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655
996화 준비하는 중 (2)
범한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호 대학사의 눈에 실망하는 기색이 점점 짙어졌다. 그리고 한참 후 그가 갈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설마 죽고 싶으신 겝니까?”
범한이 고개를 들고 호 대학사를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리 막무가내로 소란을 피우지 말아요!”
이제 보니, 호 대학사는 정말로 화가 난 거였다. 그는 경국 문관의 우두머리로 최근 들어 다른 문관들과 마찬가지로 황제와 범한이라는 부자간 반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맘때면 원래는 경국의 아름다운 가을 경치나 지켜보고 있어야 하건만. 갑작스레 일어난 이상한 일 때문에 무수히 많은 먹구름이 드리워지자 경국의 고관이자 경국의 백성인 관료들은 모두 이 혼란을 일단락하기 위해 범한에게 입궁해 사죄하라고 권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동안 범한이 보여준 태도는 호 대학사를 포함한 모든 이의 마음을 점점 싸늘하게 식도록 할 뿐이었다.
“제가 단순히 총애 받는 신하라고만 보시는 것입니까?”
범한은 아이처럼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호 대학사의 말을 듣는 순간 참지 못하고 이맛살을 구긴 채 질문을 던져 버렸다.
“총애와는 무관한 일이지요. 대인께서는 단지…… 신하일 뿐이니까요. 저도 신하고 말이지요.”
호 대학사가 억지로 화를 억누르고는 소리를 죽여 느릿느릿 말을 이어 갔다.
“대인이나 저나 모두 황제 폐하의 신하입니다. 어쩌면 대인은 황제 폐하께서 자신을 섭섭하게 대해 주셨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요. 하나 꼼꼼히 따져본다면, 개국 이래 대인처럼 총애와 신망을 받은 이가 있는 줄 아십니까? 현 조정의 역사를 똑똑히 보았으니, 황제 폐하께서 대인에게 최대한의 관용과 인내심을 보여주셨다는 걸 분명 알아야 할 겁니다.”
“대인의 힘만 맹목적으로 믿지 마세요. 그 힘이란 건 결국에는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여 주신 것이니까요. 황제 폐하께서 요 며칠 대인이 뾰족하게 굴어도 내버려 두신 건 달리 방법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그런 결단을 내리고 싶지 않으신 것뿐. 못하셔서가 아니란 말이지요.”
호 대학사가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며 엄숙하게 말을 이어 갔다.
“물론, 대인께서 출중한 신하란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
호 대학사는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이어서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았다.
‘황제 폐하께서 진정 관용을 베풀어주지 않으셨다면, 어쩌면 대인은 일찌감치 감옥에 하옥되거나,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황제 폐하께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으시니까요.’
호 대학사가 갑자기 말을 끊은 건 문득 자신이 마음이 격해진 나머지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에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화제를 바꾸었다.
“경국에서 큰 공을 세운 신하가 오만함 때문에 경도에서 사라지는 걸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호 대학사가 범한을 바라보고 있다가 정중하게 말을 이어 갔다.
“길을 잃었다면 돌아올 줄도 아셔야지요. 사납게 고집을 부리시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랍니다.”
“그 말은 얼마 전에 대머리 여럿에게 들었답니다.”
범한이 난처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이어 갔다.
“이제 보니, 지금 경도와 천하에서는 저를 역사의 마차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벌레로 보고 있었군요. 하여 서둘러 피하지 않으면 곧 깔려 죽을 거라 보고 있고요. 자신의 생각을 가지면 그 자체만으로도 죄인이 되는 것이었어요.”
범한이 차츰 웃음을 거두었다. 그리고 순간 여러 해 전 포월루 밖에서 흠씬 패준 부잣집 도령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임완아가 호 대학사와 지극히 비슷한 말을 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녀는 황제 폐하의 인내심은 결국 한계가 있다고 했었다. 그래서 지금이야 경도에 갇혀 나갈 수 없는 정도지만, 상대가 자신을 죽여 없애려 한다면 말 한마디만으로도 족하다는 식으로 말했었다.
경묘 고행자들이 에워싸고 공격했던 것과는 달리, 일단 경국 조정에서 정말로 범한이라는 불안 요소를 제거해 버리기로 결정한다면? 범한은 아무리 놀라운 무공을 지녔다 해도 자신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대종사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까 비를 맞으며 태학으로 들어오는데 학사들이 제 곁을 스쳐지나가더라고요. 그때 저도 어쩌면 언젠가는 저들에게 밉고 싫은 대상이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범한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피곤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아무도 대인을 책망하거나 미워하고 싫어한 적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경도 관원과 백성들도 사형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할 때면 어느 정도는 경의를 표하고 있어요.”
호 대학사가 두어 번 기침을 하고는 느릿느릿 말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께서 대인에 대해 하신 말씀처럼, 진 원장 일과 관련해 대인이 고집스럽고 사납게 행동한 건 있어요. 그래도 진심에서 나온 행동에 대해서는 많은 이가 이해할 수 있지요……. 하나 이 일들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는 방법을 어떻게든 배워야 합니다.”
“백성들은 대인을 존경해요. 다만 그건 대인께서 보여준 정 때문입니다. 하나 정말로 대역무도한 행동을 하신다면…… 심지어는 생각이라도 하신다면…….”
호 대학사의 목소리에 점점 한기가 실렸다.
“본관이, 조정이, 백성이, 황제 폐하께서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잘 생각해 보세요. 이는 현재 우리의 위대한 경국 조정이 지닌 통일 의지입니다. 하여 모두들 대인께서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거고요.”
“제멋대로 행동한다고요?”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그런데 웃는 얼굴인데도 무겁게 압박하는 기색이 더 강했다. 천하가 적이 되는 건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범한은 앞서 생각했던 것들을 속으로 곱씹어 보느라 정신이 조금 딴 데 팔려 있었다.
한참 후 범한이 정중하게 호 대학사에게 인사를 했다. 그런 후 별다른 말없이, 그리고 다른 정보는 주지 않고 곧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정해야겠군요. 저는 이미 늙었어요.”
호 대학사가 범한의 뒷모습을 향해 느닷없이 말을 툭 던지더니, 느긋하게 말을 이어 갔다.
“오늘 한 말은 조금 과한 면이 있군요. 하나…… 천하 판도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전쟁은 잦아들지 않으니, 조정의 백관과 천하 백성을 위해 부탁하는데, 부디 더 생각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호 대학사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황제 폐하가 다음 재상으로 삼기 위해 일부러 뽑아 놓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조정의 국면 변화에 따라 그를 위해 정해진 앞날은 오히려 모호해지고 있었다.
황제 폐하는 범한과 대항하기 위해 하종위를 치켜세웠다. 그런 하 대인은 성심(聖心)을 잘 파악하고 정무에 능했으며, 일을 노련하게 처리하면서도 허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범한의 세가 약해진 지금 그의 문하 중서 내에서 지위는 자연스레 확고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황제 폐하의 신임까지 한 몸에 받고 있으니, 그는 그야말로 잘 나가는 중이었다.
이에 권력과 지위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 호 대학사도 어쩌면 마음 한구석이 허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가 범한을 열심히 설득한 건 어쩌면 조정에 잘 아는 조력자를 남겨두려는 의도일 수도 있었다. 물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아까 그가 말한 대로였다. 지금 천하에 칼끝을 겨누고 있는 경국은 안정적인 조정, 조화로운 사회가 필요했다. 그런데 범한이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날만큼 경국이 안녕을 누리는 날도 그만큼 줄어드는 거였다.
범한이 알아서 죽는 게 아니라면, 실제로 경국 조정과 민간에서 이제 막 불세출의 공을 세운 작은 범 대인이 이렇게 죽어버리는 걸 원하는 사람은 몇 안 되었다.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인지 알아들었습니다.”
범한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저도 언젠가는 생각이 트여서 입궁해 사죄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요.”
그러자 범한 뒤에 있던 호 대학사가 웃으며 생각했다.
‘대인이 생각이 트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어쩌면…… 제가 정말로 잘못한 걸까요?”
문 앞에서 유난히 피곤한 뒷모습으로 서 있는 범한이 살짝 갈라지는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말했다.
하지만 호 대학사는 이 말을 듣자마자 순간 가슴이 뜨거워져 천천히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오늘 재입궁을 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황제 폐하와 범한의 부자간 신경전은 호 대학사가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단지 누구도 먼저 고개를 숙일 생각이 없는 상황이니, 황제 폐하를 설득해 범한에게 입궁하라는 성지를 내리도록 한다면, 어쩌면 범한도 순순히 따를 수도 있을 텐데…….
호 대학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범한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제가 지금은 감찰원 소속은 아니나, 그래도 정말 재밌는 소식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대학사께서도 듣고 싶으실 걸요?!”
그러자 호 대학사가 살짝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범무구가 하 대학사 저택에서 책사로 있습니다.”
말을 마친 범한이 인사를 하고 곧바로 방을 떠났다. 이때 태학에 내리는 비는 여전히 약하지도 세차지도 않게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산 아래로 보이는 범한의 얼굴은 전혀 동요 한 기색이 없었다. 오늘 호 대학사와의 대화에서 그는 이미 목적을 이루었다. 그는 조정 내 고위 관원들이 자신을 어찌 보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황궁에 계신 황제 폐하가 자신에게 얼마나 관용을 베풀어 줄 수 있는지도 이해했다. 물론, 가장 관건은 마지막에 던진 말이었다.
범한은 우산을 들고 조용히 빗속을 걸으며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오늘 밤이 아니라면 내일 황궁에서는 입궁하라는 황명을 내릴 것 같았다. 그리고 호 대학사를 통해 황궁에 푼 모 신호는 어쩌면 의자에 앉아 있는 그 남자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모두 계년조가 이제 막 경도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아직 준비가 덜 되었음에도 이 군신간의 냉전을 용수철이 제 기능을 못하는 범위 안에 묶어둬야만 했다. 그래서 범한은 준비하고 있는 거고, 시시각각 준비하는 거였다.
* * *
그날 밤, 호 대학사는 입궁을 했다. 그가 황제 폐하께 눈물까지 흘려가며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어서방 시중을 드는 태감들은 황제 폐하의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는 건 모두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당장에 황명 하나가 궁 밖으로 나가 범씨 가문 저택 밖에서 이레 동안 밤마다 이루어진 살육이 막을 내려서였다.
호 대학사는 편안한 얼굴로 황궁을 나갈 때까지 범한이 자신에게 알려준 경천동지 할 정보를 황제 폐하께 알려드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첫째, 뒤에 대체 어떤 음모가 숨어 있기에 범한이 이런 긴급한 사항을 왜 자기에게 말해줬는지 이해가 안 되어서였다. 둘째, 지금의 경국은 호 대학사의 신념처럼 단결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태학에서 그는 범무구란 이름자가 귀에 익는다고 생각했을 뿐, 그게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호 대학사는 과연 문하 중서의 우두머리인 대학사 다웠다. 그가 차 한 잔 마시는 동안 그의 부하 관원들은 깔끔하게 조사를 마쳤다. 범무구란 자는 과거 2 황자부에 있던 여덟 가문 장수 중 하나였다.
황궁 문을 나서서 마차에 올라 탄 호 대학사가 더는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후 가볍게 수염을 어루만지고 웃으며 생각했다.
‘작은 범 대인은 과연 원수를 절대 잊지 않는 귀여운 사람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