.’
마음이 싱숭생숭하니까 별생각이 다 드네.
“그 뒤는 어떻게 되는데요?”
“이백 명 중에서 테이프만으로 육십 명을 선발해, 그들만이 브뤼셀에서 연주를 할 수 있어.”
이거 이거, 완전히 약육강식의 세계가 따로 없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하기도 하다. 지난 삶 수천 명이 무엇인가 수만 명이 바라마지 않았던 사법고시 합격을 이뤄내지 않았는가. 수석 동차합격을 한 것도 모자라 사법연수원에서 ‘날고긴다’는 수재들을 이겨내기까지 했었지. 이제는 희미해져 버릴 대로 희미해진 쓴 추억이지만.
“육십 명 중에서 스물네 명이 뽑히고, 거기서 또다시 3차 예선을 거둔 끝에 마지막 열두 명이 남아. 그들을 부르는 이름은 여러 가지야. 확실한 건 바이올린계에서 그 열두 명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다면 세계를 무대로 해도 손색이 없단 거야.”
“그럼, 그 열두 명은 경선을 안 해요?”
“당연히 하지. 여기서부터가 백미야.”
박선영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느새 손유하마저 귀를 쫑긋 세운 채 경청하고 있었다.
“워털루 전투가 있었던 브뤼셀의 지역에는 샤펠이라는 외딴 저택이 있어. 그곳에서 열두 명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장장 8일 동안 합숙을 하지, 그리고 그 모든 모습이 방송으로 송출돼. 지정곡과 자유곡을 연습하는 모습까지 말이야.”
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샤펠은 뭐고, 합숙은 또 뭐란 말인가. 거기다 미디어 출연까지? 이거야 원, 사법연수원에 있을 적 다큐5일이 촬영을 온다고 했을 때보다 더 귀찮게 느껴진다. 그때 사법연수원 수석이라 얼마나 인터뷰에 시달렸던지. 일순 박선영은 내 이맛살이 찌푸려진 것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그리고 콩쿠르에서 우승하게 되면, 명장이 만든 바이올린을 임대 해줘.”
난 그것보다 병역면제가 더 우선입니다. 하지만 되려 바이올린이라는 이야기에 손유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빠! 그거 켜보자!”
박선영이 갑작스런 손유하의 말에 의아하게 나를 바라봤다. 난 유하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꿀꺽, 환상을 생각하니 절로 목울대가 출렁이네. 과연 내가 만져도 될까, 그때도 한참을 망설였지 않는가. 하지만 손유하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쏜살같이 사라진 뒤였다. 아아, 저 얼음꼴통.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오빠아, 빨리 켜줘!”
왕회장이 숨겨놓은 바이올린을 손유하는 어찌 찾아낸 것인지 의기양양하게 짊어 메고 나타났다. 박선영은 척 보아도 오래된 바이올린 케이스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 나는 어쩔 수 없이 손유하에게서 케이스를 건네받았다.
염병.
또다시 가슴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하잖아.
내가 케이스에서 환상을 조심스럽게 꺼내자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박선영의 눈이 부릅떠졌다. 일평생 바이올린을 전공했던 박선영이었다. 그녀는 내 손에 쥐어진 악기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말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도 좋으니 스트라디의 선율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고. 지금 침을 꼴깍 삼키는 박선영의 모습이 딱 그래 보였다.
두근 두근 두근.
격동하는 심장 속에서,
나는 오롯이 환상을 들어 보였다.
그 순간이었다. 거칠게 요동치던 심장이 거짓말처럼 안정을 되찾은 것은.
*
띵동―!
이촌동 저택을 청소하고 있던 가정부 아주머니가 때아닌 초인종 소리에 허리를 폈다. 아직 어르신이 오실 시각도 아니었거니와, 강현 학생은 평창동에 가 있을 시간이었다. 작은 아가씨 내외는 다시 지방으로 내려갔는데. 설마하니 어르신의 또 다른 자식 내외들이 방문한 것일까? 의문과 함께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 밖으로 나가자.
“해외에서 우편이 왔네요?”
우체부 아저씨가 아주머니를 반겼다.
아주머니는 우편을 받아들었지만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영어도 아닌 것이 발신지에는 알지 못하는 꼬부랑 글씨가 쓰여있었기 때문. 잘못 온 게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혹시 몰랐다. 어르신에게 온 것일 수도 있으니.
허나 편지의 시작은 이러했다.
-친애하는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브뤼셀이.
본래라면 육십 명의 예선 통과자들에게 보름 후에나 당도할 편지. 발신지는 벨기에 브뤼셀이었으며 특이하게도 거장이 친필로 직접 편지를 썼다. 그들이 보름이나 일찍 한 사람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간단했다. 하루라도 빨리 영상 속의 아이를 실제로 만나고 싶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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