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seong Detective Agency RAW novel - Chapter 159
============================ 작품 후기 ============================
* 자동차부란 자동차로 사람이나 화물을 운송하는 운수업체를 말하며, 당시 전국적으로 여러 개의 자동차부가 있었습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용회자동차부 역시 당시 간도 용정에 실재했던 업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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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전야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소화는 모로 돌아누워 이불을 끌어당기며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귓가로 벽에 걸린 시계가 째깍대며 돌아가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 왔다. 해경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과거를 털어놓은 이후, 소화의 머릿속에서는 내내 그 생각들이 떠나지 않았다.
왜 해경이 때로 그렇게 비밀을 감춘 사람처럼 굴었는지, 왜 권중만에게 그토록 날카로웠는지, 왜 그 한 장의 사진을 그렇게 간직하고 있었는지 항상 궁금했지만 답을 알게 된 지금도 속이 후련한 것은 아니었다.
소화는 문득 할아버지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혼자서 경성으로 오는 기차를 탔던 때를 떠올렸다. 지금은 그것이 마치 아주 먼 일처럼 느껴졌지만 그렇다 해도 그 때 느꼈던 감정들까지 희미해지지는 않은 채였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 아득하고 두려웠던 그 기차 안에서, 소화는 지금처럼 자신을 보살펴 주고 가족처럼 대해 줄 누군가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소화는 해경 역시 오랫동안 그렇게 여기지 않았을까 생각하다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드시 자신이 해경을 도와주겠다고 이야기했지만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이 인혜 같은 사람이었다면 훨씬 더 도움이 되었을 텐데, 하고 생각한 소화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닫힌 창을 열자 보름에 가까워진 달빛이 후원 가득 흐드러지게 쏟아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꽃도 나무도 한창인 후원의 밤은 아름다웠다. 한낮처럼 등을 밝힌 향운정에서 담장 너머로 노랫가락이 희미하게 바람에 실려 떠돌아 들어왔다. 누가 부르는 것일까, 구성지게 뽑아내는 가락에 창가에 턱을 괴고 앉은 채 멍하니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소화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소화 양.”
깜짝 놀란 소화는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온 것인지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인혜가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소화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방 안으로 들어선 인혜는 시계를 보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창이 열려 있기에 감기에 걸릴까 싶어 왔더니, 늦었는데 왜 아니 자는 건가요?”
“잠이 잘 오지 않아서요, 별 일 아니어요.”
소화가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하자 인혜가 가까이 다가와 소화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몸이 아픈 것은 아닌 모양인데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군요.”
소화는 그 말에 움찔하며 인혜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 것도 아닌 양 했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사람 대하는 일을 오래 한 탓인지 인혜를 속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만히 소화를 보고 있던 인혜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미스터 정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네?”
“소화 양이 그리 잠을 못 이룰 일이 또 있을까 싶어서요.”
부드럽고 다정한 말투였으나 소화는 그 말에 바늘에 찔린 듯 가슴 한구석이 따끔해졌다. 마치 무언가를 훔치다 들킨 어린 아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귀 끝이 빨개져 시선을 내리는 소화를 본 인혜가 창 바깥으로 눈길을 주며 입을 열었다.
“벌써 여기에 온 지 일 년이 넘었지요?”
소화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인혜가 미소를 지었다.
“처음 미스터 정이 소화 양을 잠시 돌보아 달라고 데려왔을 때 내심 무척 놀랐답니다. 몇 년을 알고 지내도 그런 일은 처음이었어요. 후에 보니 어쩌면 그때 미스터 정이 소화 양을 보고 자기 처지가 생각이 났던 것이 아닌가 했어요. 나도 소화 양을 보면 옛 일이 떠올라 주고받는 것 없어도 마음이 갔지요.”
인혜가 자신을 보고 옛 일을 떠올렸다는 것은 어쩐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 뒤에 지금의 자신처럼 초라한 과거가 있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화의 속내를 읽은 듯 인혜가 달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아홉 살에 조실부모하고 경성에 올라와 기방 하녀가 되었어요.”
“사장님이요?”
소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인혜가 짧게 웃었다.
“거기서 노래 선생님을 만나 창을 배웠지요. 참으로 엄한 분이셔서 어린 마음에 울기도 많이 울고 원망도 했지만 내게는 그 분이 아버지나 다름없었어요.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어디서 몸종이나 하며 떠돌아다녔을 거예요.”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것은 해경의 얼굴이었다. 해경이 아니었다면 자신 역시 지금은 어떤 처지일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해경이 자신을 구해 주지 않았다면 거기서 비명횡사했을 수도 있었고, 반지 도둑으로 몰려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 해도 어디선가 하녀 일을 계속 하는 삶 이외에 다른 길이 있었을까 상상하기 어려웠다. 미리암여학교 일 이후로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굳이 해경의 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자신이 사무실에 남아 있는 것이 해경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해경을 혼자 두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이도 어릴 적부터 혼자였으니 소화 양을 그냥 지나치지는 못했던 거예요.”
소화는 인혜의 말에 멈칫했다. 자신이 해경을 혼자 두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해경 역시 자신에게 그런 마음인 것일까. 소화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자 물끄러미 소화의 눈을 마주보던 인혜가 몸을 일으켜 창을 닫았다. 소화가 따라 일어나려 하자 인혜가 손을 저었다.
“아직 밤바람이 차군요. 감기에 걸릴까 싶어 닫았으니 오늘 밤은 아무 생각 말고 푹 자도록 해요.”
“네.”
소화가 조그맣게 입술을 달싹이자 미소를 짓고는 방을 나가려던 인혜가 등을 돌린 채 잠시 멈춰 섰다가 소화에게 말했다.
“외롭고 싶은 이는 없지요. 곁에서 잘 도와주어요.”
소화가 무어라고 대답하기도 전 인혜가 방을 나가며 문을 닫았다. 방 안에 혼자 남겨진 소화는 멍하니 닫힌 문을 보고 있다가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인혜가 자신과 해경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 리 없었는데도 마치 모든 것을 훤히 들여다보듯 이야기하는 것이 신기했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아무 것도 아닌 자신 같은 사람이 해경의 곁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생각하자 가슴 한쪽이 먹먹하게 잠기는 것 같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누운 소화는 눈을 감았다. 외롭고 싶은 이는 없지요. 인혜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혼자인 것보다는 자신 같은 존재라도 곁에 있는 편이 해경에게 더 나은 것일까. 자신이 해경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안다고 말했을 때 해경이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하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어쩐지 열이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된 소화는 누가 볼세라 이불을 뒤집어썼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 밤새 뒤척이다 간신히 새벽녘에야 잠깐 잠이 들었던 소화는 바깥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에 퍼뜩 잠을 깨 눈을 떴다. 잠을 영 설친 탓에 머리가 무겁고 몸이 나른했다. 조금만 더 누워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은 소화는 문득 누군가가 자신을 살짝 흔들어 깨우는 감각에 얼굴을 찡그렸다.
“아가씨, 정 선생님이 오늘은 출근하지 말라고 연락을 하셨어요.”
미랑의 목소리였다. 멍한 머릿속으로 미랑의 말을 곱씹어 본 소화는 겨우 몸을 조금 일으켰다. 미랑이 소화의 얼굴을 살피더니 얼른 소화를 도로 자리에 눕히고는 이불을 목까지 덮어 주었다.
“어젯밤에 늦게까지 못 주무시는 것 같던데, 얼굴이 좋지 않으셔요. 식사는 준비해 놓았으니 푹 주무시고 일어나서 드시는 게 좋겠어요.”
“……선생님이 연락을 하셨다고요?”
“네. 가 보실 곳이 있어 오늘은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아니 계실 거래요.”
순현의 일로 조사할 것이 있어 어딘가에 간 모양이었다. 소화는 잠시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잠이 다 깨는 느낌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경이 순천에 다녀왔던 날 저녁 어딘가가 완전히 무너져 버린 사람처럼 굴었던 것이 생각난 탓이었다. 해경이 털어놓았던 과거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날 해경이 왜 그랬는지 알게 되었던 소화였다. 해경이 어디에 간 것인지도 알지 못했고 설마 그런 일이 또 벌어질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해경이 혼자서 어딘가에 갔다는 말만으로도 가슴이 쿵쿵거리며 뛰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디에 가신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으셨지요?”
소화가 조심스럽게 미랑에게 묻자 미랑은 네, 하고 대답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해경은 인혜에게조차 이번 일에 대해서는 거의 함구하고 있었다. 아마 순현의 경우처럼 권중만과 엮이게 되었다가는 공연히 불똥이 튀게 될까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자신도 아닌 미랑에게 해경이 행선지를 일일이 알려줄 리 없었다. 그저 조사를 하러 다니는 것이라면 무슨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루 종일 가만히 있기에는 마음이 영 불안했다. 소화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미랑이 얼른 가까이 다가앉아 소화를 달래듯 말했다.
“아가씨, 잠이 깨셨으면 아침 드시고 저와 외출하지 않으시겠어요? 사장님께서 부탁하신 것도 있고 해서 나가려고 하는데 혼자 가기에는 영 심심해서요.”
한 번도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는 미랑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어지간히도 속마음이 티가 났구나 싶어 어쩐지 창피해진 소화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그러면 어서 준비하셔요. 저는 나가 있을 테니 다 되면 불러 주시고요.”
미랑이 웃는 낯으로 말하고는 자리를 피했다. 소화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경대 앞에 앉아 머리를 새로 땋고 세수를 한 뒤 부엌으로 나와 차려 놓은 아침을 깨작거렸다. 언제나처럼 정갈한 반찬이었으나 입맛이 돌지 않았다. 밥을 채 반 그릇도 먹지 않고 수저를 놓은 소화는 서둘러 먹은 것을 치우고 옷을 갈아입었다. 거실로 나와 보니 미랑은 그새 후원에서 잘라 온 꽃을 손질해 화병에 꽂아 두고 있었다.
“다 되셨어요? 잠시만요, 금방 끝난답니다.”
미랑이 후다닥 남은 꽃을 마저 손질해 꽂아 놓고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작은 손가방을 하나 챙겨 별채를 나선 미랑은 소화에게 말했다.
“오후에 다과회가 있는데 양과자를 다식으로 쓰신다고 사장님이 부탁을 하셔서요. 명치정에 양과자 파는 집이 있는데 그리로 갈 거예요.”
“그렇군요.”
“서양인이 직접 강습회도 열고 판매도 하는데 아주 맛있어요.”
재잘거린 미랑이 소화의 소매를 끌고 전차 정류장으로 향했다. 붐비는 사람들 틈을 뚫고 미랑과 전차에 탄 소화는 전차 바깥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매일같이 출근하며 보는 거리지만 어쩐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당연한 것처럼 사무실로 출근하고 해경과 함께 하루를 보내는 일상에도 언젠가는 끝이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소화는 미랑이 계속 자신의 곁에서 눈치를 살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얼른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쳤다. 명치정 정류장에 내린 미랑이 반 보쯤 앞서 걷다가 손가락으로 저만치 떨어진 과자점 간판을 가리켰다.
“아가씨, 저기예요.”
그리 지나다니면서도 한 번도 주의 깊게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이제 막 가게 문을 열었는지, 키가 작은 중년의 서양 여인이 판에 쌓아 올린 양과자들을 내어 놓고 있었다. 막 구워낸 비스켓트며 웨퍼스, 카스테라 따위가 달콤한 냄새를 풍겼다. 그 냄새에 일전 크리쓰마쓰 때 해경이 양과자를 보냈던 것이 떠올라 소화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띠었다. 미랑은 스스럼없이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잘 지내셨어요? 다과회에 쓸 양과자를 사려고요.”
“항상 가져가는 것으로 줄까요?”
여인이 웃는 얼굴을 하며 유창한 조선말로 물었다. 자주 들르는 가게인 모양이었다. 미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인이 종이봉투를 여러 개 들고 나와서는 봉투 안에 비스켓트며 웨퍼스를 그득하게 담았다. 이만큼이면 되었냐는 듯 여인이 미랑에게 봉투를 열어 보여 주자 미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이 봉투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자, 소화는 신기한 마음에 발돋움을 하며 가게 안쪽을 건너다보았다. 흰 모자를 쓴 남자 두세 명이 가게 안쪽에서 양과자를 굽고 있었다.
“웨퍼스 좀 사러 왔어요.”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손님인 듯 하여 얼른 한쪽으로 비켜선 소화는 곁으로 선 사람을 흘끔 보았다. 단발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젊은 여자였다. 무심코 시선을 돌렸던 소화는 순간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췄다. 방금 본 얼굴이 낯이 익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이영신. 마치 꺼져 있던 전구를 켠 듯 그 이름이 번쩍 뇌리를 스쳤다.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순간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패악질을 부리며 원망하던 영신의 마지막 표정을 떠올리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인사를 건네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처음 웨퍼스며 초코렛을 맛보게 해 준 사람이 영신이었다는 것이 생각나자, 문득 누군가 가느다란 바늘로 가슴 한쪽을 깊숙이 찌르는 듯한 감각이 지났다.
“여기 있어요.”
여인이 포장을 한 봉투를 들고 나와 미랑에게 내밀자, 미랑이 손가방을 열어 지전 몇 장을 세어 보고는 여인에게 건넸다. 그때 영신 역시 무심결인 듯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소화와 눈이 마주쳤다. 겨우 일이 초 정도의 찰나였음이 분명한데도 소화는 그 찰나를 마치 영원처럼 느꼈다. 영신과 자신 단 둘만이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화는 숨을 멈췄다. 먼저 시선을 돌린 쪽은 영신이었다. 소화는 영신이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직감했으나 무어라 말을 걸 수는 없었다. 미랑이 소화의 소매를 살짝 끌었다.
“아가씨, 이제 가요.”
“네? 아, 네.”
멍하니 있다가 제풀에 놀라 대답한 소화는 미랑에게 이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몇 분쯤 걷던 소화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새 웨퍼스를 사서 간 것인지 과자점 앞에 영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멀리 영신이 쓰고 있던 챙 넓은 모자가 언뜻 비친 것 같았으나 그나마도 곧 사라졌다. 걸음을 멈춘 소화를 보던 미랑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왜 그러셔요? 아는 사람이라도 보셨어요?”
“아, 아니에요.”
소화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으나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영신이 차라리 자신에게 화를 내거나 욕을 했다면 지금 같은 기분은 아닐지도 몰랐다. 마치 모르는 사람인 양 시선을 피하던 영신의 얼굴을 떠올리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영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받은 것뿐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불편해졌다. 해경은 매번 이런 기분을 혼자 견뎌 온 것일까. 불현듯 거기에 생각이 미친 소화는 손끝을 만지작거리다 미랑을 보았다.
“저어, 미안해요. 사무실에 놓고 온 것이 있어서요. 들렀다 갈 테니 먼저 가겠어요?”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가보다 싶었는지 잠시 소화의 안색을 살피던 미랑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알겠어요. 무슨 일이 있으면 꼭 향운정으로 연락 주셔야 해요.”
“네.”
소화가 대답하자 미랑이 안심이 아니 되는 듯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전차 정류장으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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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전야
미랑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서야 소화는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지난번처럼 해경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도 사무실에서 기다리는 편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 사무실로 들어서 창을 모두 연 소화는 평소처럼 청소를 시작했다. 주전자에 물을 받아 풍로 위에 올리고 바닥을 쓸던 소화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움직임을 멈추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집배원이 오는 시간이었다. 우편물은 거의 매일 있었으므로 소화는 얼른 들고 있던 빗자루를 놓아두고는 문을 열었다.
“안녕하셔요?”
무심코 인사를 한 소화는 곧 문 앞에 선 사람이 집배원이 아니라 환인 것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랐다. 환이 웃으며 물었다.
“누군지 묻지도 않고 열다니, 내가 올 걸 알고 있기라도 했습니까?”
“아, 아니어요. 우편물이 도착한 줄 알고요.”
“그래도 누군지는 묻고 열어 주어야지요.”
타이르듯 말하며 사무실로 들어선 환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한쪽 눈썹을 약간 치켜 올렸다.
“정 선생은 자리에 없습니까?”
“네. 가 보실 곳이 있다고 하셨어요. 약속을 하고 오신 건가요?”
소화의 물음에 환이 멋쩍은 표정을 했다.
“어제 저녁에 연락했을 때 대전 쪽에 내려갈 거라고는 이야기했는데 오전에 출발한다 들어서 아직 있을 줄 알았지요. 미리 연락을 하고 올 것을 그랬군요.”
“아아, 어쩌지요? 전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남겨 두시겠어요?”
“아닙니다. 소개시켜 줄 사람도 있고 해서요.”
환이 그 말을 하며 문가를 돌아보았다. 소화도 덩달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환이 문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덧붙였다.
“용정 쪽에서 나를 도와주고 있는 사람입니다. 잠시 우체국에 들렀다 오겠다고 했는데…….”
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양반은 못 되는군, 하고 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기려 하는 것을 본 소화는 얼른 문가로 뛰어가 먼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는 문 밖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굳은 채 눈을 크게 떴다. 소화는 그가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등 뒤에서 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준학 씨라고, 미리암여학교 재단의 재정을 관리하고 있고 지금은 용정에서 우리 일을 돕는 사람입니다.”
착각했다고 믿고 싶었으나 환의 입에서 나온 이름 세 글자는 너무나 분명했다. 장준학. 아까 영신과 마주쳤던 일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갔다. 준학 역시 소화를 보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 말없이 마주서 있는 소화와 준학을 본 환이 고개를 갸웃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설마 했는데 여기서 다시 뵙는군요, 박소화 양.”
준학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소화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환이 놀란 얼굴로 준학을 보았다.
“구면입니까?”
“네, 서로 잘 아는 사이입니다. 이환 공께서 제게 소개해 주려던 분은 정해경 씨겠지요?”
“언제 어디서 만났던 겁니까? 이거야 원, 나만 사이에서 바보가 된 것 같군요.”
그간의 사정을 알 리 없는 환이 허 참, 하고 놀라움과 신기함이 섞인 투로 탄식을 뱉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감각에 소화는 한 걸음 더 뒷걸음질을 쳤다. 안으로 들어온 준학이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소화는 해경이 여기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 보려 애를 쓰며 숨을 골랐다.
사무실에 와 본 일이 있으니 여기 오면서 어쩌면 짐작은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막상 자신을 마주치자 준학 역시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분명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것이 되살아났다. 김석란 사건 이후로 해외에 나갔다는 소문만 얼핏 들었는데 그 사이 용정을 오갔던 모양이었다.
순현이 죽은 직후 찾아왔던 환이 순현의 시신을 용정 제창병원에 옮겼을 거라고 했던 말이 퍼뜩 지나쳤다. 환의 입에서 그 이름을 들었을 때 가슴이 철렁했었는데, 이렇게 준학이 거기 연결되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소화는 손을 말아 쥐며 겨우 준학을 마주보았다. 준학은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였으나 그 눈빛은 날카로웠다.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준학이 환과 함께 일하고 있다면 준학의 입장에서도 이 상황이 분명 반갑지는 않을 터였다. 소화는 환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좋습니다.”
환보다 먼저 대답한 쪽은 준학이었다. 소화는 풍로 위에 올려 둔 주전자를 내려 차를 우리며 등 뒤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환이 준학에게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잘 알고 있는 겁니까? 무슨 사건이라도 의뢰했었습니까?”
“제가 의뢰한 건 아니고, 두 분께서 어떤 분의 의뢰를 받아 제 뒤를 밟으신 적이 있지요.”
소화는 차를 따르던 손을 멈췄다. 정면 돌파를 하려는 것일까. 분명 준학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해경이 불쾌한 존재였을 것임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준학이 이 사건에 대해 환에게 확실히 도움을 주고 있다면 자신들이 준학과 계속해서 대립하는 것은 서로가 곤란해지는 일일 터였다. 소화는 차를 마저 우리고는 찻잔에 따라 환과 준학 앞에 놓아 주었다. 환이 앉은 채 소화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대체 무슨 의뢰였기에 뒤를 밟은 겁니까?”
준학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환은 무슨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리 심각한 일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소화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 자신이나 해경이 준학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건 이쪽에서도 껄끄러운 일이었으나, 반대로 생각하면 준학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소화는 환이 해경과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준학의 입장에서도 자신에게 모르핀을 놓고 산중의 집에 버려두고 갔다는 것이 환에게 알려지면 좋을 리 없었다.
“숨기는 것이 원체 많으시다 보니 궁금해하는 분이 계셔서요.”
소화의 대답에 준학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진 채였다. 해경이 있었다면 좀더 현명한 방법으로 돌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소화에게는 그 정도의 여유가 없었다. 준학이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지금 이환 공에게 숨기는 것은 없습니다. 숨기는 것이 있다면 소화 양 쪽이겠지요.”
“저나 선생님은 아무 것도 숨기지 않아요.”
“이덕완의 의뢰를 받은 것도 말입니까?”
준학이 말한 이름에 순간 사무실 안에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소화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덕완이라니,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덕완이라면 분명 평양에서 만났던 환의 사촌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그가 환에게 몹시 적대적이라는 것은 소화 역시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었다. 소화는 당혹스러워하며 되물었다.
“이덕완의 의뢰라니, 무슨 말씀이시지요?”
“미리암여학교 재단이 소유한 땅을 매수하기 위해 이덕완이 정해경 씨에게 내 뒷조사를 해 달라고 의뢰한 걸 알고 있습니다.”
준학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순간 소화의 머릿속에 당시 해경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당시 김석란의 뒤를 캐 달라고 의뢰한 윤자희보다 먼저 그 땅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덕완이었다. 준학은 땅을 팔라는 이덕완의 제안을 여러 차례 거절했고 그 때문에 이덕완이 사람을 시켜 준학의 뒷조사를 시작했다. 그 직후 그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김석란이 세브란스 병원의 환자로 나타났고, 금광 브로커들에게 가짜 정보가 흘러 들어갔다고 했다. 누군가 찢어 놓은 그림의 조각이 머릿속에서 하나씩 맞춰지는 듯했다. 준학을 마주보던 소화는 입을 열었다.
“장준학 씨를 조사한 건 맞지만 저희는 이덕완 씨의 의뢰를 받지 않았어요.”
“무어라고요?”
이번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한 쪽은 준학이었다. 소화는 무언가 말하려는 준학을 가로막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에게 그 일을 의뢰한 건 삼영금광개발회사 김삼영 사장의 부인 되시는 윤자희 씨였어요. 이환 씨와 선생님은 평양에서 이덕완 씨와 좋지 않게 엮여 그쪽의 의뢰를 받을 일은 절대로 없어요.”
준학이 눈썹을 약간 좁혔다. 윤자희, 하고 소리 없이 그 이름을 입술로 되뇌어 본 준학이 환과 소화를 번갈아 보았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환이 어깨를 으쓱했다.
“소화 양의 말이 맞습니다. 이덕완과는 일전에 평양에서 아주 좋지 않게 얽힌 일이 있지요. 정 선생이 억만금이라도 받지 않은 이상 이덕완의 의뢰를 받아들였을 리 없습니다. 그쪽도 머리가 나쁘긴 하지만 정 선생에게 무슨 일을 의뢰할 정도로 바보는 아닐 거고요.”
“억만금을 준다 한들 선생님은 절대로 그런 의뢰는 받지 않으셨을 거예요.”
소화는 강하게 부정하며 손을 꼭 말아 쥐었다. 해경이 환의 신뢰를 배반하는 짓을 할 리 없었다. 준학은 잠시 말없이 소화를 응시하다 짧게 웃는 소리를 내었다.
“윤자희에게 의뢰를 받았다는 걸 증명하는 증거가 있습니까?”
잠시 말문이 막혔던 소화는 곧 윤자희가 처음 사무실을 찾아왔던 날을 떠올렸다. 해경이 인사를 건네며 소개를 받고 오셨다고요, 하고 운을 떼자 윤자희가 향운정의 최자련 사장님께 소개를 받았다고 이야기하던 것이 되살아났다. 소화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향운정의 최자련 사장님께서 윤자희 씨를 직접 소개해 주신 거예요. 그쪽에 확인해 보시면 아실 수 있겠군요. 처음부터 제 정체를 알면서 사람을 시켜 뒤를 밟고 일부러 저를 도와주신 척 연기할 능력도 있으시니, 그 정도는 전혀 어렵지 아니하시겠지요?”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처음이라 몸이 덜덜 떨렸으나 소화는 이를 악물며 떨림을 참았다. 여기서 자신이 밀린다면 환에게 신뢰를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환은 소화의 입에서 나온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준학을 마주보았다. 준학이 미간을 좁히며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요.”
“오해는 장준학 씨께서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소화가 냉정하게 말을 자르자 준학이 예의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어차피 누가 의뢰했는지는 최자련 사장님께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니, 금방 들통 날 어설픈 수작을 부리지는 않았다고 믿겠습니다. 다만 소화 양께서도 오해를 하고 계시는군요. 정해경 씨와 소화 양의 정체는 알고 있었지만 사람을 시켜 뒤를 밟은 적은 없습니다. 그날 제가 소화 양을 도와드렸던 데는 정말 다른 뜻이…….”
순간 준학 역시 무언가가 떠오른 듯 말을 멈췄다. 눈을 가늘게 뜬 준학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래서 그 때 처음부터 명치정에서 따라오게 했냐고 물었던 겁니까?”
신림리에 있던 준학의 집에서 해경과 통화하던 도중, 준학이 전화선을 끊어 버리고 자신에게 모르핀을 놓았을 때의 일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소화 역시 그 이후로는 일부러 잊고 있으려 애를 썼던 그 날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자신이 그렇게 물었을 때 준학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던 것이 스쳐갔다. 그 때는 연기였을 거라고 생각하고 무심코 지나쳤는데, 준학의 말이 사실이라면 준학 역시 그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에 그런 반응을 보였던 모양이었다. 소화는 대답 대신 준학을 빤히 쳐다보았다.
“장준학 씨는 그런 적이 없다고 어떻게 증명하시겠어요?”
준학이 그 말에 열없이 소리를 내어 웃고는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이제 곤란해진 건 제 쪽입니까?”
“그런 것 같네요.”
“사람을 쓰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길은 없군요. 그러나 아시다시피 저는 미리암여학교 재단의 경영을 담당하고 있고, 학생 명부에서 소화 양의 이름을 보고 교장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정해경 씨와 박소화 양의 정체를 알게 된 겁니다. 그 전에는 소화 양이 누구인지도 몰랐기에 사람을 붙일 필요도 없었지요.”
소화는 준학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확실히 그 말대로, 준학이 처음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당시에는 준학이 미리암여학교 재단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소화였다. 준학에 대해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이었기에 준학 역시 굳이 자신을 주목할 필요는 없었을 터였다. 소화가 아무 말도 없이 준학을 응시하자 준학이 환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본의 아니게 이환 공만 사이에서 곤란해지셨군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양쪽에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겁니까? 이제 서로 어느 정도 납득을 하셨고요?”
환이 고개를 젓고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준학은 다시 한 번 소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화는 조금 주저하며 준학의 손을 마주잡았다가 곧 놓았다. 준학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고는 입을 열었다.
“정해경 씨가 자리에 없어 아쉽지만 소화 양이 거짓말은 아니 하셨을 거라 믿겠습니다. 알고 싶어 하시는 것은 모두 말씀드리지요. 저는 지금 용정에서 장순현 씨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데 협조하고 있습니다. 상해에서…… 아시는지 모르겠군요.”
상해 이야기를 꺼내려던 준학이 환을 흘끔 보자 환이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준학은 그 손짓을 보고는 말을 계속 이었다.
“저는 본래 용정 출신이고, 상해 쪽의 독립 단체들과도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조선공산당 사람들과도 함께 일하고 있고요. 장순현 씨도 독립 단체를 돕고 있었기에,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해 쪽에서 진상을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때마침 이환 공께서 용정까지 오셨기에 저희가 그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돕기로 했고요.”
소화는 준학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준학의 말 중 마음에 걸린 것은 ‘저희가’라는 부분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소화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김석란의 젊은 주치의였다. 소화는 준학에게 물었다.
“……그 의사분께서도 함께 일하고 계신 건가요?”
“김 선생도 알고 있습니까?”
환이 곁에서 놀란 투로 끼어들었다. 그 주치의를 김 선생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준학이 잠시 멈칫하다 웃는 얼굴을 했다.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저는 한 번 기억한 것은 잘 잊지 않아요.”
“그렇다면 그때 했던 약속도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준학의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그 말은 서늘한 칼날처럼 마음을 스쳤다. 출원증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말아요. 나는 소화 양이 약속을 지킬 거라고 믿습니다…… 그때 자신에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마치 방금 들은 양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소화가 입을 다물자 준학이 고개를 까딱였다.
“맞습니다. 김 선생은 지금 용정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지요. 이상한 인연이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데는 무슨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 제가 소화 양에게 심하게 한 것은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런 오해가 없었다면 절대로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직 준학의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말은 확실히 진심처럼 느껴졌다. 다만 그 출원증만은 소화의 마음에 불편하게 걸렸다. 그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이런 상황에서조차 입을 다물라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출원증에 적혀 있던 이지순이라는 이름과 그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 것일까. 일전의 상상대로 두 사람이 이지순에게 출원증을 빼앗아 금광을 가로챈 것은 아닐까. 무서운 상상이었으나 지금은 무엇도 확인할 수 없었다.
“이 일로 곧 다시 마주칠 날이 올 텐데, 정해경 씨에게도 말씀 잘 전해 주십시오.”
준학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소화는 아주 작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듯한 기분으로 마주 목례를 건넸다.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준학이 환을 보았다.
“이제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정 선생에게 잘 이야기해 주십시오. 돌아오자마자 연락 달라고도 꼭 전해 주고요.”
환이 소화에게 당부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해경과 자신, 그리고 준학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표정이었으나 여기서 깊게 나눌 이야기는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소화는 두 사람을 배웅하고는 창가에 서서 환의 자동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다 그 자동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에서야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등줄기가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주사 바늘이 목덜미를 찔러 오던 감각이 되살아나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뒷덜미에 손을 가져간 소화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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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전야
해경은 검은 천을 사방에 두른 듯 새까만 밤 속을 달리는 열차의 창가에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져 있었다. 대전에서 경성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기차 안이었다. 오늘 대전에 갔던 것은 권경천의 죽음에 대해 확인할 것이 있어서였다. 생각할수록 우연이라기엔 장순현의 죽음과 너무나 많은 것이 비슷했다. 가장된 불의의 사고, 조작된 사망 원인, 포섭된 경찰.
해경은 사람이 가장 바꾸기 어려운 것이 사고방식이나 습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경향성이 있다. 한 번 어떤 방식으로 성공한 적이 있다면, 다음번에도 그와 같은 방식을 답습하려는 것이 일반적인 심리다.
해경은 권중만을 처음 다시 만났던 라 세느 사건 때부터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당시 중만은 자신은 그저 투자를 했을 뿐이라고 발뺌했지만, 객실 한두 개의 구조 정도를 변경한 것이 아니라 아예 제출한 도면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지하층을 공사한 것인데 이중 도면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해경은 평양에서도 확증은 없었으나 그가 허진남에게 인삼이 든 음료와 강심제를 함께 먹도록 해서 살해한 뒤 오계영이 총살한 것처럼 꾸몄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경찰들 역시 크든 작든 그에게 협조하고 있었던 것도 분명했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 누군가를 제거해 왔다면, 가장 처음 권중만에게 성공을 안겨 준 사례가 있었을 것이다. 그 성공에 안심하고 계속해서 비슷한 수법을 사용하도록 만들어 준 최초의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해경은 그것이 권경천의 죽음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었다.
권중만은 충동적인 동시에 치밀한 자였다. 무언가를 손에 넣기 위해 덫을 놓고 기다릴 줄 아는. 그가 권경천을 죽인 것이 확실하다면 그 이유는 틀림없이 재산 때문일 터였다. 젊은 새어머니와 총애 받는 배다른 동생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했기에 아예 아버지를 제거해 버린 것이다. 새어머니와 동생을 없앤다 해도 그 자리는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었으므로.
해경은 대전 경찰서에서 권경천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확인했으나 기사에 난 것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다만 당시 권경천이 타고 있던 차를 당연히 폐차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수리 후 본가에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작은 수확이었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라 차에 증거가 남아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무엇이든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기실 진짜 목적은 백명숙을 만나는 데 있었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재원으로 권경천과 결혼했던 여자가 아들 몫의 유산 관리를 모두 권중만이 대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쉽게 찬성했을 것 같지 않은 탓이었다.
그녀가 거의 두문불출하며 지내고 있고 경성의 친정에도 오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는 말에, 해경은 신생 잡지의 기자를 가장하여 취재를 하고 싶다며 백명숙에게 연락을 취했고 몇 번의 설득 끝에 겨우 만날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명숙을 만난 것은 권중만의 본가 근처 카페에서였다. 아이는 맡겨 놓고 나온 것인지 명숙은 혼자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연락드렸던 기자 김송준입니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명숙을 알아보고 가까이 간 해경이 가짜 이름을 대며 인사를 건넸을 때, 명숙은 몹시 소스라치며 놀라 해경을 쳐다보았다. 해경은 그녀의 그 놀란 얼굴을 인상적으로 여겼다. 아직도 젊은 나이였고 한때는 분명 뭇 남자들의 눈을 잡아끌었을 분위기도 여전했으나 그 얼굴에는 오랫동안 공포에 시달린 사람들 특유의 기색이 남아 있는 탓이었다. 작은 동물처럼 예민하고 항상 긴장되어 있는.
「저를 취재하고 싶으시다고요.」
명숙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해경은 안경을 고쳐 쓰며 유쾌함을 가장한 말투로 대답했다.
「권중만 사장님께서 워낙 유명하시다 보니 집안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요. 부인이 없으시니 본가 살림을 여사님께서 홀로 맡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제게는 힘이 없어요.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에요.」
명숙은 미소를 지었다. 웃고는 있었으나 동시에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만약 힘이 있었다면 절대로 아들의 재산 관리를 모두 중만에게 맡기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 정도의 재원이 조부 뻘은 되는 남자와 결혼했을 때 머릿속에 아무런 계산이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권중만 때문이었다. 명숙은 들고 있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며 불안한 눈치로 카페의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보았다.
「삼십 분 정도밖에는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군요. 집에 아이를 두고 와서요.」
「집에 아이를 보아 주는 사람이 없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명숙은 초조한 듯 연신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권중만 정도의 재력가가 어린 동생을 돌볼 보모 하나 붙이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집 밖에 삼사십 분 나와 있는 것조차 불안하다는 것은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해경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을 꺼내 들어 시시한 질문들을 던졌다. 친정에 대한 질문이나 일본 유학 시절에 관한 이야기 따위였다. 명숙은 연신 시계를 흘끔거리면서도 해경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대답은 조리 있었고 망설이거나 주저하는 것도 없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멈칫한 것은 권경천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였다.
「권중만 사장님께서 회사를 그렇게 크게 키웠던 건 남편 분께서 돌아가신 후였지요? 괜찮으시다면 그때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하는데요. 음주 후에 자동차를 운전하다 사고가 났다고 들었습니다만.」
「미안해요.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군요.」
명숙이 해경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해경은 말을 돌리는 대신 물었다.
「남편 분께서는 그때 술을 드시지 않았던 거지요?」
명숙이 약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누가 들었을까 두려운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명숙의 얼굴은 눈에 보일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명숙이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일어나야겠어요.」
해경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명숙에게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께서는 권경천 사장님이 사고로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건 일종의 도박이었다. 권중호의 유산에 대한 권리가 모두 권중만에게 넘어가 있는 것이며, 명숙의 태도 같은 것에서 그녀가 권중만과 그리 우호적인 관계일 리 없다고 짐작했기에 던져 본 말이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면 이 말로 명숙에게 다시는 접근할 수 없게 될뿐더러 권중만이 자신에게 바로 화살을 돌리게 될 수도 있었다.
명숙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해경은 손수건을 쥔 그녀의 손끝이 하얗게 질려 눈에 보일 정도로 떨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권경천이 죽은 뒤 몇 년을 어린 아들과 함께 그 집에 고립되어 지내 왔던 것일까. 대전과 경성이 그리 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친정에도 걸음을 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명숙은 해경을 빤히 내려다보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겁을 먹은 기색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으나, 그 눈빛은 아까보다 훨씬 날카로워져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지요?」
「권경천 사장님은 죽기 전날 밤 윤후택과 만났지만 술은 전혀 먹지 않았습니다. 윤후택과 헤어진 뒤 몇 시간의 행적은 알 수 없지만 다음날 새벽 사고로 돌아가셨지요. 그러나 부인께서는 남편 분이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겁니다. 당연히 그것이 사고가 아닐 거라고도 짐작하셨겠지요.」
명숙은 해경의 말을 듣고 있다가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는 해경의 눈을 마주보았다.
「잡지 기자가 아니군요?」
「저는 부인을 돕고 싶은 겁니다.」
「당신은 그 사람을 잘 몰라요.」
해경은 그 말을 할 때 명숙의 눈에 스쳐간 복잡한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 사람’이란 권중만을 뜻하는 것이리라. 해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그 사람을 잘 압니다.」
어쩌면 권중만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해경은 뒷말을 삼키며 명숙을 응시했다. 명숙은 고개를 숙인 채 이 끝으로 입술을 잘근거렸다. 루주가 지워져 핏기 없는 입술이 드러난 탓에 그 얼굴은 더욱 창백하게 보였다.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눈을 내리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이는 술을 마시지 않은 지 오래 되었었어요. 마신다 해도 쉽게 취하지 않았고요. 그 일이 있기 얼마 전부터 남편은 그 사람과 사업 문제로 자주 마찰이 있었어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알아들을 수도 없을 만큼 빠른 목소리였다. 명숙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앞에 놓인 찻잔에 남은 차를 단숨에 마셨다. 목이 타는 모양이었다.
「혹시나 해서 이야기하는 거지만 나는 그 사람이 남편을 어떻게 했다는 게 아니에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권중만이 두려운 것이다. 아마도 권경천이 죽은 뒤 몇 년을 매일같이 그런 공포에 시달렸을 것이 분명했다. 해경은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맞은편에 밀어 놓았다. 명숙은 해경의 명함을 집어 들어 눈으로 훑었다. 해경은 명함에 시선을 두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실 때는 언제든지 이쪽으로 연락 주십시오.」
명숙이 양장 앞섶에 명함을 밀어 넣었다. 낯선 남자 앞에서 스스럼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해 순간적으로 당황했던 해경은 곧 눈을 가늘게 떴다. 가방이나 옷의 주머니에 넣는다면 누군가가 뒤져 볼까 싶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이런 행동이 자연스러워질 정도라면 권중만이 얼마나 그녀의 숨통을 조이고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해경은 시계를 보았다.
「삼십 분이 지났군요.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명숙이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는 서둘러 카페를 빠져나갔다. 해경은 카페의 창으로 그녀가 대로에서 택시를 잡아타는 것을 지켜보았다. 택시 안으로 빨려들듯 사라지던 가냘픈 뒷모습은 눈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해경은 명숙과의 만남을 복기하는 것을 멈췄다. 과연 명숙이 자신에게 다시 연락을 할지 아닐지는 아직 알 수 없었으나, 명숙의 반응을 통해 권중만이 권경천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녀에게도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약 권중만이 권경천을 살해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만 있다면 그녀가 그렇게 무력하게 남편의 유산을 빼앗겼을 리 없는 탓이었다. 그러나 명숙을 포섭한다면 권중만을 넘어뜨릴 수 있는 증거를 발견할 가능성은 한층 높아질 터였다. 만약 백명숙이 친정에 이 일에 관해 어떤 언질이라도 주었다면 그들 역시 권경천의 유산이 걸린 일이었기에 그저 방관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권경천의 유산……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던 해경은 잠시 고민하던 것을 멈췄다. 권경천이 자신의 아내와 자식에게 물려준 그 유산은 결국 누구의 것인가 하는 데 이르렀던 것이다. 평소에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일인데도 이처럼 예고 없이 어느새 생각이 먼저 달려가 버리는 것을 깨닫고 나면 누군가 마음의 어딘가에 정을 대고 내리치는 것처럼 선뜩한 감각이 지나쳤다.
숨을 들이쉰 해경은 서둘러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아니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아야 했다.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팔짱을 끼고 기대앉아 눈을 감았으나 산발적으로 뒤섞이는 상념들에 복잡한 머리는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해경은 잠이 든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채로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기차의 소음에 몸을 맡겼다.
그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려 한참이나 애를 쓰던 해경은 역무원의 종소리에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기차가 경성역에 거의 도착한 모양이었다. 먹물을 부어 놓은 것 같았던 창 바깥으로 간헐적인 빛이 반짝이며 스쳤다. 아마도 간판의 네온사인이나 와사등의 빛일 터였다.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며 긴 숨을 내쉰 해경은 느려지다 마침내 완전히 멈춰선 기차에서 일어나 내렸다.
막차여서 움직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역사를 나선 해경은 택시를 탈까 하다 명치정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런 야간에 택시를 부르느니 차라리 걸어가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었고, 머리가 복잡할 때는 몸을 쓰는 쪽이 차라리 편했다. 십오 분쯤 걷자 불이 모두 꺼진 미쓰코시 백화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백화점 앞을 지나 사무실이 있는 골목으로 접어든 해경은 걸음을 멈췄다. 사무실 창에 불이 켜진 것을 본 탓이었다. 소화에게는 아침 일찍 출근하지 말라고 향운정에 연락을 넣어 둔 뒤였는데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어젯밤에 불을 끄지 않고 퇴근했던가 생각했으나 그런 일은 사무소를 연 이래로 한 번도 없었기에 고개를 갸웃한 해경은 사무실 건물로 다가가 안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사무실 안은 조용했다.
문고리를 잡고 소리가 나지 않게 돌리자 잠겨 있지 않았는지 저항 없이 돌아갔다. 해경이 잠시 망설이다 문을 열자 안에서 누군가 급히 일어나는 기척이 났다. 해경은 누구, 하고 묻다 말고 말을 멈췄다. 소화였다.
“무슨 일입니까?”
경황없는 얼굴로 허둥거리는 것을 보니 아마 졸다가 인기척에 놀라 일어난 모양이었다. 자정이 다 되었는데 왜 이 시간에 소화가 사무실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당황하기는 해경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출근하지 말라고 전했는데 듣지 못했습니까?”
“아, 아니오, 들었어요. 들었는데…….”
소화가 더듬거렸다. 해경은 돌아서서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며 말했다.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는 건 위험하다고…….”
“걱정이 되어서 그랬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등 뒤에서 들려온 조그마한 목소리에 해경은 옷을 걸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귀 끝이 빨개진 소화가 고개를 숙인 채 발끝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해경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건지 조금 더 커진 목소리로 소화가 방금 한 말을 되풀이했다.
“선생님이 걱정되어서 그랬어요.”
사실은 이럴 때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기에 해경은 조금 더 침묵했다. 무엇이 걱정된다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마치 해경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소화가 눈을 들어 해경을 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주저하다 입술을 달싹였다.
“돌아오셨을 때 혼자 계시면 아니 될 것 같아서요.”
해경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짧게 웃었다. 이 시간에 혼자서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무섭지 않고, 그저 자신이 여기에 돌아왔을 때 혼자인 것이 더 신경 쓰이는 것일까. 해경은 소화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한 보 정도의 사이를 두고 마주선 해경은 허리를 숙여 소화를 마주보았다.
“앞으로는 소화 양이 또 혼자서 기다릴까 걱정되어 아무데도 못 가겠군요.”
“죄송해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린 소화가 어깨를 움츠렸다. 해경은 미소를 지었다.
“기다려 주어 고맙습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지만 실은 혼자 있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이런 순간이다. 해경은 그 사실을 문득 자각했다. 만약 돌아왔을 때 이 사무실이 비어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텐데, 소화가 여기에서 자신을 기다려 주었기에 도리어 자신의 외로움이 더욱 선명하게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어둠 속의 그림자는 눈에 띄지 않지만 빛 속의 그림자는 짙어지듯이. 해경은 삐져나온 머리 한 올 없이 꼭 묶어 반들거리는 소화의 머리를 쓸어 주고는 다시 한 번 웃어 보였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절대 혼자 남아 있지 말아요. 여기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향운정까지 데려다 주지요.”
숙이고 있던 몸을 펴며 시계를 확인하는 해경에게 소화가 말했다.
“저, 선생님. 장준학 씨가 왔었어요.”
해경은 눈썹을 좁히며 다시 소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장준학이라고 했습니까?”
“오전에 이환 씨와 함께 왔었어요. 용정에서 이환 씨를 도와주는 사람이 장준학 씨라고 했어요.”
허, 하고 저도 모르게 짧은 숨을 뱉은 해경은 어둠이 드리워진 창가를 향해 눈을 주었다. 의도된 우연일까. 그러나 정체를 철저하게 숨기고 싶어 한 쪽은 준학이었다. 굳이 다시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낼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죽일 수도 있었던 소화 앞에서. 만약 의도된 우연이라고 한다면 장준학은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 분명했다. 환이 장준학을 얼마나 신뢰하는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해경이나 소화보다 그를 더 믿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정말 우연이라면 이런 악연도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속으로 생각한 해경은 급히 소화의 양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장준학이 무어라 했습니까? 소화 양을 위협하지는 않았습니까?”
“저, 저어,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았어요. 우리가 장준학 씨의 뒷조사를 한 것이 이덕완의 의뢰를 받아서 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이덕완?”
해경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그 이름을 되풀이했다가 문득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본래 김석란의 땅에 눈독을 들인 것은 이덕완이었고, 매수를 거절당하자 뒷조사를 붙였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장준학은 자신이 그들 패거리 중 하나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해경이 잠시 말이 없자 소화가 눈치를 보다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명치정에서 사람을 시켜 제 뒤를 밟게 한 게 장준학 씨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오해라고 했어요.”
“확실합니까?”
“사람을 붙일 이유가 없었다고요. 저를 구해 준 건 정말 그냥 호의였다고 이야기했어요.”
장준학이 괴한을 시켜 소화를 위협하고 구해 주는 연극을 연출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면 더욱 문제였다. 대체 누가 왜 소화의 뒤를 밟았다는 말인가. 다음 순간 해경은 옷걸이에 걸어 둔 재킷을 황급히 내리며 소화의 손목을 쥐어 끌었다.
“일단 어서 돌아가지요. 데려다 주겠습니다.”
“아아, 참, 이환 씨가 늦어도 좋으니 꼭 연락 달라고…….”
갑작스러운 해경의 행동에 놀란 표정을 한 소화가 얼결에 해경에게 끌려 사무실을 나오면서 생각났는지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해경에게는 지금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해경은 대로변에 서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소화를 먼저 밀어 넣고는 향운정이오, 하며 나란히 앉았다.
향운정까지 가는 동안 해경이 내내 말이 없는 것이 신경 쓰였는지 소화가 곁에서 흘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해경은 서늘해지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장준학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임을 알면서도, 장준학의 손에 죽을 뻔했던 소화를 다시 그와 마주치게 했다는 것에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소화와 향운정 앞에 내린 해경은 잠시 숨을 고르다 낮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이환 씨가 함께 있었다니 다행이지만, 만약 다시 장준학을 만날 일이 있다면 절대 소화 양 혼자 있을 때는 아니 됩니다. 내 말 알겠습니까?”
“네, 네에.”
눈을 동그랗게 뜬 소화가 해경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경은 소화를 가만히 마주보다 먼저 향운정의 문을 열어 주려 문고리를 잡았다. 막 문을 밀려던 해경은 다시 소화를 돌아보았다.
“무섭고 두려웠을 텐데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 아니에요, 선생님.”
“늦었습니다. 어서 들어가요.”
얼른 고개를 흔드는 소화를 애써 외면하며 해경은 향운정 문을 열었다. 아직 불야성인 향운정 안에서 열린 문틈으로 환한 등의 불빛과 노랫소리 따위가 쏟아져 나왔다. 소화가 머뭇거리다 해경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해경은 소화의 뒷모습이 후원으로 통하는 길 너머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다가 다시 문을 닫았다. 한 겹의 문 사이로 둔탁하게 걸러진 빛과 소리가 길 위로 희미한 안개처럼 떠돌았다.
해경은 어두운 길 위에 늘어지는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혼자여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매 순간 깨닫는 기분은 생경한 것이었다. 다시 혼자이고 싶지 않은 것인가. 그런 물음을 떠올린 해경은 짧게 자조하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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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전야
해경이 향한 곳은 환의 숭삼동 사가였다. 늦어도 좋으니 꼭 연락 달라고 했다던 말이 아니었더라도 장준학에 대한 것을 빨리 확인해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이 제대로 손질되지 않은 그물처럼 얽혀 있는 기분이었다. 밤공기는 아직 초봄처럼 서늘했다.
가벼운 두통이 밀려들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더 이런 두통에 시달려야 할까. 이 일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최대한 많은 증거를 모으고 그의 행적을 낱낱이 드러내려 해도 그 전에 자신이 덫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은 때로 두려웠다. 해경에게 죽음은 언제나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으나, 동시에 지금처럼 가까이 있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가벼운 기침을 두어 번 뱉은 해경은 머릿속을 비우려고 애를 쓰며 걸음을 빨리 했다. 환의 사가 앞에 도착한 해경은 서재의 창에 불이 켜진 것을 보았다. 아직 잠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문의 줄을 당기고 잠시 기다리자 환이 직접 나와 대문을 열었다.
“늦게라도 꼭 연락 달라고는 했지만 이 시간에 올 줄은 몰랐소.”
말은 그렇게 했어도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직접 문을 연 것을 보니 자신이 올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해경은 고개를 숙여 보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죄송합니다. 권중만의 본가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소화 양에게 이야기를 들은 것도 있고 해서 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 시간에 방문했습니다.”
“아니오, 어차피 정 선생이 무얼 알아냈는지 궁금하던 차였으니 잘 되었소. 들어와요.”
앞장서 들어간 환이 해경을 서재로 안내하고는 물었다.
“차 한 잔 들겠습니까?”
“아닙니다.”
해경은 환의 권유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알겠다는 듯 손짓을 하고는 문을 닫은 환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환의 맞은편에 앉은 해경은 잠시 숨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백명숙을 만났습니다.”
“권중만의 새어머니 말이오? 어떻게 만난 겁니까?”
“잡지 기자를 가장해 권중만과 관련해 취재를 하고 싶다고 요청을 했습니다. 여러 번 거절하다 만나 주기로 했는데 상당히 불안해하더군요. 남편이 살해되었다고 믿고 있는 건 분명했습니다. 증거가 없는데다 권중만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쥐 죽은 듯 지내고 있는 것 같았고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 달라고 명함을 주기는 했습니다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환이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해경 역시 자신이 백명숙에게 접근한 것이 도박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률은 반반일 겁니다. 친정에도 몇 년째 가지 않았다든지 아들 몫의 유산을 모두 권중만에게 맡기는 것으로 했다든지 하는 일이 모두 본인의 의지 같지는 않더군요. 삼십 분 정도 자리를 비우는 것도 몹시 불안해했습니다. 만약 제가 백명숙과 접촉한 걸 권중만 쪽에서 안다면,”
해경은 잠시 말을 멈췄다. 권중만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위험해진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자신 역시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순현이 당했던 것과 같은 일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환 앞에서 그 두려움을 드러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단어를 고르던 해경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 두고만 보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장순현 씨의 죽음에 대한 확실한 증거와 증인을 확보하고, 권경천의 죽음에 권중만이 직접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야겠지요. 사고 당시 권경천이 타고 있던 차량을 당연히 폐차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직 본가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나 증거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사라졌겠지만 어떤 단서가 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해경의 말을 듣고 있던 환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턱을 괴고 이삼 분 정도 말이 없다가 해경을 마주보았다.
“일단 용정에서 정 선생이 이야기한 대로 최근 하자가 생겼거나 수리를 맡긴 차량이 있는지 알아보았는데 의심 가는 것이 한 대 있다 했소. 용회자동차부 소속의 포드 트럭인데 완충기 부분에 손상이 있고 이물질이 묻어 있었다는군요. 사람의 피인지 아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는데, 여튼 그 날 밤 순현이가 묵던 여관 사환이 그 트럭과 비슷한 것을 보았다고 이야기했소. 그리고 경찰서장이 용회자동차부 운영에 관여하고 있는데, 지역 건달패들이 사건 이틀 전에 서장을 만나러 왔었다는 증언도 있었다고 하고요.”
환의 이야기는 흥미로운 것이었다. 야간 통행금지를 지키지 않아도 되고 눈에 보이는 사인을 대범하게 조작했기에 경찰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짐작했는데, 생각보다 더욱 명백한 방식으로 일을 꾸몄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성에서라면 확실히 이런 일을 쉽게 조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경성에서 같은 일을 벌이려 했다면 포섭해야 할 관할서가 여러 군데인 데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상대적으로 치안이 좋지 않고 야간의 통행이 매우 적은 용정에서나 가능할 만한 일이었다. 용정에서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도록 만든 인물. 해경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장순명 씨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까?”
순명은 애초에 순현이 환에게 권중만을 소개해 주도록 만든 사람이었다. 순현을 용정으로 불러들인 것도 순명이었다. 순현의 죽음 이후 그런 순명의 행적이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해경에게 한 가지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장순명이 권중만과 결탁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해경의 물음에 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이오.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지요.”
“권중만과 더 가까이서 연결된 사람입니다. 상해 쪽에서 자금 유통과 관련하여 문제를 삼았다면 장순명 씨 쪽으로 먼저 화살이 돌아갔을 테지요.”
“내 생각도 같아요. 혹여 사건 이후로 본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아 달라고 용정 쪽에 요청은 해 두었소.”
“소화 양에게 용정의 정보원이 장준학 씨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해경은 이곳에 올 때부터 벼르고 있던 말을 꺼냈다. 환이 아아, 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구면이라 해서 몹시 놀랐소. 서로 감정이 좋지 않아 보이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오해가 있었던 것 같기는 했지만, 소화 양이 그러는 건 처음 보아서 장 선생 쪽에서 무얼 크게 잘못하기는 했나 보다 짐작했소.”
“장준학 씨가 경성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와 관련된 의뢰를 하나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쪽에서는 이덕완 이야기를 꺼내던데 소화 양은 아니라 하더군요. 소화 양이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닌데, 무엇 때문에 그리 단단히 오해를 한 거요?”
“지난번 제가 조덕대 씨를 연결해 달라고 부탁드린 일 때문이었습니다.”
해경의 말에 환이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미간을 좁혔다.
“그래, 맞아요. 그런 일이 있었지.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그때도 장준학이라는 이름을 꺼냈던 것 같기도 하군. 그때 미리암여학교 설립자와 관한 이야기를 했지요? 소화 양이 김석란 씨라는 비밀의 여류 독지가가 세브란스에 다닌 기록을 알아보아 달라고 했었는데…….”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 일 때문입니다.”
환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바람 새는 소리를 내고는 자기 이마를 두어 번 탁탁 쳤다.
“완전히 새까맣게 잊고 있었소. 장 선생이 미리암여학교 재단의 경영 관리를 했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그때 김석란 씨의 뒷조사를 하도록 한 게 이덕완이라고 생각했던 거군요, 그렇지요?”
“네. 당시에 금광 출원 문제로 양쪽에 사이에 충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때 오득경 선생께 병원 기록에 대해 알아보아 달라고 이야기했던 이후로 그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렸소. 내가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런 오해를 할 일은 없었을 텐데, 본의 아니게 서로 당황스러운 상황이 되었군요.”
“완전히 신뢰할 만한 사람이 맞습니까?”
해경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환이 용정 쪽에 있어서는 그의 정보력을 거의 완전히 신뢰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장준학이 아군이라면 해경의 입장에서도 그의 도움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으나 아무래도 껄끄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해경은 그때 그가 소화를 살려 보낸 것은 더 이상 자신의 뒤를 좇지 말라는 경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장준학 쪽에서도 자신이나 소화의 존재가 썩 달갑지 않기는 마찬가지일 것이기에 일부러 환에게 접근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엮이는 것은 신경이 쓰였다. 환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의심할 만한 정황이 있소?”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상당히 의뭉스러운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기는 해요. 용정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김 선생이라는 자도 그렇고요. 의사라는데 본명도 알려 주지 않았소. 숨기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 굳이 캐묻지는 않았지만 의아하기는 하더군요.”
김 선생과 의사라는 말을 듣자 해경의 머릿속에 퍼뜩 지나치는 것이 있었다. 소화가 장준학의 집에서 간병인으로 위장하여 일할 때,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젊은 주치의가 들른다고 말했었다. 해경은 환에게 물었다.
“젊은 사람입니까?”
“맞아요. 키가 큰 편은 아니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오. 미소년의 인상이라 수염을 깎으면 이십 대 초반 이상으로는 보일 것 같지 않더군요.”
“제창병원 의사라 하던가요?”
“소속은 모르겠으나 제창병원 외과 과장인 김종묵 선생과 상당히 잘 아는 사이였소.”
문득 소화가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침대 아래서 일지를 발견했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그 일지는 김석란이 기록한 것으로 제창병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했다. 집이 전소되며 당연히 그 일지도 사라져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제창병원의 간호부였다는 김석란과 환이 말하는 김 선생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을 수도 있었다.
미리암여학교 재단의 설립자로 알려진 김석란, 소화가 병간호를 했던 늙은 여인은 집이 전소되며 죽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선생이라는 자가 제창병원의 의사라면 그 일지는 간호부가 아니라 의사가 작성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필체를 일일이 대조해 볼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단지 제창병원과 김석란의 이름을 써 놓는 것만으로도 소화를 속이기에는 충분했을 터였다. 잠시 침묵하던 해경은 환에게 말했다.
“장준학 씨에게는 비밀로 하고 제창병원 쪽에 김석란이라는 간호부가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김석란?”
환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동명이인이오?”
“확실히는 모릅니다. 다만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요. 장준학 씨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서로에게 더 좋을 것 같군요.”
“알겠소.”
“만약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장준학 씨와 무슨 관계였는지도 알아봐 주십시오.”
“그러지요. 사람 일이란 참 재미있소. 어제는 적이었던 자가 오늘은 동지가 되기도 하고, 친구였던 자가 철천지원수가 되는 일도 있으니.”
환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것이 손바닥을 뒤집는 일보다 더 쉬운 시대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토록 쉽게 변절했던가. 해경은 환 같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 변절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환 자신도 누구보다 더 뼈저리게 그런 것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해경은 잠시 말없이 환의 얼굴을 마주보다 입을 열었다.
“덫을 놓는 자가 나쁜 것인데도 걸려든 사람을 비난하는 시절입니다.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조심하는 수밖에는 없겠지요. 항시 주의하십시오.”
“알고 있소. 그러나 사람을 쉽게 믿고 싶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군요.”
해경의 말을 받은 환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가 철모르는 아이 같은 말을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환은 곧 변명하듯, 혹은 자조하듯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내가 이런 이상주의자인 까닭은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 때문이지요. 생존 앞에서 이상은 사치요. 내게 생존하기 위해서 변절하는 자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겠소?”
“그들이 생존하기 위해 변절하듯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불신할 뿐입니다. 깊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해경은 자신의 말이 환에게 큰 위로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환이 겪고 있는 괴로움을 자신이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패망한 국가의 황족, 침략자들이 하사한 왕공족의 이름을 달고 자신의 자리에서 버티는 자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환이 자신의 괴로움을 결코 밑바닥까지 들여다볼 수 없듯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만 환이 자책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환의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생각의 끝은 결국 이 모든 일이 다 자신의 탓이라는 자책에 이른다는 것을 아는 탓이었다.
“계속해서 그런 생각을 하신다면 아다린이 약간 필요하실 수도 있겠군요.”
해경은 대답 없는 환에게 농담을 건넸다. 그 말을 들은 환이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해경을 마주보았다.
“요즘도 아다린을 계속 먹고 있소?”
“아닙니다.”
해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히 늘 수면부족 상태이긴 했지만, 최근에는 평양에서 돌아온 직후처럼 아다린을 달고 살지는 않았다. 소화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후로는 이상하게 아다린 없이도 잠이 들 수 있었던 것이다. 환이 다행이라는 표정을 했다.
“심화가 좀 가라앉았나 보군요.”
“그런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정 선생 말대로 아다린은 내가 먹어야겠군.”
환이 반쯤 농담처럼 들리는 말투로 내뱉고는 미간을 두어 번 문질렀다. 해경은 시계를 흘끗 보고는 환에게 말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군요. 피곤하실 텐데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정 선생 덕분에 궁금하던 것도 조금 풀렸고…….”
환이 말끝을 흐리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해경은 가만히 환을 응시하다 말을 건넸다.
“일전에 아다린이 필요할 정도의 심화라면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편이 낫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 하지요.”
소리를 내어 웃은 환이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는 잠깐 침묵하다 해경의 눈을 마주보았다.
“세상 모든 이를 의심한다 해도 정 선생과 소화 양만은 믿고 싶소. 그것조차 사치라고 하지는 않겠지요?”
“사치라니요, 감사한 말씀입니다. 소화 양도 그렇게 생각할 테고요.”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닙니다.”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대답하면서도 마음 한쪽이 묵직해졌다. 환이 가진 신뢰의 무게가 느껴진 탓이었다. 해경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오지 마십시오. 돌아가 보겠습니다. 용정에서 답이 오는 대로 연락 주십시오.”
“늘 고맙소.”
“제가 말씀드리려 한 것인데 선수를 치시는군요.”
웃는 얼굴로 답을 돌려준 해경은 환에게 앉아 있으라는 손짓을 하고는 방을 나섰다. 현관을 나서 정원을 가로지르던 해경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거실 창가에 선 환이 자신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두운 창가에 홀로 선 그 그림자가 유독 고독하게 느껴졌다. 해경은 그 순간 소화를 떠올렸다. 나는, 우리는, 모두 혼자가 아니다…… 해경은 자신과 소화의 존재가 환에게도 그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기를 바라며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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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전야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봄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가 오는 탓인지 전차가 느렸고 사람도 많아 명치정에 내렸을 때는 평소보다 십 분 정도 늦어 있었다. 출근이 늦다고 해서 해경이 무어라 입을 대는 적은 없었으나, 소화는 검은색의 박쥐우산을 받쳐 들고 발을 재촉했다. 길가에 군데군데 고인 물이 발치에서 찰박거렸다.
비가 내려 날이 어두웠기에 사무실 근처에 도착한 소화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사무실의 창이었다. 혹시 해경이 먼저 왔다면 불이 켜져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해경이 아직 출근하지 않았는지 사무실의 창 안은 깜깜했다. 길을 건너서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아 꺼낸 소화는 언제나처럼 습관적으로 문고리를 쥐었다.
그러나 그 순간 까닭을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뒷덜미가 쭈뼛 서는 감각에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서 있던 소화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려 보았다. 분명 사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을 텐데 문이 열려 있었는지 저항 없이 문고리가 돌아갔다.
“선생님이 계신가?”
소화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실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뱉은 말이었다. 소화는 마르는 입술을 축이며 조심스럽게 문을 당겼다. 열린 문틈 안으로 어둠이 스며 나왔다. 소화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잠시 귀를 기울였다. 사무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문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어 본 소화는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으로 들어서서 불을 켰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두어 발 뒷걸음질을 쳤다. 사무실 안이 마치 피난 떠난 자리인 양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탓이었다.
책장의 책은 모조리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다관이며 찻잔 따위도 다 깨져서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분명 어제 퇴근하기 전까지 정리를 하고 갔는데 어찌 된 일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출근하는 동안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 있던 소화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등 뒤에서 해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입니까?”
소화는 뒤를 돌아보았다. 우산을 접어들고 선 해경 역시 놀란 표정으로 사무실 안을 살피다 우산을 내려놓고는 소화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아, 아니오, 저도 지금 막 왔어요. 와 보니까 이렇게…….”
소화가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해경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책상 서랍이며 금고가 있는 벽면 따위를 살폈다. 열쇠로 잠가 놓은 것을 억지로 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외에 값나가는 물건 같은 것은 딱히 없어, 고개를 갸웃한 해경이 소화를 보았다.
“좀도둑인가? 혹시 소화 양 물건 중에 없어진 것은 없습니까?”
소화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소에 사무실에 두고 다니는 개인 물건이 없었기에 잃어버릴 것도 없었던 것이다. 해경이 다행이라는 표정을 하고는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들었다.
“훔쳐갈 것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수고스럽겠지만 정리를 좀 도와주어야겠군요.”
“네, 선생님.”
소화는 얼른 들고 있던 손가방을 소파 위에 내려놓고는 책을 주워들어 책장에 꽂기 시작했다.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책들을 모두 빼어 내팽개쳐 놓았기에, 원래 꽂혀 있던 순서대로 다시 가지런히 책을 꽂아 두는 데만도 삼십 분이 넘게 걸렸다. 해경이 깨진 다기를 쓸어 담아 버리는 사이 소화는 어지럽혀진 해경의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서류며 신문철도 아무렇게나 펼쳐진 채였고 밟고 다닌 것인지 발자국도 선명했다. 평소 순찰이 잦은 지역이었는데 왜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이 작은 사무실에 도둑질을 하러 온 것인지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엎질러진 잉크병을 치우고 잉크를 닦아내던 소화는 문득 손을 멈췄다. 해경이 평소에 책상 위에 늘 두고 쓰던 만년필이 없어진 것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저, 선생님, 여기 있던 만년필이 없어졌어요.”
바닥을 쓸던 해경이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펜 말입니까?”
“어제 저녁까지 쓰시는 걸 보았는데…….”
“바닥에 떨어진 것이 아닐까요?”
해경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없어진 만년필은 일전에 사무실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의뢰인에게 선물 받은 것으로, 해경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었다. 훔쳤다 해도 남의 이름이 쓰인 펜을 가져갈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되지 않았다. 소화는 몸을 숙여 책상 아래며 소파 틈 따위를 살폈으나 만년필의 자취는 없었다.
“없는 것 같아요. 비싼 물건인가요?”
소화가 무릎을 털고 일어나며 묻자 해경은 흠, 하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 값나가는 물건은 아닙니다. 금고에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만년필 하나만 가져간 거라면 까닭을 모르겠군요.”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것도 없어졌는지 살펴보지요.”
네, 하고 대답한 소화는 책상 정리를 마저 끝내고는 사무실 안을 샅샅이 살폈다. 그러나 펜 이외에는 없어진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해경이 전화번호나 주소 같은 것을 적어 놓은 쪽지 한 장까지도 모두 그대로였다. 창틀이며 문을 꼼꼼히 관찰하고는 서랍과 금고를 열어 본 해경이 입을 열었다.
“창을 열고 들어왔다가 나갈 때는 문으로 나갔군요. 젖은 흙이 묻은 것을 보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 뒤에 들어왔던 모양인데, 서랍이나 금고를 억지로 연 흔적도 없습니다. 없어진 서류도 없지요?”
“네, 전부 있어요.”
“그럼 의뢰한 이에게 원한이 있어 명부나 서류 같은 것을 찾으려고 한 일도 아닌 듯한데…… 없어진 물건이 없으니 경찰에서도 받아 주지 않겠군요.”
“만년필이 없어진 것으로 신고하면 아니 될까요?”
“아마 무시할 겁니다. 훔쳐갈 물건이 없으니 기념품 삼아 가져간 것일 수도 있겠지요. 일단 사람이 다치지 않았으니 되었습니다. 소화 양이 혼자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기면 곤란할 테니 자물쇠를 추가로 대야겠군요.”
소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밖에는 없어진 물건도 없고 해경이 곤란해질 만한 일도 없는 듯해 다행이었으나, 그 만년필 하나만 없어진 것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해경이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것이겠지만 순현의 일에 얽힌 이후로는 모든 일이 다 불안하게 느껴졌다. 소화는 불안함을 잊기 위해 걸레를 가져다 바닥에 떨어진 잉크 자국을 닦기 시작했다. 잉크 자국이 잘 지워지지 않아 쪼그려 앉은 채 힘을 주어 바닥을 박박 문지르던 소화는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권중만이 보낸 것일까. 순간 스쳐간 불길한 생각에 소화는 손을 멈췄다. 만약 중만이 해경의 사무실에 도둑을 침입시킨 것이라면 분명 자기에게 불리한 증거들을 찾아 없애려 했을 터였다. 쪽지 한 장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다독인 소화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거기 있어요.”
해경이 손을 들어 문가로 가려는 소화를 막고는 대신 문을 열었다.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환이었다. 급히 왔는지 상기된 얼굴로 해경에게 봉투 하나를 내민 환이 안으로 들어섰다. 소화가 얼른 어지럽혀진 소파 부근을 치우자 환이 그제야 어수선한 사무실의 분위기를 알아차리고는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간밤에 좀도둑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해경이 대답하자 환이 헛웃음을 뱉었다.
“허 참, 정 선생의 사무실을 털다니 간도 큰 놈이군.”
“없어진 물건은 없어 다행입니다.”
“그래요? 그건 잘 되었군요. 소화 양, 그냥 두어도 됩니다. 금방 갈 테니까요.”
바닥을 닦으려는 소화를 제지한 환이 팔짱을 끼며 해경을 마주보았다.
“지난번 이야기한 것 때문에 제창병원에 연락을 했소. 직원 명부 사본 일부를 보내주었는데 김석란이라는 간호부가 일한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해경이 봉투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꺼내서는 펼쳐 보았다. 아마 환이 방금 말한 직원 명부의 사본인 모양이었다. 해경이 눈을 그 명부에 두고 있는 동안 환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미리암여학교의 설립자인 김석란 씨는 나이가 상당히 있는 여성분이 아니었소? 이쪽에서 말하기로는 자기 병원의 간호부였던 김석란은 어린 여자였답니다. 반 년 조금 넘게 일했다는데 이미 칠팔 년도 훨씬 더 된 일이라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는다고요.”
소화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환을 쳐다보았다. 환의 말로 미루어 보아 해경이 제창병원 쪽에 김석란이라는 간호부가 있었는지 알아보아 달라고 한 모양이었다. 이미 다 끝난 일인데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생각하던 소화는 문득 장준학을 떠올렸다. 그가 다시 해경과 자신의 앞에 나타났기 때문인 것인가. 소화는 해경의 눈치를 살폈다. 소화의 속을 알 리 없는 해경은 환에게 물었다.
“장준학 씨와 무슨 관련이 있는 사람입니까?”
“음, 그것이 또 재미있는 일인데 당시에 장 선생이 용정의 중학 선생이었다는 거요. 그래서 아마 그 간호부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 모양이오. 병원을 그만둔 것도 그 때문이라는데, 함흥 제혜병원의 원장이 여자 선교사라 그 간호부를 거기에 부탁하여 맡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아마 병원 일이나 의학을 배우라고 보낸 모양인지 여의전(女醫專: 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시켰다는 소문을 들었다는데 그 이후로는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고 했소.”
“제혜병원 원장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군요.”
“지금 원장은 모례리(Florence Murray: 플로렌스 머레이) 여사라는 분인데 개원 당시 원장이었던 맹미란(Kate MacMillan: 케이트 맥밀런) 여사가 그 간호부를 맡았던 것인지, 아니면 모례리 여사가 맡았던 것인지 모르겠소. 아는 선배에게 물었지만 자기도 제혜병원에 온 지 삼 년도 채 되지 않아 그 전 일은 알 수 없고, 우선 자기가 아는 한 지금 제혜병원에 그런 이름의 간호부는 없다고 해요. 하필 모리 원장은 지금 선교회 일로 잠시 카나다로 떠나 부재중이오. 이게 중요한 일이라면 모리 원장이 돌아오는 대로 약속을 잡도록 요청해 보지요.”
환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 있던 해경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기다릴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우선 알겠습니다. 장준학 씨와는 곧 직접 이야기를 해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재단 일로 지방에 내려갔다가 내일 오후에 돌아온다고 하니 그때 함께 사무실에 들르도록 하겠소. 부디 별 일이 아니었으면 하는데…… 그나저나 경찰에 도둑이 들었다고 이야기했소?”
“훔쳐간 물건은 없는 것 같아 신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흠, 그래요. 아무쪼록 정 선생과 소화 양 모두 몸조심하도록 합시다. 나는 연구실에 일이 있어 다시 가 보아야 하니,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그쪽으로 연락 주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해경이 대답하자 환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나올 필요 없다고 손짓을 하며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해경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사무실 안을 서성거리다 멈춰 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화는 준학의 집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다시 물으면 어쩌나 싶어 초조한 마음으로 서둘러 바닥을 마저 닦아내고는 주변에 떨어진 물건들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소화가 정리를 마칠 때까지 마치 굳은 듯 서 있던 해경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책장 앞으로 다가와 신문철 여러 개를 빼서는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저, 무어 도와 드릴 일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소화의 물음에 해경은 신문철을 펼쳐 들고 거기에 눈을 둔 채 대답했다. 한참을 꼼짝도 않고 계속해서 신문철을 보던 해경의 시선이 어느 한 페이지에 멈췄다. 무슨 기사인지 알 수 없었으나 한동안 같은 기사를 여러 번 반복해 읽는 듯 침묵하던 해경이 미간을 누르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소화를 보았다. 선반의 먼지를 털어내고 남은 다기를 다시 올리고 있던 소화는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해경과 눈이 마주쳐 멈칫했다.
“무슨 일이셔요?”
“장준학의 집에서 내게 전화를 걸었던 날이 기억납니까?”
소화가 조심스럽게 물은 말에 해경은 대답 대신 소화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되물었다. 순간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싸늘해졌다. 소화는 침착하려 애를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화를 걸기 전까지의 일은…….”
“그때 내게 출원증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지요.”
“네?”
당황한 소화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 출원증은 준학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일 수도 있었으나, 사실상 사건과 관련이 없다면 해경이 거기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사방에서 덫을 놓는 상황이라 해경이 준학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출원증의 이름을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던 준학의 말 때문에 선뜻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화는 말을 하지 못하고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소화가 불안해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해경이 눈을 약간 가늘게 떴다.
“나와 통화하던 도중에 장준학이 전화를 끊게 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전화를 끊기 전의 일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거지요. 그때 소화 양은 출원증의 이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김석란 씨의 이름으로 되어 있지 않다고요. 그때 그 출원증은 누구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습니까?”
“저, 저어, 기억이 잘…….”
“몰핀 부작용이라 하더라도 소화 양이 그 전의 일을 잊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해경의 말은 사실이었다. 몰핀을 맞고 병원에서 깨어나기까지의 기억은 없었지만, 의식이 있던 마지막 순간까지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을 말함으로써 해경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소화가 아무 말도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서 있기만 하자 해경이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 출원증은 김석란의 진짜 정체와 관련이 있는 거겠지요. 때문에 장준학이 절대 말하지 말라 입막음을 한 것일 테고. 아닙니까?”
“선생님.”
소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해경을 부르자 해경은 읽고 있던 신문철을 가리켰다.
“삼 년 전 조선여자의학강습소 졸업생 중 의사검정 제삼부시험에 합격한 김석란이라는 여자가 있다는 기사입니다. 당시 나이는 스물넷이라고 되어 있군요. 제창병원에서 일하던 간호부 김석란이 제혜병원 원장의 도움을 받아 의사가 된 것일 수도 있지요. 세브란스 의전의 등록금이 연간 일백 원이고 생활비는 그 이상일 텐데 간호부 월급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겠지요. 김석란이라는 이름을 다른 이에게 빌려 주고 행세하게 하면서요.”
“장준학 씨가 김석란에게 학비를 대 주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소화가 머뭇거리다 물은 말에 해경이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그 학비는 어디서 났겠습니까? 미리암여학교 재단 경영을 맡기 전의 장준학은 중학 교사였습니다. 장준학은 신림리 집에서 화재가 났을 때 죽은 사람이 자기 고모라고 했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고모를 부양하며 김석란이 공부하는 동안 그 뒷바라지도 했다는 거지요. 중학 교사의 월급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니, 그 출원증의 주인이 바로 진짜 김석란이 아닌가 의심하는 겁니다. 그 진짜 김석란이 재단을 설립하고 그림자로 숨어 지내며 장준학을 통해 학교를 경영해 왔던 것이거나, 혹은 장준학이 그 출원증을 어떤 방법으로 빼앗아 놓고는 김석란이라는 실체 없는 인물을 내세운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출원증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숨겨야만 하겠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전에 없이 다그치는 듯한 해경의 태도에, 소화는 준학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나는 소화 양이 약속을 지킬 거라고 믿습니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본래 거짓말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었기에 해경을 계속 속일 자신도 없었다. 침묵하는 소화를 물끄러미 마주보던 해경이 짧은 한숨을 뱉고는 물었다.
“소화 양은 그때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빨리 나오라고 재촉을 하는데도 그보다 먼저 그 일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겁니다. 맞습니까?”
“그 일은 제발 묻지 말아 주세요. 네?”
거의 애원하는 듯한 소화의 얼굴에 해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화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해경이 양 어깨를 잡는 감각에 움찔한 소화는 눈을 떨구며 해경의 시선을 피했다. 자신이 대답하지 않는다 해도 해경에게 이미 속을 들여다보이는 기분이라 도망칠 곳을 찾을 수 없었다. 해경이 몸을 숙여 소화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절대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거군요.”
침묵은 곧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소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해경은 소화가 무슨 말을 할지 다 안다는 듯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장준학이 소화 양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하든 내가 그렇게는 못하게 할 겁니다.”
“……저는 상관없어요, 선생님.”
소화는 작은 목소리로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해경이 눈썹을 약간 좁히며 고개를 기울였다. 소화는 다시 한 번 되풀이해 말했다.
“저한테 무슨 짓을 하든 그건 상관없어요.”
“무슨 뜻입니까?”
되물은 해경은 말없이 입술을 깨무는 소화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가 퍼뜩 무언가 생각난 듯한 얼굴로 소화의 어깨를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말하면 내게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뜻이군요. 그렇지요?”
“선생님, 제발…….”
“장준학은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의심이 가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소화 양이 그 출원증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쪽이 우리 둘을 훨씬 더 위험하게 만들 겁니다.”
소화는 해경이 자신을 설득하는 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치맛자락을 쥐었다 놓았다 하며 초조하게 시선을 흩었다. 자신이 출원증에 대해 이야기해 해경이 그 일을 조사하게 된다면 준학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였고, 해경의 말대로 침묵한다면 그 선택이 언젠가 자신과 해경 둘 모두를 더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이럴 때는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해경이 망설이는 소화의 마음을 알아챈 듯 소화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깜짝 놀란 소화가 고개를 들자 해경이 소화의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나는 절대 소화 양을 위험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누가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소화 양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겁니다. 그리고 나 역시도,”
해경이 잠시 말을 끊었다. 소화는 문득 해경이 어린 소년 같은 얼굴을 했다고 느꼈다. 답지 않게 주저하고 수줍어하는 듯하던 그 표정은 곧 사라졌으나 소화는 그 찰나에 멍하니 시선을 붙들렸다. 해경이 두 손으로 소화의 손을 완전히 감싸 쥐고는 숨을 들이쉬었다.
“나 역시도 나를 철저히 지킬 겁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이야기해 주어요. 나는 우리 둘을 지키기 위해 묻는 겁니다. 소화 양 역시 그렇기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해 주어야 합니다. 부탁합니다, 소화 양.”
“……이지순이었어요.”
해경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이상 더 침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화는 간신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소화의 입에서 나온 말에 해경이 순간 얼어붙은 듯 굳은 얼굴로 소화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출원증에…… 제창병원에서 적은 일지 사이에 출원증이 있었어요. 거기 적힌 이름이요.”
“그 이름이 뭐였냐고 묻는 겁니다!”
해경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놀란 소화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며 마른침을 삼켰다. 무언가 하면 아니 되는 말을 뱉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해경이 더 꽉 잡으며 소화에게 재차 물었다.
“그 이름이 뭐였다고요?”
“이, 이지순이요. 이지순이었어요.”
“잘못 본 것이 아닙니까?”
“뜻 지(志)자에 순할 순(順)자를 썼어요. 분명히 보았어요.”
소화의 말에 해경이 소화의 손을 쥐고 있던 자기 손을 놓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는 무어라고 입술을 달싹였다. 소리 없는 말이었으나 소화는 해경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곧 알아차렸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다시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서던 해경이 비틀거렸다. 소화는 황급히 달려가 해경을 붙들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해경이 소파에 쓰러지듯 기대앉으며 몸을 숙이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소화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곁에 선 채 그런 해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둥글게 말린 해경의 등이 떨리고 있었다. 소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다 가만히 그 등을 쓸었다. 해경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침묵했다. 시계의 바늘이 돌아가는 소리만이 고요한 사무실을 채웠다. 열린 창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책상 위에 놓인 종이들이 팔락거리며 넘어갔으나 두 사람 모두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