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actor RAW novel - Chapter (228)
위대한 연기자-228화(228/229)
눈 내리는 영화제 (2)
<위대한 연기자>의 베를린 국제 영화제 첫 공식 상영.
-휘우우우웅.
듣기만 해도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영화가 시작했다.
거대한 설산.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만년설.
환상적인 배경 속에서 배우는 정면을 본다. 관객들과 눈을 마주 보는 것처럼.
사방이 하얗다.
‘조금 전까지 밖에서 눈을 맞던 감각이 되살아나는군.’
2월. 베를린 하늘에서도 눈이 내렸다.
광활한 설원에 홀로 선 배우 탓에 몸소 느낀 냉기가 쉽사리 되살아난다.
영화와 현실, 스크린 속과 극장 안의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더욱 영화에 몰입하게 된다.
-하아, 하아.
배우의 차가운 숨결이 뺨 언저리를 스치는 것 같은 착각.
불시에 기나긴 독백이 시작됐다.
-다 버리고 떠나고 싶다고 했어? 아니. 그건 안 될 말이지. 저 거대한 협곡이 보이지. 꼭 우리 앞에 놓인 길처럼 험난해. 하지만 난 알아.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 끝은 분명 황금빛 미래로 이어져 있어. 세상은 당장 별 볼 일 없는 우리를 무시하지만······앞으로 많은 것이 바뀔 거야.
난 가끔 꿈을 꿔. 영원히 녹지 않는 만년설처럼 변치 않는 가치를 손에 쥔 내 미래를. 그건 반드시 찾아올 미래야. 저 하늘에 빛나는 별도, 이 아름다운 행성조차도 과거에는 별 볼 일 없었어. 그리고 우리는 그것보다 더 쉽게 변하고 빠르게 변하지.
-그러니까 여기서 못 멈춰. 못 죽어. 넘어져도 일어나고 죽어도 되살아날 거야.
시작부터 압도당한다.
-······컷!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제삼자의 목소리.
그제야 관객은 깨닫는다.
저 배우가, 배우였단 사실을.
그가 왜, 무슨 이유로 저곳에서 연기하는 건지 궁금증을 남긴 채로 화면이 전환된다.
-‘1년 전. 서울.’
자막으로 표시되는 시간의 역행.
본격적으로 그들의 영화 제작기가 시작된다. 영화는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사건들을 유쾌하고 기발하고 과감하게 담아냈다.
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모인 수많은 사람의 사연.
때로는 감독. 때로는 배우. 때로는 스태프의 이야기가 ‘영화’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영화에 울고, 영화에 웃는다.
-우리 얘기 좀 하죠?
배경이 베를린으로 바뀌었다.
의태(원명우)와 정송래(서정교)가 영화 촬영을 앞두고 다시금 계약서를 확인하는 장면.
빠른 호흡의 대화는 칼처럼 서로를 찌른다.
-제일 중요한 사항. NG 금지. 못 쓸 테이크라고 해도 내 얼굴 보고 NG라고 소리치지는 마세요. 기분 좆같으니까.
거친 언사.
투박한 가치관.
두 사람의 관계에도 찬 바람이 분다. 쌩쌩.
-너 NG라는 게 얼마나 고마운 건지 아냐?”
-지랄.”
-다시 해봅시다, 기회 주는 거야. 만회할 기회. 회개할 기회. 되돌릴 기회. 다시 살 기회. 그 기회 주는 하늘의 신호가 바로 NG라고. 난 내가 죽을 때 저승사자가 내 앞에 나타나서 ‘아, 죄송요. NG입니다.’라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인데? 넌 안 그래?”
-욕심은. 그렇게 오래 살고 싶어?
유머도 잊지 않고,
-카메라 앞에서 도망치지 마라.”
-나한테는 연기가 곧 도피처거든. 이 빌어먹을 세상 속 유일한 숨구멍이지. 그런데 또 어디로 가겠어. 당신이 그런 사람들로만 모아놨더만. 아니야?”
인물의 표현도 섬세하다.
폭력과 욕설이 오가는 엽기적인 상황을 보여줄 때도 그랬다.
레스토랑. 회식 자리에서 싸움이 발생한다.
-남 흉내만 내는 주제에. 속은 텅 비어있는 주제에. 남의 껍데기나 뒤집어쓰고 사는 가짜새끼. 넌 싸구려야. 알아? 네가 내는 인위적인 오오라는 천박하고 품위 없어. 관찰하고, 찍고, 보는 게 일상인 이 영화 촬영 스태프들은 다 알아. 이 쓰레기야.”
-·······이 씨발 놈이.”
긴장감 넘치는 싸움이 한 차례 지나가고.
카메라가 의태(명우)의 얼굴을 아래에서 찍는다.
그의 분노가 고스란히 관객에게 노출됐다.
-네가 함부로 입속에 넣고 굴릴 영화가 아니야! 이 더러운 새끼야!
곰의 포효 같기도 한 울분.
-내 영화 내놔!
맹목적으로 내뿜는 분노에 공기가 진동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영화에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겨울바람처럼 냉혹하고 잔인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아무리 강한 폭풍이 그들을 쓸어버리려고 해도 악착같이 버텨낸다.
영화가 끝나간다.
-허억, 후우.
첫 장면과 연결되면서 배경은 다시 설원이 된다. 눈밭을 파헤치고 휘청거리면서 오르는 정상.
-최고의 연기를 펼쳐봐.
감독이 신호를 주고 카메라가 돌자 배우가 연기를 시작한다.
익숙한 독백이지만 이면에 얽힌 이야기를 알게 되니 완전히 새롭다. 배우의 몸짓은 너무나도 자유로웠고 동시에 결의에 차 있었다.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영상이 계속해서 펼쳐진다.
그것은 이생을 연기에 바치겠다는 각오였다.
배우는 온몸으로 주장했다.
자신이 바로 위대한 연기자라고.
“······하아.”
“으음.”
“흐으윽, 흡······.”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객석은 침묵에 빠졌다.
깊은 여운에 사람들은 넋이 나가 있었다.
‘너는 이렇게나······.’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리핀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경지에 다다랐구나. 명우야. 넌 이뤄냈구나.’
그리핀은 느낄 수 있었다. 명우가 이뤄낸 발전을. 인생을 바쳐 일궈낸 연기를.
그는 관객들에게 그토록 뛰어난 가치를 선사했다.
막을 수 없다. 외면할 수 없다. 눈 감을 수 없다. 그저 밀려 들어오는 감정에 휘청거릴 뿐.
“······하, 하하하!”
그리핀은 너무 좋아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흠칫하는 사람들.
그제야 박수 소리가 극장에 퍼지기 시작했다.
“브라보!”
“이럴 수가!”
“이런 충격은 처음이야!”
그리핀은 한 사람의 감독으로서, 팬으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존경의 박수를 보냈다.
*
베를린 국제 영화제를 취재 중인 프랑스의 기자, 클로에.
영화제가 한창 진행 중인 거리를 횡단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축제의 신나는 분위기가 카메라에 고스란히 비춘다.
“당신이 가장 기대하는 영화는 무엇인가요!”
“난 한국 영화 팬이에요! 가장 보고 싶었던 <위대한 연기자>를 이미 보고 나왔죠. 정말 최고였어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누구입니까?”
“원명우! 무조건, 그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싫어할 수가 없으니까!”
“당신이 사랑하는 감독은 누구죠?”
“그리핀, 그리고 두용곤! 사랑해요!”
인터뷰를 진행하면 할수록 심상치 않은 빈도수로 등장하는 한 배우의 이름.
이번에 만난 관광객 또한 원명우를 울부짖었다.
매우 열광적으로.
“원명우 배우를 보러 오셨다고요! 그에게 어떤 매력이 있습니까?”
“지금 딱 떠오르는 건 그의 표현법이네요. 그는 늘 영화 속으로 저를 끌고 들어가요. 스크린 속에서 정신없이 죽고 살고 하다 보면, 인생을 한 번 더 살아본 것 같은 착각이 들어요. 그건 배우가 불어넣어 준 실감이죠. 인생을 한 번 더 산다. 이 꿈 같은 찬스를 외면하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인상적인 답변이네요. 감사합니다.”
잠깐 끊었다가 가죠.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잠깐 쉬어가는 그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본다.
곳곳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영화를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가득하다.
“대단한 열기야.”
추위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열정적이었다.
그녀에게 다가온 카메라맨은 의아하게 물었다. 인터뷰 내내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원명우의 영화가 그렇게 재미있던가? 넌 봤지?”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도 <위대한 연기자>의 공식 상연을 관람했다.
“지금 들려오는 이야기만으로도 영화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는 알겠지? 그런 영화야. 관객들에게 짙은 흔적을 남기는 영화. 모든 면에서 훌륭했어.”
“그렇다면 수상이 유력하겠네? 경쟁 부문 영화니까.”
“<위대한 연기자>는 솔직히 어떤 상을 타도 이상하지 않아.”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카메라맨은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어떤 상을 타더라도 영화의 본질이 가려지는 일은 없다는 소리로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여기서 무슨 상을 타든, 심지어는 타지 못하더라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을 절대적인 작품성을 이 영화는 가지고 있다.
위대한 감독과 배우, 그리고 스태프를 닮은 이 영화는.
“그 영화는 완벽했어.”
*
영화의 성공적인 상영 후,
각종 포토콜, 프레스 컨퍼런스 등 공식 행사에 참여하는 사이 열흘이라는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폐막식과 시상식을 위해서 극장에 입장한 영화 팀.
옆에 앉은 두용곤 감독이 명우에게 물었다.
“그리핀 감독은 말도 없이 가셨나?”
“네. 작별 인사도 없이 가셨네요.”
문자 한 통 남겨두고 말이다.
-그리핀 감독: 영화 잘 봤다. 넌 위대한 연기자야.
짧은 감상평이었지만 충분한 한 마디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리핀이 <위대한 연기자>를 보고는 기립박수를 쳤다고 하던데······아마 사실일 것이다.
명우는 알 수 있었다. 다른 말 없이도.
“그래도 영화가 마음에 든 눈치더라고요.”
그가 자신의 연기에 매우 흡족했다는 것을 말이다.
신난 걸음걸이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콧노래라도 부르면서 돌아갔겠지.
어쩌면 또 새로운 영감에 눈떠서 다음 작품을 준비하러 갔을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아주 장난스럽게 시나리오를 보내올 것이다.
그리핀은 그런 사람이니까.
“수고 많았어, 명우야.”
“제가 뭘요. 감독님이 고생하셨죠.”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고 있을 때 때마침 진행자가 시상식의 시작을 알렸다.
한곳에 모인 각 부문의 영화들.
박력있게 진행되는 영화제 시상식은 꼭 성스러운 의식처럼 보였다.
이름을 불린 주인공이 앞에 나가 곰 모양 트로피를 끌어안는다. 소감을 말하고 기쁨을 나눈다.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은 타인의 일이어도 즐거웠다.
‘과연 이 영화가 받게 될 첫 번째 상은 뭘까.’
명우가 시상식을 즐기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환호와 아쉬움 사이로 두용곤 감독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들려왔다.
“유난히 배우상이 어울리지. 이 영화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제목답게. 내가 담아내고 싶었던 이야기답게. 안 그래? 네가 꼭 받아주면 좋겠는데.”
“······어깨가 무겁네요.”
“힘 좀 내봐.”
“만약 상을 타면 단상에 올라가서 제일 먼저 감독님께 감사를 표할게요.”
“하하. 남는 장사로군.”
“그 반대 때도 그렇게 해주셔야 합니다.”
“그야 물론.”
환하게 웃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영화에 대한 믿음이 가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망의 순간이 찾아왔다.
단상 앞에 선 시상자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결과를 발표했다.
“베를린 국제 영화제, 주연상! 그 주인공은······”
세상은 끝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위대한 연기자, 원명우.”
위대한 연기자 원명우.
그는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말했다.
“배우는 절대 혼자 만들어질 수 없다. 그것을 알게 해준 당신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정말 뜻깊은 날이네요. 위대한 연기자를 탄생시킨 모든 이에게 이 상을 받치고 싶습니다.”
*
[<위대한 연기자> 원명우 베를린 국제 영화제 대망의 주연상 수상! 은곰상 쾌거!] [드디어 일 냈다! <위대한 연기자>에서 배우 역할을 연기한······한국 남자 배우 최초 주연상 수상!] [주연상, 원명우의 연기자 일대기 정리. 첫 데뷔작은?] [베를린이 반한 배우, <위대한 연기자> 원명우! 개봉은 언제? 올해 말 예상!] [국내외로 호평이 자자! <위대한 연기자> 어떤 영화길래? 미리 보는 원명우의 미친 연기력! ‘원명우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든 연기를 통틀어 가장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벽을 깨다!]└축하합니다!!!
└원명우 주연상 수상!!! 이거지!!!
└ㅠㅠㅠ미쳤다 진심!! 자랑스러운 한국의 배우 원명우ㅠㅠㅠ
└드디어 국제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타내!!
└사실 시간 문제였음ㅋㅋㅋ 이미 원명우는 전설의 반열에 드는 연기를 늘 우리에게 보여줘 왔다.
└ㅇㅈㅇㅈ
└지금 영화 본 사람들 올라오는 후기에는 진짜 완전 소름에 오한에 눈물 콧물에 다 쏟는다고 하던데ㅋㅋㅋ 그 정도 연기라고 함ㅋㅋㅋ
└본 사람마다 기겁하는 중.
└해외 후기들 진짜 다들 극찬이다.
└평점 미쳤음ㅋㅋㅋ
└개봉하면 무조건 보러 간다ㅠㅠㅠ
└제발 빨리 상영해주세요 무조건 보겠습니다.
└우리 곁에 있어서 너무 좋다!!! 최고!
└원명우 지금까지 영화 찍느라 너무 수고 많았어요ㅠㅠ
└수상 축하합니다!
<위대한 연기자>로 명우가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았다.
뿌듯한 쾌거에 사람들은 열열한 성원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명우에게 열광하게 되는 것은 영화가 개봉된 후의 일이었다.
도서전
베를린 국제 영화제 주연상 수상.
성공리에 마무리한 첫 공식 상영.
베를린 국제 영화제가 끝난 후, 명우는 해외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바쁘게 비행기를 타고 돌아다녔다.
미국 유명 잡지의 표지 모델을 장식하거나 여러 언론사와 인터뷰, 명품 브랜드의 패션위크에 참석하는 등.
이제 전 세계에서 명우를 안 찾는 곳이 없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겨우 시간이 났네.”
그 모든 스케줄을 소화한 후 찾아온 간만에 여유.
명우는 기회가 될 때 들르려고 벼르던 곳에 방문했다.
“오랜만에 맛있는 커피 한 잔 즐기러 가볼까.”
골목 사이에 위치한 익숙한 카페.
솜씨 좋은 바리스타가 있는 곳.
집필 장소기도 했던 장소.
오랜만이다.
명우는 입구에서부터 풍기는 향긋한 원두 냄새를 음미하다가 문을 열었다.
딸랑-.
인기척에 고개를 든 주인장.
한때 작가 지망생이었던 카페의 주인, 랜돌프다.
그는 명우를 발견하고 놀라워했다.
“너······.”
“또 온다고 했죠?”
“하핫, 어쩐지 아까부터 새가 울더라니. 반가운 이가 올 징조였나. 스타의 귀환이로군.”
그는 명우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러고는 주방에서 뭔가를 꺼내왔다.
명우가 집필한 <생애의 도중>의 번역판이었다.
불쑥 내밀고 딱 한 마디한다.
“사인해줘.”
“자, 여기요. 사진까지 찍어드렸습니다.”
“이건 사진값.”
“감사합니다. 책 좀 봐도 되죠?”
“물론이지.”
명우는 그가 서비스로 내준 수제 크렘 카라멜을 먹으며 번역된 책을 살펴보았다.
표지도 질감도 다르다.
번역된 문장들. 자신의 글을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옮겨낼 수 있을지 성의 있게 고뇌한 티가 났다.
수준 높은 번역에 만족하고 있으니 맞은 편에 앉은 랜돌프가 말했다.
“네 인기는 서점가에서도 엄청나. 작가라서 너도 잘 알겠지만, 정말 센세이션 해.”
그렇다고 하더라.
해외에서 자신의 책이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단 소식은 한국에서도 뉴스가 됐다.
<생애의 도중>에 대한 호평 역시도.
“다 읽으셨어요?”
“읽었지. 읽을 수밖에 없었어. 중간에 멈추지를 못했거든.”
“어떠셨어요? 마음에 드는 책이었습니까?”
“들다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더라고. 진짜 네가 쓴 건지 의심이 들 정도였어.”
“너무하신데요.”
“그도 그럴 게, 어휘도 그렇고 문장도 그렇고······상상 이상이었으니까. 알고 보니까 넌 내가 응원할 필요도 없는 천재 소설가였더라.”
“좋은 장소를 제공해주신 덕이죠.”
“역시 작가야. 말은 잘해. 그래서, 이번에는 오래 있다가 갈 건가?”
“아쉽지만 제가 나름 바쁜 몸이라서요. 독일에서 열리는 도서전에도 가볼 예정이거든요.”
“도서전?”
명우의 말에 눈썹을 들썩이는 랜돌프.
그렇다.
명우는 도서전에 가볼 생각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책이 그곳에 있을 예정이니까.
“제 책을 출간한 한국 출판사도 참여한다고 해서요. 마침 시간도 돼서, 구경하러 가기로 했죠.”
독일의 한 도시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규모의 유명 도서전. 전 세계의 출판업계의 관계자가 모이는 교류의 장. 매년 수십 만명의 방문자가 찾아온다.
한국 문학을 소개하기 위해 한결 편집자도 출장을 온다지.
랜돌프는 짐짓 커피를 내릴 때처럼 전문적인 표정으로 명우를 보고 말했다.
“네가 작가로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처음 아닌가? 보통은 독자들과 만나는 행사를 하기 마련인데.”
“아무래도 바빠서요. 그리고······독자 앞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타입의 작가는 아니거든요, 제가. 이번 도서전에도 공식적으로 초청되거나 뭐 그런 건 아니고요. 구경하러 가는 겁니다.”
전생의 영향 때문일까, 외부 행사에 적극적으로 얼굴을 내미는 작가는 못 될 것 같았다.
“널 궁금해하는 독자 생각도 좀 해주지 그래? 뭐, 어찌 됐든 그곳에서 널 목격할 사람들은 좋겠군.”
두 사람은 근황을 나누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명우는 이 여유로운 시간을 편하게 즐겼다.
*
“위대한 연기자 원명우라. 입에 잘 달라붙어.”
미국에 위치한 ‘버나드 미술관’의 손님 실.
그곳에 곧은 자세로 차를 마시는 한 노인이 있다.
은근히 부티가 나지만 몸에 걸친 옷은 검소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손가락에 낀 금반지가 유난히 빛나고 있다.
원명우의 말동무, 구보은이다.
그는 손님 실에 구비된 TV에서 연신 보도 중인 영화제 주연상 수상, <위대한 연기자>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언제 봐도 흥미롭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미술관 관장인 라이언 테일러와 함께.
그는 일전, 한국 ‘제이 옥션’에서 진행한 프리미엄 기부 경매에 참여해 원명우의 작품을 낙찰받은 전적이 있는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기도 했다. 미술계의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다.
“잠깐 눈을 떼기만 하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거든요. 보다 보면 놀라워요. 누군가 아주 잘 빗어놓은 작품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그렇지. 그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는 사람이지.”
“낭만적이네요.”
라이언은 잔을 내려놓으며 구보은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이 먼 길을 다 오시고. 소식 들었을 땐 놀랐습니다. 오랜 시간 비행하는 게 힘들지는 않으셨습니까?”
“고되긴 했지만, 말동무가 저렇게 글로벌하게 활약하는 걸 보고 있자니 몸이 근질근질해서 말이야.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돌아다녀야겠다 싶어서. 간만에 해외로 나와봤지.”
“멋지십니다.”
“그래서, 잘 지냈나? 준비 중인 전시는 어떤가?”
구보은이 최근 소식을 묻자 라이언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버나드 미술관’에서 새롭게 열릴 컬렉션 전.
이곳에서 열리는 전시회는 매년 미술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그가 수집가로서 가지고 있는 가치를 생각하면 많은 사람이 이 미술관에 모여들리라.
“수월합니다. 특별히 엄선한 작품들로 선보일 예정이에요.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구보은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볼만 하겠어.”
“거기서 메인이 될 작품이 뭘 것 같습니까?”
구보은은 길게 시선을 마주했다.
라이언이 씩 웃는다.
“특별히 초대권을 드리죠. 부디 방문해주세요. 아무리 높은 당신 눈이라도 만족할만한 전시회가 될 테니까. 요 몇 년 사이, 제가 성공적으로 사들인 작품이 꽤 많거든요.”
“알겠네. 시간이 나면 들르지.”
구본은은 어디 한번 보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이 혼자는 힘드니 말동무를 데리고.”
*
“원명우 작가님은 정말 대단해!”
독일에서 열린 도서전.
개막 5일 차.
‘영민사’ 부스에 잠시 앉아서 한숨 돌리는 한결 편집자는 정신없이 책의 축제를 만끽하고 있다. 수많은 관계자와 판권에 대해 논하고 자국의 책을 소개한다.
“작가님에 대한 질문이 정말 많이 들어와.”
역시나 올해, 가장 주목받는 것은 원명우 작가의 <생애의 도중>이다.
해외 출간 후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생애의 도중>.
한창 상승곡선을 그리는 중에 작가님이 국제 영화상을 수상하니 더욱 뛰어오르는 판매량.
서점가에서도 원명우는 월드 스타였다.
“원명우 책 있어요?”
“오, 여기가 바로.”
“<생애의 도중>이 여기 부스 맞죠?”
그동안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으나, 해외 출장을 온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그의 인기를 실감했다.
<생애의 도중>은 국내에 이어 해외에서도 줄지어 백만 부를 돌파했다. 곳곳에서 1위 행렬. 증쇄가 이어지고 세계 3대 문학상의 수상자이기도 한 월터 작가에게 공개적으로 극찬 받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해서 쌓여가겠지. 평판도 그렇고, 누적 판매수도. 천만 부, 이천만 부······”
상상할수록 가슴이 뛴다.
한국 출판계의 전설로 남을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원명우는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딱 한 권으로.
“대단해.”
“뭐가요?”
“앗, 명우 작가님! 오셨군요!”
소리 소문도 없이 당사자가 등장했다.
한결은 누구보다도 더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되게 바빠 보이시던데요?”
“작가님 덕분에요.”
그는 도서전에서 지금껏 들은 이야기를 명우에게 전해주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등 출판 강국에서도 전부 대형 출판사들이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표했노라고.
이런 얘기를 듣고도 담담해 보이는 명우에게 한결은 물었다.
“작가님, 도서전은 어떠세요? 처음 오셨잖아요.”
볼거리도 많고 즐길 거리도 많습니다.“
”사람이 많고 작가님들도 많죠?”
“그러네요.”
“다들 작가님 알아보시지 않았어요?”
그에 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알아본 몇몇 사람들과는 조용히 인사를 나누고 왔다.
한결은 그럴 줄 알았다는 시선으로 답했다.
“지금 이 출판계에서 제일 주목하고 있는 작가님이시니까요. 이런 관심이 익숙하시죠?”
명우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배우로서야 그렇지만 작가로서는 글쎄.
신선한 부분도 없지 않았다.
“아, 혹시 월터 작가는 보셨어요? 도서전에 참가하신다고 들었는데.”
“저는 못 봤습니다. 아직 다 둘러보지도 않았고요.”
월터.
세계적인 작가. 그의 책은 한국에서도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책을 안 읽는 사람도 이름은 알 만큼 엄청난 업적과 수상 경력을 가진 작가다.
“그의 문장은 꼭 칼 같죠. 속내를 까발리는 재주가 특출난 작가님이세요.”
“그래서 세계적으로 엄청난 독자를 거느리고 계시는 거죠. 명우 작가님처럼요.”
“하하.”
혹시나 그를 보게 되면 알려주겠다고 그에게 말하고 명우는 다시 도서전 구경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여기를 봐도 책, 저기를 봐도 책.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명우는 다양한 나라의 여러 책을 살펴보면서 오랜만에 마음껏 문학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100개국에 가까운 나라에서 참석한 대규모 도서전답게 들려오는 언어도 각양각색이었는데, 명우는 어렵지 않게 그들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명우는 자신의 이름 또한 자주 포착했다.
“원명우의 책을 봤어?”
“<생애의 도중>은 내가 올해 읽은 책 중 1등이야!”
“아, 저는 <생애의 도중>이 역시 기억에 남네요. 안 그래요. 들?”
책의 세상에서 일하는 사람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들이 찾는 도서 대상에 자신의 글이 포함된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더 기분 좋은 일이었다.
명우는 속으로 감사를 표하고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대부분 둘러본 것 같은데. 어디를 가볼까. 오호, 저기는 뭐 하는 곳이지?’
도서전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중앙에 위치한 홀에서 북 토크를 진행 중인 한 작가가 보였다.
“······저기 있었군.”
한결 편집자가 언급한 세계적인 작가, 월터가 저기에 있다.
취재 중인 기자들도 보인다.
‘나도 좋아하지, 저 작가의 이야기는.’
상당히 냉철한 시각으로 써 내려가는 이야기에는 확실히 그만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올해 출간한 신작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다.
갈색 머리카락에 눈동자. 교수풍의 남성은 상당히 정갈한 말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잠시 구경하던 명우는 한결에게 이야기도 전할 겸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지만 않았다면.
“사실 올해에는 이 책보다 한국 소설, 원명우라는 작가가 더 주목받고 있죠. 하지만 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 책을 읽었거든요. 정말이지 대단한 작품이었어요.”
극찬이다.
그러나 거기 끝나지 않았다.
“그는 윌리엄처럼 단 한 권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부 담아냈죠. 여러분, 다들 그의 이야기를 읽으세요. 내 책은 안 읽어도 <생애의 도중>은 꼭.”
“헉, 원명우!”
맞은 편,
북 토크를 듣던 한 관객이 명우를 발견하고 큰소리를 냈다.
최고의 화가
명우를 발견하고 큰 소리를 낸 관객은 제풀에 놀라서 입을 가렸다.
당연히 그런다고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모두가 명우를 바라보았다. 월터 작가를 포함해서 전부.
두 작가의 눈이 마주친 순간, 주변에서는 환호성이 퍼졌다.
“세상에, 원명우야!”
“그가 여기에 있을 줄이야!”
“어, 어서 사진 찍어! 이런 만남이 성사되다니 꿈만 같아!”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도 놀란 표정이다.
작가와 작가의 만남. 주변에서 구경 중이던 손님과 관계자들은 다들 눈을 빛냈고, 이 갑작스러운 해프닝을 환영하는 눈치였다.
월터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명우를 향해 손을 뻗는다.
“이럴 수가! 이렇게 만나다니! 잠시 이쪽으로 오셔서 인사라도 하시겠습니까?”
화끈한 제안이다.
스태프 중 한 명이 명우에게 다가와 말했다.
“올라가셔서 인사라도 하세요, 작가님!”
“네? 아니, 그래도.”
“어서요!”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결국, 명우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고 바로 단상으로 올라갔다.
“우와아아!”
“후우우우!”
“그래, 이거지!”
작가로서 독자들 앞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최초의 순간.
‘이렇게 된 이상,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어차피 이렇게 된거 즐기자.
목을 가다듬고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유창한 영어가 그의 입에서 쏟아져나왔다.
“안녕하세요, 작가 원명우입니다.”
작가 원명우를 향하는 우레와 같은 환호성.
소란이 일자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며 더 많은 인원이 몰렸다. 어느새 일대에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명우와 월터를 알아보고는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의자 하나가 월터의 옆에 놓이고, 그곳에 명우가 착석하자 본격적으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당신에게 아주 좋은 소식이 있었죠. 늦었지만 축하해요.”
“하하, 감사합니다.”
“난 당신을 배우로서도 알고 있어요.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은 사람으로서 당신의 다음 영화도 응원하고 있죠. 이렇게 만났으니, 전부터 궁금했던 걸 몇 가지 물어도 될까요?”
물론이다.
명우의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그는 차근히 이야기를 진행했다.
“누군가의 글을 논할 땐 그의 인생도 함께 돌아봐야 하죠.”
“네.”
“당신은 연예계에선 하늘의 별이고, 문학계에서는 놀라운 존재입니다. 그 외에도 당신에게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다양한 재주가 있는 걸로 압니다. 지금의 당신은 어떻게 해서 태어났죠?”
흠.
잠시 자신의 첫 순간을 떠올려본다. 있는 그대로를 말할 순 없겠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별은 어둠에서 탄생하고 놀라움은 지루함에서 태어나죠. 지금은 다소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과거지만 그 시절의 전 낙제생에 가까웠어요. 첫 데뷔를 이루기까지 엄청나게 많은 오디션에서 떨어졌습니다.”
“베를린에서 그 쟁쟁한 배우들을 다 제치고 주연상을 타낸 당신이요? 칸에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하고, 오스카 남우 주연상을 거머쥔 당신이 말이죠?”
“하지만 사실에요. 과거의 전 텅 빈 사람이었어요. 미숙하고 남의 기준을 충족하는 일이 드물었죠. 아무것도 없으면서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조차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는 없었죠.”
“마주한 거군요.”
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면할 수 있는 과거는 없어요. 아무리 용을 써도 과거는 바꿀 수 없으니까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자 미래가 보였어요.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걸 실감했죠.”
“꿈을 찾았군요. 당신을 움직이게하는 꿈을.”
“그때부터 이야기가 탄생하더라고요.”
“이 책에 담긴 내용 또한 그렇습니다. 주인공이 길을 개척하며 여행을 즐겨요.”
“맞습니다.”
책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생애의 도중>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고 나서 그는 길게 책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난 이 책을 읽고 감탄했습니다. 차라리 경악에 가까웠죠. 여러 인생을 한 사람에게 욱여넣은 것 같은 방대함은 도저히 내가 접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묻고 싶었어요.”
“뭔가요?”
“당신이 쓴 글에서 가장 후회되는 부분은 어딥니까?”
재미있는 질문이다.
명우는 담담하게, 그저 사실을 말하는 건조한 어조로 답했다.
“전 집필을 시작할 때, 설령 이 작품을 쓰다가 죽어도 후회 없을 글을 쓰자고 다짐했습니다. 그 다짐을 지켰고요.”
“하하, 네. 그럴 것 같아서 물었어요. 그런 글이었어요. 당신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졌습니다.”
그는 명우의 답을 예상했다는 듯이,
마음에 든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빌어 말씀해주시죠.”
즉흥적으로 벌어진 상황인 만큼 여유 있는 인터뷰는 아니었지만 월터도 명우도 만족했다.
객석으로 시선을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책을 발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알아줄 거란 믿음이 없었다면 전 펜을 들지 못했을 겁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또 만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일어나서 고개를 숙인다.
그런 명우에게 쏟아진 누군가의 외침.
“천재 소설가!”
명우는 환호성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이 유쾌한 해프닝은 관객들의 손에 의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연일 화제가 됐다.
원명우 작가의 첫 공식 일정은 훗날 출판업계의 전설로 남게 된다.
*
신나게 도서전을 즐긴 명우.
이제 영화 개봉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하면서 여유롭게 짐을 쌌다.
영화 개봉 전 마지막 여유를 즐기려고 하는데, 구보은에게 연락을 받았다.
“어라, 구보은 선생님이시네? ······미국에 계신다고?”
시간이 괜찮다면 얼굴 한번 보자는 제안.
당연히 응했다.
“선생님.”
“한국 밖에서 봐도 여전하군.”
“그러는 선생님도요.”
그가 미국에서 지내는 자택은 상당히 으리으리했다. 그 속에서 구보은의 검사한 복장은 더 잘 눈에 띄었다.
구보은은 잘 자란 농작물을 보는 표정으로 명우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만나니 알겠군. 늠름해졌어.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됐구나.”
“원래 어른이었어요, 선생님.”
“그랬지. 그런데 이제는 관록이 붙었구나. 보기 좋아.”
“하하. 감사합니다. 잘 지내셨어요?”
“관광도 하고 볼일도 보고. 너는. 라이언하고 만났나?”
라이언 테일러.
자신의 작품을 소유하고 있는 미술계의 유명인. 명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소식은 들었어요. ‘버나드 미술관’에서 전시를 연다면서요.”
워낙 유명 인사니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았더라도 알았겠지만 그가 먼저 소식을 전해왔다.
“그곳에 자네 작품이 전시되는 것도 알지?”
“네. 대략적으로는 설명을 들었어요”
“가서 볼 건가?”
명우는 긍정의 의미로 미소 지었다.
봐야지.
‘명우’로서 그린 그림이 미술관에 걸리는 건 처음이니 어떨지 기대가 됐다. 마침 미국에 있기도 하고.
명우가 긍정을 표하자 구보은이 반갑게 말했다.
“응. 그럴 것 같아서 같이 가자고 연락 한 거야.”
“가까이에 계신 줄 알았으면 제가 먼저 제안 드렸을 겁니다.”
구보은은 명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멋지게 차려입고 오라고. 미술계의 유명 인사들이 다 모이는 자리일 테니까.”
-라이언 테일러 컬렉션 전 개최! 첫날부터 수많은 방문객이 ‘버나드 미술관’을 찾았다. 뛰어난 안목으로 고른 수많은 작품 중에서······한국 작가, 명우의 작품 또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으로 방문객 대부분이······
“역시 반응이 좋구나.”
차 안.
명우는 기사를 대동한 구보은의 차를 얻어타고 그와 함께 보내준 ‘버나드 미술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한국 기사를 살피며.
한국에서 한때 화제가 됐던 명우 대표작, ‘우상’을 보러 오고 싶다는 댓글들이 많이 보인다.
└원명우의 작품은 맨눈으로 봐야 한다던데ㅠㅠㅠ가고싶다ㅠㅠㅠ
└가서 본 사람을 말 들어보면 원명우 작품 전시 되게 잘해놨다고 하던데 궁금하다.
└라인업 미쳤다······진심 원명우는 전설적인 존재구나.
└저게 버나드 미술관에 걸리네ㅋㅋㅋ진짜 클래스가 다름. 왜 미국에서만 하냐고ㅠㅠㅠ
└전 미국 살아서 보고 왔는데 정말 제 인생 최고의 전시회였습니다. ‘우상’ 최고였어요.
“한국에서도 반응이 좋지?”
“네. 방문한 사람들 평도 좋네요.”
“기대가 되는군.”
차가 부드럽게 정차했다.
창밖으로 엄숙하고 절제된 미술관의 외관이 보인다. 저곳에 자신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이 많네요.”
“아무렴.”
구보은이 앞서 예고한 대로 유명한 미술 평론가나 화가, 미술 전문 기자, 갤러리 관계자 등이 많이 보였다.
입구에 깔린 붉은 카펫을 밟고 안으로 들어가자 실내의 공기가 얼굴로 끼쳐왔다. 그때부터 미술의 공간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바깥과 다른 온도.
울리는 발소리.
늘어선 작품들.
구보은과 명우는 말없이 감상을 시작했다.
신화를 모티브로 삼은 그림. 핏빛 역사를 간직한 미술품이나 작자 미상의 고전작품, 미술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던 화제작까지.
과격하거나 우아하거나, 과감하거나 섬세하거나, 지적이거나 우스꽝스럽거나.
붓 하나로 남긴 누군가의 의지를 정신없이 감상했다.
“······눈이 즐겁네요.”
미술관에서는 유난히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한 섹션을 감상하고 나왔을 때 명우가 말했다.
미술 작품을 구경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마음이 풍족해진다.
“다음 구역으로 넘어갈까요.”
방 형태의 공간이 나온다. 안으로 들어가자 새로운 전시 작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으음.”
명우와 구보은이 동시에 반응했다. 특히나 구본은의 표정이 환해진다.
그곳에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 반의 작품이 나열되어 있었다.
‘반의 작품. 나의 작품. 오랜만이네. 전시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실제로 보니 기분이 남달라.’
연도별로 나열된 작품을 쭉 감상하다가 한 작품 앞에서 발을 멈췄다.
-반의 <초상화>. 시기 미상.
작품에 관해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많이 얽혀있기로 유명한 서양 화가, 반.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거대한 그림이었다.
우수해 보이는 남자가 비스듬히 서서 기댄 채 허공을 보고 있다.
‘그리운 그림이구나.’
약간은 향수에 젖어서 과거의 자신을 맞이했다.
그 앞에 당당히 서 본다. 지금의 자신은 과거의 자신에게도 결코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니까.
어떠냐.
난 이번 생에도 잘살고 있다.
“어? 저 그림 웃고 있다!”
“얘가, 쉿! 조용히 해야지.”
“엄마! 방금 웃었어!”
“알았어, 알았어.”
자화상 속 과거의 자신은 어쩐지 웃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이렇게 반가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보러 와보는 건데.’
생각보다도 더 반가운 재회여서 명우는 유난히 이 구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는데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자네 그림이군.”
또 다른 명우의 작품, <우상>이 있다.
유난히 그 앞에 수많은 사람이 멈춰있는 게 보였다.
100세에 가까워 보이는 노인부터 8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까지 입을 꾹 다문 채로 진지하게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정말 진지하게.
과거를 만나고 와서 그런가. 만감이 교차했다.
‘다들 알까?’
실은 이곳에 있는 모든 자화상이 오직 한 사람을 모티브로 한 그림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아볼까?
화가의 의문에 감상자들은 감탄으로 답했다.
“새 생명을 얻고 되살아 난 것 같은······왜 이런 생각이 들지? 이상해.”
“놀라워······저 작품 이면에 심상치 않은 사연이 얽혀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구려.”
“하아, 뭐가 나를 이렇게 감동에 젖게 만드는 걸까.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서······주체할 수가 없네.”
과거부터 현재까지.
반과 명우가 만나면서 한 인물이 지나온 까마득한 시간의 경계가 이 공간 어딘가에 생겨났다.
그 묘하고도 기이한 감각에 다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보는 명우의 <우상>은 각별했다.
“다들 네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군······나도 그렇고.”
모두가 명우의 작품을 우러러봤다.
이 미술관에서 오직 이 작품만이 줄 수 있는 단 하나뿐인 감상에 다들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