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75)
75화. 응원(1)
“꿈보다 해몽이란 말이 있긴 하지만, 봐봐.”
수현이 신이 나서 스티브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이 오브제들은 저마다 비유와 상징에 잘 쓰이는 것들이야. 왜 그런 거 있잖아.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라든가.”
“숫자 7이 행운을 상징한다든가? ……음. 진짜 그렇게 보면 새롭게 분류되는 부분이 있는데?”
“맞아. 그래서 내가 이 주제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짤막하게 메모를 해뒀거든?”
수현이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펼쳤다.
전국대회를 두고 수현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준비하고 있었는지 한눈에 보이는 메모가 거기에 있었다.
“반지는 사랑, 약속, 증표, 화려함, 헌신…… 나무는 봄, 성장, 풍요, 수확, 신성함. 계절에 따라 다른 표현 가능. 또 사다리는 구조, 계층, 목표, 노력, 연결. 와…….”
1차로 떠오르는 것들을 마구잡이로 휘갈긴 메모들.
100개의 오브제 아래에는 각각이 상징하고 내포하는 의미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이게 끝이 아니야.”
수현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럼?”
“이건 오브제를 본 순간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잖아. 여기서 한 번 더 고민하고 슬쩍 비틀어야 작가의 시선이 들어갈 수 있을 거고.”
“그치만 보는 사람이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표현돼야 할 거고?”
“맞아. 바로 그거야. 그걸 고민하고 있어.”
“흠.”
스티브는 한참 더 수현의 메모를 들여다보더니 수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어?”
“그냥. 칭찬해주고 싶어서.”
수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스티브가 수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솔직히 나는 이제껏 나를 자극할 만한 대상을 만난 일이 없어. 특히 또래에는 아무 기대가 없었지.”
“아.”
급작스런 고백이었지만 놀랄 만한 얘긴 아니었다.
스티브는 한국에 오기 전에도 모국인 캐나다는 물론 미국, 유럽의 유명 화가들과 화랑에 이름을 조금씩 알리던 주목받는 신예였다.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할 가능성이 농후한 재능 넘치는 10대 화가.
그런 스티브가 어쩌다 한국에 체류하게 됐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식탁 아래에 둔다고 등불의 빛이 가려지지 않듯, 스티브는 이곳에서도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니 어지간한 화가와 작품들은 그에게 감흥을 주지 못할 테고, 또래들에게 관심과 기대를 갖기도 쉽지 않았을 거다. 그럴 필요도 없었겠고.
“근데 너는 특별해.”
스티브가 수현과 한 번 더 시선을 마주쳤다.
“너한테는 굉장히 궁금해지는 무언가가 있거든. 재능도 대단하고. 분위기랄까, 느낌이랄까. 그런게 묘해. 어쨌든 그게 어떻게 커갈지 보고 싶단 말이야. 맹세코, 난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관심을 가진 일이 없었어. 게다가.”
스티브가 수현의 다이어리를 다시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말했다.
“넌 정말 한순간도 삶을 낭비하며 흘려보내지 않아. 때론 감정에 매몰되거나 지치거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빗나갈 법도 한데 말이야. 그게 정말 대단해. 놀랍고.”
“흐음.”
수현이 머쓱한 얼굴로 상의의 옷 주름을 만지작거렸다.
다시 얻게 된 삶, 다시 주어진 기회 앞에서 열심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림을 놓아버린 후, 내내 불행했고, 그림을 그릴 때 얼마나 행복한지 절실하게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얘길 스티브에게 꺼낼 순 없었다. 수현은 하하 웃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여튼, 네 생각도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주제에 대한 고민을 하다보니 대화를 나눌 상대가 필요했거든.”
“그렇다면 얼마든지.”
스티브가 팔짱을 끼며 거드름을 피우는 표정을 연기했다.
“말만 해. 내가 뭐든 도와줄 테니까.”
“음. 그럼 먼저 내가 적어둔 이 상징들에서 뭔가 빠진 거나 의견을 보탤만한 게 있으면 얘기해줄래?”
“오, 안 그래도 난 사다리라는 주제에 꽂혔어. 이건 아주 개인적인 얘기긴 한데, 내가 10살쯤 됐을 때 일이야.”
그리고 둘은 늦은 시간까지 신나게 오브제들을 두고 즐거운 토론을 벌였다.
***
수현은 대회의 본질에 집중하며 주제를 탐색하고 있었으나 모든 애들이 그런 건 아니었다.
절반쯤의 애들은 주제 리스트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해 벌써 대회를 포기한 듯 굴었고, 출처가 불분명한 괴담을 퍼트리는 애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무식하게, 컨디션 관리를 뒤로하며 강행군을 이어가는 애들도 소수 존재했다.
시험보다는 투표와 심사위원단에 얽힌 루머에 집중하는 애들, 그리고 자기 그림보다 경쟁자의 그림과 훈련법에 몰두하는 애들도 있었다.
그렇게 다양한 인간 군상이 그려지는 가운데 전국대회 2차 시험 날짜가 다시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거 받을래?”
2차 시험 하루 전인 화요일 점심시간.
빠르게 식사를 마친 수현 앞에 3반 오유나가 불쑥 나타나 선물을 내밀었다.
“……?”
뭔가 싶어 눈을 끔뻑거리자 오유나가 괜히 미간을 찡그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 이건 부담스럽지 않을 거야. 지난번 생일선물처럼 그런 건 아니니까.”
학기 초, 오유나는 세현예고 내 권력 구도를 정리하는 데에 수현을 이용하려 한 일이 있었다.
김하영의 버릇을 고쳐주려다 보니, 김하영이 괴롭히려던 수현이 누군지 알게 됐고, 수현과 일부러 가까워지며 위기감을 조성하려 했던 것.
그러나 수현은 모든 구도와 의도를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김하영에겐 적절한 선도 그었다.
다른 애들이라면 냉큼 받았을 좋은 선물을 거절하고, 친구가 되고 싶은 거라면 가끔 떡볶이나 먹고, 그림을 그리는 정도면 될 거란 충고까지 던지기도 하면서.
웃기는 일이라 넘길 수도 있었지만, 오유나에게 그 일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후, 오유나는 수현에게 관심이 생겼고, 함께 벽화를 그렸던 일이 몇 번이고 떠올라 또 같이 그림을 그려보잔 말을 하고 싶단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런데, 오유나가 크게 마음먹고 막상 수현을 찾았을 때, 수현은 교실에 없었다.
전국대횐지 뭔지, 거기에 정신이 팔려 무척이나 바빠졌다나. 단짝처럼 붙어 다니던 박선화와 차윤희에게도 전처럼 시간을 내주지 못한다는 게 애들이 물어온 소식이었다.
어쨌든 전국대회는 장장 6개월의 여정. 수현의 실력이라면 3차까지 갈 게 분명하니 대회가 끝나고 보면 된다고 둘 일이 아니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
오유나는 수현이 좀 한가로울 시간을 노려 1반을 찾았다.
친구를 사귀는 법을 잘 몰라 오늘도 선물을 하나 들고 오긴 했지만, 지난번 수현의 충고를 거울삼아 적당한 것으로 골라왔다.
“대회 나갈 때 쓰라고. 흠. 우리 집엔 많거든.”
오유나가 가져온 건 꽤 품질이 좋은 브랜드 화구세트였다.
물감과 붓, 연필이 같이 들어있는.
이것도 가격이 꽤 나갈 텐데.
수현이 어림짐작하며 미간을 찌푸리자 오유나가 선수를 치며 버럭 화를 냈다.
“산 거 아니야! 그냥 집에 많아서 그래. 예고 다닌다니까 여기저기서 비슷한 선물을 자꾸 보내오잖아. 근데 알지? 물감도 유통 기한 있는 거.”
우유도 아니고, 물감의 유통 기한은 몇 년쯤으로 꽤 긴 편이다.
발색에 차이가 생긴다곤 하지만 육안으로 구분하는 게 쉽지 않을 정도고, 관리만 잘하면 오래오래 두고 쓸 수 있는 게 미술 재료.
게다가 연필이나 붓 같은 건 사용하기 전이니 유통 기한을 따질 부분이 아닌데.
하지만, 이걸 가져다준 오유나의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아 수현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이걸 버리는 거야?”
“……어?”
“아니. 농담. 좋은 물건인데 꼭 처치 곤란한 걸 넘기는 것처럼 말해서.”
“아니, 네가 또 지난번처럼 친구 사이가 어쩌고, 이런 건 받을 수가 없고 할까 봐.”
입을 삐죽이던 오유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할 말이 있기도 하고 해서 겸사겸사 온 거야.”
“어. 뭔데?”
“그때, 정원동에서 벽화 그리던 날 있었잖아.”
“응.”
“시간이 짧아서 아쉬웠거든.”
“아.”
학교 운동장에서까지만 해도 찬바람을 쌩쌩 일으키던 오유나가 천진한 얼굴로 집중하며 벽화에 달려들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느꼈지만, 그날 그림 그리기가 꽤 재밌었던 모양이구나.
“언제 또 갈 계획 있어?”
“벽화?”
“어. 사실 답답한 게 좀 있는데, 그니까 그림을 그리다 보니까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막히는 부분이라니 의외의 얘기였다.
오유나는 그림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애였고, 배울 의지만 있다면 집에서 당장 가장 실력 있다는 선생을 과외로 붙여줄 여력이 있을 거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수현이 자신을 빤히 보는 오유나를 보며 말했다.
“혹시 그거. 나한테 얘기하고 싶은 거야?”
“어. 선생들은 죄다 똑같은 말뿐이야. 못 알아듣겠는 말들만 해.”
그러더니 오유나는 다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 그렇다고 당장 급한 건 아니야. 너 대회 준비도 해야 하는데, 그 시간 뺏을 생각은 전혀 없거든? 그냥 대회가 끝나고도 괜찮고, 중간에 조금 시간 날 때도 괜찮고. 한 번 더 같이 그림을 그려봤으면 좋겠어서.”
이런 거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수현이 싱긋 웃었다.
“가자.”
“어?”
“5교시 실기동 수업이잖아. 아직 점심시간도 30분이나 남았고.”
“지금 봐준다고?”
“벽화는 어렵겠지만 잠깐 보고 얘기는 충분할 것 같은데? 너 지금 엄청 답답한 것 같아서.”
“와.”
오유나가 입을 떡 벌렸다.
“너 진짜 좋은 애구나?”
잠시 후 미술과 실기동 빈 소묘실.
5교시 수업이 시작되기 전, 적당한 장소를 찾은 오유나와 수현이 본격적인 상담을 시작했다.
“내가 형태 감각이 좀 떨어지는 편이야.”
오유나가 제법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그러니까 그냥 상상으로 뭔가를 그릴 때는 상관없는데, 대상을 그대로 표현할 때는 문제가 되더라고.”
“그렇겠네. 제일 곤란할 게 소묘 수업일 테고?”
“맞아. 난 소묘가 정말 쥐약이야.”
오유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큰 결심을 한 듯 자기 스케치북을 펼쳐보였다.
“웃으면 안 돼?”
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서였을까.
풉.
수현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막았다.
“와.”
겨우 감탄사로 치환해 감정을 표현한 수현이 몇 장을 더 넘겨보며 진단을 내렸다.
“기복이 심한데?”
“어, 어떤 날은 잘 잡히는데, 어떤 날은 또 영 감이 안 잡혀. 그게 연습 부족이라고, 과외 선생들은 숙제를 엄청 내주더라고. 다른 방법이 없냐고 하니까, 형태를 재고 비율을 따지는 방법을 수학적으로 다시 알려주는데, 이게 각도가 조금만 틀어져도 오차가 커지잖아. 그게 문제야.”
도저히 세현예고 학생이 그렸다고 볼 수 없을 수준의 소묘.
그러나 수현의 눈에는 일말의 가능성이 보였다.
드물긴 하지만 몇 장의 그림은 나쁘지 않은 완성도를 보였고, 몇 가지만 손에 익숙해지면 다음 단계로 점프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다 싶었던 거다.
수현은 과거,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중엔 당연히 미술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도 있었고, 오유나 같은 학생의 문제점이 뭔지는 경험으로 이미 알 수 있었다.
“음.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유나야?”
그리고 수현은 천천히 유나에게 신세계를 열어주었다.