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30)
00030 나는 화나지 않았다 =========================================================================
“멋있다…….”
정공 힐러, 한지연은 유지웅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적당한 키에 적당한 얼굴, 외모만 보면 눈에 띄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남자의 매력은 능력이라고 하지 않던가? 보호막 능력이라면 명실공히 레이드계의 탑이다.
말이라도 걸어볼까 싶었다. 그러나 한지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초면에 티격태격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내가 미쳤지! 대체 왜 그랬을까!
‘성질 좀 죽일 걸!’
그러나 이미 버스는 떠났고 막차는 끊겼다.
힐러들은 자존심이 세다. 좀 늦게 왔다고 딜러가 뭐라고 한다면? 아마도 한바탕 뒤집어 놓을 것이다. 그런데 저 남자는 힐러보다 한 단계 위인 보호막 능력자다. ‘널리고 널린’ 힐러한테 그런 모욕을 받았으니 기분이 엄청 상했을 것이다.
탱커, 유찬형이 어느새 그녀 옆에 다가왔다. 그의 얼굴도 몹시 어두웠다.
“실수했어요.”
“……알아요. 미안해요.”
“사과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평소 같았으면 무슨 참견이냐고 쏘아붙였을 것이다. 힐러한테 탱커가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도, 상황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사과해야 한다. 비단 자신이 소속된 정공을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레이드 인생을 위해서다. 유지웅은 앞으로 레이드계의 유일무이한 주축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전과가 있다면, 앞으로 그녀만 힘들어진다.
용기를 내서 그녀는 다가갔다.
“저…….”
쉬고 있던 유지웅은 흘끔 고개를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차가운 눈빛에 한지연은 말이 목구멍을 넘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용기를 쥐어짰다.
“잘못했습니다. 죄송해요.”
“뭐가요?”
“살다 보면 좀 늦을 수도 있는데, 별 거 아닌 거 가지고 제가 말을 함부로 했습니다. 죄송해요.”
단단히 벼르고 있던 유지웅은 살짝 허탈해졌다. 너무 쉽게 일이 풀린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은 씁쓸했다.
만약 자신이 평범한 힐러였다면 그녀가 사과를 했을까? 보호막 능력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공격대 전멸 위기를 막아냈기 때문에 그녀가 사과를 한 것이다.
“사과에 진심이 안 느껴지는데요.”
“……예?”
“말을 함부로 했다고 자책해서 사과하는 건가요? 아니면 내가 보호막 능력자니까 사과하는 건가요? 어느 쪽이죠?”
“저,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한지연은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나이는 두세 살 많아 보이는 그녀가 그러니 어쩐지 우습다.
“됐습니다. 진심도 없고 그냥 내가 보호막 능력자니까 하는 사과 따위는 나도 필요 없어요. 우리가 앞으로 또 볼 사이도 아닌데 뭐 어때요? 가보세요.”
본래 유지웅은 그녀와 맺은 트러블을 구실 삼아 소속 정공에 강하게 압박을 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과까지 한 마당에 그러는 건 자기 꼴도 추해진다. 평소 힐러들의 특권 의식을 비방해왔으면서 똑같은 짓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정도에서 끝내기로 했다. 그냥 흘리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한지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앞으로 또 볼 사이도 아닌데.’라는 말 때문이다. 그 말이 다시없을 무서운 경고로 들렸던 것이다.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가보시라고요.”
“아, 안 돼요! 저 레이드에서 매장시키려는 거죠?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한지연은 울듯이 매달렸다. 유지웅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매장? 내가 왜요?”
“다, 다시 안 볼 사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우리가 다시 또 만나서 하하 호호 할 정도로 사이좋은 관계인가요?”
“그, 그건…….”
“레이드 전에 괜히 트러블 만들어서 팀 분위기 해치는 건 내 취향 아니에요. 그래서 레이드 끝난 다음에 단단히 따지려고 했어요. 그런데 사과를 하셨군요. 본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내가 보호막 능력자니까 하는 사과요.”
“…….”
“정말 단단히 따지려고 했는데 맥이 빠졌어요. 형식적이긴 하지만 일단 사과했으니까 넘어가려고요. 그렇다고 내가 그쪽과 친하게 지내야 할 이유는 없죠?”
“……죄송합니다.”
“가보세요. 그만 귀찮게 하시고요.”
한지연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갔다. 잔뜩 기가 죽은 모습에 유지웅은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식으로 갈구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는데? 본의 아니게 복수가 조촐해졌지만, 사과까지 한 마당에 처음 계획대로 그녀가 소속된 정공까지 불길을 피우는 것은 일을 너무 키우는 것이다.
‘다시 안 보면 그만.’
그렇게 가볍게 넘어가기로 했다. 앞으로 어떤 레이드 팀이든 그녀가 소속돼 있다면, 참가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아무튼 꼴좋다.’
귀족이라고 거들먹거리다가 더 큰 귀족한테 갈굼 당하고 축 늘어진 모습이, 왜 이렇게 보기 좋을까?
“24억입니다.”
감정가가 그렇게 나왔다. 딜러들은 은근슬쩍 유지웅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입을 다물었고, 공격대장이 대신 선언했다.
“원래 저는 이 분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추가 분배와 면세 금액 전부를 분배해드리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면세는 이 분에게 주어진 국가 혜택이니까요. 하지만 이 분이 끝내 거절하시더군요. 원래 자기가 받아야 할 몫이지만 다 가져가면 공격대 사기가 저하되기 때문에 30%는 탱커와 딜러 개개인에게 분배하는 거라고요. 추가 분배도 마찬가지 이유로 거절하셨습니다. 힐러진으로 참가했으니 힐러 몫만 받으면 되지 더 받을 필요가 없다고요.”
이 공격대장! 뭔가 센스가 있다. 아부할 줄 안다. 그런 말 따위 한 적 없는데, 알아서 치켜세워주고 있다.
“따라서 대충 계산해도 개인 당 천만 원씩 더 분배됩니다. 게다가 공격대 전멸 위기도 이 분 아무런 사망자도 내지 않고 무사히 넘어갔습니다. 그 점을 모두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박수!”
짝짝짝짝짝!
이 정도면 아부 기술이 정점을 찍은 거 아닌가? 유지웅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찡긋했다. 이 공격대장, 왠지 마음에 든다?
그는 물질욕보다는 명예욕에 가장 결핍돼 있었다. 천민 딜러 시절을 겪었다가 간신히 힐러가 되었지만, 다시 보조 힐러로 떨어지면서 얻은 후유증이다. 탱커, 딜러의 세금을 다 가져갈 수도 있지만 30%는 분배해주는 게 그런 이유에서다. 저 공격대장은 그런 마음을 어떻게 알고 살살 긁어준다. 처세술이 대단하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님 덕분에 목숨도 건지고 돈도 더 받아갑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특히 여자 딜러들이 보내는 선망의 눈빛이 마음에 든다. 정효주라는 조강지처가 있지만, 남자로서 이런 상황이 즐겁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분배가 끝나고 해산할 때가 되었다. 다들 즐거워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두 명만 침울해 있었다. 유찬형과 한지연이었다. 유지웅은 마지막으로 그들을 훑어보고는 타고 온 람보르기니에 몸을 실었다.
‘세스토 엘레멘토도 사고 싶은데. 효주한테 혼나려나?’
“잘 다녀왔어?”
집에서 쉬고 있던 정효주가 반갑게 맞아들였다.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는지 그녀는 하얀색 에이프런을 착용하고 있었다. 유지웅은 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 에이프런 말고는 아무 것도 입은 게 안 보였기 때문이다. 설마 알몸?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정효주는 배시시 웃으며 에이프런 하단을 살짝 들어 보였다. 허벅지를 고스란히 드러낸, 극단적으로 폭이 좁은 하얀 핫팬츠가 보였다.
“옷 입고 있거든?”
“아래는 그렇다 치고, 상체는?”
“아하, 이거?”
그녀가 몸을 빙글 돌렸다. 탱크톱 끈이 등을 조이고 있는 게 보였다. 유지웅은 살짝 실망했다. 나름 기대했는데!
“밥 거의 다 됐어. 먼저 씻고 올래?”
“너부터 먹으면 안 돼?”
“안 돼. 배탈 나.”
그녀가 픽 웃으며 기습적으로 뺨에 입술을 댔다. 그가 얼른 허리를 끌어안으려는 찰나 몸을 빼냈다. 역시 이 여자, 탱커라서 그런지 몸이 날렵하다. 겉보기에는 가늘기 그지없는 몸인데.
맛있는 냄새가 집안에 가득했다. 유지웅은 일단 욕실로 들어가서 땀과 먼지를 씻고 나왔다. 지글지글 기름 끓는 소리가 들린다.
소파에 앉은 유지웅은 TV를 켰다. 그리고 몸을 돌린 채로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정효주만 응시했다. 앞태도 예쁘지만 뒤태도 참 매력적이다. 쭉 빠진 다리 라인을 보고 있으면 날렵한 한 마리 암사슴이 생각난다.
“신기하다.”
“뭐가?”
“너 다리 디게 얇은데, 어떻게 그렇게 큰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지 모르겠어. 인체의 신빈가?”
“너어.”
그녀가 홱 뒤돌아보며 눈을 흘겼다. 가슴께가 잔뜩 부풀어 있는 에어프런이 눈에 잡혔다. 그러고 보니 어깨도 저리 좁으면서 가슴은 참 크다.
“옛날의 나는 참 바보인 거 같아.”
“왜?”
“너처럼 맛있는 여자를 왜 계속 못 알아봤는지 말이야.”
“너 진짜! 왜 그렇게 엉큼하니!”
정효주는 버럭 화를 냈다. 아니, 화를 낸 척을 했다. 유지웅이 빤히 쳐다보고 있자 그녀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부끄러운 듯 나지막하게 물었다.
“저기, 내가 정말 맛있어 보이니?”
“지금 군침 흘리는 거 안 보여?”
몸을 일으킨 유지웅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한손으로 능숙하게 허리를 감쌌다. 조금 많이 과장해서, 한 팔로 다 안을 수 있을 정도로 허리가 참 얇다.
연인 사이의 가장 이상적인 키는 몇 cm일까? 유지웅은 단언할 수 있다. 바로 10cm라고. 왜냐하면, 정효주와 그가 딱 10cm 차이이기 때문이다.
어깨에 입술을 댔다. 하얀 살결을 음미하듯이 애무하다가 에이프런 어깨끈을 슬쩍 물고 내렸다. 그녀가 부끄러운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풍만한 가슴 계곡선이 보인다. 탱탱한 탱크톱 사이로 억지로 혀를 밀어 넣어 본다. 가슴이 너무 빵빵해서 압박감 때문에 혀가 잘 안 들어간다.
허벅지를 어루만지던 왼손이 면 재질의 핫팬츠를 끌러 내렸다. 핫팬츠를 무릎께에 걸쳐놓고는 팬티 아래로 손가락이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흐으…… 흑…….”
마치 흐느끼는 듯한 신음. 살짝 상기된 얼굴이 귀엽다. 쇄골을 핥으며 쓸어 올리듯이 목덜미를 애무하자 가늘게 몸을 떤다.
손가락 끝에 질척거리는 느낌이 묻어났다. 투명한 액이 묻어 미끌거렸다. 그녀가 몸을 뒤로 젖히며 그의 머리를 잡았다. 그는 탱크톱을 물고 그대로 아래로 잡아당겼다. 하얀 젖가슴이 출렁거리듯이 드러났다.
“찌개 다 됐는데…… 타는데…….”
“불 껐어.”
“흐으…… 그래도 밥 준비는 마저…….”
“그냥 너부터 먹을래. 그리고 배탈날래.”
유지웅은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그녀가 목을 껴안고 매달렸다. 침대까지 갈 여유도 없어서 그대로 거실 소파로 향했다. 소파에 그녀를 눕히고 위에서 덮쳤다. 입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반바지에 막 손을 댄 순간이었다.
딩동. 딩동.
벨이 울렸다. 누구지? 유지웅은 짜증이 났다. 그래서 사람이 없는 척 무시했다.
딩동. 딩동.
벨이 계속 울렸다. 짜증이 머리까지 치밀었다. 한껏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식어버렸다. 그녀가 얼른 일어나서 옷차림을 추슬렀다. 그리고 혀를 살짝 내밀었다.
“밥부터 하라는 운명이야.”
그리고 총총거리며 주방으로 가버렸다. 유지웅은 신경질이 나서 인터폰을 확인했다. 잡상인이면 확 욕을 해줄 참이었다.
“어라?”
사람 네 명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두 명은 그도 아는 인물이었다. 유찬형과 한지연, 오늘 갔던 막공의 메인 탱커와 힐러를 했던 이들이었다.
그는 정문으로 나왔다. 문 밖에서 팔짱을 열고 퉁명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죠?”
“사죄드리러 왔습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를 따라서 다른 이들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뭘 사죄한다는 건가요? 영문을 모르겠는데요.”
모르긴 뭘 몰라. 다 알지. 그냥 정효주와 좋은 분위기가 깨져서 심통을 부리는 것이다.
“저는 휴머닉 정규 공격대장 장태수라고 합니다. 오늘 저희 정공 힐러가 막공에서 나만귀족님한테 결례를 저질렀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거라면 이미 사과했고 마무리 했어요. 이렇게 또 찾아오실 것까진 없는데요.”
“저어, 제가 듣기로 다시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던데요. 그거 때문에 걱정이 돼서 물어물어 찾아뵈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셨으면 해서요.”
사과는 받아도 좋은 관계를 맺을 마음은 없다. 그래서 다시 안 볼 사이라고 언급을 했다. 그 한 마디가 장태수를 좌불안석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직접 당사자를 이끌고 집단 사죄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