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Logistics Center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240)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240화 (외전완결)(240/240)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 240화
외전 11화. 광장 (외전완결)
그로부터 2주의 시간이 흘렀다.
순조롭게 정거장이 건설되는 사이, 나는 한 가지 소식을 더 접할 수 있었다.
[입학 통지서]손에 들린 종이의 이름이다.
초중고교는 진즉 설입이 끝나 시범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비로소 대학까지 설립됐다.
내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복학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것.
때늦은 4월 개강이긴 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백민우가 나란히 걸으며 중얼거렸다.
“학교에 다시 가게 될 줄이야······.”
한국에서 하나뿐인 대학이다.
물론 그밖에 유수의 대학들이 재설립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유대감으로 모인다.
그중에는 ‘학벌’도 있었는데, 생존자 중에서는 멸망으로 인해 사라진 자신의 모교를 다시 설립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어쩌면 나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물론 나야 모교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단, 지극히 사적인 소원을 이루려는 것뿐이지만.
마찬가지로 입학통지서를 쥔 민우가 내게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근데 누가 교수야?”
“나도 몰라, 그냥 경력자 알아서 뽑아달라고 했어.”
솔직히 내 전공이 뭐였는지 기억조차 안 나는 판이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통폐합으로 학과가 멸망했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상이 멸망해 버려 그 정체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누가 교수인지 어떤지가 내 관심사일 리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날씨 좋다.”
이것이 돌아온 일상의 상징이라는 것.
모든 멸망을 이겨냈기에, 여유롭게 복학이라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사라락.
사월의 꽃잎이 우수수 흩어져 내린다.
촘촘하게 늘어선 나무들 사이를 느긋하게 스쳐 지나간다.
등굣길에 들릴 만한 카페가 없는 건 아쉬운 점이다.
그래도 알뜰살뜰하게 텀블러에 아메리카노를 담아왔다.
달그락달그락, 얼음 부딪히는 소리를 울리며, 사박사박 부드러운 꽃잎을 밟았다.
꿈에 그리던 분홍빛 풍경이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그냥 또 그렇네.”
본디 목표란 이루고 나면 허전한 법.
그토록 고대하던 복학이었는데도, 이상하게 별다른 생각이 안 들었다.
어쩌면 지나간 시간이란 결코 돌아올 수도, 되찾을 수도 없기 때문일지도.
새삼 무상함을 느끼고 있자니, 불쑥 뒤에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림자는 총 세 개였는데,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모두 아는 얼굴이었다.
“아니, 여기서들 뭐 하세요?”
베로니카 공녀, 엘븐하임의 엘리, 심지어 유럽에 있던 리디아까지.
공녀는 날개를 접어 백팩처럼 등졌고, 엘리는 큼지막한 화구 가방을 들었으며, 리디아는 벽돌만 한 전공 서적을 들고 있었다.
뻔뻔하게 맨몸뚱이로 등교하는 우리와는 달리 준비성이 철저한 모습.
그녀들을 대표해서, 엘리가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이 학교 다닐 생각 없냐고 하시던데요? 그래서 저희도 등록했죠.”
유성철 임시 총장이 주도한 특례입학.
그래도 저마다 신중하게 전공을 선택했다고 했다.
베로니카 세력을 이끌어야 하는 공녀는 정치외교학과를, 탁월한 언술로 세계수를 키워냈던 리디아는 심리상담학과를, 엘리는 특유의 예술적 재능을 살려 미술대학에 지원하기로 했다고.
‘예술적 재능이라······.’
엘븐하임에서 보여줬던 엘프들의 처참한 그림 실력이 떠올랐다.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말만큼은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배우겠다는 열정까지 나무랄 수는 없는 법.
교수들이 곤욕을 겪기는 하겠으나, 그것까지야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었다.
웅성웅성.
그러고 있자니, 다른 학생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차림새로나 이국적인 외모로나 상당히 눈에 띄는 세 사람이다.
적당히 인사를 주고받은 우리는 수업이 있는 각자의 강의실로 흩어졌다.
셋 모두 은근한 설렘에 부풀어 있었다.
마치 새 시대의 신입생처럼.
***
“오늘은 이걸로 끝인가.”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나온 나는 민우와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바람이 잦아든 탓인지, 살랑살랑 떨어지던 벚꽃잎의 풍경도 김빠진 듯 사그라들었다.
수강 신청 따위는 없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세운 유일한 대학.
거기에 과목 선택은 사치에 불과하니까.
학과별로 모든 과목이 고정돼 있었는데, 개설된 교양과목 시간표를 보던 중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직접 수업할 줄이야.”
다름 아닌 형, 성겸의 이름이 있었던 것.
시간 강사라곤 하지만, 교단에 서고 싶다던 꿈을 이룬 셈이었다.
그때, 또다시 뒤에서 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겸 씨!”
공녀, 엘리, 리디아였다.
과목은 달랐지만, 시간표가 고정된 탓에 끝나는 시간마저 같았던 것.
우르르 달려온 세 사람이 내가 쥐고 있던 시간표를 살펴봤다.
그러곤 형, 성겸의 이름이 강사로 적힌 <말하기와 쓰기>와 혈겸의 이름이 강사로 적힌 <이종족 소통>을 가리켰다.
“어! 저도 이거 듣는데!”
“등록한 사람은 다 들을걸요.”
수업이 끝났는데 밥 먹을 식당조차 없었다.
강의동 몇 개 뚝딱 지어놓은 채, 교수와 강사만 쑤셔 넣은 대학이었으니.
포스트 아포칼립스 제1 대학, 어쩌면 그런 이름을 써도 좋을 성싶었다.
등록한 학생들의 모습은 적잖이 눈에 띄었지만.
‘따지고 보면 오늘이 개강일이네.’
개강 날에는 대부분 수업이 일찍 끝난다.
한국 대학의 유구한 전통을 모를 수밖에 없는 공녀, 엘리, 리디아 세 사람?기껏 학교에 왔더니 수업이 30분 만에 끝나 버렸다며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개강일의 설렘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개강 파티해야죠.”
“······개강 파티? 뭐예요, 그게?”
인싸들처럼 학교 앞 술집을 전세 내지 않아도 좋다.
한적한 학교 앞 밥집에 삼삼오오 모여 된장찌개 한 숟갈 뜨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개강 파티라 치부할 수 있는 법.
물론 간단하게나마 술 한잔 걸쳐주는 것이 모름지기 새 학기에 대한 예의이기는 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다 같이 꼭 들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따라오시죠.”
지이잉!
푸른 포탈문을 열었다.
이제는 몇 번 써먹지 못할 내 각성 능력.
힘에 부친 포탈이 호박 마차처럼 우리를 파티 장소로 안내했다.
***
차원 정거장은 아직 공사 중이었다.
하지만 거울을 중심으로 한 광장만큼은 웬만큼 완성돼 있었다.
다차원 곳곳에 설치된 내 포탈을 통해서라면, 누구든,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는 장소였다.
“정겸 님!”
솔렌을 비롯한 마농족들이 격하게 우리를 반겼다.
‘슈퍼마켓’을 중심으로 광장에는 수십 개의 파라솔이 설치돼 있었는데, 비델족과 마농족들이 턱시도 유니폼을 갖춰 입은 채, 점원으로 일했다.
머물 장소를 마련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나 뭐라나.
“예, 오백 다섯 잔이랑······. 빨간 뚜껑, 황태 세 마리······. 알겠습니다.”
주문받은 비델족들이 족제비 수염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꽃무늬가 그려진 은쟁반을 팽그르르 돌리며 카운터로 돌아갔고, 냉장고에서 커다란 맥주잔을 꺼내, 거품이 넘치도록 차가운 맥주를 담았다.
다른 한 마리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황태를 서빙했다.
황태를 굽다 그랬는지 흰 족제비 수염이 꼬불꼬불하게 그을려 있었다.
괘씸하게도 서빙하던 황태를 몇 조각 날름 집어 먹기도 했지만, 그거야 괜찮았다. 귀여우니까.
“적셔!”
촤아악!
테이블마다 술판이 벌어졌다.
드워프들이 차디찬 맥주를 물처럼 들이켰고, 카멜롯의 기사들이 우아하게 와인과 샴페인을 기울였다.
엘프와 드루이드들은 커다란 투명 플라스틱 통을 꺼내놓고 술을 마셨는데, 말린 잎을 수북하게 넣은, 이른바 특제 세계수 담금주였다.
“히히히······.”
다이치는 벌써 취했는지 풀밭에 늘어져 있었다.
그 옆구리를 채우며 새근새근 낮잠을 자는 마농족들.
잔디 위로는 거대한 세계수가 우뚝 솟아올라 있었는데, 세계수의 자연력이 풀밭에 누운 이들의 숙취를 천천히 회복시켜 주었다.
진탕 마셨어도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나면 멀쩡해질 만큼.
‘계획대로 잘 돌아가고 있군.’
일종의 ‘가맥집’으로 설계한 슈퍼마켓이다.
다양한 이들이 방문하고, 또 어울릴 수 있는 열린 광장.
세상의 모든 사물이 한데 모이는 곳이 물류센터라면, 그것을 거꾸로 뒤집는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모이는 광장이 될 것이었다.
팍스에게도 이로운 일이다.
다차원 곳곳에서 밀려드는 사람들과 사물들, 그 모두가 팍스에게 새로운 경험을 부여해 줄 테니까.
‘걱정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공녀처럼 ‘슈퍼마켓’의 오용을 걱정하는 이들도 많았다.
불손한 목적으로 마켓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생길 수 있었으니까.
실제로 그런 사례가 간간이 있었지만, 팍스의 대처로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롱코트를 펄럭거리며 다가온 란슬롯이 그간의 상황을 내게 보고했다.
“무기류를 수납하려고 했던 일당을 검거했습니다. 상위차원 지도자들이 있는 수용소 쪽에 배정해서 수감할 예정입니다.”
“이번에도 그대로 튕겨냈어?”
“총기류였는데······. 빨아들인 다음 총신을 꺾어서 되돌려 주더군요. 얻어맞고 실신한 녀석들을 그대로 잡아들였습니다.”
슈퍼마켓의 거래는 팍스와의 ‘대화’라고 봐도 된다.
거기에 다짜고짜 총을 들이밀었다니, 얻어맞을 수밖에.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있자니, 공녀가 기분 좋은 얼굴로 다가왔다.
“정겸 씨, 이거 보세요! 팍스가 보내줬어요!”
그릇에는 큼지막한 한우 등심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녀의 식성에 맞춰 팍스가 특제 요리를 준비해 준 것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고기에는 새빨간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짜식, 세심하기도 하지.’
특유의 기계 음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팍스는 사람들의 물건을 받아들이고, 또 이렇게 물건을 출하하는 식으로 자신의 대답이나 호의를 표현해 주곤 했다.
사람들은 어디선가 새로운 물건을 찾으면 팍스에게 보여줘야겠다며 광장을 찾았고, 팍스는 그들의 흥미로운 발견을 축하하며 받은 물건을 두 배, 세 배로 되돌려 주었다.
물류센터는 과거, 지금, 그리고 미래로 이어질 박물관이 되었다.
그것은 나나 누군가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닌, 팍스 자신의 의지였다.
‘거래’는 팍스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의 창구였으니까.
와하하하!
왁자지껄한 웃음이 들려온다.
사람으로 가득 찬 광장을 바라보며, 나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텅 빈 물류센터에 홀로 남겨져 있던 때의 기억을.
‘아주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물류센터는 여전히 텅 비어있지만, 팍스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쭉, 시끌벅적한 광장이 녀석의 주변을 둘러줄 테니까.
나는 2주 전, 팍스가 내게 건네준 물건을 꺼내 보았다.
띠링!
휴대폰이 울었다.
팍스가 내게 건네주었던 스마트폰.
거기에는 어딘가 익숙하게만 느껴지는 메시지가 하나 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미안, 학교 다녀오느라.”
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외로움을 탄다.
허전한 마음을 위로해 주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