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of the Fallen Kingdom RAW novel - Chapter 264
제264화
갑작스럽게 성사된 대결.
성화 기사단의 단장인 오르카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상황이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이기면 그만이다.’
이 많은 이들 앞에서 선언해놓고 말을 바꾸지는 않겠지.
어차피 선택지는 없다. 거절했다면 렌 아르젠은 정말로 성화 기사단 전부를 베고 황성으로 향했을 테니까.
그리고 그가 황제를 만나게 되면 성화 기사단은 버려질 것이다.
2황자의 명을 따랐더라도, 2황자 스스로를 희생할 만큼의 가치는 없을 테니.
“클로에 아르젠.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쇠퇴기에 접어들지 않았나? 아직도 검을 들 힘이 남아 있는 줄은 몰랐군.”
오르카는 자신 있었다. 상대는 이미 전성기 다 지난 늙은 여기사.
아무리 같은 마스터급이라고 해도 역량의 차이는 존재하는 법. 렌 아르젠이나 아르한 아르젠이 나왔다면 모를까, 클로에라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나도 너 같은 때가 있었지.”
그녀가 두 다리를 지면에 고정하고 검을 곧추세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천지 분간 못 하는 애송이인 시절이.”
“……애송이? 내가 말이냐?”
“그래. 애송아.”
그녀가 손가락을 까닥이며 도발하자, 오르카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달려든다.
콰앙!!
둘 다 묵직한 중검을 펼치는 기사.
한 번 격돌할 때마다 강렬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크윽!”
“뒤로 빠져라!”
성화 기사단의 단원들이 뒤로 슬쩍 물러서고, 아르젠의 기사들은 그 자리에 미동 없이 서서 두 사람의 공방을 지켜보았다.
“한순간도 놓치지 마라.”
렌은 수호 기사들에게 명했다.
수호 기사들 모두 결국 검의 입회식을 통과하면 사대 유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테니.
이 공방을 보며 중무류가 어떤 검술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간 노력한 게 확실히 보이네.’
아르젠의 겉핥기식 사대 유파의 검술이 이제는 본연의 힘을 조금씩 되찾고 있었다.
중무류는 땅의 힘을 빌리는 검술.
지면에 다리를 지지하고 있는 이상 무너져서는 안 된다. 그것이 중무류의 진의이다.
콰앙!!
또다시 폭음이 터졌다.
땅이 헤집어질 정도의 기파가 지면을 두드리지만, 클로에가 서 있는 곳만큼은 어떠한 충격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클로에를 몰아붙이던 오르카가 처음보다 살짝 힘이 빠졌는지, 검이 흔들렸고.
‘끝이군.’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클로에의 지진포가 오르카를 날려 보내며 대련을 마무리 지었다.
“쿨럭!”
흉갑이 그대로 안으로 밀려 들어가며 그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아마 갈비뼈 몇 대는 부러지고 심장에도 타격이 크게 왔을 터.
순식간에 핼쑥해진 오르카를 바라보던 클로에가 납검하고 렌의 뒤로 빠진다.
“나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자신의 단장이 질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성화 기사단이 웅성거린다.
쓰러진 오르카의 옆을 지나가며 렌이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문 열어라.”
나지막하게 던진 말이었지만 저 높이 있는 병사들의 귀에 쏙쏙 박힐 정도로 뚜렷하게 들렸다.
그그그그그극!!
성화 기사단의 단장도 당했고 약속까지 한 마당에 렌의 말을 거부할 이들은 없었다.
아르젠의 위엄에 겁을 먹은 병사들이 성문을 열고 아르젠은 당당하게 성문을 뚫고 들어갔다.
아르젠의 깃발이 펄럭이고 그들의 휘장에 그려진 문양이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대놓고 2황자가 그들을 막으려 했음에도 막지 못했다.
그저 손 놓고 기다려야만 하는 2황자의 모습을 생각하니 아르젠의 기사들은 자부심이 느껴졌다.
거리를 지나는 아르젠을 향한 공포와 선망의 시선들이 바로 현 아르젠의 권세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가장 앞에 서서 말을 타고 가는 렌 아르젠의 뒤를 따라 사대 유파의 기사들과 10명의 수호 기사가 호종한다.
그들에게 렌 아르젠이라는 기사의 등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넓었으며, 듬직하고 위용이 넘쳐흘렀다.
‘에덴 형님에겐 미안하지만, 가주는 렌이 맞는 거 같네.’
‘전검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카리스마군. 렌 아르젠은 따르고 싶게 만드는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
아르한과 클로에는 어느새 렌이라는 인물에 감화되어 진심으로 렌을 따르고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전방에서 일단의 무리가 다가온다.
또 2황자의 장애물들인가 싶어 표정을 굳힌 렌 앞에 낯익은 이들이 나타났다.
푸른 배경에 입을 벌린 붉은 새가 그려진 깃발.
발렌베리 가문의 문양이었다.
“저 녀석들도 2황자에게 붙어먹었나?”
아르한이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히이이잉!!
말이 거칠게 투레질하며 그들 앞에 멈췄다.
“반갑네. 디에고 발렌베리네.”
말에서 내린 디에고가 렌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렌 아르젠입니다.”
예상외로 상대가 정중하게 나오니 우선은 렌도 정중하게 대했다.
‘발렌베리의 가주가 직접 행차하다니, 렌의 위명이 과거랑 비교할 수도 없이 높아졌군.’
아르한은 조금 놀랐다. 발렌베리의 가주는 그 콧대가 매우 높아서 이렇게 스스로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발렌베리 가문은 제국 내에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가문이었으니.
“지난 교황 추모식에서 내 자식들이 꽤 신세를 졌다고 들었네.”
“별일 아닙니다. 악마를 막아내려다 그리되었을 뿐이죠.”
“그리 겸손할 필요 없네. 어찌 되었든 이 녀석들의 목숨을 구해준 건 사실이니까.”
그의 뒤에서 로젠트 발렌베리와 플랫 발렌베리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때는 제대로 고맙다고 말도 못 했던 것 같군. 은혜를 입었다. 고맙다. 렌 아르젠.”
로젠트가 제법 진지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과연 저게 진심일까? 아니면 명성에 겁을 먹어 억지로 숙인 처세일까.
“고맙다.”
옆에 있던 플랫 발렌베리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은 미세하게 균열이 나 있었다.
플랫을 보니 알 것 같았다. 이들은 렌 아르젠이라는 명성과 아르젠이라는 권세에 굴복했을 뿐이라는 걸.
하지만 상관없다. 모든 이들이 진심으로 따르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니.
“됐습니다. 발렌베리 가주님.”
렌은 가주에게 말했고 가주는 두 사람의 고개를 들게 했다.
“그래서 여기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난날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온 거네. 황궁으로 가고 있다지? 우리도 거기까지 함께할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발렌베리의 속마음이 어떨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의 속마음이 어떻든 이용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이용하면 될 뿐.
발렌베리가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2황자도 더 이상 귀찮은 술수는 벌이기 쉽지 않을 거다.
“가죠.”
제국의 수도 중앙을 가로지르는 아르젠과 발렌베리의 행렬에 제국민들이 알아서 길을 터 주었다.
제국 내 최고 유력 가문 둘이 뭉친 데다, 발렌베리에는 가주까지 있는 상황.
2황자의 세력이 마음먹고 길을 막으려 한다면 가능은 하겠지만, 충돌이 일어나면 2황자는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입게 된다.
‘검주들은 안 보이는군.’
만약 황제도 2황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진작에 검주들이 나타나 그들을 구속했을 것이다.
하지만 검주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것을 파악한 발렌베리가 먼저 나선 것이겠지.
나름 도박 수를 건 것이다. 2황자와 대립하는 아르젠에게 이렇게 대외적으로 붙는다는 것 자체가.
두웅―!
황성에 도착하자 거대한 북소리가 들려온다.
바란 제국의 어마어마한 크기만큼이나 커다란 황성의 규모.
내성의 입구는 너무나도 쉽게 열렸다. 발렌베리의 가주인 디에고가 나서니 병사들도 어찌하지 못하고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무운을 빌겠네.”
“감사합니다. 발렌베리의 뜻은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군.”
디에고가 발렌베리를 이끌고 돌아갔다.
그리고 황성에서 시종장이 나와 렌에게 인사했다.
“폐하께서 렌 아르젠 경을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그러지.”
“다른 분들은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렌은 시종장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브릴런트부터 성국의 바스티안, 로자리아, 아르젠의 대저택까지.
많은 곳을 가보았지만, 제국의 황성만큼 크고 웅장한 곳은 없었다.
각 벽면에 예술품들이 줄지어 걸려 있고 화려한 황금 장식들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황성을 들어가고도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방.
문이 열리자, 의자에 앉은 금빛 머리칼의 남자와 그의 옆에 서 있는 호위 기사가 보였다.
“렌 아르젠 경이 오셨습니다.”
시종장의 소개에 가면을 쓴 호위 기사가 렌을 훑으며 살짝 경계한다.
“마리아, 걱정 마라.”
“렌 아르젠은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럴 리가.”
천천히 일어선 그가 렌을 바라보고는 웃는다.
“대륙을 구하신 영웅이 위험하겠나? 마리아.”
“렌 아르젠입니다. 폐하.”
렌은 정중하게 예를 취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 반갑다. 앉아.”
전생에서도 황제는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베일에 싸여 있는 그는 어떤 인물일지.
생각보다 젊었다. 그의 아들인 윌리엄의 아버지라기보다는 형제처럼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그의 눈빛에 담긴 깊은 세월은 달랐다. 그저 시선을 한 번 마주친 것만으로도 속내가 다 파헤쳐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 보통이 아니군.’
신체 능력은 기껏해야 상급 기사 정도. 지금의 루이즈와 대련하면 비등하지 않을까 싶은 수준이었다.
“꽤 요란스럽게도 찾아왔더군.”
“폐하를 만나 뵙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겠지. 나를 지키려는 이들이 워낙 많아서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했지만,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아마 아르젠에서 황궁을 향한다고 하는 순간 모든 정보를 미리 파악하고 있었겠지.
2황자가 아르젠을 버리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럼에도 모른 체 하고 있단 건, 아르젠을 버릴 생각이라기보다는 2황자가 어떻게 판단하고 대처하는지를 보고 싶은 거겠지.
아르젠은 그를 시험하는 도구로 쓰일 뿐이고.
‘아르젠을 버리려 했다면, 애초에 이리 만나주지도 않았을 거라 생각되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버릴지 말지 간을 보고 있는 걸까.’
당최 황제의 생각을 읽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건 황제 역시 마찬가지겠지.
아무리 황제라도 아르젠 내부에서 가주와 한 내기에 대해선 알지 못할 터.
그도 궁금할 것이다. 지금 렌 아르젠이라는 인물이 이렇게 직접 황궁으로 찾아온 정확한 이유를 말이다.
“이번 연합군의 일은 저도 참 유감이라 생각합니다. 제국군의 피해가 컸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아르젠의 소식도 들었다. 나도 유감을 표하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이지. 아르젠은 나의 제국을 뒤받쳐줄 충실한 신하들이 아닌가?”
“…맞습니다.”
황제는 렌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이리 찾아온 거지?”
“제가 지난 성국에서의 일로 3검주님에게 선물 하나를 받았습니다.”
렌은 품에서 금패를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황제가 직접 3검주에게 무엇이든 단 하나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하며 하사한 증표다.
그것을 렌이 3검주에게 받은 것이었고, 렌은 이번에 그것을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게 거기서 튀어나올 줄은 몰랐군.”
말은 그리했지만, 황제는 금패를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다.
“무엇이든 단 하나의 부탁을 들어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그럼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말해봐라.”
“저와 내기 하나 하시겠습니까?”
“……내기?”
황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렌의 제안에 미간을 좁혔다.
그가 이 금패로 당연히 2황자와 관련된 아르젠의 문제를 말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 지는 쪽이 이기는 쪽의 원하는 걸 들어주는 것으로 말입니다.”
“왜 그런 내기를 하는 거지? 금패만으로도 내가 부탁을 들어준다고 했을 텐데?”
“금패는 제가 폐하께 받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건 3검주가 금패를 받을 만한 공을 세웠기에 준 것이다. 그것을 다시 너에게 준 건, 3검주의 마음일 뿐. 내 말은 변하지 않는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같은 부탁이라도 해주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정도는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정도가 달라진다?”
“예, 폐하께서 진심으로 제 부탁을 들어주고 싶으시다면 어떠한 것을 부탁해도 열심히 부탁을 들어주시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들어주는 시늉만 할 수도 있는 거죠.”
스릉―!
그때 옆에 있던 호위가 얼굴을 붉히며 렌의 목에 검을 들이민다.
“네가 같잖은 허명을 얻었다고 폐하를 욕보이는구나.”
“그렇다면 그대로 베지 그러셨습니까?”
하지만 렌은 검이 목덜미에 닿을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건방진-.”
“욕보이는 게 아닙니다. 폐하의 마음을 사고 싶을 뿐입니다.”
렌의 당돌한 태도에 코웃음을 친 황제가 크게 웃는다.
“크하하하하하!!”
정말 오랜만에 이런 패기 넘치는 기사를 보아서 그런지 그는 자꾸만 웃음이 났다.
“좋아, 맞는 말이야. 금패의 허점을 정확히 꿰고 있군.”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아량은 무슨, 그래서? 내기는 뭘 한다는 거지?”
“기사는 기사만의 방식이 있지 않겠습니까?”
렌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국의 그 어느 누구라도 좋습니다. 저를 이긴다면 내기는 제가 진 걸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저를 이기지 못하면 내기는 저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황제와 그 옆의 호위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건방지군. 제국의 기사가 누구든 이길 수 있다는 건가?”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죠. 다만 폐하께서 선택하신 기사가 저를 이긴다면 내기는 폐하께서 이기시는 것이고, 제가 이긴다면 내기의 승리는 제가 가져가는 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저 이것은 내기일 뿐.
제국 제일의 고수가 나오는 조건이 아니니 지더라도 열 받을 필요 없다.
렌은 이리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배려 아닌 배려가 황제의 자존심을 더욱 건드렸다.
“좋아. 그럼 나는 플레처 아르젠을 보내도록 하지. 그도 나의 기사나 마찬가지이니,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