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34)
133마왕의 축제
세레나와 헤어진 뒤, 거리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도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납치범이 축제나 구경하고 있을 거라니, 상식적으로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래서 세비트에게도 도시를 빠져나가는 배를 조사하게 시켜 둔 데다가, 복잡한 생각에 잠겨 있었던 만큼 거리를 둘러보는 행동은 건성이나 다름없었다.
왜 사제장이 그를 몰래 데려간 걸까?
그 바보 인간은 치료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암흑 교단이 사교라고는 하지만 그 성력의 정점에 있는 사제장이 고작 남들의 시선이나 방법 따위에 연연해서 제대로 치료를 못 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까.
그보다는… 오히려 치료를 빌미로 그와 뭔가 따로 할 일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또한 암흑 교단의 전투 사제인 만큼, 사제장이 그를 해칠 거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 바보가 말했던 원래의 목적, 즉 암흑 교단의 수석 사제를 찾는 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잠깐만. 암흑 교단의 수석 사제?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상념을 나는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저 머나먼 북부라면 모를까, 이 서부에서 암흑 교단의 사제를 보는 건 일반인이 요마를 보는 것 이상 힘든 일이다.
더구나 사제장은 츄리오넬을 찾아올 수석 사제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고 우리는 때마침 츄리오넬에 도착한 참이었다.
이 모든 게 단순한 우연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길을 지나가는 여우 계집애에게 시선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그는 평범한 사제라기에는 너무 비범했다.
물론 ‘흑야의 축복’을 익힌 전투 사제가 수석 사제이기까지 하다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그의 다재다능함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기도….
…뭐? 여우 계집애?
머릿속에 들어 있던 것을 그대로 날려 버리고 나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건성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시야 저편에서 축제를 구경하고 있는 여우 계집애의 뒷모습이 나의 입을 따악 벌어지게 했다.
저 꼬맹이, 정말 축제 구경을 하고 있었던 거야?
그 바보 인간의 말이 들어맞았다는 사에 너무 황당해서 얼어붙어 있기를 잠시, 나는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일단 저 여우 계집애를 붙잡아야 했다.
그리고 엉덩이를 때리고 엉엉 울게 하든, 아니면 사탕을 주고 속이고 달래든 그를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부터 알아내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하지만 채 세 걸음을 옮기기도 전, 나는 그대로 쩌저적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저 여우 계집애의 엉덩이를 때리거나, 쓰디쓴 사탕을 줄 필요도 없이 그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노점에서 사 들고 온 꼬치구이를 여우 같은 꼬맹이에게 건네주는 그의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이상에는 말이다.
그 자리에 굳어 있기를 잠시, 사이좋게 꼬치를 나눠 든 그와 여우 계집애가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중,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코드 당신, 대체 지금 뭘 하는 거야?!
납치당해서(혼절해 있었다는 사실은 무시하더라도) 나와 세레나를 이렇게 걱정시켜 놓은 주제에 자기는 한가롭게 여우 계집애랑(암흑 교단의 사제장이라지만) 꼬치나 나눠 먹고 있다니!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 멱살을 붙잡고 따지고만 싶은 충동을 나는 가까스로 참아 냈다.
그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에게 연락도 안 하고 저런 계집애를 따라다닐 리가 없다.
사제장의 직위로 뭔가 강요를 했다든지, 아니면 암흑 교단의 임무를 수행 중이라든지 그런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응, 그럼. 설마 이런 상황에 태연하게 데이트나 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합리적인 생각으로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속을 다스렸다.
그리고 냉정한 계산으로 인파 속에 숨어들어 그와 여우 꼬맹이를 은밀히 미행하기 시작했다. 상황을 지켜봐야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뿐, 저 둘이 나와 세레나 몰래 뭘 하려고 하는지 두 눈으로 똑바로 지켜보고야 말겠다는 감정적인 결정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꼬치를 다 먹은 계집애가 화기애애하게 그의 손을 잡는 것을 본 순간, 나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겨 나갔다.
“…위대한 폭풍의 지배자 세이너스여. 내가 원하는 것은 크레도스에서 뿜어져 나온 한 줄기 바람. 세계의 허파에서 토해져 나온 용의 숨결이라.”
나는 충분히 냉정하게 판단했다.
함부로 마법을 쓰면 안 되는 상태지만 이 정도 주문이라면 후유증도 없을 테고, 이토록 시끄러운 상황에 이 짧은 주문을 엿들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토록 빈약한 마법을 쓴 것만 해도 내 냉정한 판단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만약 냉정하지 않았다면, 저 여우 계집애에게 당장 아크베르넬의 마창을 날렸을 테니까.
후후후.
그렇게 냉정, 침착, 현명한 판단 아래 은밀하게 주문의 영창을 마친 후, 나는 여우 계집애가 그와 떨어진 틈을 타, 바람의 구슬이 맺힌 손가락을 앞으로 향했다.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여우 계집애에 대한 나의 응징은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꼬마야. 길 한가운데 서서 뭐 하는 거냐? 응?”
이 인간은 또 뭐야?
내가 길 한가운데 서 있는 게 거슬린 것일까, 아니면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고 싶었을 뿐일까. 술 냄새를 풍기며 다가온 취객을 본 나는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인간을 상대해야 하는 것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이 취객이 앞을 가로막은 덕분에, 여우 계집애가 시야에서 가려졌기 때문이다.
“비켜.”
“엉? 이 꼬마 말버릇 좀 보게? 넌 애미, 애비도 없냐, 이것아?!”
버럭버럭 고함을 내지르는 취객의 행동에 나는 인내심이 바닥나는 것을 느꼈다.
평소라면 이 정도로 흥분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미 폭발 직전이던 내게 있어, 취객의 시비는 기름 창고에 불똥을 던지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내 손에는 마침 이 상황을 간단히 해결할 수단이 있었다.
휘우우우웅!
“에? 에으아으어어억―!!”
내가 쏘아 낸 바람의 구슬을 맞은 순간, 취객은 나뭇잎처럼 저 뒤쪽을 향해 날라갔다.
그리고 취객의 몸이 행인들의 머리 위를 지나 여우 계집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무심코 한 손을 불끈 쥐며 쾌재를 불렀다.
그대로 깔려 버려라!
애초부터 위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은 데다가 안전성이 높은 마법인 만큼 별다른 충격은 받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저 여우 같은 계집애를 꼴불견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눈을 빛내던 나는 쩌적 굳어 버렸다.
여우 계집애가 취객의 몸을 피해 냈기 때문도, 그가 여우 계집애를 끌어안듯이 잡아당겨서 충돌로부터 구해 줬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렇게 구함을 받은 뒤에도 그의 목에 양팔을 감아 든 채 더욱 품속 깊이 안기는 여우 계집애의 행동이 나의 속을 완전하게 뒤집어 버리고 있었다.
너, 너! 누구 허락을 받고 감히 내 거에 손을 대는 거야?! 응? 당장 안 떨어져?!
내가 그렇게 속을 끓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우 계집애는 그에게 안긴 상태 그대로 무언가를 즐겁게 이야기했다.
잠시 후에야 따로 떨어진 두 사람이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아크베르넬의 마창을 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나는 생각을 멈췄다.
너무나 열을 받은 나머지 지금까지는 미처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뭐지, 저 모습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여우 계집애가 즐겁게 무언가를 얘기할 때마다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내젓는 그의 모습을 나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하지만 여우 계집애와 그의 기묘한 분위기는 지금까지 내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평안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딱딱하기보다는 정중하면서도 왠지 더없이 친근하고도 따스하게만 느껴지는 나와 세레나에게도 보여 준 적 없는 그 모습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나의 가슴을 저릿하게 하고 있었다.
그는 나와 세레나를 가족으로 받아 주었고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그와 가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소녀를 대하는 그의 모습이 나와 세레나조차 보지 못했던 평안한 분위기를 간단하게 끄집어내고 있는 소녀의 존재가 내게 이유 모를 박탈감을 느끼게 했다.
대체… 저 여우 계집애는 그와 무슨 사이지?
내가 복잡한 심정으로 멈춰 있는 사이 그는 수로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로 올라가, 노점에서 팔던 기올라를 집어 들었다. 기올라는 12개의 현을 통해 깊고도 다양한 음색을 낼 수 있지만 대신 다루기 까다로운 전통악기였다. 때문에 그가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아 기올라를 비스듬히 들어 올릴 때까지도 그 동작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그의 거친 손이 기올라의 현을 튕기기 시작한 뒤에야, 가까스로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가 지금, 이 순간 연주를 시작하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디링.
가볍게 현을 튕기는 그 동작은 거친 손에 비해 너무나 부드러웠고, 애무와 같은 그 움직임이 빚어낸 소리는 이 소란 속에서도 너무나 선명하게 퍼져 나가 주변을 지나가던 행인들마저 힐끔 곁눈질로나마 그에게 시선을 향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연주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