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70)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70화 >
“손가, 그 말이 정말 사실인가?”
왕회장이 조경가위를 내려놓은 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욘석들이 공항에서 완전 영화를 찍더라고, 그렇게 와락 껴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연애에는 셈이 느린 것이 전형적인 경상도 사내애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셈이 능한 거였어. 타이밍이 아주 최수종이도 울고 가겠더군.”
“현이가 나를 닮아 정이 많기는 하지. 손가, 날도 더운데 가위질은 그만하고 저기 가서 앉아서 조금 쉬세나.”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네, 영감탱이.”
왕회장과 유회장이 정자에 앉자 가정부 아주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시원한 수정과와 찹쌀 꽈배기를 내왔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더운 요즘 왕회장이 특히나 즐겨찾는 간식거리였다. 구름 한 점 없는 창공에 뙤약볕이 내리쬐는 것이 이제 완연한 여름 날씨였다. 왕회장
이 수정과로 입을 축이고는 슬쩍 유회장을 바라봤다.
“식은 언제 올릴 참인가?”
“무슨 식?”
“약혼식 말일세.”
유회장은 입 밖으로 수정과가 뿜어져 나올 뻔한 것을 애써 참아냈다. 하마터면 왕회장의 얼굴에 그대로 뱉을 뻔했으니.
“손가, 일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두 사람의 마음이 중한 것이라고 말일세. 우리 같은 구닥다리 뒷방 늙은이들이 저울질해서 결혼하는 시대는 지나가야 하지 않겠나.”
“공항에서 그렇게 난리부르스를 쳤는데 증명된 것이 아니겠나? 이러다가 살아생전 손주사위를 볼 수는 있나 싶어.”
“어린 아이들일세, 들뜬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뀔 것인데 지금 감정이 수십 년을 간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나.”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왕회장은 아쉬운 듯 찹쌀 꽈배기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젊었을 적에는 쳐다도 보지 않던 것인데 나이가 들수록 이상하게 단 것이 구미를 당겼으니. 사람욕심 또한 마찬가지였다. 줄어들기는커녕 해가 거듭될수록 늘어나지 않는가. 인재를 보
면 어떻게든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특히 그 아이는 인재라는 말로 다 표현되지 않는 수재중의 수재가 아닌가.
“영감탱이, 현이가 주말마다 나와 바둑을 두는 것은 알고 있지?”
“암, 그래서 실력은 좀 늘었나?”
“실력만 늘다 뿐인가. 현이랑 마주 앉아 바둑을 두면서 대화를 하다 보면 어떤 날은 내가 최상철이하고 있는 기분이 드는거야.”
“진명그룹 최상철이?”
왕회장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다 최상철을 모르지 않았다. 한때 대한민국의 경제역사의 한 페이지를 자랑했던 창업주였으니. 이미 고인이 되어버렸지만, 그의 경영수완은 아주 뛰어나 한때는 제일그룹을 추월했던 적도 있었다.
“또 다른 날에는 명성그룹의 김성종이 하고 대화를 하는 것 같기도 했지.”
이 또한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창업주.
“다른 한날은 개성의 이명근이 하고 마주 앉은 기분이기도 했고 말일세. 분명 눈앞에 보이는 것은 조그마한 어린아이였는데 말이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대답이 하나같이 깊은 뜻을 품고 있지 않겠나. 그 깊이가 웬만한 경영가 못지 않으니, 내가 탐이 나지 않고 배길
수가 있을까.”
2년이란 시간은 짧다면 짧고 기다면 긴 시간이었다. 그동안 왕회장은 강현의 성정을 비롯해 생각의 깊이를 헤아려보았다. 허나 나온 결과는 예상 했던 정도를 뛰어넘었다. 긴 고심 끝에 내려진 결론은 그 아이는 너무 광범위해서 전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만
큼 뛰어나지만 왕회장 자신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존재가 바로 그 아이, 강현이었다.
“영감탱이, 분명한 건 말이지.”
그 순간,
“그 아이는 앞으로 다가올 풍파도 짐작하고 있을걸세.”
창공을 가로지르던 이름 모를 새가 대답이라도 하듯 크게 선회했다.
*
“형, 도대체 언제 갈 거예요?”
벌써 며칠째일까, 백정훈이 작업실에 출근 도장을 찍듯 하루도 빠짐없이 나타나고 있었다. 얼마 전 종업식을 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학교까지 따라왔을지도 모르겠다. 참다못해 한마디를 던지니 백정훈이 으레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현아 너는 만약에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해야 하는데 눈앞에 베토벤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니? 악보를 해석함에 있어 작곡가의 의견을 듣는 것은 엄청난 기회이지. 그가 만들어낸 창조물이니까 말이야. 나 또한 마찬가지란다. 이 엄청난 악보의 작곡가가 바
로 눈앞에 있는데 다른 곳에서 연습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니겠니?”
도대체 2년 동안 유학을 하면서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 현성그룹 결혼식장에서 봤던 샌님 같던 모습은 이제 아예 보이지 않았으니. 뻔뻔함을 한 숟갈 퍼먹은 모습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싫지 않았다. 악보를 보는 그의 눈빛은 전장에 나가는 장수만큼이나 진지했기에. 하물며.
“현아, 연습 한 번 해봐도 될까?”
철혈의 마에스트로 연주를 눈앞에서 들을 수 있지 않은가. 지난 삶 백정훈의 지휘를 보겠다고 얼마나 열심히 티켓팅을 했던가. 그때의 노력이 지금의 보상으로 다가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내가 만든 곡을 연주하는 것이었으니 그 감회가 더욱 남달랐
지.
“언제나 느끼지만, 현이 네 작업실은 정말 최고인 것 같다.”
작업실에 구비된 연습용 피아노였다. 하지만 단순히 연습용으로만 쓰기에는 가격이 상당히 나가는 제품이었다. 신디사이저를 이용하거나 전자 피아노를 사용해도 될 요량이었지만 임혜라 이사장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소속사 하나는 기똥차게
고른 것 같았으니.
3악장으로 구성된 악보였다.
올림다단조 2/2박자 형식으로, 서정적인 음색으로 첫 문을 열며 음 하나 하나에 힘을 실어 연주한다.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마치 안개 밭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일 정도로 몽환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주었고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2악장을 지나쳐 격렬하게 몰아치
는 소나타형식의 3악장은 베토벤의 월광과 자못 닮아있었다. 하지만 그 피날레가 확연히 달랐으니. 모든 것을 떠나보내듯 날려버리는 마지막 선율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역시 곡이 제 주인을 잘 찾아갔다.
“현아, 곡명은 없는 거니?”
백정훈은 이 악보를 단순히 6번이라고 부르기 싫은 모양새였다. 애초에 오선위의 음표를 그려나갈 때 곡의 제목은 생각지 않았으니.
“형이 원하시는 대로 부르시면 돼요.”
하물며 백정훈을 생각하며 만든 곡이 아닌가.
똑똑.
그때 노크소리와 함께 임혜라 이사장이 들어섰다. 시계를 보니 왜 방문한지 알 수 있었다. 어째 요즘 임혜라 이사장의 취미가 나와 함께 점심을 먹는 것 같았으니.
“현아, 이번엔 일본에서도 연락이왔어.”
“일본이요?”
“그래, 클래식 음반을 발매할 생각이 없냐고 묻더라. 아무래도 일본이 아시아에서는 클래식 시장이 가장 크잖니. 이러다가 미현 씨가 3개국어 능력자 되는 건 아닐는지 모르겠다.”
임혜라 이사장의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백정훈은 여전히 골똘히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이미 셋이서 몇 번이나 함께 식사자리를 가졌던지라 그가 생각에 빠질 때면 그 집중력이 엄청나다는 것은 애진즉 알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차가 나올 즈음이었다.
“그래, 생각났어.”
백정훈의 말에 임혜라 이사장과 내 시선이 향했다. 아무래도 밥을 잘못 먹은 것일까, 백정훈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점차 선명해지고 있었으니.
“철혈!”
어?
“비장하고 서슬 퍼런 그 악보, 격렬하게 몰아치는 피날레는 마치 전장의 분위기를 풍기니. 철혈, 그래 철혈이라는 단어가 현이 네 악보와 어울린다.”
쏜살같이 내뱉는 말에 임혜라 이사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반면, 나는 등줄기에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되면 이 자리에서 훗날 백정훈의 별호가 탄생하는 격이 아닌가.
* * *
스피오 스피오 맴맴―!
아침부터 매미 울음소리가 선명한 가운데 이천동 저택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하다. 지난 삶 요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지만 이제 호박전을 만드는 것은 눈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정도니 이만하면 훌륭하다. 아무렴, 지
난 2년간 할머니께 대접할 호박전을 만드는 것이 내 주요임무였으니.
“손주 녀석이 호박전을 이리 잘 구우니 할애비가 불안한 걸, 이러다가 임자가 내가 만든 것보다 현이가 만든 것을 더 좋아하겠어.”
할아버지는 미소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정장을 차려입으신 할아버지였다. 곧 어머니와 아버지도 준비를 끝마치셨다. 그렇게 김기사 아저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한참이나 달렸다. 얼마나 갔을까 선산을 지키는 초로의 노인은 환한 미
소와 함께 우리를 맞아주었다. 매우 감회가 남달랐다. 과거 결혼기념일 즈음 할아버지 홀로 찾았던 산소를 이제는 넷이서 함께 오르고 있었으니.
“임자, 나왔소.”
할아버지는 무덤을 조심스럽게 매만지셨다. 관리가 잘 되어온 산소였다. 여름날의 햇살을 받아 자란 노랗게 핀 원추리꽃과 양지꽃이 우리를 반겨주었으니. 할아버지는 호박전을 꺼내 할머니가 바라보는 위치에 놓아두셨다. 막걸리 대신 할머니가 좋아했다던 흰 우유와
함께 말이다. 한창 산속을 타고 다니는 바람 내음을 맡고 있을 즈음.
“강서방, 앞으로 세상이 크게 변할 걸세.”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향해 운을 띄웠다. 아버지는 그라이핀 상용화에 여념이 없으신 분이셨다. 세상이 흘러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눈이 어두우셨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귀를 기울였다. “조만간 큰 일이 날수도 있을 게야. 흘러가는 풍파를 도망쳐 피해 가려 하지 말게나. 어줍짢게 피해 가려다 오히려 초가삼간을 태우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아무리 고된 풍파라 할지라도 내실을 다지면 견뎌낼 수 있는 법이니 말이야.”
할아버지 또한 왕회장과 마찬가지로 다가올 풍파를 예감하신 것이 분명했다. 나야 역사의 흐름을 알고 있는 정도였지만 할아버지와 왕회장은 그야말로 역사의 한 중심에 계시지 않은가. 체감하는 위치와 강도가 현저히 다를 것이리라.
“예, 장인어른.”
“내 자네의 그 우직한 성정이 마음에 듬세, 이럴 때일수록 마음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거야. 사업을 함에 있어 영민하게 돌아갈 머리는 하나면 되니.”
그 순간 할아버지가 말을 끝마치며 나를 슬쩍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먼 곳을 바라보며 초코 우유로 입을 축였다. 몸이 작아지니 입맛이 변한 것일까. 예전에는 먹지도 않았던 초코 우유를 이렇게 홀짝이고 있으니. 오히려 이런 운치좋은
산속에서 막걸리 한잔 기울이는 것이면 모를까.
“그럼, 임자가 현이가 만든 호박전을 다 먹기 전에 나도 한 번 맛봐 볼까?”
그럴 줄 알고 넉넉하게 만들어왔었지. 할아버지의 결혼기념일 날 가족끼리 호박전을 즐기고 있었으니 하늘에 계신 할머니 또한 이 광경을 정겹게 보고 있으리라. 그런데 할아버지는 왜 오늘 아버지에게 다가올 풍파를 경고해준 것일까.
그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우루루쾅―!
뙤약볕이 내리쬘 때는 언제고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 마냥 천둥 번개는 물론 장대비가 쏟아졌다. 기어코 긴 장마가 시작된 것이었다. 아침 일찍 작업실에 갈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시간을 늦춰야만 할 것 같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거실로 내려갔을 때였다.
“어? 삼촌 안녕하세요.”
삼촌 내외는 물론이고 이모 내외까지 거실에 앉아있었으니 어안이 벙벙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이른 아침부터 할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이리 달려온 것이라 했다. 저들 또한 갑작스런 호출의 이유를 모르는 듯 얼굴에 불편하고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으니.
“아주머니, 혹시 오늘 무슨 대소사가 있나요?”
내가 모르는 집안의 대소사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 오랫동안 저택에서 일해온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하지만 가정부 아주머니도 도통 이유를 모르겠단 눈치셨으니. 모두의 의문이 더해갈 즈음 할아버지가 서재에서 걸어 나오셨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그 누구 하나 입을 먼저 여는 이가 없었다. 이때만큼은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것이리라. 식사가 전부 끝날 때 즈음 되어서야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딱 일주일 남았다.”
무슨 말씀이신 것일까?
“일주일 후면 대한민국이 아주 시끄러워 질게야.”
모두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만은 그렇지 않았다. 너무나도 이상했으니. 지난 삶을 떠올려보면 내년 1월부터 풍파의 전조가 시작되지 않는가. 할아버지 또한 분명 다가올 풍파를 짐작하셨다. 하지만 일주일 뒤라니?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아직 내년까지는 4개월이 넘는 시간이 남지 않았는가. 그 시작은 분명 대한그룹의 중심 대한철강 이었다.
그때였다.
“일주일 뒤.”
그 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대한철강부터 시작될 게다.”
내가 알고 있던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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