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11)
111화. 시험(1)
“사고요?”
수현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묻자 노영국이 껄껄 웃었다.
김 부장이 당황하는 걸로 봐 사전에 없던 얘기인 듯했다.
“쇼케이스를 열어보면 어떨까 해서 말이지.”
“네?”
“그러니까 예고편 말이야. 본편이 시작되기 전에 기대감을 올려줄 예고편. 게릴라성 예고편으로 쇼케이스를 열어보면 어떨까 싶어.”
홍보가 목적인 공연에서야 쇼케이스를 여는 경우가 드물게 있었으나, 미술 전시회에 이런 이벤트를 연단 얘긴 금시초문이었다.
아주 나중이라면 또 모를까.
90년대 말, 그것도 신인 작가의 전시에 쇼케이스라니.
“처음엔 아무런 설명 없이 네 그림을 하나 공개할 거야. 짤막한 카피 정도는 붙어도 좋겠지. 당신에게 던지는 위로라든가, 스무 살의 위로. 이런 콘셉트로 말이야.”
노영국이 눈을 감으며 빠르게 자기가 떠올린 것들을 뱉어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장소, 의외성을 지닌 곳에 네 그림을 띄울 거야. 아, 물론 원본이 훼손될 우려가 있으니 스크린을 활용해야 할 거고. 그렇게 지하철역이나 전광판에 이미지들을 차례로 띄우다 보면 다들 조금씩 궁금해할 거다. 이게 대체 무슨 그림인지, 무슨 의도인지, 누가 그린 건지.”
노영국이 다시 눈을 뜨더니 빙그레 웃었다.
“난 그 궁금증을 쉽게 해결해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마침내 대중의 궁금증이 극에 달했을 무렵.”
노영국이 환희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림을 보여주던 전광판에 날짜와 장소를 크게 띄울 거야.”
“날짜와 장소요?”
“그래. 네 첫 개인전이 열리는 날짜와 장소 말이야.”
듣기만 해도 거창한 계획이었다.
노영국의 생각이 어디까지 실현될진 알 수 없었지만, 큰 규모로 몰아붙인다면 어마어마한 화제가 될 게 분명했다.
그냥 전시장이 아니라 바깥으로 나가는 그림이라니.
수현은 떨리면서도 한편 기대됐다.
‘위로’는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에게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더 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전할 방법이 있을까, 고민했는데 이런 식이라면 가능하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나는 더 열심히, 잘 그려야겠구나. 최선을 다해야겠구나.
수현은 또 한 번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나저나 더 필요한 건 없니?”
노영국이 뭐든 들어줄 것 같은 기세로 물었다.
“일선에서도 많은 지원을 해주는 걸로 알지만, JK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은 또 다를 거야. 어려워하지 말고 말해봐.”
그게 어디까지일지, 수현은 잘 감이 잡히진 않았다. 그러나 마침 고민하고, 방법을 찾던 일이 있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백현대 근처에 집을 구하고 싶어서요.”
“집을?”
“내년에 대학에 가면 편하게 다닐만한 거리였으면 좋겠어요. 작업 공간이 따로 있을 만한 크기로요.”
“오, 작업실 겸 집을 구해달란 거구나?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전속작가들의 주거 문제는 내부에서도 고민하던 부분이고.”
“아, 그런 게 아니라 실은 제가 집을 사고 싶거든요.”
“집을…… 사?”
지원 요청이 아니라는 게 의외였는지 노영국이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그간 받은 상금이랑 영국에서 그림을 팔고 번 돈이랑 후원금들을 모았더니 꽤 큰 돈이 돼서요. 그렇다고 아파트를 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이 수준에서 얻을 수 있는 집이 있다면 구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지금 네 돈으로 집을 사겠단 말이지?”
“네. 아직 미성년자 신분이라 제가 직접 계약할 순 없을 거거든요.”
“그런 문제라면 차라리 조금 기다리는 게 어떨까?”
노영국이 미간을 찡그리며 제안했다.
“매매를 도와주는 정도야 일도 아니겠지만, 요즘 집값이 점점 떨어지는 추세거든.”
“네…….”
“어쩌면 몇 달 후엔 엄청나게 떨어질 수 있어. 바닥을 치는 기간이 얼마나 갈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조금만 기다리면 헐값에 나오는 집이 많을 거다. 그때가 되면 한 채를 살 돈으로 두세 채를 살 수도 있을 거야.”
반짝이는 노영국의 눈을 보며 수현이 작게 웃었다. 한번 지나온 시절이니 수현도 당연히 아는 얘기.
IMF 직격탄을 맞으면 거리에 나앉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들이 쫓겨 급매로 내놓는 집은 그야말로 헐값이 된다.
그러나 수현은 그런 집을 사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불행을 사, 자신의 행복으로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렇지만 저는 사업가는 아니니까요.”
수현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자신의 의지를 정확하게 표현하면서 상대에게 예의를 갖출 수 있는 말을 골라냈다.
“만약 누군가가 불행을 겪어 손해를 보며 파는 집을 사게 된다면 저는 내내 마음이 불편할 거예요. 그런 마음으론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거고요.”
“하.”
노영국이 놀랍다는 듯 수현을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넌 예술가니까. 맞아. 마음 불편할 일을 만들어선 안 되겠지. 내가 그 점을 놓쳤다. 하지만 말이야. 만약 수현이 네가 매수한 금액보다 집값이 더 떨어진다면, 그건 그거대로 속상하지 않겠니? 그게 신경 쓰여서 그림을 못 그리게 될 수도 있는 거잖아.”
조금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던지는 다음 질문.
수현이 싱긋 웃으며 그걸 받았다.
“아주 손해 볼 리는 없어요. 시간의 문제지, 어차피 집값은 다시 회복될 거라고 보거든요. 경기야 불황과 호황을 반복하기 마련이고, 우리나라에서 집값은 항상 올랐으니까요. 빨리 팔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하하! 그래! 맞다! 네 말이 맞아!”
짓궂게 던진 말에도 똑 부러지는 답을 하자 노영국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노영국은 김영인 부장에게 눈짓했다.
“부장님, 내가 좀 전에 말한 쇼케이스 건과 수현이 집을 구하는 부분, 부장님께서 책임 지시고 빠르게 진행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준비되면 계약서를 보여주마. 서류는 아무 문제 없이 준비할 테니 걱정 말고 있어. 몇 가지만 해결하면 네가 스무 살이 되는 해에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될 거야.”
노영국이 고개를 끄덕였고, 수현이 밝게 웃으며 감사를 전했다.
***
구체적인 전시기획과 작품 수, 콘셉트 같은 걸 논의하고 다시 작품을 그리고, 한동안 그렇게 단순한 패턴이 반복됐다.
시간은 유수와 같았다.
잡아먹을 듯한 더위가 물러나고 제법 공기가 서늘해졌다.
방학이 끝난 9월.
세현예고 미술과엔 1학기와는 또 다른 레벨의 긴장감이 흘렀다.
“전국 소묘 모의평가?”
“아, 나가볼까?”
“이거 참가인원 엄청나지?”
“아무래도 전국구니까.”
월요일 아침. 실기동 복도에 선 3학년 미술과 애들이 수군수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국 소묘 모의평가.
입시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묘 시험 일정이 나온 거다.
실기시험이야 학교에서도 심심찮게 보고 있지만, 범위가 세현예고 안으로 좁았고, 이렇게 전국단위로 실기 모의평가를 여는 건 드물어 모두의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고3. 입시경쟁을 해야 할 아이들이 대거 참여할 시험. 그들의 현재 수준과 자신의 역량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테니까.
“일반고 출신 애들도 엄청 나온다고 하더라.”
“하긴, 미대에 가면 일반고 출신 애들도 많다고 하잖아.”
“맞아. 우린 걔들에 대한 정보는 없으니까, 이런 시험을 통하면 도움이 될 거야.”
“근데 굳이 견제할 이유가 있어? 아무래도 예고 애들이 입시 준비 기간도 길고, 실력은 좀 더 낫지 않을까?”
“글쎄. 입시 미술은 단기간에도 가능한 부분이 있고, 괴물 같은 애들이 또 나올 수도 있는 거니까.”
“맞아. 알아봐서 나쁠 건 없지.”
신청자에 한해 보는 시험이지만 같은 학년에서 경쟁하게 될 애들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참가하는 일이 많았다.
세현예고에서도 신청자가 속출했다. 거기엔 수현의 친구들도 있었다.
“다른 것보다 시험장 컨디션을 미리 경험할 수 있다잖아.”
“맞아. 우리가 실기실에서 그릴 때야 조명도 있고, 적당한 인원을 배치하니까 자리에 여유도 있는 편인데 막상 시험장은 그런 거 없다며.”
“그렇지. 그때 가서 당황하는 것보다 이렇게 한번 경험하는 게 좋다고 하더라고.”
박선화와 차윤희, 박준영, 오유나는 신청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차윤희가 며칠 전 이종현 선배를 만나 입시에 관한 조언을 들었고, 그가 이왕이면 소묘 모의고사를 보라고 권했고, 그걸 또 애들한테 전하자 우르르 신청했던 거다.
하긴 무려 백현대 시각디자인과에 다니는 선배의 합격 수기인데 백현대를 준비하고 있던 애들에겐 무조건 따라야 할 지침으로 들렸을 거다.
사실, 어느 정도는 그 말이 맞기도 했고.
“한수현, 너도 시험 보면 안 돼?”
“맞아. 우리끼리 가려니까 뭔가 허전한데.”
“그래! 가서 또 세현예고 신의 손이 왔다! 이렇게 분위기 좀 잡아줘야지.”
애들은 수현에게도 같이 시험을 보자고 졸랐지만, 수현은 가볍게 거절했다.
“아니. 이번엔 너희끼리 가.”
이미 입시가 끝난 거나 마찬가지인 수현은 굳이 이런 시험을 볼 이유가 없었다.
“와.”
“헐.”
“너무해.”
“아니, 너무한 건 너희들이지. 왜 시험까지 같이 보자고 해.”
“힝. 그래도 해줄 수도 있잖아.”
“맞아. 어차피 넌 부담도 없는 상황인데, 그냥 놀러 왔다 생각하고 어? 몸이나 풀어보자,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걸 왜 하냐고.”
“좋아. 그럼 시험까진 그렇다 쳐.”
몰아가려던 애들은 의외로 수현이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한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응원은 와줘라. 인간적으로.”
“맞아. 친군데 그 정도 도리는 해줘야지.”
“그럼. 너는 시험이 끝난 거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다 같이 운명공동체잖아. 같이 백현대 가야 하는데, 응원은 해줄 수 있는 거지?”
“그거야 뭐, 어려울 건 없지.”
수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묘 시험은 주말에 열릴 예정이었다.
보통 주말엔 전시회 작품을 그리는 데 시간을 보냈는데, 한 주 정도 쉬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간 성실하게 준비해왔고, 마침 물감이 마르길 기다려야 하는 시기이기도 했고.
“좋았어. 그럼 다들 열심히 준비해보자.”
“어으, 떨린다.”
“이거 학과 모의고사보다 더 긴장되는데?”
애들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전의를 다졌다.
며칠 후, 전국 소묘 모의평가 당일.
시험장 앞에 긴장한 얼굴을 한 수험생들이 새카맣게 모여 줄을 서 있었다.
실제 대학입시에 도움이 되도록 모의 원서를 쓰고, 합격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도 대강 평가받을 수 있는 시험이다 보니 다들 어지간히 긴장한 얼굴이었다.
“입시까지 아직 몇 달 남았어. 그때까지 실기 실력은 얼마든지 향상될 수 있고, 이번 점수가 절대적인 건 아니야. 1등부터 100등까지 세분화하는 것도 아니고, A, B, C로 대강 나누는 정도니까.”
“그래도 B나 C가 나오면 백현대는 진짜 가망 없는 거잖아.”
“여태 너희가 학교에서 본 시험들은 전부 A였잖아. 평소 실력보다 시험장에서 그린 그림이 엉망으로 나온 거라면 다른 문제가 있는 거니까, 그게 긴장해선지 시험장 컨디션의 문제인지 파악해서 다시 대비하면 돼. 어쨌거나 실전같이 임하되 너무 과몰입하진 말란 얘기야.”
“후우. 알겠어.”
“그래. 그래야지.”
약속대로 수현은 모의 평가장에 응원차 나왔고,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 긴장한 아이들이 멘탈을 붙잡을 얘길 해주었다.
“어? 문 열린다.”
“슬슬 입장인가 본데?”
“와, 어떡해. 나 떨려!”
잠시 후, 실기 시험장으로 향하는 입구가 활짝 열렸고, 여기저기서 탄식과 긴장한 애들의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쫄지 말고, 최선을 다하고 와!”
“그래! 알았어, 다녀올게!”
“응원 고마워, 수현아!”
“이따가 보자!”
수현의 친구들도 한 명씩 무리에 섞여 시험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휴.”
당사자가 아닌데도 시험장의 공기는 괜히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 수현이 한참 애들의 뒷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볼 때였다.
“……?”
낯익은 실루엣이 친구들이 가는 길에 섞여들었다.
설마 했는데, 그 애가 쓰윽- 고개를 돌렸고, 옆얼굴을 보니 확실해졌다.
언제 봐도 반갑지 않은 그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