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89)
88악당의 결의
전력은 명명백백.
녀석의 손은 반쯤 망가져 검조차 쥐기 힘들고, 계집애는 마력에 휘둘리는 게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나는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힘든 지경, 이쯤 되면 절체절명의 위기다.
그러나 물러날 길 따위는 없으며, 전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절망할 만큼, 나는 호락호락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그에 따른 계획 또한 이미 수립해 놓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뿐.
“아리스. 세레나.”
입을 열면서도 놈에게서 눈을 떼지는 않는다. 다만 활짝 열린 오감으로 녀석과 계집애가 흠칫하는 것을 느끼며, 나지막이 말을 잇는다.
“나를 믿을 수 있나?”
녀석과 계집애는 짧은 동요를 드러냈다. 살아남는 데 있어 믿음 따위는 불필요한 것, 믿음이란 다만 삶을 꺾는 독에 지나지 않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독 또한 약이 될 수도 있는 법. 지금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무의미한 믿음이 필요했다.
“물론입니다.”
“…응.”
흥, 어리석은 녀석을 같으니, 망설임 없이 대답을 내놓은 녀석과 계집애를 나는 마음속 깊이 비웃었지만, 지금만은 그 어리석음이 필요하기에, 다만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너희들을 목숨, 내게 맡겨라.”
녀석과 계집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손으로 검을 움켜쥐는 녀석과 굳게 입술을 다무는 계집애의 모습만으로도,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하여 감각의 열쇠로 닫혀 있던 문을 열며, 나는 성난 눈을 한 멧돼지에게 말을 던졌다.
“와라. 짐승아.”
뀌이익…!
사납고도 맹렬한 맷돼지의 기세, 그것을 마주한 것만으로 다리가 부들거리고, 내출혈을 일으키는 내장이 터질 듯 조여 온다.
그러나 양팔을 주머니에 꽂아 여유를 가장하고, 흐린 안개 속에 몸의 떨림을 숨기며, 나는 흉소를 머금는다. 투기, 살기, 용기, 권위….
그 무엇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지언정, 고작 기세에서부터 꺾여 무릎 꿇어서야, 숙련된 악당은 될 수 없는 법이다. 그러한 내 모습이 뜻밖인 듯, 경계의 모습을 띠는 멧돼지를 차갑게 마주한다.
“달라진 것은 없다. 너는 여전히 강인한 짐승이고, 나는 여전히 나약한 인간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네가 위에서 상대했던 것이 지상 최강의 인간을 막아 내고, 검자에게 검을 가르치고, 마족을 주웠던 인간이었다면, 지금 네가 상대해야 할 것은 절대로 삶을 포기하지 않으며,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을 삼류 악당이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명심해라, 악수(惡獸)여. 네가 악의(惡意)로써 죽이고자 하는 상대는 어떤 패배와 굴욕과 추악함조차 넘어서 살아남아 온 지상 최악의 인간이라는 것을.”
실패쯤은 숨처럼 익숙하며, 패배 따위에 연연해 본 적은 없다.
굴욕이란 일상과 같았으며, 치욕 같은 것은 느끼지도 못한다. 비열함을 마음에 간직하며, 추악함은 언제나 등에 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았기에, 나는 여태껏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니 내게 승리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져가라.
그러니 내게 굴욕을 원한다면 마음대로 받아 가라.
그러니 내게 추악함을 원한다면 질리게 보고 가라.
그러나 내 목숨만은 쉽게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
뀌익!
내 말을 듣고 흥분한 듯, 놈은 사나운 콧김을 토해 낸다. 들끓는 마력과 함께 흘러넘치는 살기와 광기는 분명 요마와도 비견될 만큼 흉악스럽지만. 나는 단호하게 그 어설픔을 말할 수 있다. 그래 봤자 네놈은 한낱 짐승이라고.
‘하늘 섬의 떠돌이’였다면 박장대소했을 거다. ‘이름 없는 골짜기의 공포’라면 무시했으리라. ‘어둠의 산의 주인’이었다면 비웃었을 것이다.
그 어떤 마술사의 부름도, 그 어떤 마법사의 도움도 없이, 신화시대부터 1,000년에 달하는 세월을 오로지 스스로의 힘만으로 살아남았던 강대하고도 사악했던 요마들에 비하면 네놈은 고작 일개 짐승일 뿐이다. 그런 요마들마저 나의 삶을 꺾지는 못했거늘, 과연 네가 나를 죽일 수 있다고 믿느냐?
“자아, 파멸할 각오가 되었다면 와라. 악수여!”
뀌이이익――!!
두두두두―!
분노가 터져 나왔음일까. 사나운 포효와 함께 돌진해 오는 멧돼지를 보며 나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뇌를 한계 이상까지 일깨운다.
고속 사고, 순간 판단, 다중 분석, 절대 추론.
원래 한평생 동안 개발하더라도 사용할 수 없는 뇌의 영역이 깨워지며, 수십 배로 증폭된 정신적 능력을 통해, 시간이 멈춘 듯한 감각이 나를 지배한다.
그리고 놈의 성격, 운동 능력, 행동 양식, 신체 구조에 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현재를 넘어선 순간을 예측한다.
“아무리 큰 폭풍도 작은 나비의 날갯짓에서 비롯되며, 아무리 긴 여행길도 그 시작은 한 걸음에 지나지 않는다.”
“…폭풍의 지배자 세이너스여. 내가 원하는 것은 질풍이라.”
치솟는 바람이 지면에서 뭉쳐 들며, 땅을 내려찍으려던 앞발을 미세하게 비튼다. 그 힘은 멧돼지의 거체에 비하면 미약하다.
하지만 전력으로 돌진하고 있던 상태라면, 작은 힘이라도 큰 영향을 끼치는 법, 철저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철저하게 조절된 마법의 힘과 방향은 순식간에 멧돼지의 다리를 뒤섞이게 하고, 그 결과 멧돼지의 몸은 단숨에 허공을 날아, 땅 위를 나뒹군다.
쿠궁―!!
뀌에에엑―!
단단한 지반을 마구잡이로 구르다가, 비틀비틀 일어나는 상처 하나 없는 놈을, 나는 냉정하게 직시한다.
타격 자체는 미약한가? 예상대로라면 뼈 한두 개는 부러졌어야 할 터, 그러나 몸에 둘러싼 연무의 방어력과 갑옷처럼 두껍고도 질긴 가죽이 내 예측을 빗나가게 했다. 아쉬움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고작’ ‘한 번’ ‘실패’했을 뿐이다.
신물 나도록 익숙한 실패의 경험은, 그렇기에 3, 4차 계획까지 준비하는 철저함과 어떤 사태에든 대응할 수 있는 임기응변을 내게 주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행운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 다만 다시금 한 걸음을 내디디며 준비해 둔 다음 계획을 실행할 뿐.
“바위는 어떠한 역경에도 물러나는 법을 모르며, 빗줄기는 바람과 함께 노닐되 땅을 잊지 않는다.”
뀌이익―!
분노한 듯한 괴성과 함께, 계집을 향해 쏘아진 안개 덩어리를 향해, 한 줄기 섬광이 뻗어 나간다. 빠르고도 육중하게 안개를 찢어 버리는 것은, 찬란한 빛을 머금고 있는 한 자루의 검,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나의 눈은 놈의 흉성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음험한 속내를 직시한다.
“단단한 벽을 무너트리는 것은 언제나 작은 빈틈이며, 흩어진 구름은 비가 되어 다시 돌아온다.”
예측한 대로 찢어진 안개가 부풀어 오르며, 사방에서 연쇄적으로 터져 나가려는 순간,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온 검광의 운무가 그 안개를 조각조각 흩어 버린다.
예상하고 예측하라. 어설픈 함정이나 계략 따위에 넘어가지 마라.
뇌에 한계가 있다면 한계를 뛰어넘고, 현실이 있다면 현재를 초월해 미래를 직시하라.
‘진리의 탑’의 현자들이, 미래를 ‘예측’하는 걸 넘어 ‘예지’라는 진리에 도달하고자 만들어 낸 비전, 현자들에게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내다보며, 영웅들에게 세상의 위기를 알려 주고, 방책까지 가르쳐 줄 수 있게 해 주는 근원, ‘진리의 눈’을 습득한 내게는, 미래조차 엿봐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흉내일 뿐이다. 온종일 진리의 눈을 유지함으로써, ‘예지’를 손에 넣은 그들과 달리, 내가 진리의 눈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몇십 초도 안 되는 찰나뿐이다.
그 효용은 임기응변을 짜내는 것이 고작이며, 100% 완벽한 예지 따위는 절대 불가능하다.
현자에게 훔쳐 낸 비전이 불완전해서가 아니다.
애초부터 내게는, 진리에 도달할 재능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 따위는 어찌 됐든 상관없다. 절대적인 미래를 예지하지 못해도 좋다.
다만 지금까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쌓아 온 수많은 경험과 육감을 바탕으로, 모든 실패를 예상하고 계획해 대비해서 한없이 예지에 가까운 예측을 이뤄 낸다.
한계를 넘어선 중노동에 뇌가 달아오르며, 지끈거리는 두통을 토해 내지만, 뇌가 녹아내리기 직전까지 진리의 눈을 사용해 멧돼지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계획을 조금씩 수정해 나간다.
나는 그렇게 한계의 한계까지 미치도록 노력하고, 고민하지 하지 않으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삼류니까.
안개가 흩어지고, 검광이 번쩍이며 질풍이 몰아친다.
예측을 벗어난 실패와 착오.
그 모든 것을 대비해 준비된 수많은 계획대로, 멧돼지의 움직임을 저지하며, 한 걸음 한 걸음씩 놈을 향해 다가가던 끝에 나는 나지막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물러나라.”
녀석과 계집애의 동요가 뚜렷하게 느껴지지만, 이제는 더 이상 다른 기척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녀석도, 계집애도 도움 되지 않는다.
믿어야 할 것은 누구보다 믿을 수 없는 나 자신뿐,
그렇게 멧돼지가 내 몸을 들어 박으려던 순간, 나는 ‘전장의 환염’을 펼쳐 미끄러지듯 옆으로 한 걸음을 옮기며, 주머니로부터 성물을 감은 오른손을 꺼냈다.
그리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멧돼지의 머리에, 곧장 그 오른손을 박아 넣는다.
안개에 의해 가려져 있던, 녀석의 주먹에 의해 생겨난 상처 안으로!
“영혼조차 집어삼키는 슬픔. 그것이 너의 악이라면….”
움직여라. 마의 힘이여, 성력과 마력은 상극인 법, 성물을 통해 멧돼지의 마력을 자극하여, 그 모든 힘을 미간에 응축되도록 제어한다.
하여 강제적으로 응축시킨 마력의 핵을, 사슬에 휘감긴 손가락으로 틀어쥔다.
“너의 악의(惡意), 받아 가겠다.”
촤악―!!
멧돼지에게 끄집어낸 마력의 핵을 움켜쥐자, 불길처럼 넘실거리며 나를 침범해 오는 것은 도저히 막아 낼 수 없는 강대한 마력, 그러나 상관도 없다. 막아 낼 수 없다면, 먹어 버리면 될 뿐.
우우웅.
손에 휘감긴 성물을 파이프라인 삼아, 홍수처럼 밀려드는 마력을 받아들인다.
멧돼지의 몸을 통해 1차로, 성물을 통해 2차로, 심장을 통해 3차 정제된 정순한 마력이 혈관을 타고, 전신을 질주한다. 통제할 생각 따위는 없다. 제어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그 마력을 몸속에 녹아들어 있던 ‘통곡의 혈화’의 화학 성분에 결합해, 내가 바라는 형태로 세포 변이를 구현한다.
우득. 우드득!
부러졌던 뼈가 붙고, 찢어진 근육이 이어진다. 터졌던 혈관이 봉합되며, 내장의 상처마저 깔끔하게 그 모습을 감춘다.
1차 정제를 통해 생물에게 적합하도록, 2차 정제를 통해 인간에게 적합하도록, 3차 정제를 통해 내게 적합하도록 변이된 마력, 그것에 반응한 ‘통곡의 혈화’의 화학 성분이 신체를 원래대로 원상 복구하는 방향으로, 세포 변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아슬아슬한 줄타기, 비록 내게 가장 적합하게 변이되어 있다 해도, 조금이라도 마력이 강하거나 약하게 작용하면 세포 재생이 아닌 다른 돌연변이 작용이 일어난다.
또한 ‘통곡의 혈화’의 화학 성분이 부족하면, 수용의 한계를 초과한 막대한 마력이 내 혈관을 터트리고 뼈를 으스러트려 버릴 것이다.
그 때문에 그 미미한 변동부터 미세한 흐름까지 그 세밀한 변이를 관찰하고 계산해, 혈관에 화학 성분이 모두 소진된 순간, 손에 쥐고 있던 핵을 단숨에 부숴 버린다.
핵을 잃음으로써 녹아내리듯 사라진 마력과 원상태로 복귀된 세포를 확인하고, 나는 서서히 시선을 돌렸다.
폭주하던 마력을 잃어버렸음에도 강제적인 마력의 이탈 덕분에 더 이상의 변이를 멈춘 멧돼지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한다.
비록 마력이 사라졌다고는 해도, 거체만은 그대로인 놈의 힘은 맹수 이상, 숨결마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지금이라면, 녀석이나 계집애가 나서기도 전에 저 거대한 입으로 날 단숨에 씹어 먹거나, 박치기 한 번에 내 몸을 박살 낼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움직일 수 있겠지?”
뀌…익?
하지만 그런 멧돼지를 바라보며, 나는 흉소를 머금는다.
그리고 당황한 듯, 망설이듯, 흔들리는 시선으로 나를 마주 보는 놈을 향해, 나지막이 그 말을 이어 간다.
“그렇다면 와라. 너의 심장이 뛰는 한 날 죽이기 위해 달려들어라. 그렇게 네가 진정 악이라는 것을 증명해 봐라!”
뀌익… 뀌이이이익!!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킨 멧돼지, 그 시선에서 살기와 광기가 흩어진다.
결국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다가, 그대로 꼬리를 말고 달아나는 멧돼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조소한다.
‘…하, 그래. 고작 그 정도였나?’
결국 놈은 요마도, 악수도 아니었다. 마에 물들어 스스로를 버리지 않으면 짝을 잃은 슬픔도 견뎌 낼 수 없는, 악이라는 짊을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나약하고도 어리석은 짐승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짐승조차 속이고 우롱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나임을 어찌 자조하지 않을 수 있을까?
…큭큭큭….
털썩, 멧돼지가 사라지자 힘을 잃고 쓰러진 육신은, 이미 물리적인 한계에 도달하여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회복된 것은 기껏해야 치명적인 부상뿐, ‘진리의 눈’의 과도한 사용으로 정신은 아득하고, ‘통곡의 혈화’로 얻은 감각도 사라진 지 오래….
더구나 체력마저 완전히 바닥난 지금의 내게는, 더 이상 멧돼지를 피할 힘은커녕, 가만히 서 있을 여력조차 없었다. 짐승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봤자, 용검자처럼 동물을 설득하는 일 또한 불가능하니, 결국 온갖 말과 기술과 능력을 쓸 수 있더라도, 위협해 겁먹게 하는 것만이 나의 한계다.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멈추지 않는 한, 끝까지 움직일 수 있다 할지라도, 결코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마지막까지 이 몸뚱어리를 부여잡고 발버둥 칠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운명.
뭐, 그딴 것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런 사실 따위 이미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결코 삼류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무리 노력해도 일류가 될 수 없는 진실을.
하지만 원망을 느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명예와 긍지 따위를 찾는 자가 아니다.
부귀영화와 쾌락만을 추구하는 자도 아니다. 싸워 지키고 구하며 살리는 자 역시 아니다.
그러나 죽이고 괴롭혀 빼앗는 자 또한 아니다.
순간의 방심과 잠시의 교만만으로 죽는 자, 다만 속이고 이용하고 도망쳐 살아남는 자, 삼류임을 잊는 순간 파멸하게 돼 버리는 자, 항상 긴장하고 대비해 목숨을 부지하는 자, 어떤 죽음도 파멸도 잡을 수 없는 자, 결코 일류도 이류도 될 수 없는 삼류, 절대 영웅도 범인도 될 수 없는 악당, 그런 한 명의 삼류 악당으로서 나는 편안히 휴식에 잠겨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