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has become the older brother of the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249
249화. 색칠의 마녀 (3)
타이머스 황태자는 매일같이 격무에 시달렸다. 심연의 악마를 붙잡은 이후, 악마의 마력이 대지로 환원되면서 덩달아 마력을 갖고 태어나는 아이들의 수가 늘었다. 이 변화는 기회이자 위협이었다. 타이머스는 물론 기회라고 생각했다.
마물로 가득 차 사람은 터를 잡고 살지 못하는 은둔자의 땅. 언젠가 그곳을 완전히 정복하는 날이 올 것이다.
타이머스는 그 땅의 주인으로 은근히 낙점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마법학교에 입학한 뒤 수석을 놓치지 않는 천재 마법사인 4황자 데이지. 전투에 재능이 없다는 게 흠이지만, 온화한 성정과 따뜻한 마음씨는 큰 장점이었다.
데이지는 은둔자의 땅을 지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데이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타이머스 본인이 그렇게 만들 생각이기도 했다.
이런 합리적인 이유에 더불어, 가르치면 가르치는 족족 성장하는 동생을 예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른 형제들보다 데이지를 더 엄하게 가르치고 관리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일각에서는 타이머스가 데이지를 견제한다는 소문도 돌았는데, 그건 알 바 아니었다.
타이머스는 데이지를 예뻐했다. 그리고 그 릴리는 타이머스의 순수한 속내를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대뜸 전하와 함께 사냥을 가고 싶다고 말씀해 보세요. 그러면 넘어가 주실 겁니다. 오히려 좋아하실 거예요.”
타이머스의 집무실 앞, 릴리가 데이지에게 속삭였다.
데이지는 땀으로 촉촉한 손바닥을 살짝 마주 잡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렇게 얼버무릴 수는 없어. 용건이 있어서 부르신 거잖아. 착실히 대답해 드려야 해.”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솔직히 말씀드리고 혼나는 수밖에요.”
“하지만 혼날 일은 아니야. 정말이야.”
“그렇다면 그 말도 하시면 좋겠네요.”
“형님이 나를 한심하게 건방지다고 생각하시면 어떻게 하지. 형님을 귀찮게 해드리려는 건 아니었는데…….”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일단 들어가시죠.”
릴리가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타이머스의 책상 앞까지 가는 걸음이 무겁고 또 무거웠다. 데이지는 도와달라는 듯 몇 번이나 릴리를 쳐다봤다. 릴리는 그저 빙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
타이머스는 서류를 검토하고, 시종에게 넘기고, 새로운 서류 더미를 받아든 다음, 또 다른 봉투를 넘기고, 다른 상자를 받고, 인장을 찍고……. 이런 과정을 세 번쯤 반복한 다음 느긋하게 데이지를 불렀다.
그다음 또 말이 없었다. 데이지는 기다리다 못해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지난 시험에서 또다시 수석을 했습니다. 약초학은 조금 어려웠지만, 괜찮았어요. 역사는 당연히 만점이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나머지 과목도 다 좋았습니다. 학교생활은 순조로워요. 제 또래의 영식들과도 활발히 교류하고 있습니다. 형님께서 언질을 주신 몇몇 가문은 눈여겨보는 중이고요. 아, 마법 실습에서는…….”
“탈진했다고 들었다.”
타이머스가 데이지의 말을 도중에 끊어냈다. 데이지는 잘만 움직이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시험이 고되어서 피곤했나 봅니다. 건강을 살피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
드디어 급한 서류에 마지막 도장을 찍은 타이머스가 고개를 들었다. 데이지는 살쾡이 앞에 선 병아리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얼마 전 예지력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다가 탈진해 쓰러진 게 화근이었다. 억울한 점은 쓰러질 정도로 마력을 사용했는데도, 자신이 보고 싶었던 미래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지력을 사용한 이유를 들으면 형님께서는 한심하다 하시겠지.’
데이지는 타이머스가 자신을 중요한 측근으로 취급해 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렸을 때부터 이는 큰 영광이었다. 타이머스는 데이지의 부모이자 라이벌이었고, 밤하늘에 떠 있는 길잡이 별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자신의 모자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타이머스의 주변에는 자신을 대체할 이들이 아주 많다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너를 왜 마법학교에 보냈다고 생각하지?”
타이머스가 짐짓 엄하게 물었다. 데이지는 타이머스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술술 대답했다.
“첫째 기본적으로 학문을 수양하고, 둘째 마력을 지닌 이들의 동향과 시류를 파악하기 위함이며, 셋째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미래의 사업 및 전쟁에서 어떻게 대처할지 익히기 위함입니다.”
“틀렸어.”
데이지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타이머스는 데이지와 눈을 맞추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가서 놀라고 보낸 것이다.”
“예?”
데이지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지만 은근히 고개가 기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가서 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는 어릴 적부터 나를 도와 큰 공을 세웠다. 이후로도 제국을 위해 바삐 일할 테지. 그러니 놀 수 있는 건 지금뿐이야. 황실 안에 갇혀서는 재미있는 일이 없을 것이고. 마법학교가 딱 좋을 것 같았다. 네 소꿉친구인 달리아 글러토니도 그곳에 가 있으니.”
“아…….”
“그곳의 수준을 뻔히 아는데 네가 탈진했다는 게 나는 믿기지 않아. 너는 이미 열 살 때 그곳에서 배울 법한 마법은 모두 통달했다. 네 마력을 그렇게 소진시킬 만한 일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지 않아. 그러니 솔직히 말해.”
데이지는 달리아의 이름을 듣고는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타이머스는 그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달리아 글러토니와 무슨 사고를 쳤지? 달리아 글러토니의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지난번에는 한 강의동의 계단을 모두 뒤집어 놓았다지. 시에라가 새 강의동을 세워주기로 하면서 무마되었다지만…….”
대화를 듣던 릴리가 키득키득 웃으며 덧붙였다.
“달리아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범상치 않았죠. 여섯 살 때는 글러토니 공작성 전체를 바꿔놓으셨잖아요. 아주 알록달록하게.”
달리아는 시에라를 위해 공작성을 아주 예쁘게 꾸몄던 전적이 있었다. 물론 선의였는데, 여섯 살의 취향과 보편적인 사람들의 취향이 다르다는 점은 애석한 일이었다. 검붉은색으로 신비로우면서 묵직한 멋을 내던 외벽은 분홍, 노랑, 파랑 등의 색이 불규칙하게 뒤덮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공작성 둘레에는 깊은 물길이 생겨서 웬 고래 한 마리가 계속 빙글빙글 돌며 소란을 피웠다.
공작성의 일부 방에는 정체불명의 물건이 잔뜩 쌓여 있었다. 크레파스로 대충 그린 듯한 문도 몇 개 생겼는데, 이를 열면 전혀 알 수 없는 문화의 양식을 따른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사물과 공간의 정체는 시에라 글러토니 공작만 알았는데, 그가 선물을 받는 당사자였으니 어찌 보면 잘된 일이었다. 시에라만을 위한 선물이 되었으니 말이다.
글러토니 공작가에 벌어진 소동은 공작령뿐만 아니라 제국 전체에 소문이 났다. 아직도 글러토니 공작성은 얼룩덜룩한 모습 그대로다.
“달리아 글러토니와 어울리는 걸 말리지는 않겠다만…….”
타이머스가 찜찜해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자 데이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달리아는 아무 잘못 없어요! 마력을 소진해 쓰러졌던 건 별일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저 제가 혼자 궁금한 점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데이지의 목이 새빨개졌다. 데이지는 평소에 바른 자세로 있으라 가르침을 받았던 것도 잊고, 쑥스러워하며 타이머스의 눈치를 살폈다.
“예지력을 과도하게 사용했습니다. 보고 싶은 미래가 있어서요. 하지만 마땅히……. 대단한 사건은 아무것도 예지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연회에 나올 메뉴나 며칠 뒤의 날씨 정도여서요.”
“보고 싶은 미래를 볼 때까지, 계속 마력을 사용했다고?”
“네…….”
“왜 그런 미련한 짓을 했지?”
데이지의 입술이 꾹 다물린 채 움찔거렸다. 잠시 고민하던 데이지가 한숨을 쉬며 조용히 고백했다.
“은둔자의 땅에 관해 보고 싶었습니다.”
“…….”
“그곳의 미래가 궁금했습니다. 미래에도 그곳이 은둔자의 땅이라 불리는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곳에 제가 있는지도.”
“…….”
타이머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내가 너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줬나 보구나.”
“형님……! 그렇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피곤하겠지. 들어가 봐.”
데이지의 낯빛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어깨가 풀이 죽어 가라앉은 게 보였다.
“큼큼.”
릴리는 일부러 소리 내 헛기침을 하며 타이머스의 시선을 끌었다. 그녀는 데이지의 시무룩한 뒤통수를 눈짓하며 연신 헛기침을 반복했다. 그 의도를 뒤늦게 알아차린 타이머스가 릴리를 노려보다가 데이지를 불렀다.
“이번 성적표 무척 기특했다. 잘했어.”
데이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고, 이내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감사합니다! 분발하겠습니다!”
***
방으로 돌아온 데이지는 쉽게 진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형님이 나를 칭찬해 주시다니.”
데이지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자랑스러운 성적표, 칭찬하던 교수의 얼굴, 매일같이 돌아다닌 교정, 달리아가 뒤집어 놓은 강의동의 계단, 거침없이 책을 넘기던 달리아의 손.
손?
“데이지!”
“으악!”
바닥을 내려다보니, 자신이 밟고 있는 그림자에서 불쑥 손이 튀어나와 있었다. 작은 손은 무언가 더듬거리다가, 데이지의 발목을 확 붙잡았다.
데이지는 비명을 지르려다가 참고, 이제는 그림자 밖으로 두 쪽 다 튀어나온 손목을 붙들었다.
“뭐 하는 거야!”
“생각처럼 되지는 않는다. 나 반만 꺼내줘. 반이면 돼.”
데이지는 손목을 잡아 끌어올렸다. 바닥에서 튀어나온 건 방금까지 떠올리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달리아. 이런 식으로……. 이런 식으로 황실에 오는 건 옳지 않아. 황실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건 큰 죄야. 이건 죄라고.”
데이지는 누가 들을까 걱정하며 조심히 말했다. 달리아는 하하하 웃으며 바닥에 팔을 기댔다. 어쨌거나 그녀는 지금 어깨까지만 바닥을 뚫고 나온 상태였다.
“날 밀고할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누가 와서 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이런 일은 글러토니 공작도 무마해주지 못할 거라고…….”
“괜찮아! 안 들키면 되니까. 어쨌든 그림자를 빌려줘서 고마워. 이걸로 확실해졌어. 네가 일찍 강의실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 늦잠을 잔 내가 그림자를 타고 금방 이동해서 출석하는 거야. 그럼 지각하지 않겠지. 완벽해.”
“지각하지 않으려고 이런 이동 방법을 개발하는 마법사는 너뿐일 거야…….”
“칭찬 고마워.”
데이지는 달리아와 대화하기 위해 몸을 낮췄다. 마치 침대 밑을 보려는 사람처럼, 그는 황족으로서의 체통도 잠시 잊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기엔 왜 온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들키면 정말 혼날 거야.”
“오늘 저녁에 피핀이 테리폰 찜을 해준대. 내가 시험을 보는 동안, 피핀은 은둔자의 땅에서 테리폰을 잡아 왔다지 뭐야.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먹자.”
“그게 다야?”
“응! 맛있을 거야. 너도 좋아하잖아.”
데이지는 웃으려 하다가, 화를 낼 듯 얼굴을 찡그렸다가 다시 배시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