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uin A Love Comedy RAW - Chapter (318)
EP.318 애가 속은 착해 #2
“…..”
“…..”
“그만 좀 쳐다보면 안 돼?”
빨대로 딸기 우유를 들이켜고 있던 미유키의 낯부끄러운 말투.
책상에 팔꿈치를 괸 채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내가 단호히 대답했다.
“안 돼.”
“부담스럽잖아.”
“한두 번도 아닌데 갑자기?”
“너무 빤히 쳐다보니까. 근데 머리가 많이 길었네?”
그리 말한 미유키가 한손으로 내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머리카락 안으로 파고들어오는 여러 손가락.
그 느낌이 퍽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내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잘라야지.”
“내가 잘라 봐도 돼? 뒷머리만?”
“그래라.”
“뭐야? 진짜?”
“어.”
“이상하게 자르면 어떡하려구?”
“그럼 이상하게 되는 거지 뭐.”
태평한 내 답에 어이가 없어졌을까?
미유키의 양쪽 입꼬리가 위로 쭈욱 올라갔다.
가만 보니 어이가 없다기보다는 기분이 좋은 것 같다. 내가 미유키 자신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느낌을 풍겨서.
“그냥 헤어샵가서 잘라.”
“왜? 귀찮냐?”
“아 뭐래…! 머리 망가질까봐 겁나서 그러는 거지…!”
애정 어린 말투로 내 팔을 툭 치는 미유키.
앞자리에서 그런 미유키와 날 본 부반장이 눈꼴 시렵다는 듯 혀를 찼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하든가.
라는 말을 삼킨 내가 오물오물 빵을 먹고 있는 빵녀를 턱짓했다.
“나도 빵 하나만.”
“켁…?”
“나중에 새 걸로 사줄게.”
“콜록.”
특유의 긍정적인 기침을 한 빵녀가 내게 새 빵을 내밀고, 미유키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고…
아주 평화로운 하루였다. 오전에 일어난 히요리와의 사건은 빼고.
그렇게 모든 수업이 끝난 후, 부활동 시간.
오늘도 학생회 일이 바쁘다며 먼저 가보겠다는 미유키가 떠나고, 나는 느긋하게 검도부실로 향했다.
앞서 가는 테츠야가 보이긴 했지만 따로 붙잡지는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확실히 몸이 좋아졌다.
미약하긴 하지만 등빨이 생겼어. 근데 저 시그니처 같은 더벅머리는 어떻게 해주면 안 되나?
운동은 열심히 해놓고 저러니까 연쇄살인범 같다.
요즘 바쁜 미유키가 나와 테츠야를 보면 서로 소원해졌다고 할까?
테츠야가 자주 미유키에게 전화를 걸긴 하던데, 미유키는 요새 내게 테츠야와의 관계를 묻지 않았다.
어쩌면 테츠야가 이런 얘긴 쏙 빼놓고 일상적인 얘기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다보니, 어느새 부실에 당도했다.
부실 앞에서 수다를 떠는 부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문을 여니,
“어서 오세요, 예보니 아카데미 검도부입니다!”
문 옆에 서서 허리를 꾸벅 숙이는 치나미가 보였다.
“앗, 후배님이시로군요.”
어제와는 다른 엉뚱한 환영인사에 잠깐 멍해져 있던 나는,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복숭아 향에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뭐하세요?”
“무엇을 하긴요. 입부를 원하는 신입생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인사를 하고 있지요.”
코앞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저런 인사를 받으면, 좋은 이미지는커녕 오히려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애초에 치나미가 워낙 밝은 사람인만큼, 그녀의 바람대로 좋아할지도.
“작전을 바꾼 겁니까?”
“네. 책상에 앉아있으면 오만해 보이는 것 같아서요.”
“그렇지는 않을 걸요?”
“그런가요? 어쨌든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감독도 허락한 건가요?”
“물론이랍니다. 입부 신청서와 관련된 일은 모두 제게 일임하셨어요. 이럴 게 아니라 후배님께서도 도복으로 갈아입으시고, 옆에 서서 절 따라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예보니 아카데미 검도부입니다!”
그새 들어온 기존 부원에게 활기찬 인사를 하는 치나미를 보며 실소를 터뜨린 나는, 그녀와 있다 보면 왠지 동심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고 생각하며 탈의실로 들어갔다.
**
투둑.
‘미치겠네.’
여느 때처럼 평범한 부활동이 끝난 시간.
아직까지 학생회에 있는 미유키가 부탁한 학용품을 사기 위해 혼자 차를 타고 도심으로 나간 나는, 갑작스레 내리기 시작한 비에 혀를 내둘렀다.
내가 비를 좋아하긴 하지만 3일 연속으로 내리는 건 심하잖아.
내 앞길이 흐릿할 거라는 신의 계시인가? 해도해도 너무하다.
문구점과 가까운 빈 공간을 찾아보았지만 자리가 전혀 없다.
우산도 없어서 새로 하나 사야할 판이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리는데, 내일부터는 차 안에 비치해두던지 해야겠다.
나는 문구점과 꽤나 거리가 있는 공용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았다.
비상등을 켜고 도로변에 세워놓을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법규를 잘 지켜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어쩌면 히요리가 오전에 말했던, 오늘 시내에서 놀 거라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혹여 마주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졌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차에 있는 바람막이를 입고 근처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달려가 우산을 산 나는 문구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불편한 사람을 만났다.
“어?”
테츠야가 거기 있었던 것이다.
재수 한 번 더럽게 없다. 세상이 참 좁아.
어깨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며 우산꽂이에 우산을 찔러 넣은 나는, 날 발견하고 눈을 크게 뜨는 테츠야에게 다가가 물었다.
“미우라네? 너 여기서 뭐하냐?”
“나…? 샤프랑 뭐 이것저것 사려고 왔지. 넌?”
“미유키가 노트랑 이것저것 사달래서.”
“미유키가?”
“학생회 일에 필요하나봐.”
“아… 그래? 어제 나한테도 학생회에서 쓰는 용품이 낡았다고 그러던데.”
굳이 그 말을 내게 하는 이유는 뭐지?
자신이 더 빨리 알았다는 특별함을 강조하는 건가?
아니면 지금 자신이 사는 물건들이 미유키에게 줄 것들이라고 넌지시 눈치를 주는 건가?
아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저 음침한 놈한테 영향을 받는 것 같잖은가.
시비를 걸면 두들겨 패고, 아니면 관심을 끄는 게 맞다.
오늘 재수가 더럽게 없다. 비도 맞고, 테츠야도 우연히 만나고.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재수가 옴 붙은 뒤엔 좋은 일이 찾아오는 법이다.
오늘 내게 행운이 찾아올 것 같은 느낌이야.
사실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루하루가 즐거운 법이니까.
“그러냐? 일 봐라.”
“그래. 너도.”
놈과의 대화를 더 이어나갈 생각 따윈 전혀 없었기에, 나는 놈을 스쳐지나가며 미유키가 부탁한 물건을 골랐다.
이후 계산을 마치자마자 더러운 냄새가 풍기는 문방구를 빠져나와 공용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투둑, 투두둑.
우산 원단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좋다.
빗줄기가 강해진다는 게 문제지만, 울림이 퍽 나쁘지 않아.
급격하게 어두워진 도심을 걷던 나는, 골목길 사이사이에 있는 음식점들의 간판이 켜지는 것을 보았다.
그쪽을 걸어가는 타이밍에 맞춰 점등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마치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그런 식으로 혼자 분위기에 취해 궁상을 떨며 길을 걷던 나는,
“안녕?”
방금 지나친 새로운 골목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발을 우뚝 멈추었다.
빗소리가 꽤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상냥한 음색이 그 소리를 뚫고 내 귀에 제대로 박힌다.
‘히요리구나.’
도심에 들어설 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기대했었는데 아주 좋다.
테츠야를 만나 더러워졌던 기분이 씻겨나가는 듯한 기분이야.
왜 히요리를 못 봤을까?
그 골목 초입이 무척 어두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내 마지막 퍼즐이 될 히로인을 못 보니 죄스런 감정이 생긴다.
헌데 히요리는 누구와 인사를 나누었던 걸까?
그건 지금 알게 되겠지. 만약 남자라면 그놈의 대가리를 반으로 갈라야겠다.
궁금증을 감추고 다시 골목으로 돌아가니,
“이거 먹어볼래? 맛있는 건데.”
쪼그려 앉은 히요리가 바닥을 향해 무언가를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심지어는 아무도 없는데 우산까지 앞으로 기울인 채였다.
저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어 눈을 가라앉혀보니, 골목 구석에 검은색과 흰색이 뒤섞인 자그마한 형체가 보였다.
‘고양이?’
그 형체는 고양이었다.
새끼라고 하기엔 크고, 성체라고 하기엔 작은… 성장기처럼 생각되는 고양이가, 히요리가 내민 통조림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멀뚱멀뚱 앉아있었다.
길고양이 같은데, 히요리의 속은 착한 성격상 그냥 지나치기 껄끄러웠나보다.
근데 히요리… 통조림 뚜껑은 왜 안 따니?
먹이를 주고 싶다면 냄새라도 맡게 해서 고양이를 유혹할 필요가 있지 않겠니?
쇳덩이만 내밀면 나 같아도 저런 반응을 보이겠다.
우리 히요리는 참… 치나미만큼은 아니지만 백치미가 충만하구나.
치마는 그렇다 쳐도 샌들은 또 언제 준비해온 거야? 대단하다.
가만히 앉아있는 고양이의 경계심이 많은 것 같지는 않지만, 내가 히요리를 부르면 곧바로 도망가 버릴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구경만 하기엔 비를 맞는 히요리가 걱정된다.
짧은 시간동안 어쩔까 깊게 고민하던 나는, 결국 절충안을 내밀기로 했다.
“아사히나.”
골목으로 이어지는 코너에 마치 치나미처럼 얼굴만 빼꼼 내밀고 히요리를 속삭이듯 불렀으나, 못 들었는지 여전히 고양이만 쳐다보며 통조림을 흔들고 있다.
“아사히나…!”
“응?”
목소리를 약간만 높이자, 그제야 히요리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아갔다.
소리의 진원지를 찾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그녀.
코너의 우산 밑으로 반쯤 내밀어진 내 얼굴을 확인한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마츠다 선배? 거기서 뭐해요?”
“뚜껑을 따…!”
“네? 뭐라구요?”
“뚜껑을 따라고…!”
“뚜껑? 아…”
자신이 무슨 실책을 저질렀는지 알아차린 그녀가 무안한 듯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는 조심조심 통조림 뚜껑을 땄다.
행여나 고양이가 먹다 다칠까 우려해 뚜껑 전체를 오픈한 그녀는, 고양이가 흥미를 보이는 듯 약간 움직이자 만면을 활짝 펴며 통조림을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천천히 앞발을 뗀 고양이가 머뭇머뭇 통조림으로 다가갔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곧장 얼굴을 파묻고 입을 빠르게 움직이는 고양이.
어지간히 허기가 졌었나보다.
히요리는 여전히 고양이에게 우산을 씌워주느라 움직이질 않고 있었다.
먹는데 정신이 팔린 고양이가 도망가지 않으리라고 확신한 나는, 조심스럽게 히요리에게 다가가 그녀의 뒤에 섰다.
이후 히요리가 비를 맞지 않게끔 무릎을 굽혀 우산의 위치를 내렸다.
“고마워요.”
어깨너머로 날 곁눈질하며 감사를 전하는 그녀의 제복이 젖어, 저번에 나무 아래에서처럼 속살이 훤히 비치고 있다.
그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다. 히요리와는 비오는 날에 특별한 일이 생기는 것 같아.
그녀의 등 뒤에 툭 튀어나와 있는 브라끈을 못 본 체하며 코를 긁적인 내가 물었다.
“여기서 뭐하냐?”
“친구들이랑 분위기 좋은 카페 왔어요.”
“여기 그런 카페가 있어?”
“네. 조금만 들어가면 있어요. 옛날 골목 감성으로 사진 찍기 좋대요.”
“왜 나와 있는데?”
“카페가 좁아서 잠깐 바람 쐬러 왔어요. 선배는 손에 든 거 뭐예요?”
밖으로 나왔다가 비를 맞으며 추워하는 고양이를 발견하고, 잽싸게 먹이를 사고 돌아왔나보구나.
“이거? 필기구랑 노트랑… 뭐 이것저것. 근데 너 안 춥냐?”
“추웡. 옷 줘요.”
마치 당연하다는 듯 내가 입고 있는 외투를 요구하는 그녀.
헛웃음을 친 나는 바람막이를 벗어, 후드를 히요리의 머리에 걸어놓았다.
그러자 아무렇지도 않게 바람막이의 팔 부분을 자신의 어깨에 걸친 히요리가 고양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악마 같던 애가 말이 없어지니까 왠지 어색하다.
벌써 조교라도 당해버린 건가 싶을 지경이다.
부디 고양이가 빨리 제 보금자리로 돌아가주길 바라며, 나는 가만히 서서 후드로 인해 머리가 눌려 볼록해진 히요리의 자그마한 뒤통수를 쳐다보면서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