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74
◈ 마가 (2)
까마득히 어린 소년에게 무시당했다. 초면에 네놈이란 말을 입에 담은 여인이다.
정연신은 생각했다. 명문가의 무공 높은 귀부인이 참을 리가 없노라고.
“내가 저 아이의 어미가 맞다. 주연정(朱戀庭)이라 한다.”
그녀가 온화하게 한 번 웃었다. 삽시간에 바뀐 인상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주씨?’
기품 탓에 묘한 가정이 떠올랐다. 정연신은 곧장 물었다.
“황족이신지요?”
“그러하다.”
대답을 듣고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마세인의 부친 역시 방계였다.
황족과 혼인할 만큼 출중한 면이 있는 사내라면 이미 유명했을 터였다.
어떤 곡절이 있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듯하구나. 본성에 내 출신을 아는 이가 몇 없다. 이해하라.”
옥 장식으로 머리를 틀어올리고 있다. 한족의 둥근 귀가 뚜렷했다. 먼 방계의 황실 혈통이란 의미였다.
후궁을 들인 황제는 태조가 마지막이었다. 비빈이 마흔 명 이상이었다고 했다.
직계 황손들은 달랐다. 후처나 첩을 들이지 않았다.
오롯이 명족 부인 한 명을 반려로 맞이한다 했다.
오히려 황권과 연이 없는 수많은 자손들이 처첩을 두는 데 자유롭다고.
주연정 역시 그런 자의 여식인 듯했다.
“주 부인을 뵙습니다.”
예를 취하되 부복하지는 않았다. 출가외인이라 했다. 태조의 피를 미량이나마 받았다 해도 그랬다.
이제는 명 황실 자금성의 인물이 아니다. 북경에서 나와 혼인을 했으면, 이미 입황마가의 사람이었다.
무림인이란 의미였다.
“맹랑한 놈이로고.”
주연정의 입매가 말려올라갔다.
정연신은 담담히 고개를 들었다. 반응이 의외였다.
네놈 운운하기에 아들의 후계권을 지키기 급급한 인물인 줄 알았다. 생각한 바와 다른 걸까.
주변 가솔들 역시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묵묵히 정연신을 눈에 담기만 했다.
“편히 앉거라. 널 위해 연 자리이니라.”
“······하면, 감사히.”
짧게 묵례하고 연회석에 앉았다. 마세인이 슬그머니 따라와 제 모친 옆에 자리했다.
악사들이 들어왔다. 전각이 넓은 덕인지 멀리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고풍스러운 음률이 은은하게 번져 왔다. 자리의 격을 채워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네 도량을 시험하고 싶었다.”
주연정이 입을 열었다.
“북경을 나선 지 스무 년인데 이렇다. 아직 행실에 밴 권위가 뭇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가 있으니, 너그러이 해량하여 주었으면 하는구나.”
“······.”
언사가 파격적이었다. 정연신은 잠시 침묵했다.
‘뭐지?’
상상한 자리와 몹시 달랐다. 무슨 의도일까.
금의 현을 튕기는 소리와 퉁소의 울림이 잔잔한 가락을 이루는 가운데, 연회석에 자리한 이들은 잠시 침묵했다.
소리만 그랬다. 고수들의 세계는 달랐다.
정연신은 끊임없이 자신을 훑어내리는 내력의 줄기들을 느꼈다.
무공 수위 이상의 기감을 지녔기에 겨우 감지할 만큼 은밀했다.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용무가 궁금합니다.”
정연신은 대놓고 물었다.
피차 의도를 숨겼다. 허나 초대한 쪽이 아쉬운 자리였다. 숙이고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주연정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나는 태생부터 돌려 말하는 데 익숙한지라, 무인의 화법은 언제 대해도 낯설단다. 널 칭찬하는 이들이 많았다. 입황성의 기둥감이라고······. 들은 그대로구나. 마광익의 섬예가 몹시 용맹하다 했지.”
“······.”
“네 무공이 상당히 고절하다고 들었다. 동년배에 비할 자가 없을지도 모른다지. 많은 게 궁금하더구나. 정가장의 무공은 변변치 않을진대 어찌 그런 무(武)를 몸에 담았는지. 그리고······”
하얀 옥병에 손을 뻗은 그녀가 웃었다.
“관례를 치를 때. 본가의 후계 자리를 거절한 저의가 무엇인지.”
정연신은 주연정의 몇 마디로 많은 정보를 얻었다. 이 자리에서 두 가지를 확인했다.
첫 번째는 역시 무학이었다. 섬예의 무공 연원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익히 알았다. 최단 기간에 최연소로 청색 위계에 오른 까닭일 것이다.
정연신은 이미 좌중 앞에서 여러 차례 본신 무공을 선보였는데, 하나같이 입황마가의 무학이 아닌 탓이기도 했다.
입황성주에게 무공을 전수받기 전부터 그랬다.
최근 임무의 이야기 역시 의문을 더할 듯했다. 입황성주가 귀환 시 보인 모습 탓이었다.
‘왜 본성까지 안고 오셔서는······.’
감사함이 더 큰 탓에 내심으로도 투정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쪽이 본론일 것이다.
“저의를 물으셨는데.”
정연신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날 이미 단언한 걸로 압니다. 세운 뜻이 강호 무림과 본성에 있으니, 구태여 명문이라는 외가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였지요. 마세인이라면 훌륭한 가주가 될 겁니다.”
“네 성정이 아주 호방하구나.”
주연정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고아한 자태였다.
정연신은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입황마가를 본가로 칭한 자였다.
먼 방계의 황족이 온전히 마가에 자리잡아 안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다.
오히려 좋다. 이러면 굳이 적으로 만들 이유가 없다.
선을 긋는 걸로 족할 일이었다. 정연신은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입술을 뗐다.
“그러니, 앞으로 귀가와 엮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원하는 바가 절연입니다. 그러는 편이 무용한 분란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요.”
“······.”
순간 가벼운 적막이 일었다. 소리없이 웃던 주연정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마세인의 표정도 경직됐다.
모두 입을 다문 연회장에 악기의 음률만 은은하게 흘렀다. 반응이 기이했다.
‘오히려 저쪽이 요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정연신은 생각했다.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 친모와 이미 절연한 가문 아닙니까? 대답해 주시지요. 공적으로 입을 열어 마가의 명예를 난도질하기 전에.”
일부러 말을 과하게 했다. 그런데도 주연정의 얼굴에는 의문이 어릴 뿐이었다.
“···어찌 그럴 수 있지? 네가 전수받은 성주님의 무학이 네 권세를 보장하리라 여기는가? 틀렸다. 입황성은 그런 곳이 아니야.”
“저는 온전히 마광익 무인으로 살아갈 테니, 섬예란 별호 앞에 입황마가의 이름이 붙지 않았으면 할 뿐입니다. 주 부인께도 기꺼운 일 아닌지요?”
“······힘든 일을 태연히 말하는구나.”
주연정이 느릿하게 말했다.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너는 이미 본가의 정쟁(政爭)에 발을 들였느니라. 마가의 피를 지니고 두각을 드러낸 순간 그리될 일이었지. 너를 후계자로 들여야 한다 말하는 자들, 본가의 영명을 드높일 검으로 삼아 마땅하다 주장하는 이들, 너를 원치 않는 우리······”
그녀가 흐린 미소를 지었다.
“어느 쪽이든 그렇다. 본가와 네가 절연하는 순간, 책임을 놓고 큰 바람이 불 것이다. 역풍을 맞지 않으려거든 무슨 짓이든 할 수밖에 없느니라.”
“우스운데.”
“성주님의 직전제자가 아니더냐. 아이야. 네 존재는 이미 그토록 크단다. 홀로 절연을 입에 담는다 한들, 본가는 네 옷자락을 잡고 늘어질 것이야.”
“자리에 있기 힘들군요.”
정연신은 그대로 일어섰다. 무례하게 뒤돌아서는데 누구도 호통치지 않았다.
정치의 영역에서 무위를 논한다면 명백히 고수들이었다.
악사들의 변함없는 연주가 그를 배웅했다.
* * *
칠주야가 흘렀다.
마광익 전각에서 정양에 힘썼다. 그동안 주연정과 마가 원로들의 얼굴이 정연신의 뇌리를 채웠다.
그들의 심계가 얕지 않았다. 겪어본 적 없는 성질의 싸움을 걸어 왔다.
권세 높은 자들이 자신을 엮는 데 온힘을 다하는 것이다. 큰 문제였다.
‘어떻게 해야······.’
침상에 누운 채 생각에 잠겼다. 본래는 시비를 걸어 상종하지 못할 원수가 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명문가의 무공들을 겪는다면 그걸로 족하다 여겼다.
지금은 아니다.
저들의 노련함은 정연신을 아득히 넘어선다. 어떤 일이든 감수할 태도였다.
완전히 다른 종류의 갈등.
위세 높은 자들이 거치적거린다. 이 정도면 정연신이 우려한 바가 맞다.
앞으로 휘말릴 시간이 입황마가를 받아들여 얻을 지원보다 훨씬 클 것이다.
외조부에게 체질과 수명을 밝히는 것도 잠시나마 생각했다.
‘절대 믿을 수 없어.’
곧바로 머릿속에서 접었다.
그는 정가장에서 없는 아이로 자랐다. 외가는 손내밀지 않았다. 성장의 시일이 그랬다.
강호에 발을 들이고서는 황보세가의 행실을 봤다.
정도 무림의 기둥을 자칭하며 사익으로 무력을 떨치는 작태였다.
정파 천하제일가라 일컬어지는 남궁세가는 어땠는가. 도움을 준 정연신에게 차도살인을 꾀했다.
또 있다. 혈염교에서는 인간의 바닥을 봤다. 그저 심연이었다.
······불신. 오직 불신만 남았다.
‘입황성 원로원주를 노린다고?’
그의 외조부는 권력을 탐하는 자였다. 딸과 연을 끊고도 그 아들을 손주로 대하려 했다.
쓸모를 보고 그랬다. 정연신의 약점을 쥐고 어찌 흔들지 몰랐다.
‘성주를 뵈어야 할까. 도리어 빚을 만들어도 되는 건가. 공적을 쌓아야 하는데.’
열여섯 살의 소년 고수는 고뇌했다.
스윽.
이부자리로 파고들었다. 지금은 흐리게 비치는 노을조차 눈부셨다.
마광익의 방이야말로 그의 안식처였다. 시선을 염려하지 않고 무인의 기백을 내려놓을 수 있다.
시일이 정해진 삶을 애써 외면하지 않아도 된다.
천천히 몸을 말아 웅크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햇볕의 주황빛 끄트머리를 멍하게 느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 소협! 정 소협!”
익숙한 음성이 의식을 자극했다. 헌원창의 목소리였다.
요란한 기파가 마광익 전각을 향해 밀려들었다. 뭇 선배들의 기척도 느껴졌다.
성주와 정연신을 먼저 배웅한 이들이 복귀한 것이다.
드르륵.
세 사람이 곧장 들어왔다. 헌원창과 청명, 백미려였다. 이미 몸을 일으킨 정연신은 옅게 웃었다.
혈염교의 본단까지 그를 구하러 온 동료들이었다. 고맙게 맞이했다.
“무슨 일 있소?”
그를 물끄러미 살피던 헌원창이 불쑥 물었다.
정연신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무슨 바람이었을까. 이들마저 믿지 못할 삶이라면, 굳이 열매에 얽매일 필요도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술잔이 없어도 좋았다. 해질녘의 고즈넉한 공기가 주향과 안주를 대신했다.
정연신이 몇 마디를 말한 순간이었다.
청명과 백미려가 내공 방벽을 크게 일으켰다. 기막(氣幕)이었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했다.
정연신은 이야기했다.
가정사를 말하고, 체질을 털어놓고, 남은 시간과 입황마가를 입에 담았다.
“······.”
석양만큼 잔잔한 침묵이 이어졌다. 어느새 청명과 백미려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헌원창은 소리없이 눈물을 흘려댔다.
입황대협이 코를 한 번 훌쩍이고 말했다.
“······거, 일단 마가부터 찾아갑시다. 내게 괜찮은 방도가 떠올랐소.”
“예?”
“들어보시오.”
그렇게 말하고는 제법 오랫동안 속삭였다. 두 청색 고수의 기막이 굳건한데도 그랬다.
흉계를 꾸미는 듯한 모습이었다.
듣고 보니 실제로 그러했다.
“갑시다!”
눈시울을 흰 소매로 훔친 헌원창이 일어섰다. 다른 세 사람도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청명이 정연신의 어깨를 툭 치고, 백미려가 뒤에서 한 번 품에 안았다.
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목숨을 나눈 동료들의 염려요, 칼날을 벗삼은 고수들의 이해였다.
멋쩍게 고개를 저은 정연신이 헌원창의 등을 따랐다. 잠시나마 정말로 막내가 된 느낌이었다.
네 사람은 곧장 입황마가의 거처에 당도했다. 문지기 두 명이 나섰다.
“신분과 용무를 밝혀 주십시오.”
“아니. 섬예 소협이 계시는군. 열어도 된다.”
헌원창은 문지기들을 무시하고 크게 소리쳤다.
“연정아─!”
내공까지 실렸다. 엄청난 목청이 땅거미 진 밤공기를 흔들었다.
주연정의 출신을 아는 자가 외부에 몇 없다 했다.
내밀한 사정이 있을 터였다. 허나 마광익 고수들이 고려할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성주님 아래야. 태자도 쩔쩔매는데, 출가한 방계 황족 따위야 뭐······.”
청명이 능글맞게 웃으며 바닥을 툭 찼다. 청안마검이 순혈 명족이란 사실은 이미 유명했다.
“대체 뭐요!”
“지금 부르는 게 뉘신 줄 알고?”
문지기들이 당황한 낯으로 달려왔다. 헌원창은 기척없는 신법을 발휘했다.
놈들의 손을 뿌리치며 연신 연정이란 이름을 외쳐댔다. 야밤에 때아닌 활극이 벌어졌다.
몸을 살짝 튼 정연신은 일행이 아닌 듯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