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558
899화 차 한잔에 담긴 뜨거움과 차가움 (1)
범한의 입에서 하종위라는 세 글자가 나오자 범약약이 조용히 일어나서는 난처함과 자책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범한이 잠깐 동안 그런 누이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하종위는 나를 건들지 못할 거야. 황실에서 그건 원치 않을 테니까.”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는 계속 말했다.
“아무래도 조정에서 잘나가는 하 대인은 우리 집안과 혼사를 맺으려면 내 비위를 맞추기 보다는 차라리 황제 폐하의 뜻을 따르는 충성스러운 개가 되는 게 더 낫겠다고 결심한 것 같아.”
범한이 ‘흥’하고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어갔다.
“하종위는 황제 폐하의 힘에 기대 나와 싸웠다가는 자신의 앞날이 좋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어. 그래서 폐하와 내 사이에 갈등을 일으킬 만한 중요한 문제를 찾아내고 싶어서 끊임없이 나를 자극하는 거야. 나를 완벽하게 쓰러뜨려야 자신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는 걸 아니까.”
“그럼, 폐하께서는 왜 이런 일을 벌이시는 건데?”
그 말을 들은 범약약이 이제야 불안감을 느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조 섞인 말투로 설명했다.
“폐하께서 나를 며칠 뒤 감찰원 원장에 올릴 결정을 내리셨어.”
이 일은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일이었기에 범약약은 축하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에 의문과 반감만 더욱 짙어졌다.
‘줄곧 오라버니를 총애해온 황제 폐하가 어째서 갑자기 오라버니의 권세를 압박하려는 걸까?’
“당근을 주면서 동시에 채찍을 휘둘러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걸 알려주려는 거지. 황제 폐하께서는 나에게 이 점을 일깨워주고 또 나를 약하게 만들고 싶으신 거야. 신하가 너무 많은 권력을 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시니까.”
누이를 바라보던 범한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살짝 비웃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이런 조치들이 황제 폐하가 경국의 미래를 내다보고 한 결정이라는 거지. 문하중서를 중심으로 해서 호 대학사를 조정의 수장으로 앉히고 감찰원과 도찰원이 서로 균형을 이룰 때 조정은 비로소 안정될 수 있어······. 그래서 이번 조치들은 백 년 뒤 경국이 어떤 모습이 될지를 보기 위한 시험적인 조치들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하종위도 문하중서 사람이잖아.”
범약약이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건 감찰원이 가진 힘이 너무 크기 때문이야. 이전에 진평평 대인이 감찰원에 있던 시절에 당시 재상이셨던 장인어른을 포함해서 조정의 문무백관 중에서 진평평 대인을 압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어? 그리고 나 같은 경우도 하종위가 도찰원 좌도어사라는 관직과 황제 폐하의 총애만 가지고 나를 압박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는 어쩔 수 없이 하종위를 문하중서에 들이고 억지로 그의 관직을 높여줌으로써 내 권력을 줄일 힘을 만들어 주신 거지.”
범한이 호탕한 웃음을 지으면서 계속 설명했다.
“물론 훗날 조정에서 하종위의 권력이 너무 커진다면 황제 폐하께서는 그가 가진 권력도 줄이려 하실 거야.”
범한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개똥같은 제왕의 심술인 건지. 균형에 너무 집착해서 두드러진 것들은 모두 잘라버리려 하는 거지.”
* * *
한참 동안 침묵하던 범약약이 나지막이 말했다.
“손씨 집안 아가씨가······ 아직도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범약약은 경도 부윤 쪽 상황이 급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오라버니를 통해서 황제 폐하의 계획을 알게 되니 손씨 집안을 도와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참 침묵하던 범한이 예상치 못한 말을 내뱉었다.
“손빈아에게 가서 내가 나중에 반드시 찾아가겠다고 말해.”
화들짝 놀란 범약약이 물었다.
“하지만 오라버니가 경도 부윤이 물러나는 게 황제 폐하의 뜻이라고 말했잖아?”
고개를 숙인 범한이 양손을 깍지 끼고 차분히 배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황제 폐하와 3년 전에 한 약속이 있어. 만약 이전에 황제 폐하가 내 권력을 가져가려 하셨다면 나도 순순히 내주었을 거고, 하종위가 한동안 제멋대로 굴어도 내버려 뒀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범한이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해. 그래서 내가 지금 쥐고 있는 권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싶어.”
“지금 황제 폐하를 상대로 싸우겠다는 거야?”
범약약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불안해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아직 젊으니까 내 마음속 불길이 치솟는 대로 행동할 거야.”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극히 맑은 그의 미소에는 불길 같은 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사실 아주 단순했다. 그는 자신이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모두 지키고 싶었고, 그래서 자신의 화를 이용해 잠시 자신의 손에 있는 권력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해야만 강력한 황제 폐하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방법을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
범약약이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라버니의 마음이 이미 정해져서 다른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웃으며 물었다.
“정말 손씨 집안 아가씨 만나러 가지 않을 거야?”
“나는 손씨 집안 아가씨가 노처녀가 되는 건 원치 않아. 그러니까 보러 가지 않을 거야.”
범한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손씨 집안 아가씨에게 곧 있을 생일잔치를 내가 기대하고 있다고 전해.”
* * *
응접실에 앉아 있는 손빈아의 마음속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지만, 겉모습은 다소곳하고, 침착했다. 물빛 홑옷 차림으로 다소곳하게 정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도도하고 우아해 보여서 손님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범씨 집안에 찾아와서 지금까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뒤죽박죽이었다. 귀족 집 자제인 자신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곳에 찾아온 게 수치스럽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집안에서 한숨만 연달아 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 마음이 조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머리를 휘젓는 건 범한이라는 존재였다.
이미 3년 동안 작은 범 대인을 보지 못했지만, 여종들이 항상 밖에 소문을 떠벌리기에 손빈아는 작은 범 대인이 3년 동안 잘 지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들과 딸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가정은 화목하고 조정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잘 지낸다는 걸 알고 그녀는 무척이나 안심되었다.
손빈아는 범한을 보고 싶었지만, 그녀 역시 자신이 작은 범 대인을 만나는 게 예절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을 다스려도 보고 싶은 마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래서 범한의 저택을 찾아온 그녀는 한 편으로는 범한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범한이 정말 저택에 없어서 조용히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가 살짝 식자 여종이 찻물을 바꿔 주었다. 벌써 네 번째 바꾸는 거였다. 이른 아침부터 지금까지 있었음에도 범씨 집안은 손씨 집안 아가씨를 박대하지 않았다. 의관에서 돌아온 등 대가는 공손하게 행동하면서 그녀가 적적하지 않도록 담소를 나누었다. 몇 시진 동안 계속 담소를 나누면서도 등 대가는 화제가 중복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손빈아는 등 대가가 범씨 집안일을 관리하는 부인이라는 걸 알았기에 함부로 무시하지 않았다. 다만 신 군주가 저택에 없다는 말을 듣자 속으로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은 모두 소공야의 부인인 신 군주의 성격이 무척이나 온화해서 바깥일로 남편과 이견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알고 있었다.
게다가 모두들 신 군주가 항주회를 이끌며 가난한 경국 백성들을 도와주는 어질고 선량한 모습에 감복해서 칭송을 그치질 않았다. 하지만 손빈아는 경도 안에서 자신과 범한 사이에 난 소문이 신경 쓰여서 신 군주를 보기가 두려웠다.
손빈아가 한참을 기다렸음에도 등 대가는 여전히 군주는 입궁했고, 소공야는 일을 처리하러 나가서 저택에는 아무도 없다고만 했다. 그러면서 집안에 주인이 없어 기다려야 하는 점을 양해해 달라는 말도 연신 했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손빈아는 관리가 저택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걸 보고는 작은 범 대인이 자신을 보기 싫어서 후원에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살짝 실망한 그녀가 일어나 떠나려 하는데 등 대가가 그녀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등 대가의 뜻밖의 행동에 놀란 손빈아는 그제야 후원에서 자신이 온 일을 가지고 의논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다시 조용히 앉아서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뒤 범약약이 응접실에 들어오자 손빈아가 재빨리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했다. 두 여자가 서로를 자세히 살펴보며 인사말을 주고받은 뒤 범약약이 범한이 남긴 말을 전했다.
범약약의 말을 들은 손빈아는 작은 범 대인을 나중에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더없는 기쁨을 느꼈다. 볼 일을 마친 손빈아가 서둘러 감사 인사를 하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떠나려 했다.
그때 범약약이 기뻐하는 손빈아의 얼굴에 살짝 실망하는 기색이 드리우는 걸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라버니를 사모하는 손빈아의 모습이 안쓰러워진 범약약이 마지못해 말을 내뱉었다.
“오라버니는 지금 후원에 계시지만, 남녀가 유별하여 직접 나와서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낭자께서도 오라버니의 이러한 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떠나려 하던 손빈아가 그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손빈아는 범씨 집안 아가씨가 작은 범 대인의 난처함을 설명하는 동시에 자신이 안쓰러운 마음에 이런 말을 했다는 걸 알았다. 범씨 집안 아가씨의 진심을 느낀 손빈아가 감격해서는 양 볼을 살짝 붉히며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떠나는 손빈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범약약이 참지 못하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범한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갔는데 왜 숨어 있는 거야?”
그리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손씨 집안 아가씨가 오라버니의 뜻을 이해하고도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더라고.”
이 말을 하면서 그녀가 모처럼 범한을 노려보며 말했다.
“오라버니, 그렇게 깐깐하게 굴지 않을 수는 없는 거야? 손씨 집안 아가씨를 위한 고려가 그녀를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거야?”
범약약은 자신의 목소리에 살짝 화난 기색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속으로 놀랐다. 그녀가 재빨리 미소를 지어 본심을 숨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몇몇 일들은 아직 오라버니에게 말해주는 걸 잊었는데, 우리가 이전에 잘못 들었던 것 같아.”
범한은 이 말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제부터 착한 사람이 되는 게 나쁜 일이었어?”
손씨 집안 아가씨를 성공적으로 피하고 누이를 위로해준 범한이 한가롭게 두 다리를 꼬고 앉아 사천립과 소문무가 보낸 서신을 읽으면서 낮게 콧소리를 흥얼거렸다. 동이성에 있는 사신단에서 아직 진전된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아무래도 사고검이 이틀은 더 버티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범한 역시 조급할 건 없었다. 경도에 앞으로 6, 7일은 더 머무르면서 오랜 시간 세심하게 처리하지 못했던 개인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데 집중할 생각이었다.
민북 황실 금고 3대 작업장에서 소문무의 위치는 갈수록 안정되고 있었다. 임소안 가족들이 도와주는데다가 감찰원과 황실 금고 전운사의 긴밀한 협력 덕분에 과거 왕계년 다음으로 범한의 만담꾼으로 활약했던 그는 이제는 3대 작업장의 일인자에 올랐다. 물론 범한의 뜻을 대신 추진하는 게 그의 주된 임무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